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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근대사] 국공내전에 대한 이야기 1화 <20년 전쟁의 시작>

구름위 2013. 12. 11.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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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투쟁은 제외하고 양자가 본격적으로 군사적 대결로 치닿는 1930년전후부터 시작하겠습니다.

 

1928년 12월 29일.

장작림이 일본에 의해 폭사한지 6개월후 아버지를 이어 만주를 장악한 장학량이 동북역치(동북3성은 중앙에 변방으로서 복속한다)를 선포하고 청천백일기를 내걸음으로서 장개석의 북벌은 3년도 안되어 속전속결로 완료가 됩니다.

 

그러나 북벌과정에서 손을 잡았던 다른 동업자들(염석산, 풍옥상, 이종인)은 장개석이 논공행상은 하지 않고 자기 혼자 모든 공을 가로채고 일인 독재를 강화한다고 불만을 품었습니다. 특히 편견회의에서 장개석이 일방적으로 "병력을 다이어트하라!"라는 엄명을 내리자 이들은 자기들을 멸망시키기 위한 술수라고 판단했습니다. 더욱이 당시 중국군은 생계형 용병이기에 병사들을 대량으로 명퇴시키려면 이들에게 적지 않은 명퇴수당을 줘야 했습니다. 그냥 빈털털이로 쫓아내면 당장 반란을 일으켜 총수의 목을 따러 달려들었죠. 그런데 장개석은 그 돈을 제대로 주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앉아서 죽느니 서로 손을 잡고 "반장전쟁"을 일으킵니다.

 

풍옥상(1882 ~ 1948) : 서북군의 총수. 화북 일대를 다스림. 한때 장개석과 도원결의를 맺었으나 反장개석의 길을 걸어가다 결국 장개석에게 암살당함. 참고로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부의를 황제자리에서 쫓아낸 인물. ※ 사진출처 : 네이버백과사전

 

 

염석산(1883 ~  1960) : 산서군의 총수. 산서성장이자 제2전구 사령관으로 "산서황제"로 불리기도 했음. 독실한 불도옹. 나중에 공산군에게 아작이 난 후 장개석 따라 대만으로 토낌.

※ 사진출처 : http://blog.daum.net/beijingslowwalk/16153165

 

이종인(1891 ~ 1969) : 광서군의 총수. 항일전쟁때 태아장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등 지휘력이 상당히 뛰어났고 국민당군에서 부총통으로 장개석 다음의 위치를 차지. 제2차 국공내전 말에 공산측과 협상을 했으나 결렬되자 장개석의 러브콜(?)을 생까고 미국으로 망명후 대륙으로 돌아감.

※ 사진출처 : 영화 "건국대업"의 한장면(실사진을 못 구해서리..)

 

29년 2월 장개석-이종인의 장계전쟁을 시작으로 장개석-풍옥상의 장풍전쟁, 군벌시대 최대의 내전이었던 중원대전까지 이어집니다. 중원대전은 장개석 일생일대 최대의 위기였는데 위의 삼인방외에 장발규, 오패부, 손전방, 석우삼 등 잔존 군벌 세력과 왕정위, 진공박같은 국민당내 反장개석파까지 모두 뭉쳐 일대 반장개석 포위망을 구축합니다. 속된말로 넘버투부터 시다바리까지 모두 뭉쳐서 넘버원(장개석)에게 싸움을 건 것이죠. 특히 풍옥상의 서북군은 소련의 막대한 원조로 당시 중국내 최강부대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숫적으로도 60~70만 정도였던 정부군에 대해 반란군은 80만에 달하였습니다. 따라서 30년 3월부터 시작된 이들의 공세는 유례없을만큼 강력했고 장개석은 완전히 사면초가에 빠지죠. 7월에는 장개석이 그의 일기에 "최악의 사태가 닥친다면 나는 당과 나라를 위해 내 생명을 버릴 따름이다"라고 비장한 각오를 적을 만큼 위기에 빠지죠. 그러나 장개석이 군벌들을 각개격파하고 양다리 걸치고 있던 장학량이 장개석쪽으로 넘어와 풍옥상의 뒤를 범함으로서 8개월에 걸친 승부는 장개석의 승리로 끝납니다. 이 전쟁에서 정부군은 약 10만, 반군은 15만의 사상자를 냅니다.

