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명십삼릉(明十三陵)을 말한다.

구름위 2013. 10. 30.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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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홍촉(洪燭)

 

자금성(紫金城)에서 십삼릉(十三陵)까지. 이것은 명나라때 대부분의 황제들이 반드시 거쳐간 길이다.

단지 3명이 예외이다. 첫째는 명태조 주원장이다. 그는 남경 자금산의 아래('효릉")에 묻혀 있다. 둘째는 건문제이다. 그는 자신의 숙부인 연왕 주체(즉 나중의 영락제)에게 패배당하여, 남경성이 함락될 때 행방불명이 되었다(전해지는 바로는 불바다 속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죽어서도 묻힐 장소를 얻지 못했다. 셋째는 제7대황제인 경태제(景泰帝, 明代宗)은 복벽한 영종(英宗, 토목지변으로 몽골 오이라트에 포로로 잡혔다가 나중에 풀려나서 돌아옴)의 궁정정변으로 죽임을 당하였는데, '왕'의 예로 옥천산 북쪽 금산구에 묻힌다. 그가 생전에 자신을 위해서 만들어두었던 명십삼릉지구의 분묘는 폐기되는데, 미완공의 이 묘자리는 백여년후에 명광종 주상락의 경릉(慶陵)으로 꾸며지니, 어쨌든 쓸데없이 공사한 것은 아니었다.

건문제의 황제자리를 빼앗은 주체는 북경으로 천도하고, 자금성을 만든다. 위세를 드러내고, 영화부귀를 누리면서 죽음에도 대비했다. 서북쪽의 창평 천수산 아래에 호화로운 능묘를 만드니, 바로 장릉(長陵)이다. 그 규모와 기세는 명태조의 효릉에 비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다.

장릉의 보성(寶城: 城壁, 墳山, 方城을 포함함) 및 지궁은 주체가 등극한 후 7년째 되는 해(1400년)부터 착공했고, 4년후에 완공한다. 지면의 주체시설인 은전(제사용)은 지금 북경지역에서 보존된 최대의 그리고 완벽하게 보존된 명나라 건축이다. 또한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의 목조건축물중 하나이다. 동서의 길이와 기세는 자금성의 태화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영락제는 문치무공방면에서 큰 일을 벌이는 것을 좋아했을 뿐아니라, 죽고나서의 사후에 대하여도 조금도 소홀히 처리하지 않았다.

허대령(許大齡) 선생은 장릉이 십삼릉중 가장 긴 신도(神道), 가장 큰 비정(碑亭)과 비(碑), 최대의 향전(享殿)과 최대의 보성을 지닌 것을 제외하고 농담식으로 이렇게 말했다: "정화하서양의 목적을 보면, 그가 정화를 해외로 보낸 것이 건문제를 찾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이는 국위를 선양하고 해외에서 보물을 찾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장래 장릉에서 영락대전은 발굴될 가능성이 크지는 않지만, 장릉 및 경릉, 헌릉에서 정화가 해외에서 가지고 온 주보, 향료가 있을 가능성은 아주 크다." 주체는 개국황제인 주원장에 다음가는 중요인물이다. 창업형군주에 속한다. "정난지역", 천도, 변방수비, 원정(그는 타타르, 오이라트의 두 부족을 북벌하는 도중에 죽었다), 및 능묘건축에 이르기까지 '살아서는 위대함을 죽어서는 영광을' 추구했다. 장릉은 그에게 기념비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장릉의 주위에, 12개의 능이 있다. 모두 주체의 자손이다. 그들은 주체의 유산인 자금성과 금란전을 승계했다. 그리고 영락제의 삶과 영락제의 죽음을 따라했다. 그리하여 일률적으로 토목공사를 크게 벌여서 능묘를 만들었다. 그리고 부장할 보물들도 긁어모았다. 인간세상의 황금미옥, 능라주단을 모조리 가져가려고 했다.

장릉의 보물은 아직도 수수께끼이다. 만력황제의 정릉은 이미 1956년에 발굴되었다. 출토된 대량의 부장품을 보면, 광금단료가 160필에 달하고, 황제의 왕관 및 용포는 모두 금사금선수직으로 만들었고, 황후의 봉관도 보통이 아니었다. 보석을 백여개, 진주를 오천여개나 상감했다. 구천지하에서 보석가게를 열어도 될 정도이다. 그와 비교하면 염라대왕이 오히려 가난뱅이로 보일 것이다.

