역사속 신무기<15>이집트 철퇴
- 파라오 권력 상징 ‘신성한 무기’
- 2007. 04. 23 00:00 입력 | 2013. 01. 05 02:57 수정
철퇴는 곤봉(Club)을 원형으로 전쟁무기로 적합하도록 파괴력과 살상력을 배가한 무기다.
단지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적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고 제작과 관리에 특별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초기 청동기시대에는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곤봉과 차이점이 있다면 손잡이와 머리로 나뉘어 있고 머리 부분 또는 전체가 금속이라는 점뿐이다.
기원전 1600년께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를 침입하자 파라오와 이집트의 귀족들은 이민족의 침입을 격퇴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그러나 전투용 철퇴와 도끼·단궁으로 무장한 이집트 군대는 전차와 복합궁·청동기 무기로 무장한 힉소스인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아메넴헤트 3세(기원전 1855∼1808) 이후 평화를 누렸던 이집트인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당시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철퇴는 이미 전투용 도끼와 창·칼 등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청동기 방패와 투구·갑옷의 등장으로 단순히 상대방을 타격해 치명상을 입히는 철퇴의 가치가 급격히 반감됐기 때문이다.
철퇴의 사용을 가장 마지막까지 고집했던 이집트도 중간 왕국의 멸망과 함께 철퇴를 다른 무기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고 기원전 1500년께 신왕국 건국 이후에는 파라오의 상징 역시 코피시로 대체됐다.지렛대의 원리를 응용해 만든 철퇴는 머리 부분을 무겁게 하고 모양을 복잡하게 만들어 단 일격으로도 적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도록 고안된 타격 무기다.
기원전 3000년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머리 부분은 돌, 손잡이 부분은 나무로 만든 최초의 철퇴가 등장했고 이후 다양한 형태의 철퇴가 광범위하게 활용됐다.그러나 창과 방패를 사용한 밀집대형의 등장은 철퇴의 효용가치를 반감시켰고 사용 용도와 범위를 크게 제한했다. 철퇴가 계속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국가들이 타 지역에 비해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고 사용 목적과 용도에 따라 무기체계를 세분화했기 때문이다.
과거에 비해 철퇴의 중요성은 크게 감소했지만 전차병이나 기병의 보조무기로 계속 사용됐고 일부 국가에서는 통치자의 권력을 부각시키는 상징물로 사용되기도 했다. 철퇴를 보병의 기본 무기로 사용한 마지막 군대는 기원전 12세기께 당대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아시리아 군대였다.
이후 철퇴는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께 흑해 연안과 소아시아 지역에서 일시적으로 사용됐고 창과 검의 전성기였던 그리스·로마시대에는 야만적인 무기로 분류돼 철퇴의 사용 자체가 금기시됐다. 폴란드와 헝가리, 제정 러시아와 오스만투르크제국 등 강력한 기병부대를 보유했던 일부 국가들은 철퇴를 16세기 이후까지도 사용했다. 철퇴는 근접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고안된 타격무기이자 가장 순수한 형태의 원시적 무기다.
역사속 신무기<16> 아시리아의 ‘슬링 ’
- 중심에 줄 매달아 무거운 돌 투척
- 2007. 04. 30 00:00 입력 | 2013. 01. 05 02:58 수정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는 이전까지 중구난방으로 운용되던 돌팔매병을 정규군에 편입시키고 적극적으로 활용한 최초의 아시리아 왕으로 기록된다. 특히 아시리아군대의 투석병은 기원전 3000년 이후 요새화된 도시를 공격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고 센나케리브 왕은 투석대가 준비되기 전에는 결코 공성전을 시작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당시 요새화된 도시의 가파른 사면을 공격하는 데 공성 망치와 결합된 투석병의 고각 투석만큼 치명적인 공격은 없었다. 아시리아의 투석병들은 오른손에 슬링을 들고 왼쪽 허리에는 사파라로 불린 장검을 차고 다녔으며 항상 2인 1조로 움직이며 궁수 후방에서 적을 공격했다.
흔히 투석(投石)끈 혹은 투석구로 불리는 슬링은 중심에 탄환을 싸는 가죽이나 천이 있고 양쪽으로 줄이나 끈을 매달아 돌이나 무거운 쇳덩이를 투척하는 공격 무기의 일종이다. 중심에 돌멩이와 같은 탄환을 두고 줄이나 끈의 양쪽 끝을 잡고 머리 위에서 빙빙 돌리다 한쪽 끝을 놓으면 원하는 방향으로 가속된 탄환이 날아간다.
대부분의 슬링은 1m를 넘지 않는 길이와 무게 0.3㎏을 넘지 않는 단순한 구조로 목동들이 들짐승으로부터 가축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했기 때문에 종종 무기로서의 치명성이 간과되기도 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 묘사된 바와 같이 신장 2.9m의 거구를 자랑했던 펠리시테의 장수 골리앗조차도 양치기 소년 다윗의 돌팔매 일격에 쓰러졌을 정도로 슬링의 위력은 충분히 치명적이다.
돌팔매질은 상당히 오랫동안 유용한 공격 방법으로 이용됐는데 탄환 자체의 충격력만으로도 충분히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어떤 형태의 돌멩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정확히 타격할 수 있었고 전장에서 돌멩이만큼 구하기 쉬운 것도 없었기 때문에 보급 문제도 걱정없었다.
기원전 7세기께 고대 그리스에서는 세스트로스펜던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됐고 그 위력은 페르시아 황제 크세르크세스 조차 놀라게 했을 정도였다.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의 저서 ‘소아시아 원정기’에서 당시 로도스 섬의 투석병들은 정확하고 치명적인 돌팔매질로 장궁으로 무장한 페르시아의 궁병들을 압도했다고 기록했다.슬링을 정규군의 무기로 사용한 마지막 군대는 로마군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멸망과 함께 슬링은 정규군 무기체계에서 제외됐고 투석행위 자체가 야만적인 행동이라는 인식과 함께 전장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그러나 근대화와 무기체계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19세기까지 슬링은 매우 치명적이고 상대하기 까다로운 원시 무기로 악명을 날렸고 그 개념은 현대의 유탄발사기로 계승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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