 

※ 반장전쟁의 과정 : http://m.enha.kr/wiki/%EB%B0%98%EC%9E%A5%EC%A0%84%EC%9F%81

 

사실 이 전쟁에서 장개석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보다 반군 지휘관들을 뒤에서 매수하고 분열시키는 정치적, 정략적 술수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점에서 재능이 있었죠.  또한 반군들은 이해관계에 의해 일시적으로 뭉친 것이었고 지도자가 부재했기에 상호 협조가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승리는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라 타협과 미봉책에 불과했습니다. 일부 군벌들(오패부, 손전방, 풍옥상 등)은 완전히 몰락했지만 상당수의 군벌들은 건재했고 남경정부의 세력은 광동, 복건에서 양자강 하류 일대로 확대된 것에 불과했습니다. 편견회의에서 결정된 군대 감축도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큰 희생과 비용만 치루었을뿐, 무엇을 위한 싸움이었는지도 모르게 되었죠.

 

사실 북벌이건 반장전쟁이건 결코 전국을 하나로 통일한 것이 아니었고 각 성의 지도자와 군벌들이 장개석의 힘에 눌려 마지못해 복속하기로 적당히 합의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각 성들은 반 독립된 상태를 그대로 유지했고 남경정부는 연합정권에 불과했죠. 이런 이름뿐인 통일은 나중에 항일전쟁, 제2차 국공내전까지도 해결되지 않았죠. 어쨌거나 장개석은 명실상부한 국민당과 중국의 통치자로 올라서게 됩니다.

 

한편, 중원에서 누가 패자가 될 것인가 한창 치고박고 있던 시절.

그들과는 상관없이 호남 장사에서 "계급혁명"을 하겠다고 들고 일어났다가 아작이 났던 모택동은 죽을 고비 한번 넘기고 1927년 10월 1천명의 열렬 추종자들을 이끌고 호남성-강서성 경계에 있는 정강산 산속에서 아담한 새 보금자리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수호지의 양산박을 흉내내듯 모택동은 정강산을 기반으로 인근 농촌을 대상으로 산적질과 약탈을 벌입니다. 나름의 공산주의 유토피아 건설을 위한 포교활동도 열심히 하죠. 여기에 주덕, 진의, 임표 등 다른 공산 패잔병들도 하나씩 몰려들어 1천명은 다음해 5월에는 1만명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연말에는 5만명까지 불어납니다.(이때부터 보여준 이들의 엄청난 번식력)

 

한폭의 그림같은 지금의 정강산. 우리의 마오씨는 배 나오기전 물맑고 공기좋은 이곳에서 나물 캐먹으며 수련과 내공을 쌓았다고 함.

정강산 혁명 박물관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zxz60/150002934506)

 

1928년 5월에 주모군(주덕-모택동군)은 조직과 병력을 재편하여 이른바 "공농혁명군 제4군단"으로 개편됩니다. 주덕이 군단장, 모택동이 당대표가 되었죠. 7월에는 국민당군 장교였던 팽덕회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투항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제5군단이 창설됩니다. 병력은 각기 4~5천명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홍군"이라는 명칭을 칭하게 됩니다.

 

이렇게 세를 불려나가는 홍군에 대해 국민당정부도 보고만 있을 수 없었고 1928년 8월 강서성, 호남성, 광동성에서 병력을 대규모로 동원해 토벌에 나섭니다. 토벌군은 18개 연대에 달했고 4개 연대에 불과한 홍군에 비해 숫적으로 압도했습니다.

 

그러나 두차례의 토벌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는데 토벌군은 초반에는 우세하게 밀어붙었으나 서로간의 분열과 불신, 감정대립으로 협조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홍군은 분열된 토벌군을 각개격파합니다. 여기에 토벌군 일부 부대가 반란을 일으켜 홍군쪽에 붙는등 상황이 불리해지자 토벌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철수합니다. 이 전투에서 모택동은 소위 "16자 전법"을 처음 선보여 승리에 큰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국민당군이 정강산 일대를 포위하고 식량 공급을 차단하자 산속에서 말라죽게 생긴 이들은 1929년 1월 근거지 포기를 결정하고 자신들의 지지세력이 있는 강서-복건 경계지역으로 이동합니다. 여기도 대도시는 없고 찢어지게 가난한 산촌동네였으나 정강산보다는 그나마 살만한 곳이었습니다.

 

이 당시 홍군은 처음 2개 군단 1만명에서 시작했던 것이 1930년 4월에는 14개 군단 7만명에 이르게 됩니다.