 

정릉은 십삼릉 중에서는 중등규모에 속한다. 방산의 서남쪽 대석와(大石窩)에서 단계(丹階)로 쓸 돌(길이 3장, 두께 5척)을 운반해오는데, 2만의 운반공들이 꼬박 28일간(하성서의 <<양궁정건기>>) 운반했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재력을 들였는지 알만할 것이다. 그외에 유릉, 무릉, 태릉, 강릉, 영릉, 소릉, 경릉, 덕릉등등도 마찬가지이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규모가 비교적 작은 헌릉에 동원된 군부(軍夫), 공장(工匠)이 23만명이다. 십이릉중 가장 작은 편인 경릉에도 10만명이 동원되었다. 능 하나를 만들 때마다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피와 땀을 흘렸겠는가?

예를 들어 장릉을 만드는 과정에서, 주체는 일찌기 사람을 보내어 천수산 시공부지에서 제문을 지어서 죽은 일꾼들을 위로했다. 죽은 자를 위하여 묘를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인력 재력을 낭비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살아있는 사람을 죽였는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중국역사상 어두운 밤과도 같은 우매함과 암흑이다.

사망은 생명보다 중요하다. 생활보다도 중요하다. 이런 고대 제왕들의 사고방식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그들은 자신의 위하여 능묘를 만드는 동시에, 무형중에 국가의 군주제시대를 점차 거대한 분묘로 몰아넣었다. 봉건사회는 제왕들의 사치와 혼용 가운데 마지막을 맞이한다. 인류의 발전사는 바로 문명과 야만의 투쟁과정이다. 문명은 최종적으로 야만에 승리한다. 황제는 결국 죽는다.

또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황제가 모조리 죽은 후에, 문명은 비로소 탄생하고, 비로소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제왕의 무덤 속에서 몸부림쳐서 빠져나온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어쩔 수 없이 그 시황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시황은 장성을 쌓으면서 수많은 백성을 죽였다. 원래 의도는 좋은 것이었을 것이다.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게 하도록 외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었다. 최소한 절대적인 이기심에서 벌인 일은 아니다. 하물며 민간전설에는 맹강녀가 한번 곡을 하자 장성이 무너졌다고 하지 않는가.

장성과 십삼릉을 비교하면, 명나라황제들의 황음과 이기심이 드러난다. 이는 혼자서 누리기 위한 '장성'이다. 백성의 선혈과 뼈를 가지고 자신을 위하여 개선문을 만든 것이다. 하물며 당시에는 어느 과부가 이 무덤 위에 엎드려 통곡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통곡할 자유마저 빼앗긴 것이다.

명나라때는 심지어, 금나라 원나라의 소수민족의 비빈순장제도를 그대로 썼다. 명영종이 죽기 전에 비로소 유조로 폐지시킨다. 이는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의 제왕들이 감히 하지 못했던 일들이다.

지금 십삼릉 덕릉의 동남쪽에 있는 동정(東井)과 정릉 서북쪽에 있는 서정(西井)(당시에는 동서낭낭궁이라고 불렀다)에는 지금도 분홍색의 담장과 녹색 유리기와로 된 건물의 유적지가 남아 있다. 이곳은 영락제가 순장한 비빈들을 묻은 곳이다. 정말 악독하다. 이처럼 아름답고 살아있는 희생물을 선택하다니.

황제는 죽으면서도, 여색에 대한 탐욕을 버리지 못했다. 살아있는 사람을 금은주보와 마찬가지로 모조리 데려갔다(못먹는 것은 싸가지고 간다는 말도 있다). 비빈들이 죽을 때 모두 정원에서 식사를 하고, 식사를 마치면 집안으로 끌려들어간다. 이때 곡소리가 전각을 진동한다. 집안에는 소목상(小木床)을 두고, 그 위에 서게 하고는, 밧줄을 위에 매달아 둔다. 그리고 머리를 그 안에 집어넣게 하고, 아래 소목상을 걷어낸다. 이렇게 하면 목이 졸려서 죽는 것이다.

이들 미인들이 황제를 위하여 우는 것일까? 자신을 위하여 우는 것일까? 울어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십삼릉은 통곡한다고 해도 무너지지 않는다.

제왕의 분묘는 백성들의 백골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들의 영광은 항상 짙은 음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 또 하나...나는 십삼릉을 다 돌아보았다. 느끼는 바가 있다: 다행히 명나라의 국운이 다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계속하여 지어나갔다면, 교외의 좋은 논밭은 모두 다 차지하지 않았겠는가? 백성들은 고혈을 모조리 빨리지 않았겠는가? 거기의 대리석, 한백옥, 화강암은 모두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만든 것이 아닌가?

겨우 십여명의 황제만으로도 수백년간 백성들을 고생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해가 전혀 되지 않는다: 고염무와 같은 지식인이 왜 황제의 무덤에 엎드려 곡을 했는가? 호소를 하지도 않고, 성토를 하지도 않고, 애도를 했는가?

서생의 곡은 어떤 때에는 궁녀의 곡보다도 더욱 애매하다.

