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임진왜란 울산성 전투

구름위 2014. 9. 19.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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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12월 23일부터 이듬해 1월 4일까지

 13일 간의 울산성 전투

 

 

 

 

 

 

 임진왜란을 일으킨지 6년째 인 1597년,

일본군은 다시 북진을 시도하는데, 그것이 이른바 정유재란이다.

일본군은 육로와 해로를 통해 동시에 진격을 시작하지만 , 수군이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패전을 당하게 되어 충청도를 지나 경기도 남부까지 진격했던

일본육군은 서둘러 철수를 하였다.

이렇게 해서 전쟁은 지루한 대치전 양상을 보이는데, 이즈음 7년 전쟁의 흐름을 바꿀 울산성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진다. 
                            
                           

 (1) 울산성의 축성(築城)
 울산성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설계하고 부장등 1만6천명이 오오다(太田一吉)의 감독으로 축성에 착수 하였다.
일설에는 시월10일에 그 곳 지형을 보고 13일에 시공한 것인데 이에는 2만3천의 인원으로 비바람을 무릎쓰고 쌓은 것이라 하였다.
이 도산(울산성)은 들에 우뚝 솟은 神鶴城(筆峯이라고도 함)에 牙城을 만들고 본성은 그 남쪽을 점하였다.
 
그 높이 50m, 동서가 100m, 남북이 600m에 달하였으며 실측평수는 1,209坪 95였다.
또 본성의 북쪽 조금 낮은 곳은 제2본성을 쌓아 동서가 10m, 남북이 40m였고 400坪02의 면적을 가졌다.
제2본성의 서북쪽 돌출한 곳은 제3본성을 만들었는데 그 평수가 599坪38이었으며 동서의 길이 40m, 남북길이 100m였다.
또 제2본성의 동북 突角지점에서 동으로 연속한 細長한 長堤도 쌓았고 그 길이는 109問 25, 上蝠은 7問내지 8問이었다. 이 長堤는 속칭 나팔등이라 불렀는데 이는 선박의 掩蔽 및 城池의 방비를 위한 것 이었다고 한다.

적군은 이 성을 축성하면서 읍성과 병영성을 헐고 그 돌을 가져다 성벽을 쌓은 것이 길이 1,300여m요, 높이는 10~15m였으며 여기에 대소의 城櫓 12개를 만들고 남쪽을 제외한 3면은 上堤를 둘러쌓고 다시 그 위에는 木柵을 만들었으며 길이2,400m나 되었다.
그런데 토제에 설치하였던 木柵은 木柵을 三重으로 둘렀고 城櫓나 성벽에는 鉌砲 3백정을 시설하였다. 한편으로 남쪽의 한곳은 바다(태화강)에 면하여 배가 성밑까지 들어와 정박할 수 있었다.

 (2) 1차 울산성 전투
  
1.彼我의 兵力  
11월에 이르러 요동으로부터 명나라의 경략 형개(邢玠)가 건너와 추격에 나선 명군은 12월4일에 먼저 제독 마귀(麻貴)가 군사를 거느리고 남하하였다.
 이들 양호(楊鎬)와 마귀의 4만여 군사는 21일 문경새재를 넘어 을 거쳐 안동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울산성 공략에 동원된 동정군은 경리 양호이하 4만여명 조선군은 도원수 권율(權慄)  이하  경상 좌병사 고언백, 경상 우병사 정기룡, 별장 김응서, 항왜장 김충선 및 병사 15000명이었다. 당시 항왜는 150명이 조선측에 붙어서 참전하였다.

  2. 언양싸움

 경주까지 내려왔던 동정군은 군을 갈라서 高策 吳惟忠은 언양에서 부산의 적에 대비하고 李如梅  解生으로 左右協이 되어 울산을 바로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2월 22일 寅時가 끝날 무렵에 동정군의 대군이 아사노와 쉬시도의 진막에 갑자기 쳐들어가 전초병 5백이 전멸하다시피 되었다. 이때 아사노는 여러 부장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을 나와 마주 싸우다가 패하여 간신히 도망쳐 울산성으로 오다가 성문 근처에서 그의 부장 가매다가 뒤따로온 명장을 치고 성중에서는 가또오가 성문을 열고 나와 겨우 들어가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왜적의 사망자는 440人 이였으며, 이로써 동정군은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였다.

