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제1차세계대전과 중국노동자군단

구름위 2013. 8. 23.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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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가장 큰 곤경은 알게 모르게 역사를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90여년전 14만의 중국노동자군단은 머나먼 유럽의 전쟁터를 누볐다. 잔혹한 살륙과 힘든 환경 속에서 이들 중국노동자들은 중국인의 완강함, 끈기와 근면함을 가지고 거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연합국의 최종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죽고, 타향을 떠돌았다. 그들은 이름도 남기지 않았다. 2002년 14만 중국노동자들중 마지막 노인이 프랑스에서 숨을 거두었다.

한 시대는 더 이상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후손으로서, 우리는 이들 민족의 고통과 기억을 안고 있는 옛닐을 잊어서는 안된다. 세월에 묻혀서 잊혀지게 해서는 안된다. 먼지처럼 덮여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문자기록으로 그 시대를 남기려 한다. 정처없이 떠돌던 중국노동자의 영혼을 위하여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세월을 위하여.

 

여러해가 지난 후, 제남에 살고 있는 정령(程玲)은 자주 92년전에 할아버지가 산동의 고향집을 떠나 유럽의 전장터로 향하던 광경을 상상해본다.

그것은 1917년의 봄이었다. 가뭄으로 황무지가 되어버린 땅 위로 산동성 봉래현 상유촌의 마을에 간단한 행낭을 꾸려서 길을 떠나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마을 입구의 청석교앞에서, 11명의 젊은이는 자주 뒤를 돌아보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가족들과 이별을 고했다. 돈을 벌어 집안을 먹여살리겠다는 꿈을 안고 머나먼 위험한 유럽의 전쟁터로 떠나는 것이다. 가족들의 아쉬움과 걱정과 눈물을 뒤로 하고,...이 젊은이들 중에 정령의 할아버지인 필수덕(畢粹德)도 있었다.

2년이 지난후인 1919년, 마을 입구로 10명의 전쟁의 포화를 견디고, 풍상을 겪은 젊은이들이 돌아왔다. 정령의 할아버지만 제외하고.

"그는 프랑스에서 전사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정령의 말은 어두웠다. 필수덕이 고향을 떠날 때, 겨우 1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이제 이승과 저승으로 갈린 것이다.

2008년 11월 12일, 정령과 남편은 25살된 딸을 데리고 프랑스 북부의 작은 마을에 있는 1차대전 영국군의 묘지에서, 90년간 묵묵히 서 있던 할아버지의 묘비를 찾아냈다. 마음에는 서글픔과 감격이 솟구쳤다. 필수덕의 묘지 곁에는 14명의 중국노동자들이 함께 묻혀 있었다.

정령은 중국노동자 하나하나의 묘비에 국화를 한송이씩 바쳤다. 적막한 중국노동자의 묘지 앞에 종이돈을 태웠다. 바람을 따라 날리는 재는 묘지위를 휘돌았다. 이국타향에 묻혀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을 위하여.

"1차대전기간에, 14만의 중국노동자들이 유럽전쟁터로 가서 참전했다. 그동안 2만여명의 노동자들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그들은 역사에서 잊혀져서는 안된다." 정령은 전화에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유일하게 유럽까지 가서 중국노동자의 묘지를 살펴본 중국대륙의 후손이다."

 

"형제들이여. 들으시오. 너와 내가 유럽에 온지 삼년이 지났다. 세월은 빠르다. 정말 쏜 화살과도 같다. 사람마다 부모형제가 있고, 부인과 자녀가 있다. 정을 그리워하는 것은 천성이다. 친척과 고향, 동향사람들과 친구들, 그런데 어찌 외국에서 일하고 있는가..." 이것은 1차대전기간동안 중국노동자군단이 불렀던 노래라고 전해진다.

바로 이런 노래소리속에서 14만의 중국에서 온 노동자들은 1916년부터 유럽전쟁터를 누볐다.

"중국노동자군단이 유럽전쟁터로 간 것은 특수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위해시 인사자료국(당안국) 국장인 장건군의 말이다.

1914년 8월,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핵심으로 하는 연합국은 독일 오스트리아를 핵심으로 하는 동맹국과 벨기에 및 프랑스 서북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1년여의 참혹한 교전후, 쌍방은 모두 거대한 사상자를 남긴다. 교전쌍방의 전투인원이 모두 격감한다. 프랑스전쟁터의 후방과 전쟁보급선에 노동력이 극도로 부족했다. 특히 1916년의 베르뎅전투와 솜므강전투를 거치면서, 인력이 부족하여 연합국군대의 전쟁군수보급선은 거의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영국, 프랑스등 연합국은 중국에서 '노동자군단'을 모집하려는 아이디어를 생각한다.

1916년 5월부터, 프랑스, 영국 양국은 중국의 교회조직을 통하여, '사기징용'의 방법으로 임의로 천진, 산동일대에서 유럽전쟁터로 나갈 중국노동자를 모집했다.

