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사,,국공 내전..

[중국근대사] 국공내전에 대한 이야기 2화 <본격적인 토벌과 실패>

구름위 2013. 12. 11. 16:05
728x90

 

<왕정위 : 1883 ~ 1944>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장개석의 일생일대의 라이벌이 누구였는가를 묻는다면, 중국인을 포함해 열에 여덟, 아홉은 당연하게도 "모택동"을 꼽지 않겠나 싶습니다.(일단 제 마나님부터) 그러나 실제로 장개석이 평생에 걸쳐 경쟁했던 상대는 모택동이 아니라 "왕정위(본명 : 왕조명)"라는 사람입니다.

 

마지막 황제 부의의 아빠(순친왕)를 암살하려다 실패하는 것으로 세상에 명성을 떨친 왕정위는 22살에 문의 혁명당에 가입했습니다. 4살 연하장개석이 뒷골목 세계에서 방랑할때, 이미 이 양반은 국민당에서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거물 정치인이 되었고 손문의 오른팔이자 손문의 가장 강력한 후계자이기도 했습니다.

 

손문 사후 광주국민정부 초대주석이 된 그는 처음에는 장개석의 상관에서, 이후에는 평생의 라이벌이 되었고 "브라더스"가 되자는 장개석의 러브콜을 거절하기도 했습니다.(참고로 장개석의 브라더스는 총 10명이었다고 함.)

 

그의 일생은 뭘 하든 매번 거의 성공할 "뻔"으로 끝났습니다. 순친왕의 암살미수 사건부터, 장개석 추방, 장개석 암살, 쿠테타, 반란 등등. 마지막 순간에서 항상 실패했죠. 그래도 질기게 살아서 자리를 유지하다가 결국에는 중일전쟁때 나라를 버리고 일본쪽에 붙어 남경괴뢰정권의 수장이 됩니다. 그리고 중국 역사상 가장 악질적인 매국노가 되었죠.

 

날고 기는 대인배들을 상대로 산전수전 겪어가며 위만 보며 올라간 장개석이, 처음 공산당 토벌을 시작할때만해도 15년뒤 "듣보잡" 모택동따위에게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생이란 실로 알 수 없는 일이라는.

 

1930년 11월.

장개석은 국민당 제4차 전당대회에서 본격적인 공산당 토벌을 위해 다음의 방침을 결정합니다.

1. 공비를 완전히 진압할 것

2. 홍군을 공격할 정부군을 파견할 것

3. 공산화된 지역을 수복할 것

 

처음 동원된 병력은 총 7개 사단 10만명이었습니다. 총지휘는 강서성 주석이자 제9로군 사령관인 노조평이 맡았고 남창에 사령부를 두었습니다. 토벌군은 혼성부대였는데 노조평 휘하 강서성 지방군(제 18사단, 제 50사단)에 제6로군과 제19로군 휘하부대가 증원되어 지원을 맡았습니다. 목표는 강서 남부 소비에트 지구의 중심지인 서금이었습니다.

 

                    

 

1930년 당시 공산당이 멀티를 뿌린 지역들(사진출처: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p.368)

 

이때만 해도 한낱 농민으로 구성된 "오합지졸"따위는 길어야 3~4개월이면 간단하게 끝장을 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중앙의 정예군이 직접 나설 것도 없이 강서성, 복건성 일대의 지방군만 투입했던 것이죠. 10만의 병력중에도 실제 투입된 병력은 5개 사단 4만 4천정도이었고 주덕휘하 제1방면군 산하 6개 군 4만 2천명이었던 홍군보다 숫적 우세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공격은 12월 19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초반에는 순조롭게 진행됩니다. 토벌군은 서금 북쪽의 동고라는 마을을 점령한후 남쪽으로 퇴각하는 홍군을 추격했습니다. 홍군은 전투를 회피하면서 산악지대로 유인합니다. 선봉에 섰던 제18사단과 제50사단은 손쉬운 승리에 신이 나서 정찰도 게을리 한채 신나게 추격합니다. 이들이 전열도 흐트러지고 우군의 협조도 없이 무턱대로 산속으로 들어오자 주덕은 바로 역습에 나섭니다. 12월 27일부터 6일간 진행된 반격에서 토벌군 제18사단 9천명은 용강에서 완전히 와해되어 포위 섬멸되었고 사단장 장휘찬은 포로가 됩니다. 제50사단도 동소에서 일방적으로 격파되었습니다.

  

< 1차 초공의 전개도. ※ 출처 : 현대중국전략의 기원 >

 

위의 두개사단이 대파되자 나머지 부대들은 싸우지도 않고 철수합니다. 패전의 원인은 우선 모택동에게 작전정보가 모조리 새어나감으로서 정부군의 작전에 대응할 수 있었고, 반면 국민당측은 서로 소속이 다른 군벌군대끼리 제대로 협조가 되지 않았고 총사령관인 노조평의 졸렬한 지휘, 익숙치 않은 지형에 상대에 대한 경시에 있었습니다.

 

포로가 된 불쌍한 친구 장휘찬은 본보기로 참수된후 뗏목에 실려 양자강의 물길을 타고 돌아갑니다. 이 예상치 못한 참패는 남경의 장개석이 일기에 "신년벽두부터 올해 신수는 안 좋을 거같다"라고 쓰도록 만들었죠. 대신 홍군은 소총 13,000정을 노획하는등 푸짐한 새해선물을 받았습니다.

 

아무튼 1차 초공은 이렇게 어이없이 끝나는데 국민당은 병력을 정비해 곧장 제 2차 초공에 나섭니다. 2월부터 준비하여 실제 작전은 4월 1일부터, 본격적인 전투는 5월 16일부터 30일까지 15일간 진행됩니다.