 

제1군단(호북) : 허계신, 5300명

제2군단(호북) : 하룡, 5,900명

제3군단(강서) : 채신희, 5,400명

제4군단(강서) : 주덕, 10,000명

제5군단(강서) : 팽덕회, 6,900명

제6군단(호북) : 광계훈, 5,900명

제7군단(광서) : 장운일, 7,900명

제8군단(호북) : 황공략, 4,900명

제9군단(호남) : 이름미상, 1,300명

제10군단(호북) : 이름미상, 2,000명

제11군단(광동) : 이명서, 5,000명

제12군단(복건) : 등일, 8,900명

제13군단(절강) : 호광면, 5,000명

제14군단(강소) : 하혼, 2,000명

 

이외에도 호남, 안휘, 해남도, 하북, 하남 일대에 소규모 추종세력들이 있어 다 합하면 20개 군단 10만명에 달했습니다.(출처 : 인민해방군사, 국방군사편찬위원회 著)

 

 

장개석이 반장개석 포위망속에서 머리털 빠지게 싸우고 있을때, 모택동은 또다시 승승장구하는 기회를 포착합니다. 

당시 아직 공산당내에서 모택동의 위치는 확고하지 않았고(군사적으로는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지만) 상해의 당 중앙위원회에서 주도권은 이립삼이 쥐고 있었습니다. 그는 농민중심인 모택동과 달리 레닌주의자로서 러시아처럼 중국도 도시 노동자를 중심으로 혁명을 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립삼 : 1896-1967> ※ 사진출처 : http://terms.naver.com/item.nhn?dirId=2902&docId=2142

 

그리고 1930년 군벌들이 한창 중원대전을 벌이고 있는 것을 기회로 그의 주도로 홍군은 장사-무창-남창 삼각지대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준비합니다. 

 

작전은 주덕(모택동이 정치위원)의 제4군단을 개편한 제1군단이 남창을, 하룡의 제2군단과 서향전의 제4군단이 무창을, 팽덕회의 제3군단은 장사를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덕, 모택동을 비롯한 야전 지휘관들은 피아간의 전투력과 화력 차이, 병력의 분산, 전략적 일관성의 결여 등을 내세워 각개격파될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이립삼은 고집을 부려 공세에 나서게 됩니다.

 

예상대로 작전은 대참패로 끝납니다. 팽덕회의 제3군단만이 일시적으로 장사를 점령했으나 정부군의 맹반격에 10일만에 쫓겨납니다. 패착의 원인은 병력을 한곳에 집중해도 부족할 판에 한꺼번에 3개의 대도시를 점령하겠다고 분산시켰고 병사들은 소총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두꺼운 성벽을 뚫을 중화기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죠. 그냥 상대의 허를 찔러 기습으로 이겨보겠다는 허황한 과신에 불과했죠.

 

노동 이론가에 불과한 이립삼의 미숙한 작전 지도로 홍군은 참담한 패배를 겪었고 그 또한 당 지도부에서 완전히 쫓겨났습니다. 이때의 경험이 얼마나 호된 것이었는지 홍군은 향후 제2차 국공내전까지 17년간 단한번도 잘 방비된 도시를 공격하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이립삼이 쫓겨난후 1931년 11월 제1회 소비에트 대회가 서금에서 개최되어 소위 "중화소비에트 공화국 임시중앙정부"라는 거창한 이름의 정부를 수립하고 모택동이 주석으로, 항영과 장국도가 부주석으로 추대됩니다. 수도는 대회가 열린 서금으로 하였습니다. 영역은 180개현, 인구 900만에 달했습니다. 이로서 한낱 일개 정치위원에 불과했던 그가 당 서열 몇손가락안으로 껑충 뛰어 오른 것이죠.

 

한편, 홍군의 공세는 철저한 실패로 끝났음에도 뜻밖에 장개석의 주목을 돌리게 합니다. 그동안 변방의 산적떼쯤으로 여기던 공산반군이 자신이 방심하던 사이 이정도로 컸나 라고 큰 충격을 받았죠. 따라서 이대로 놔둘 것이 아니라 더 크기전에 철저히 싹수를 밟아주어야겠다라고 생각합니다.

 

중원대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중국 전체를 지배하게된 장개석은 이제 홍군에게 눈을 돌리게 되었고 1930년 11월 제1차 초공을 시작으로 양자는 본격적으로 대결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