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후(呂太后: BC241~BC180)는 이름이 여치(呂雉), 자는 아후(娥姁)이며,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황후이다. 그녀는 유방이 죽은 후에 정권을 장악하여 16년간 한제국을 통치했다.
여치는 진(秦)나라 때 단부현(單父縣: 지금의 산동성 단현<單縣>)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여공(呂公)은 원수를 피하여 패현(沛縣)으로 이주, 유방과 친분을 맺은 뒤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초한전이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여치는 유방의 부모와 함께 항우(項羽) 진영에 인질로 잡혀있었다.
기원전 203년 항우와 유방의 강화가 성사되자 여치와 유방의 부모도 석방되었다. 그 이듬해 유방은 황제에 오르고 여치는 황후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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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일찍이 뛰어난 지략으로 유방의 천하통일을 보좌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초(漢初)에는 유방이 유씨(劉氏) 이외의 왕(제후)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고조 10년(BC197) 유방이 양하후(陽夏侯) 진희(陳희, 희=豕+希)의 반란을 평정하러 출정하였을 때, 수도 장안(長安)을 지키고 있던 여치는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의 반란 정보를 입수한 후, 마침내 승상 소하(蕭何)와 모의하여 한신을 궁궐로 불러들여 죽이고 삼족을 멸하였다. 얼
마 후 유방은 진희의 반란을 평정하고 낙양(洛陽)으로 돌아온 후에 양왕(梁王) 팽월(彭越)이 반란을 도모하려 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유방은 즉시 팽월을 체포하였지만 모반의 증거가 없자 그를 평민으로 강등시켜 파촉(巴蜀)에 유배 보내기로 하였다.
도중에 팽월은 여치를 만나 그녀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집으로 돌아가 여생을 편히 쉴 수 있도록 유방에게 잘 말해줄 것을 청하였다. 낙양으로 돌아온 여치는 유방에게, "팽월은 용맹한 장수이니 그를 촉(蜀)에 들여보낸다면 범을 산에 풀어주는 것과 같아서 크나큰 후환이 될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은 들은 유방은 즉시 팽월을 죽여 버렸다.
여치의 슬하에는 아들 유영(劉盈: 후의 혜제)과 딸 노원공주(魯元公主)가 있었다. 그러나 유방은 유영의 성격이 나약하다는 것을 이유로 그가 총애하던 비빈(妃嬪) 척부인(戚夫人)의 아들 조왕(趙王) 유여의(劉如意)를 태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척부인의 눈물어린 호소와 유방의 결심으로 유여의는 거의 태자에 오를 뻔 했지만, 장량(張良)을 위시한 여러 대신들의 간언과 여치의 노력으로 유여의는 태자에 오르지 못하고 유영이 태자의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고조 12년(BC 195) 4월 유방이 죽고 여치의 아들 유영이 제위를 계승하였으니 그가 한나라의 2대 황제 혜제(惠帝)이다. 이에 황태후가 된 여치는 어린 혜제를 대신하여 정사를 보면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여태후는 유방의 사랑을 받았던 척부인과 태자의 자리를 넘보았던 조왕 유여의를 그대로 놓아두지 않았다. 먼저 척부인을 영항(永巷: 원래는 궁녀들이 살던 곳이었으나 후에는 죄를 지은 비빈을 감금하는 곳으로 사용되었음)에 감금한 다음 조왕 유여의를 제거할 틈만 노리고 있었다.
혜제 원년(BC 195) 12월, 혜제가 새벽에 활쏘러 나간 틈을 이용하여 여태후는 혼자 남아있던 유여의에게 독주를 먹였다. 아침 해뜰 무렵 혜제가 돌아왔을 때 유여의는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해있었다.
그후 여태후는 다시 척부인의 손과 발을 자르고 눈을 뽑고 귀를 태우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인 다음 '돼지우리'(≪사기≫「여태후본기」에는 '측중(厠中)'이라 되어 있는데, 혹자는 이를 '변소'로 풀이하기도 함)에 가두고 그녀를 '사람돼지'라 불렀다.
