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유럽 하늘 지배한 메서슈미트 Bf109E

구름위 2017. 1. 8. 12:00

유럽 하늘 지배한 메서슈미트 Bf109E

2005. 09. 06   00:00 입력 | 2013. 01. 05   01:54 수정


새로운 패러다임의 적용은 기존의 틀을 깨는 엄청난 발전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의 실현에는 상식이 필요하다. 병기 개발도 예외는 아니다. 새로운 영역인 항공 전력에서 독일의 메서슈미트 Bf109 전투기(사진)와 영국의 브리스틀 블레님 폭격기는 그 명암을 잘 보여 준다.
1920년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미국과 영국은 폭격기 만능 사상에 빠져 있었다. 빠른 폭격기를 만들 수 있다면 제아무리 기동성이 우수한 복엽 전투기가 있어도 빠른 속도를 살려 따돌릴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1930년대 후반에 등장한 영국의 블렌힘 폭격기는 이 사상을 입증한 것처럼 보였다. 당시 영국의 복엽 전투기들보다 80㎞나 빠른 시속 450㎞를 달성한 것이다.
승전국들이 이렇게 폭격기 개발에 매진하고 있을 때 독일은 보다 상식적으로 접근했다. 1935년 히틀러가 재군비를 선언하자 독일 공군은 각 항공사에 전(全) 금속 단엽 전투기의 개발을 요구했다. 단엽 전투기는 복엽 전투기보다 기동성은 떨어지지만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가 장점이었다. 단엽기의 빠른 속도를 바탕으로 폭격기를 제압할 수 있다고 본 것이 독일 당국의 판단이었다. 단엽 전투기 개발 경쟁의 승자는 후일 메서슈미트사로 알려진 바이에른 항공공업사의 Bf109였다.
후발 업체였던 바이에른 항공공업사는 당시 항공공학계에서 명성을 날리던 빌리 메서슈미트 박사와 아라도사에서 설계를 담당하던 발터 레델 박사까지 끌어들여 신형 전투기의 개발에 착수했다. 이들의 목표는 공군의 요구 사항을 모두 만족하면서도 작고 날렵한 짜임새 있는 전투기였다.
1938년에는 다이믈러 벤츠가 개발한 DB601 엔진을 장착함으로써 Bf109E는 한 단계 더욱 발전하게 됐다. 무장 강화로 늘어난 중량에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와 상승력, 우수한 비행 성능과 안정성을 갖게 된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Bf109E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곧 유럽의 하늘을 지배하는 공중 강자가 됐다.
1939년 9월의 폴란드 침공, 1940년 초의 스칸디나비아 전투, 그리고 프랑스 침공전에서 Bf109는 연합군의 어떠한 전투기도 따르지 못하는 뛰어난 비행 성능과 20mm 기관포 2문, 7.92mm 기관총 2문의 강력한 무장을 앞세워 연합군을 일방적으로 압도했다. 기존의 항공기로 어느 정도 독일 공군에 맞설 수 있으리라는 연합국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고 영국·프랑스의 전투기들은 Bf109E의 위력 앞에 철저히 무너졌다. Bf109는 이후 숙적인 영국의 스핏파이어를 만날 때까지 유럽의 하늘을 지배했고 몇 차례의 개량을 거치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단일 기종으로는 가장 많은 3만3000기가 생산됐다.
한편 고속 폭격기로 기대를 모은 브리스틀 블레님은 빈약한 기체 구조와 낮은 성능을 극복하지 못하고 등장 3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만일 영국이 폭격기 만능론이 아닌 상식적인 접근을 통해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를 좀 더 빨리 하늘에 등장시켰다면 제2차 세계대전 초기 항공전의 흐름도 바뀌었을 것이다.
급강하 폭격기 Ju87 슈투카
명중률 혁신 일으킨 ‘하늘의 포대’