1917년 8월 14일, 중국북양저우는 정식으로 연합국에 참가한다고 선언한다. 독일과 동맹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영국 프랑스등과 상의한 후, 중국은 주로 '노동자를 병사대신 보내는' 방식으로 참전하기로 한다. 10만의 중국노동자를 조직하여, 1차대전전선에 내보내서, 전쟁후방에서 보급선을 유지하도록 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영국프랑스등의 교공사무국(僑工事務局), 초공국(招工局)등이 연이어 만들어진다.

영국,프랑스 양국의 모집범위는 화북과 연해각지에 걸쳐 있다. 주로 산동, 강소, 직예지역이었다. 1차대전기간동안, 영국프랑스 두 나라는 중국의 직예, 산동, 강소등 8개성에서 중국노동자 14만여명을 모집했다. 위해를 통하여 운송된 중국노동자가 54000여명에 달하여, 위해는 1차대전기간동안 최대의 중국노동자수출지가 된다.

당시 산동등지는 가뭄으로, 농사를 망쳤다. 빈곤한 상태에서, 많은 농민들이 앞다투어 모집에 응했다. "중국노동자에 주는 대우는 국내에서 매월 10위안대양(大洋)이었고, 국외에서 다시 10위안을 보조금으로 주었다. 당시의 10위안이면,1000여근의 고량(高梁)을 살 수 있는 돈이다. 빈곤한 백성들에게는 아주 매력적이었다." 1차대전 중국노동자연구에 매달려온 산동 임치 사람인 대홍옥(戴洪玉)은 이렇게 말했다. 그 자신도 바로 중국노동자의 후예이다. "당시 생활때문에, 많은 마을에서는 대규모로 신청했다. 나의 할아버지가 살던 마을인 임치 동저촌에서도 7명의 청년들이 신청했다." 산동사람들은 몸이 건장하고 추위에 잘 견디므로, 유럽전쟁터의 기후에 잘 적응했다. 그리하여 영국프랑스 양국에서는 주로 산동지역에서 모집을 했따. "1차대전기간동안, 중국에서 유럽으로 간 14만의 중국노동자중에서 10만명이 산동출신이다."

중국북방의 농민을 주로 하여 구성된 노동자군단은 중국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동쪽으로 태평양을 거쳐, 미국, 카나다로 가서 마지막에 유럽에 닿았다. 혹은 서쪽으로 인도양을 거쳐 아프리카의 희망봉으로 갔다. "가는 길만 3개월이상이었다" 유럽으로 간 중국노동자군단은 영국프랑스 양국군대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군사적으로 통일편제되었다. "매500명이 한 대대로 모두 260여개 대대가 있었다. 합계 14만명가량이다"

 

중국을 떠날 때부터, 중국노동자군단은 생사를 가늠하기 어려운 운명에 처했다. 사망의 그림자가 언제나 주위를 맴돌았다.

어떤 중국노동자는 유럽전쟁터에 도달하기 전에 중도에 죽었다. 1917년 2월 24일, 지중해해역에서 중국노동자를 운송하던 프랑스 Athos호가 독일잠수함에 격침된다. 배에 타고 있던 54명의 중국노동자는 모두 바다에 묻혔다.

중국노동자는 영국프랑스연합군이 통제하는 프랑스 서부전선에서 단기간 군사훈련, 공병훈련과 부두에서 선적하적운반훈련을 받은 후, "중국노동자군다"으로 편제되어 영국프랑스의 군대에 속하게 된다. 출발전에, 중국노동자들은 연합국과 체결한 계약에서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사실상 중국노동자들이 종사하는 업무는 전투의 최전선이었다. 유럽에 도착한 14만의 중국노동자중 9.6만명은 영국군에 배속되고, 3.7만명은 프랑스군의 지휘를 받았다. 그외에 1만여염은 미국의 유럽원정군을 위해서 일했다.

그동안 대홍옥의 할아버지인 대전신(戴傳新)은 프랑스군대에 속했다. 전선의 운수업무를 담당했는데, 베르덩등 여러 번의 중요한 전투에 참가한다. 그러나 정령의 할아버지인 필수덕은 영국군대에 배속되고, 유럽의 서부전선에서 계속 싸웠다.

1차대전기간동안, 유럽인들은 중국노동자들의 활약에 깜짝 놀라게 된다. 그들은 '피로를 모르는 중국인'이라고 불렀다.

중국노동자군단은 군기가 분명했다. 군령에 복종하고, 전방의 어디로 군대가 가면, 중국노동자군대도 따라서 어느 곳이든 갔다. 도로수리, 양식운송, 벌목, 참호파기, 공사, 무기탄약운송, 부상병구호, 전쟁터청소, 시체매장, 심지어 지뢰제거까지...중국노동자군단은 유럽전쟁터에서 가장 힘들고, 가장 골치아픈 일을 맡았다.

