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명청상방: 관상결탁으로 생겨난 소금전매업자

구름위 2013. 10. 30.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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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양려광(楊黎光)

 

중국인들은 뒤를 돌아보기 좋아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 이익추구만을 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신용기갈증을 앓고 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명청상방을 떠올리고, 그들을 신용을 기본으로 하고, 신용으로 사업을 시작하고, 신용으로 사업을 발전시킨 일대 "유상(儒商)"으로 이상화한다. 여기에서 최소한 두 가지 잘못을 범했다: 하나는, 신용은 원래 상인(물론 일반인도)이 당연히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도덕수칙이다. 만일 이것을 대단한 미덕으로 찬양한다면, 이 민족의 집단인격은 확실히 불쌍하고 가련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다음으로, 신용이 부족하다고 하여, 무한대로 신용을 끌어올릴 수는 없다. 신용은 도덕적 품격이거나 직업소양일 뿐이다. 그것이 경제발전의 원동력은 될 수 없다. 그리고 상인이 재물을 취득하느냐의 여부를 결정하는 주요한 요소가 될 수도 없다.

 

이외에, 상방이 흥성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명청의 두 왕조를 상업이 번영하고, 인민이 부유했던 태평성대로 묘사하려는 생각을 일방적으로 가지기도 한다. 명왕조에 대하여, 역사학자인 황인우는 이렇게 그 본질을 갈파한 적이 있다: "이 제국은 무력을 숭상하지 않는 경향을 보일 뿐아니라, 사회개조, 생활수준제고의 큰 뜻도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그저 대량의 인민이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사서'에서도 소위 '백성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는다'는 저표준하에서 사회의 장기적인 안정을 도모했다." 그리고 야만적인 청왕조에 대하여는 중국에 문명의 대후퇴를 가져다 주었다. 사회경제에 여하한 혁신적인 발전도 가져다주지 못했고, 기껏해야 전왕조의 사례를 본받아서,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 '사회개조, 생활수준제고'를 하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은 백성들이 부유해져서 재물의 세력을 믿고 관청을 무시하고, 정권을 위태롭게 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인민을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게 한 것은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또 다른 측면에서 정권을 위태롭게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는 전제통치자들이 공동으로 취했던 방식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에서 출발하여, 일부러 절대다수의 백성들이 겨우겨우 먹고살 수 있는 수준을 유지하게 한 것이다.

 

천백년이래로, 중앙집권적 전제재도는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속에는 광명이 없다.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명청상방은 송나라때 관청과 결탁한 상인들과 마찬가지이다. 단지 규모가 더 커지고, 범위가 더 넓고, 더욱 집단적이 되었을 뿐이다.

 

역사의 진실을 복원하자면, 명청상방의 흥성은 실제로 통치자의 정치적수요에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최초의 이유는 명태조 주원장이 실시한 "개중제(開中制)"에 있다.

 

주원장이 몽골원나라세력을 격파하고 명왕조를 건립한 후, 여전히 북방유목민족은 큰 위협이었다. 그리하여 장성을 잇는 선을 따라 9개의 방어구를 둔다. 이를 구변(九邊) 혹은 구진(九鎭)이라 부른다. 이것은 동쪽으로는 요동진 해변부터, 서쪽으로는 감숙진 가욕관까지, 5274킬로미터에 이러는 거대한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관할했다. 긴급한 군사적 상황이 발생하여 내지에서 지원군을 보내는 경우를 제외하고 평소에 주둔군만 80여만에 달했다. 그중 주둔군이 가장 밀집한 지역은 "내박경기, 외공이적(內迫京畿, 外控夷狄)"의 대동(大同)일대였다. 대동진이 관할하는 장성의 길이는 323킬로미터이다. 여기에는 마보영관병 13.5만명이 있고, 말, 나귀, 노새등이 5만여필 있었다.