2005. 09. 13   00:00 입력 | 2013. 01. 05   01:55 수정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다큐멘터리 필름에서 날카로운 사이렌을 울리며 먹이를 잡아채려는 독수리처럼 지상의 적을 향해 하늘에서 내려꽂히며 폭탄을 떨어뜨리는 인상적인 모습의 비행기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독일이 보여 준 새롭고 혁명적인 형태의 전쟁인 전격전을 상징하는 하늘의 포대, 그것이 Ju-87 슈투카(사진)다. 충격적인 새로운 무기의 등장이었다.
슈투카의 개발은 독일 공군의 조달 책임자 에른스트 우데트가 미국을 방문하던 중 커티스사의 급강하 폭격기 헬다이버의 시범을 참관, 급강하 폭격의 가능성을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우데트는 귀국 후 융커스사의 설계진에게 우수한 급강하 폭격기를 제작할 것을 지시, 슈투카 개발 사업의 단초를 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기는 폭탄 장착량이 적었을 뿐만 아니라 조준 장비도 정확하지 않아 실전에서 효과가 낮았다.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검토된 방법 중 하나가 수직에 가까운 각도로 급강하, 목표에 최대한 접근한 다음 폭탄을 투하하는 급강하 폭격법이다.
급강하 폭격을 최초로 시도한 항공기는 미국의 커티스 SBC 헬다이버 복엽기지만 전금속 단엽 급강하 폭격기에서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것은 독일의 융커스 Ju-87 슈투카였다.
1935년 한스 폴만을 중심으로 한 융커스사의 설계진에 의해 완성된 시제기는 독특한 역갈매기형 주익을 가지고 있었고 단좌기임에도 1톤에 가까운 폭장이 가능했다.
당시 수평 폭격기들이 고고도에서 떨어뜨리는 폭탄의 명중률은 10% 내외. 하지만 슈투카가 급강하 폭격에서 보인 명중률은 거의 60%에 육박했다. 수평 폭격기들보다 적은 폭탄을 사용하면서 오히려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1937년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슈투카의 성능에 놀란 독일 공군성이 수평 고속 폭격기로 개발된 Ju-88에도 급강하 폭격 능력을 요구할 정도였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시작되면서 슈투카는 말 그대로 하늘의 포대로서 그 위력을 발휘했다.
적 전차 부대, 교량, 밀집 보병 진지, 요새화된 방어 진지 같은 아무리 어려운 타격 목표라도 슈투카의 사이렌이 들리기만 하면 연기를 내뿜는 폐허로 바뀌었다. 심지어 지상의 병사들은 슈투카에서 울리는 사이렌만 들어도 지금 자신이 표적이 되고 있다는 중압감에 순식간에 전의를 잃고 공황 상태에 빠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1940년 노르웨이 전역에서도 슈투카는 거칠 것이 없었다. 심지어 기존의 수평 폭격기들로는 명중하기 어려운 지그재그로 운항하는 함선조차 슈투카의 급강하 폭격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이후에도 슈투카는 벨기에·네덜란드·프랑스를 석권할 때까지 독일 육군의 빠른 진격을 지원하는 든든한 하늘의 포대로 활약했다.
하지만 슈투카도 1940년 여름 영국 항공전이 시작되면서 약점을 노출하기 시작했다. 다른 폭격기들이 그러하듯 영국 전투기들을 따돌릴 만한 속도도 없었고 기동성도 부족했다. 조종사 보호를 위한 장갑판도 거의 설치돼 있지 않아 슈투카는 조금만 명중탄을 맞아도 조종사나 기체가 치명상을 입고 연기를 뿜으면서 지상으로 떨어졌다. 제공권이 확보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쓸 수 없었던 것이다.
구식화가 확연해진 1942년 이후 슈투카는 포케불프 Fw-190과 헨셀 Hs-129 같은 지상 공격기들에게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지만 날개 아래에 기관포를 장착, 대전차 공격기로도 활약했다.
도합 5700기가 생산된 슈투카는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한 영광의 시절부터 독일이 패망할 때까지 독일군과 영욕을 함께하면서 항공전의 역사 속에 강한 인상과 명성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