고염무는 명나라가 망한 후에 염무(炎武)로 개명하고, 항청투쟁에 가담한다. 청나라 순치16년(1659년)에 그는 47세였다. 아마도 가능성이 없다고 보았는지, 강소 곤산에서 북경으로 온다. 먼저 배알한 것은 자연히 한족통치를 상징하는 명릉이다. 분명히 몇번 절을 했을 것이다. 남은 19년의 기간동안 그는 시종 그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6번이나 십삼릉을 배알한다. 그리고 <<창평산수기>> <<경동고고록>>등 시문을 쓴다. 그리하여 무형중에 가장 유명한 명십삼릉의 묘지기중 하나가 된다.

명십삼릉의 퇴폐한 모습은 고염무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제사를 지냈고, 과거의 좋은 시절을 그리워했다.

사실, 그 십여명의 황제는 그가 눈물을 흘려줄만큼 가치가 있는가? 이는 완전히 수갑과도 같은 충군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쫓겨난 황제들이 그의 충성을 받아줄 수도 없지 않는가.

그는 숭정의 사릉에서도 애도하는 시를 지었다. 사실 숭정은 목을 매어죽은 무능한 황제였다. 그의 유골은 현지 선비들에 의해 매산의 홰나무에서 끌어내려져 몇몇이 돈을 모아서 싼 값의 버드나무관에 넣어 창평으로 운송한 후, 요절한 귀비 전씨의 묘에 같이 묻어준다. 일찌기 난폭했던 주명왕조는 마지막에 가서 관을 살 돈도 없었다. 겨우겨우 마음씨 좋은 사람들의 연민과 기부로 관을 마련했다.

이것이 인과응보인가?

동곽선생들아. 이들 사람을 잡아먹은 가족들에 대하여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된다.

옛황제이든 신황제이든, 죽은 황제이든 살아있는 황제이든 어쨌든 모두 짐승같다. 그들에게 골수를 빨리던 때를 잊었는가? 피까지 모조리 빨리던 때를 잊었는가? 왜 그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려주는가?

 

이자성이 거용관을 차지하고, 창평을 함락시켰다. 먼저 명릉을 점령했다. 그 후에 북경으로 밀고 들어간다. 궁중에 깊이 틀어박혀있던 숭정을 목매달아 죽게 만든다. 만일 장기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대명왕조의 장에 대하여 외통수로 장군을 부른 것이다. 황제도 죽을 지경에 처하고, 조상의 묘도 보전하지 못했다.

황천의 주체들은 아마도 이런 것을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백성의 피고름을 짜내서 만든 능묘가 자신의 업적이 산서에서 온 잡이들에게 짓밟히게 될 줄이야. 이를 보면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숭정말에 창평의 여러 능은 이자성에 의하여 훼손된다. 감장(龕帳)이 모두 사라지고, 신주(神主)도 누가 훔쳐갔는지 모른다.

이자성은 말을 타고 황가의 조상묘를 짓밟았다. 이때는 복수의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는 역대왕조의 반란자들이 동경하는 일이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폭군만이 폭민을 만들어낸다. 폭정만이 폭동을 불러일으킨다. 이자성은 비록 일부 문화재를 손괴했지만, 나는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를 위하여 변호할 생각이 있다. 최소한 이는 독재의 왕권에 대한 필요한 경고이다. 황제들에게 일깨워주는 것이다: 자신의 안정과 평안을 위해서라면 백성들을 괴롭히지 말아라, 백성들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모든 황제는 프랑스대혁명중에 단두대에서 죽어간 루이 몇세처럼 될 것이다.

 

매산(지금의 경산)은 숭정의 단두대이다. 그가 총명했다는 것은 일찌감치 목을 맸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은 관중을 피하고, 굴욕을 피했다. 숭정이 절대로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명나라의 천추기업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일 것이다. 그는 생전에 자신이 묻힐 능묘도 만들지 못했다. 다행히 전비묘가 있어서 그의 몸을 묻힐 수가 있었다. 능앞의 신공성덕비는 청나라황제가 그를 위하여 세워준 것이다. 비문은 자연히 나중에 쓴 것이다. 사실 이 패가망신한 자에게 무슨 공덕이 있겠는가?

십삼릉중에서, 사릉(思陵)은 모양이 특수하고, 확실히 간소하다. 지는해의 쓸쓸함과 같다. 사릉의 '사(思)'는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것 이외에 반성하는 생각이라는 뜻도 있다. 망국의 군주는 확실히 저승에서 잘 반성해봐야 할 것이다.

