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전쟁 이후 약 40년간 유럽은 큰 전쟁없이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 이는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너무도 참혹했던 전쟁을 동시에 경험한 유럽의 각 군주들이 도발을 자제한것이 이유.
그러나 문제는 다른곳에서 발생했다. 이미 나폴레옹 전쟁때부터 대규모 군대를 거느린 러시아와 프로이센... 당시로선 군대의 크기만으로는 이미 세계 최강이랄수 있었던 러시아가 기울어가는 세력인 오스만 투르크제국에 이빨을 들어낸 것이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1848년 혁명으로부터 아무 영향을 입지 않고 헝가리인들의 독립운동을 성공적으로 진압한데 고무되어 발칸지역에 대해 보다 공격적인 정책을 시도하게 된다. 그간 발칸반도를 통해 직접 지중해로 진출하려던 러시아의 남진을 용납할수 없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지원을 선언하고 1854년 6월 콘스탄티노플로 원정군을 파견한다.
연합국과의 충돌을 두려워한 러시아는 일단 점령지에서 군대를 철수 시키나 이미 고무된 연합군측은 러시아를 응징하기로 결의, 그해 9월 러시아군이 주둔한 강력한 요새인 세바스토폴을 공략하기 위해 요새 북쪽 30마일의 해안에 군대를 상륙 시킨다.
아무 저항을 받지 않은 가운데 상륙한 연합군은 세바스토폴을 향해 진격하며, 이때부터 문제가 발생하게된다. 양측 모두 잇단 실수와 준비 부족, 무모한 지휘로 인한 실패들을 거듭보여주어 '최악의 전쟁'을 만들어낸 것이다.
콜레라가 창궐하고, 가을 폭풍우가 심한 흑해 지역에 대한 사전 지식은 물론, 지도 한장 갖추지 못한채 출발한 연합군은 요새를 포위하는데 너무도 긴 시간을 소비하였고, 그 사이 러시아는 새로운 축성물을 구축, 요새를 강화시킨다. 연합군은 공성포가 도달할때까지 한달을 기다린 끝에 보루를 공격했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그사이 중원된 러시아군이 반격을 시도하나, 역시 준비부족으로 실패 한다. 발라클라바에서는 영국 근위병이 무모하게 러시아 포병부대를 정면 공격하다가 참담한 패배를 맛본다. 그후 러시아는 여러열로 참호를 배치, 지연전위주의 참호전으로 나서나 두달후 불어닥친 폭풍우는 참호 대부분을 물로 메우고, 그 안의 병사들은 각종 질병에 시달린다. 질병에 사망한 병사수가 전투로 사망한 병사수보다 훨씬 많았다.
동계작전에 대한 준비도 못 갖춘채 겨울을 보내고, 막대한 전쟁비용이 각국의 정부를 압박한다. 영국 내각이 총 사퇴하고, 러시아 황제는 군대의 무력함에 홧병으로 죽고만다. 이듬해 연합군 함대가 해안 일대를 완전 봉쇄함에 따라 가을이 되어서야 연합군은 겨우 세바스토폴을 함락시킨다. 모두가 지친 가운데 오스트리아까지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하자 결국 러시아는 연합군에 항복한다.
크림전쟁으로 연합군이 얻은것은 러시아의 남진을 일시적으로 저지시킨것과 터키의 몰락을 1세기정도 늦추었을뿐이였다.
크림전쟁이 주목받는 또하나의 이유는 이 전쟁이 현대전과 근대전의 교차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럼 크림전쟁시 연합군과 러시아군의 군수물품 차이를 살펴보자.
1. 연합군은 강선소총(Rifle)을 사용했고 러시아는 활강소총(Musket)을 사용했다.
2. 연합군은 증기로 움직이는 기선을 사용했고, 러시아는 돛을 단 범선을 사용했다.
3. 연합군은 최초로 전신을 사용 통신과 정보면에서 러시아를 압도했다.
그외에도 전쟁과는 다른 방면에서도 변화가 이루어졌다. 이 전쟁에서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활동했으며, 이로써 간호제계의 발전과 여성들의 전쟁 참여. 더불어 지위향상에도 크게 기여했다.
또한 이 전쟁으로부터 앙리뒤낭은 인도주의를 주장하며 국제 적십자를 발족 시켰고, 1864년 12개국이 최초로 제네바 협약(일명 적십자 조약)을 맺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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