이 사실을 안 혜제는 여태후의 야만적인 행위에 충격을 받고 병을 얻게 되었다. 그는 여태후에게 사람을 보내어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이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저는 태후의 아들로서 더 이상 천하를 다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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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매일 주색에 빠져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후 여태후는 다시 유씨 성을 가진 제후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혜제 7년(BC 188) 가을 혜제가 세상을 떠났다. 혜제가 죽은 후 여태후는 두 명의 소제(少帝: 한 명은 원래 평민의 소생이었는데 여태후가 혜제의 황후 장씨<張氏>에게 명하여 그를 데려오게 하여 혜제의 아들로 삼은 다음 그의 생모는 죽여 버렸다.
다른 한 명은 상산왕<常山王> 유의<劉義>이다.)를 차례로 옹립하고 황제의 지위를 대신하였다. 황제의 이름으로 반포되는 모든 명령과 조서는 모두 그녀의 손에서 나왔으니, 이때부터 그녀는 실질적인 황제나 다름 없었다.
여태후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그녀의 정책에 반대하던 태위(太尉) 주발(周勃)과 우승상 왕릉(王陵)을 파면하고, "유씨 외에는 누구도 왕이라 칭해서는 안된다"는 유방과의 약속을 파기, 여태(呂台), 여산(呂産), 여록(如祿) 등 많은 여씨 일족들을 왕후로 책봉했다.
여태후는 황제의 지위를 대신한 8년 동안 많은 정적들을 무참히 죽이고, 여씨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그 어떤 야만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지만, 국정 운영 면에서는 그 어느 왕조의 어느 황제에 못지 않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먼저 고조 유방 이래로 시행해 오던 민생안정 정책을 계승하여 농업을 장려하는 한편, 삼족을 멸하는 연좌제와 요언령(妖言令) 등의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였다.
이로써 이 기간에는 백성들의 생활이 비교적 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혼란했던 사회도 점차 질서를 잡아가고, 피폐했던 경제도 점점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유씨 외에는 누구도 왕이라 칭해서는 안된다"는 유방과 여러 대신들의 약속을 파기하고 많은 여씨 일족들을 왕으로 삼음으로써 대신들의 불만은 더욱 커져가고 있었다.
즉 그 속에는 그녀의 사후 일어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정치적 불안 요소가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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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80년 3월, 천하를 호령하던 여치도 결국은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7월에 병세가 위독해지자 그녀는 급히 뒷일을 수습하기 위하여, 조카 여산(呂産)을 상국(相國)에 임명하여 북군(北軍)을 통솔하게 하고, 여록(呂祿)을 상장군에 임명하여 남군(南軍)을 통솔하게 한 후, 그 두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 "고조가 천하를 평정했을 때, 대신들과 '유씨 외에 왕이 되는 자는 모두 합심하여 토벌하라'는 약속을 하였소. 그러나 지금은 여씨가 왕에 책봉되어 권력을 장악하고 있으니 대신들은 모두 이에 불복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은 후에 황제는 나이가 어리므로 대신들은 아마 난을 일으킬 것이니
, 그대들은 반드시 군대를 장악하여 황궁을 수호하도록 하시오. 나의 장례를 치를 때도 그대들은 황궁을 떠나지 말고 반란에 대비해야 할 것이오."
그리고는 다시 여록의 딸을 황후로 삼은 다음 자기가 죽은 후에도 여씨천하를 유지하려는 야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7월 신사일(辛巳日), 여태후는 장안(長安) 미앙궁(未央宮)에서 62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여태후가 죽은 후에 태위 주발과 승상 진평(陳平), 주허후(朱虛侯) 유장(劉章) 등은 신속하게 여씨 일족을 주살하고 문제(文帝) 유항(劉恒)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로써 여태후와 그녀의 일족에 의해 다스려지던 한나라는 다시 유씨천하를 회복하게 되었다. 여태후의 묘지는 유방의 장릉(長陵) 서쪽(지금의 섬서성 함양시 동쪽 35리 지점)에 있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에서 그녀의 치적을 다음과 같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혜제와 여태후 시절에는 백성들은 전국시기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군신(君臣)들은 모두 '무위(無爲)'의 경지에서 안식(安息)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혜제는 팔장만 끼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여태후가 여성으로서 황제의 직권을 대행하여 모든 정치가 방안에서 이루어졌지만 천하가 태평하고 안락했다. 형벌을 가하는 일도 드물었으며 죄인도 드물었다. 백성들이 농사에 힘을 쓰니 의식(衣食)은 나날이 풍족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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