후세의 제왕은 더더욱 사릉을 경계로 삼아야 한다. 모든 일에 세번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어서 비참해질 것이다. 아쉽게도 대청왕조는 사릉에 비를 세워주었지만, 진정으로 교훈을 받아들이지는 못한 것같다. 그들의 결말도 대명왕조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다. 영국프랑스연합군이 원명원을 불태우고, 팔국연합군이 자금성을 함락시키고, 두 번이나 황제(함풍과 광서)를 황급히 도망가도록 만들었으니, 정말 쓸모없는 자들이다. 멍청한 서태후(중국특색의 클레오파트라 혹은 에카테리나여왕)는 망국의 책임이 있을 뿐아니라, 매국까지 했다. 땅도 떼어주고, 돈도 물어주고, 국권을 잃는 많은 조약에도 서명했다. 조상이 물려준 장성을 모조리 팔아버린 것이다. 장성이라는 위엄과 존엄의 개념은 일찌감치 허명만 남았다. 장성은 청나라말기에 그저 소극적인 장식품이었다.

십삼릉은 열 세명의 황제의 저승에서의 집이다. 그들이 사후에 보유한 지하왕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다른 의미에서는 자금성이다.

그들은 언젠가 이 집으로 이사가야 한다.

황제를 이사가게 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금관옥상, 보정향로, 예상우의, 동거석수, 심지어 덮개까지도 빠트려서는 안된다. 그리고 수량이 엄청난 '잡비' 부장되는 화폐. 이 모든 것들은 죽는 것도 살아있는 것과 같게 보는 예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릉을 예로 들면, 건설비만도 백은800여만이 들었다. 여기에는 부장품의 가치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생활용품도 모조리 갖추어 놓는다. 황제의 유령이 만일 금벽휘황한 지하궁전에서 거닌다면, 분명히 편안하게 느낄 것이다.

다만 아쉽게도 우리는 그들이 죽은 후에 어떻게 느끼는지는 알지 못한다.

매번 기발굴된 정릉에 갈 때마다, 나는 자신이 황제의 음삼한 꿈속에 들어간 것처럼 느껴져서 냉기에 부르르 떨곤 한다.

 

십삼릉에서 소릉의 한켠에, 월아성(月牙城)이 있다. 속칭 아파원(啞巴院)이다. 현궁이 봉문된 후, 설계사 및 장식공들은 모두 이 곳에 갇힌다. 그리고 약을 먹인다. 모조리 벙어리(啞巴)가 되는 것이다. 입은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한다. 이 방법은 도굴을 방지하는데 유효했다고 한다.

명십삼릉외에 북경근처에 있는 제왕릉으로는 금릉(金陵), 청동릉(淸東陵 지금의 하북 준화)등등이 있다.

서남쪽 방산에 위치한 금릉은 금왕조(1115-1234)이 황가능묘이다. 금나라시조부터 장종까지 17명의 황제와 후비 및 왕들이 잠들어 있다. 명십삼릉보다 400여년전에 만들어진 북경 최초의 황릉구역이다. 지금 지면건축은 모조리 사라졌고, 지하궁전만 800년의 암흑과 신비속에 잠들어 있다.

건륭이 천수산 십삼릉을 구경할 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나라가 개창할 초기에, 예친왕이 우리 군대를 이끌고 요동에서 승리할 때, 명나라의 군신은 성상(星象)의 설에 미혹되어, 금나라때 능침이 우리 왕조와 관련이 있다고 하여, 방산현의 금릉을 훼손시켰다...이후에 정릉의 향전을 철거하고 제사를 끊었다."

이는 풍수를 믿었던 만력황제가 후금이 굴기하자, 일찌기 조상묘에 대하여 토벌을 하였다는 것이다. 금나라 청나라는 모두 종족연원이 같다. 청나라병사들이 입관한 후, 이에 대한 보복으로, 명릉중 만력제의 정릉을 불태웠다. 이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이닌가? 봉건시대에 왕조가 바뀌면, '개싸움'의 투쟁이 벌어졌다. 전황조의 묘를 파헤치는 것은 정신적인 승리의 일종이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고, 복수의 창끝은 저승으로 향한다. 피할 방법이 없다...황제는 죽은 후에도 편안하지 못하다.

청동릉은 민국시대에 탐욕스러운 군벌에게 도굴당한다. 공병과 폭약을 동원했다. 이는 최대규모의 도굴사건이다. 묘안의 보물은 모조리 가져간다. 현재는 행방불명이다. 아마도 이미 조용히 팔려버리고, 군벌혼전때의 탄약비용으로 충당되지 않았을까? 그 운명은 명십삼릉보다도 못하다. 서태후는 평생동안 돈을 배상하고 땅을 떼어주느라고 바빴는데, 죽어서는 자신의 묘조차도 지키지 못했다.

이 모든 것들은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탓이다. 역사는 반드시 반복된다. 명사릉이 그러했고, 청동릉도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