 

속담에, 병마미동, 양초선행(兵馬未動, 糧草先行, 병사와 말이 움직이기 전에 병사들이 먹을 양식과 말이 먹을 풀을 먼저 이동시켜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길다란 변방체계, 이처럼 방대한 주둔군규모는 명나라정부에 거대한 공급난을 가져다 주었다. <<대명회전>>의 기록에 따르면, 대동진에서만 주둔군의 양식이 51만석, 풀이 16.9만속 필요했다. 이외에 대량의 면화, 베등 소비품도 필요했다. 이들 물자를 운송하기 위하여, 명정부는 대량의 관군을 동원했을 뿐아니라, 많은 백성들도 징집했다. 결론적으로 매년 장성에 병력을 주둔시키는데 드는 돈이 천만냥이상이었다. 이는 중앙재정에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변방의 군사소비와 공급간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하여, 명나라정부는 몇 가지 조치를 취한 바 있다. 그중 진상(晋商)의 발전에 핵심역할을 한 것은 '개중제'이다. 개중제라 함은 역대 식염(食鹽, 소금)을 국가가 전매하는 기초위에서, 명정부가 변방의 군수물자조달을 해결하기 위하여 일거양득의 방식을 채택했다. 돈도 적게 들고, 시간도 적게 들며, 힘도 적게 드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의 의도는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상인을 부유하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개중제는 상인들로 하여금 변진의 변방창고에 양식을 납품하고, 이를 통해서 관염(官鹽)을 판매할 수 있는 허가증(鹽引, 引目)을 주는 것이다. 이를 "납량중염(納糧中鹽)'이라고 부른다.

 

모든 국가에서 전매하는 상품은 폭리상품이다. 소금은 양식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필수불가결한 생활필수품이다. 소금은 양식과는 달리 어디서나 생산되는 물품이 아니다. 그러므로, 소금은 관청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고, 이를 통하여 백성으로부터 폭리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은 소금자원이 부족한 나라는 아니다. 그 가치 폭은 폭리는 주로 관청의 독점때문에 나타난다.

 

개중제가 최초로 실행된 곳은 산서 대동진이다. <<명태조실록>> 권53의 기록에 따르면, 1370년(홍무3년), 산서행성의 관리가 조정에 건의한다: "대동의 양식저장은 능현(지금의 산동성 덕주)에서 태화령(산서성 삭주 마읍)까지 운송하는데, 길이 멀어 비용이 많이 듭니다. 상인으로 하여금 대동의 창고에 쌀 1석을 제공하거나, 태원창고에 쌀 1석3두를 제공하면, 회염(淮鹽) 소인(小引, 2백근) 하나를 끊어주게 되면, 이렇게 하면 운송비가 적게 들고 변방의 창고는 충실해질 것이다." 명태조 주원장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다음해에 개중제를 실행한다.

 

"납량중염"은 주로 구변에 집중되어 있었따. 대동진은 가장 먼저 이 제도를 실행한 곳이고 납량의 액수가 가장 큰 곳이다. 그리하여 산서상인은 가까운데 있다보니 이득을 많이 보았다. 개중제가 다양화된다. '납량'외에 납면(納棉), 납포(納布), 납마(納馬), 납철(納鐵)을 통해서 염인을 받는 방식이 나타난다. 산서상방은 여러가지 경영으로 북방의 군수무역을 독점하엿을 뿐아니라, 그 세력범위를 양회, 하동등 전국의 모든 소금생산지로 확장시킨다. 이리하여 '무천사방(貿遷四方)'의 전국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명나라중기에 들어서면서, 염업정책은 '개중제'에서 '절색제(折色制)'로 변화한다. 소위 "절색제"는 양식등 물자를 지정한 변방지구로 운송하고 염인을 받을 필요가 없고, 직접 은자를 주고 염인을 받아내는 방식이다.

 

"개중제"가 산서상방을 만들었다면, "절색제"는 휘주상방(徽州商幇)이 흥성하게 만들었다. 현대인들이 무한히 그리워하는 명청양왕조의 상방은 사실 관상결탁으로 일어난 소금판매업자인 것이다.

 

개중제를 실핼할 때, 양식등 물자를 변방으로 운송해서 염인을 얻을 때는, 휘주는 멀리 떨어지고, 산속에 깊이 있으며, 교통이 불편한데다, 땅은 좁고 사람도 적은 곳이어서, 양식을 스스로 자급자족할 수가 없었다. 진상과 비교하면 '지리'적으로 아주 불리했다. 절색제가 실행되니, 휘상은 내지에서 돈으로 염인을 사들일 수가 있었다. 홍치년간에서 만력년간까지, 휘주염상은 무리를 이루어 당시 전국최대의 소금생산지인 의정(儀征), 양주(揚州)와 회안(淮安)등지를 장악했다. 휘주염상의 경영은 일시에 커다란 발전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