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량해전 참패 과정 기록 ‘조방장 김완’ 참전 등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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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수군의 훈련 모습을 그린 조련도. |
1597년 7월 16일은 운명적인 날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바로 이날 칠천량과 그 주변 일대에서 사실상 전멸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일본 주력 함대와 싸운 결전에서 기록한 첫 패배이자 유일한 패배였다.
주력 군함인 판옥선을 기준으로 100척이 훌쩍 넘는 대함대를 자랑하던 조선 수군은 칠천량해전 이후 겨우 10여 척만 남을 만큼 치명타를 입었다. 원균·이억기 등 수군의 고위 지휘관 다수가 전사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개전 초반에 잠깐 고전을 했을 뿐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소속 수군들이 경상도 해안으로 출동한 이후에는 거의 무적을 자랑했다. 그런 조선 수군이 왜 갑자기 참패한 것일까. 도대체 칠천량해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 의문을 푸는 데는 당시 해전에 참전했던 조방장 김완(金浣·1546~1607)이 남긴 글이 도움이 된다. 임진왜란 초기 사도첨사로 이순신 휘하의 전라좌수영에서 활약했던 김완은 칠천량전투에도 참전했다. 그는 용감히 싸웠지만 역부족으로 바다에 뛰어들었고 결국 포로로 잡혔다. 일본 본토로 끌려간 그는 끈질긴 노력 끝에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그의 경험담을 본인과 그 후손들이 정리한 책이 바로 해소실기(海蘇實紀·사진)다. 김완에 따르면 일본군의 집중공격이 시작된 시점은 7월 16일 오경, 즉 새벽 3~5시였다. 김완은 기습에 놀란 조선 수군이 ‘닻을 올렸다’고 표현하고 있어, 아군이 정박한 상태에서 적의 공격이 시작됐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적의 접근을 아군이 사전에 알지 못했던 것이다.
김완은 전투 초반의 상황에 대해 “전라좌수영의 군량미를 적에게 뺏기고, 주장(통제사 원균)의 착오로 여러 군함이 이미 궤멸돼 절반은 진해로 패주하고, 절반은 거제로 도망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조직적인 대항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붕괴한 것이다. 김완은 자신이 ‘한후선’에 타고 있었다고 증언하면서 “내 휘하의 남도포만호·회령포만호·조라포만호·해남대장이 이미 수사(전라우수사 이억기)를 따라 먼 바다로 나갔기 때문에 홀로 군관과 사부들을 격려해 싸웠다”고 증언한다. 한후선은 제승방략 체제에서 후방 경계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을 의미하는 한후장이 탑승하는 선박일 가능성이 높다. 후방경계 책임을 진 김완이 최일선에서 부하들도 없이 싸워야 했다는 뜻이다.
김완은 자신이 싸우는 순간 근처에 있던 원균이 “충청수사 최호와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원균조차도 전투가 어느 정도 진행된 이후에는 “술에 취해 누워 있었다(醉酒高臥)”는 것이 김완의 증언이다. 경상우수사 배설의 경우에도 “배멀미(수질)로 제 정신이 아니었다(不省人事)”고 한다.
전투 초반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일부 함대를 이끌고 전투에 유리한 먼 바다로 먼저 이동한 상태에서, 나머지 함대는 거의 전투조차 해 보지 못하고 분산·궤멸한 것이다. 결국 김완은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경계를 소홀히 해서 기습을 당한데다, 지휘체계가 마비된 상태에서 각개 격파당했다는 증언을 한 것이다.
승리한 전투만이 교훈을 주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패배한 전투에서 더욱 값진 교훈을 얻을 수도 있다. 칠천량해전은 경계를 소홀히 하는 군대는 참패를 면할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남겼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지휘관의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잘 보여주는 전투가 칠천량해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해소실기는 본인이 직접 남긴 기록에 후손들이 정리한 내용이 뒤섞여 있으므로 수록 내용에 대해서는 교차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본인의 전과를 자랑한 대목 외에 칠천량해전의 경과에 대한 기록은 나름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기록됐다는 점에서 사실과 일치할 가능성이 높다. 해소실기는 현장 중간 지휘관이 목격한 패전의 경험담으로 나름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해소실기에는 포위된 김완이 왼쪽 다리에 적탄을 맞은 후 배 위로 뛰어 올라오는 왜군과 맞서 싸운 일, 중과부적으로 배를 포기하고 바다에 뛰어든 김완이 인근 섬에 상륙하는 상황 등 전투 이후의 과정도 소상하게 기록돼 있다. 김완은 내서기도 혹은 어리도라고 불리는 섬에서 “(조선의) 전선(판옥선)들이 일제히 불길에 타오르고 연기와 불꽃이 가득하게 하늘을 덮고 있으니 참으로 보기가 참담했다”고 증언한다.
참고로 김완은 사극 불멸의 이순신에선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한 인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경상좌도 영천 태생의 인물이다. 사극에선 다소 희화화시켜 묘사했지만 실제로는 수영에도 능하고 전투에서도 용감했던 전형적인 조선시대 무인 중 한 명이다. 해소실기는 그런 김완의 인물 됨됨이를 살펴보는 데도 의미가 있는 사료라 할 수 있다.
국방일보에서 퍼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