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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의 사례
- 피란민 가장한 北 저격수 유엔군에 큰 타격
- 2008. 02. 19 00:00 입력 | 2013. 01. 05 03:37 수정
북한군은 제2차 세계대전 시 소련군처럼 2인조 저격수를 운용했다. 그들의 야전 규정에는 ‘저격조나 사냥꾼조는 적극적인 활동으로 공격을 준비하는 적을 끊임없이 타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군과 중공군 저격수들은 피란민으로 가장해 유엔군을 기습 공격하고 작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한국전쟁 후 북한은 ‘인민군 군사상식’이란 책을 통해 저격수들의 활약을 선전했다. 선전·선동 목적으로 작성돼 신뢰도에 문제가 많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 저격술보다 게릴라전에 가까운 내용을 담은 책이긴 하지만 북한군의 저격수 운용 방식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 많다. 이 책에서 북한은 다음과 같이 선전하고 있다.
“1952년 한 해 동안 동부전선에서 행동한 인민군과 해방군 저격수들은 1만6000여 명의 적병을 소멸했다. 적들이 밤에는 습격이 무섭고, 낮에는 저격수가 무서워 못 살겠다는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특히 인민군 저격수 차상률이 소련제 모신 나강 저격총으로 무장, 120여 명의 한국군과 미군을 사살하고 헬리콥터를 추락시켰다. 중국 해방군의 저격수 짱타오팡은 32일 동안 214명을 사살했다.”
물론 선전을 목적으로 과장된 수를 담은 주장이다. 하지만 북한이 나름대로 저격수를 중시했음은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반면 미군은 저격전에 대해 충분한 준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북한군을 지나치게 경시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개전 초기만해도 원자력 시대의 전쟁에서 이러한 기본적 보병전술에 대해서는 누구도 큰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은 뒤늦게 저격전의 중요성을 이해하게 됐다. 미군의 저격전 노력은 미 해병대에 의해 수행된 서울 시가지 전투에서 증명됐듯이 매우 효과적이었다.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해병대원들이 스프링필드 M1903A1 소총으로 무장한 저격수와 함께 활동했다.
자동소총 사수가 의심 나는 적 진지에 사격을 퍼부으면 북한군도 미군 진지를 향해 대응사격을 실시했다. 이때 노출된 북한군에 대해서는 해병대 저격수의 잘 조준된 스프링필드 소총으로 저격을 가했다.
전장에서는 때때로 공산군 저격수의 집요한 공격이 이어졌다. 미 해병대 저격수들은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특수작전에 돌입했다. 사기를 높이기 위해 각자의 진지에서 일주일간 12명 이상의 적을 사살해 1등을 차지한 저격수에게는 시원한 맥주 한 상자가 지급됐다.
저격수들은 전우들로부터 열렬한 지원을 받았고, 동료들 또한 공산군 저격수의 위치를 찾아내기 위해 모든 비상 수단을 강구했다. 결국 해병대에게는 극적으로 상황이 바뀌는 행운이 다가왔다. 전선에서는 적 사살 수효가 늘어나고 그만큼 부대의 사기도 올라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전방 진지에서는 북한군 저격수들이 숨을 죽이고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에 고무돼 미 5해병연대 2대대는 1951년 4월, 최초로 저격 소대를 편성했다.
저격 소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정찰중대장이며 젊고 유능한 저격수인 홀메스(G. Holmes) 중위가 맡았다. 그는 719m고지의 저격전투에서 장거리 사격을 가해 중공군들을 완전히 궤멸시켰다. 미 해병 저격수들은 약 400m 정도의 사거리에서 좋은 목표물을 발견, 차례차례 제거하고 기관총 사수까지 명중시켜 역습의 기회를 박탈했다.
중공군들은 해병 저격수들의 정조준된 사격으로 모조리 전사했다. 사격을 받고 부대가 공황 상태에 빠지면 원거리에 숨어 있는 저격수의 존재를 찾아낸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왕좌왕하면 표적만 노출시킬 뿐, 이런 부대를 골라 미군 저격수들은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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