 

이번에는 규모가 두배로 확장되어 총 12개 사단 20만명에, 장개석의 "팔대금강"중 하나인 국방장관 하응흠이 지휘를 맡았습니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황포군관학교 교관이기도 했던 그는 군벌전쟁때 큰 활약을 하여 사람들에게 이른바 "팔대금강"으로 불리었죠.(뭔가 소림사스런..) 당시 홍군은 병력이 대폭 확장되어 총병력이 약 12만 7천에 달했는데 강서성에서 토벌군과 맞선 병력은 6만 6천명정도였습니다.

 

※ 국민당내 장개석 직계 장군들을 가리켜 "오호상장", "팔대금강", "십삼태보"라고 불렀음. 중국인들의 작명센스란...--;;

http://blog.daum.net/shanghaicrab/12601973

 

하응흠은 1차 초공전때를 경험삼아 무턱대로 병력을 축차 투입하지 않고 강서성, 복건성 일대의 대규모 포위망을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질서정연하고 신중히 병력을 전진시키며 포위망을 좁힙니다. 그러나 1차 초공때와 마찬가지로 적을 쫓아 산악지대로 들어서자 병력이 분산되었고 홍군은 재빠른 기동력과 유리한 지형지물을 이용해 유격전을 펼치며 토벌군의 약한 부대들을 골라서 각개격파합니다. 가장 약한 제5로군 병력이 격파되고 제6로군, 제26로군도 차례로 격파되어 총 6개 사단이 패퇴함으로서 팔대금강 하응흠이 나선 2차 초공도 완전한 실패로 끝납니다. 소총 2만정에 대량의 물자만 선물로 남기죠.

 

  

< 2차 초공전의 전개도. ※ 출처 : 위와 마찬가지로 현대중국전략의 기원 >

 

두차례의 작전은 전적으로 홍군에 의한, 홍군을 위한 작전이었습니다. 1931년 5월 홍군은 총병력 11만 7400명, 소총 6만정, 기관총 768정, 포 29문, 박격포 34문을 보유했고 이 무기의 90%는 국민당이 선사한 것이었습니다.

이 어이없는 결과는 결국 장개석이 직접 나서도록 만들었습니다. 

 

 당시 장개석은 중원대전이 끝난뒤 사후정리에 한창 정신이 없었는데, 두번의 초공이 참패로 끝났다는 보고를 받자 그제서야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깨닫고 남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해야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는 바로 초비사령부가 있는 남창으로 내려와 직접 지휘를 맡습니다.

 

제3차 초공은 1931년 7월 1일부터 시작됩니다.

총병력은 30만이었고 그중에 전투병력은 약 13만명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자랑하는 정예의 중앙군도 투입합니다.

작전방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북으로는 남창, 동으로는 남풍, 서 길안의 3개 방향에서 홍군의 수도인 서금으로 직진하여 진격하는 것으로 이른바 장구직진(長驅直進), 분진합격(分進合擊)의 전술이었습니다. 이는 글자 그대로 병력을 분산하여 적의 심장부로 직진한후 접근하여 집중 공격한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7월 2일에 광창에서 홍군을 격파하고, 광창, 동고를 점령합니다. 7월 20일에는 석성을, 25일에는 동고를 점령하고 8월 1일에는 요충지인 흥국, 우도를 점령하여 포위망을 좁혀나갑니다. 9월 13일에는 서금 부근까지 진격하죠.

 

장개석은  지휘하에 우세한 병력으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으나, 험준한 산속 깊숙히 전진하자 병참이 길어진데다 폭우까지 내려서 작전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합니다. 또 홍군의 저항이 완강해지면서 진격이 정체되죠. 홍군은 길게 늘어진 국민당군의 측면과 후방을 기습하여 격파하고 잽싸게 퇴각함으로서 국민당은 적의 주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끌려다니게 됩니다. 토벌군은 2개 사단이 격파되고 1개 사단이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비적의 진압은 대규모 군사 원정보다 어렵다. 비적들은 지역의 지형에 익숙하고 농민들의 지원을 얻어 항상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 나는 이제 빨갱이 비적들의 토벌이 하루 이틀에 이룰 수 있는 과업이 아님을 깨달았다."(1931년 8월 12일. 장개석의 일기)

 

이제서야 장개석은 공산군이 그 이전의 어떤 군벌군대보다도 강력한 상대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홍군은 한낱 시골 산적떼가 아니라 기동성과 전투력, 지휘력이 갖추어진 정예 군대였습니다. 숫적으로나 화력으로나 월등히 열세한 오합지졸이면서도 그 신속한 병력 기동, 왕성한 사기는 장개석과 토벌군 지휘관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더욱이 장개석은 더이상 작전을 지속할 수 없었는데, 내우외환때문이었습니다. 광동출신의 거물 정치가 호한민과의 대립으로 그를 가택 연금시키자 광동군벌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초공중인 병력 일부를 빼돌려 반란 진압에 나서야 했습니다. 게다가 1931년 9월 18일 일본의 만주 침략, 즉 만주 사변이 일어나게 됩니다. 악전고투중인 모택동과 홍군에게는 그야말로 "할렐루야"였습니다.

 

그러나 모택동은 한번 쓰라린 패전을 겪게 됩니다. 연승에 들떠 퇴각하던 정부군을 추격하다 정예로 이름난 제19로군의 반격을 받아 대패를 당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운은 결코 다하지 않았습니다. 구 풍옥상 휘하의 손연중군 2만명이 반란을 일으켜 홍군에게 투항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