"당시의 환경은 아주 열악했다. 중국노동자군단은 연합국의 최후승리를 위하여 참혹한 희생을 치렀다. 공헌이 아주 컸다." 대홍옥의 말이다. 연합국부대는 계약을 위반하여, 중국노동자군단을 직접 전투의 제1선으로 배치했다. 그리하여 중국노동자군단은 직접 적군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1918년, 프랑스 마인강, 브렌번, 베르덩, 오르나등 전투에서 전투가 위급해지자, 중국노동자들은 거친 쌀이나 검은빵조차 제대로 공급받지 못했다. 어떤 중국노동자는 7일간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그들은 들판의 풀을 뜯어먹고 무우를 씹으면서 견뎠다. 어떤 사람은 들판의 풀에 있는 독에 중독되어 장염, 이질을 앓아 목숨을 잃기까지 했당. 1918년 11월 유럽전투가 끝났다. 전후통계에 따르면, 2.4만명이 전쟁중에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영국군에서 일하던 중국노동자들 중에서 성명이 파악되는 사람들만 9900명이다. 현재 프랑스와 벨기에에 매장된 중국노동자의 묘지는 모두 69곳이다. 그러나 겨우 1874명의 중국노동자만이 안장되어 있다. 더 많은 1차대전의 중국노동자들은 생명을 전쟁터에서 낙엽처럼 잃었고, 묘지마저도 남기지 못했다.

"나의 할아버지는 1918년 서부전선에서 사망했다. 독일의 공습으로 죽은 것이다." 유일하게 정령이 위안으로 삼는 것은 당시 전투가 있던 곳에 영국군이 전후에 1차대전군인묘지를 만들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머나먼 중국에서 온 이 중국노동자를 잊지 않게 된 것이다. "사실 묘지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에게 있어서, 조문하고 기념할 곳은 있다. 그러나, 유럽에서 희생된 더 많은 중국노동자의 후예들에게 이런 기념할만한 곳조차 없는 것이다.."

 

1918년 11월, 동맹국이 투항한다. 4년을 끓었던 피비린내나는 세계대전이 종결된 것이다. 연합국의 승리에 중대한 공헌을 하고 참혹한 댓가를 치른 중국노동자군단은 그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해 11월 16일, 영국 식민대은 영국령 위해위 조차지의 행정장관 로크마트에게 전보를 보내여, 중국측에 중국노동자들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전해달라고 한다: "전쟁이 끝난 아주 기쁜 날에, 나는 위해위의 인민들에게 전쟁승리를 축하하고, 여러분의 도움에 감사한다. 위해위에서 모집한 중국노동자군단은 전쟁에서 큰 역할을 했다. 중국사회단체의 정부에 대한 충심어린 지지에 아주 감사한다."

그리고 국내도 환호작약했다. 북양정부의 계획대로라면, 연합국의 일원으로 그리고 중국노동자군단의 중대한 공헌을 바탕으로, 중국은 당연히 전승국의 지위를 차지할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땅의 주권도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태의 발전은 중국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1919년의 파리평화회의에서, 영국프랑스등의 전승국은 '중국은 군인한명 병사한명 파견하지 않았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산동에서의 독일의 권리는 모두 일본에 양도하기로 한다.

열강의 후안무치한 행동에, 평화회의에 참가했던 중국대표중 하나인 고유균(顧維鈞)은 분노하여 소리친다: "14만 중국노동자가 유럽전쟁터에서 피를 흘렸는데, 누가 감히 그들의 공헌과 역할을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열강이 중국에 불평등한 베르사이유조약을 체결하여, 산동을 나눠가지려 한다는 것을 알고, 유럽에 있던 중국노동자들은 분노했다. 중국노동자들은 신속히 노동자대표를 선정하여, 중국협상대표인 육정상에게 글을 올렸다. 그리고 북양정부가 평화회의에서 중국의 이익을 보호해주고, 열강에 고개숙이지 말 것을 요청했다. 중국노동자대표는 글을 올리면서 총을 한 자루 같이 보냈다. "일본의 요구에 응락하는데 서명할 것이면, 이 총으로 자결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당신을 죽여버리고 말 것이다."

그런 중국노동자군단의 열혈도 파리평화회의의 결과를 뒤바꾸지 못했다. 중국이 빈약하던 시기에, 중국대표단의 노력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약소국이었던 중국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국가존엄과 이익을 지킬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유럽의 중국노동자들은 각자 서로 다른 운명을 걷는다.

전승국을 위하여 큰 공헌을 한 중국노동자군단은 전후에 전승국국민대우도 받지 못했다. 그들의 운명은 오랫동안 아무도 보살펴주지 않았다. 오히려 지방치안을 해치는 것으로 취급당했다. 1919년 가을 그들은 차례로 귀국당한다. 중국으로 되돌아온 노동자들은 11만명가량이다. 나머지 3000여명의 중국노동자들은 프랑스에 눌러앉았다. 중국-프랑스관계사상 첫번째로 프랑스에 이민간 중국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