 
 3. 攻城
12월 23일
제독 마귀는 참장 楊等山 유격장 파새와 파귀 세사람에게 누가 선봉이 되기를 원하는가 하고 묻자 세사람이 서로 앞서려고 다투므로 파새로 하여금 선봉을 명하여 그는 정병 천명을 거느리고 앞장 섰으며 楊等山도 2천의 병을 이끌고 뒤따랐다.조선군의 도원수 권율도 좌병사 고언백과 우병사 정기룡을 대동, 이 싸움에 참가 하였다.
이날 미명에 유격장 파새는 울산읍에 진출하여 모오리의 부장 래이젠, 아소누마, 도노 등을 급습하여 죽이고 화전을 쏘아 적군의 가영막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동정군의 급습을 알게된 적은 아사노와 가또오 오오다 등이 군사를 대동하여 나오므로 파새는 거짓으로 퇴각하여 적을 유인하였다가 楊等山의 군사와 합세하여 공격하고 파귀, 李如梅등의 군사도 일시에 공격하니 적은 포위망에 빠져 많은 사상자를 내게되고, 견디지못한 나머지 퇴각하여 성안으로 들어갔으며 이 싸움에서 오오다, 오가노, 모리시마 등이 전사하였다.또 적의 군감 오오다도 부상 하였으며 전사만도 460여명에 달했다.
그런데 이날 적을 벤 수에 대하여는 宣祖實錄 31年 正月 條에서 本月二十三日 사五百餘이라 하였다.
또 21년 11월 乙卯條에서는 4백여두라 하였다.
그리고 아사노는 근신 기무라에게 준마 한필을 주어 서생포의 기요마사에게 보고케 하고 기요마사는 부장 가또오와 가다오가 등을 서생포왜성의 유수로 남겨두고 곧 부산성으로 원군을 청하는 한편 좌우 20여명을 거느려 배를 타고 울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가또오 기여마사의 울산성입성은 우리측과 일본측의 견해가 다르다.

일본쪽은 26일의 일로 보고있다.
12월 24일
연합군은 새벽 4시부터 좌협장인 부총병 이방춘은 반구정의 적진을 공격하고, 중협장인 부총병 高策은 중앙본도를 따라 병영을 지나고 직접 남하하여 성황당(내황마을)의 적진을 무찌르며, 우협 장인 팽우덕은 태화강의 적진을 포위하였다.
또 경리 양호는 성의 북쪽에서 독전하고 吳惟忠은 남쪽에 둔치며 李如梅와 파새는 서생에서 오는 적을 강변에서 차단하고 조승훈과 파귀는 부산쪽의 적에 대응하였다.
이날 경리 양호는 직접 몸에 무장하여 독전하였으며 포격의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수백개의 화전이 불을 토하는 총공격전이 벌어졌다.
유격장 모국기는 절강 정병 3천을 이끌고 서북외곽 진지의 2중성책을 돌파하고 외곽안에 먼저 기어올라 쳐들어 갔으며 유격장 진인은 적의 석시를 무릎쓰고 적진 1,2책을 돌파하고 제 3책을 거의 돌파할 무렵이었다.
부총병 李如梅와 경리 양호와는 서로 친근한 사이어서 양호가 진인의 공이 李如梅 보다 위에 올라감을 싫어하여 갑자기 꽹과리를 쳐서 공격군의 철수를 명하여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되어 버렸다.

울산성은 새로이 쌓은 성이라 워낙높고 험하여 우리군 측은 방패등 모든 무기를 동원하여 성밑으로 육박하였으나 비오듯 퍼붓는 적의 조총, 궁시, 화포, 큰 돌 등의 반격을 받아 물러나고 만 것이다.
한편으로 기요마사의 요청으로 서생포로부터 달려온 원군은 배 20~30척에 분승하고 이날 하오 2시경에 강을 따라 성밑까지 접근하였으나 절강군의 한 부대가 저지하여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염포에 투박하였다.
이날밤 접반사 이덕경은 경리 양호의 천막을 찾아가서 칭사의 뜻을 드리니 그는 말하기를 [이것은 사소한 승리에 지나지 않소 아군이 서생포와 부산의 적을 멸하는 것을 두고 보시오]하고 득의에 찬 그의 결의를 나타내었다.
이날의 싸움에 관하여 일본측은 辰時의 초(상오 7시)에서 申時의 끝(하오 5시) 까지 일곱 번 방비하고 일곱 번 치는 대격전 이었다고 하였다.

24일의 종합전과에 대하여 李炯錫의 壬辰戰亂史는 참수 661급 포로 4명이었고 이외에도 마필 등 수많은 군수품을 노획하였고 많은 양곡도 소각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선조실록은 사획 8백여급과 6백여類라 하여 큰 차를 보이고 있다.

12월 25일
동정군은 이날 아침부터 3면에서 성을 포위하고 화포와 화전을 쏘고 군사를 교대시켜 가면서 반복공격하기 7회에 걸쳤다.
그러나 적병은 성벽 4면에서 총구를 비오듯 퍼부으므로 명군은 성에 발을 부치지 못하였으며 명군 사상자 수백, 우리군도 다수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날의 전투에서 명나라 유격장 陳寅도 적탄을 맞아 부득이 물러났다.
우리나라 도원수 권율장군은 군사를 독전함에 있어 명나라 군사보다 뒤져가는 현감1인과 出身1인 軍丁1인의 목을 베어 군중에 돌려 보이게 하니 서로 용약하여 앞다투어 성벽을 기어올라 갔다.
그러나 이날 적은 총포와 창으로 최후의 발악을 하여 우리의 공격도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날 진중의 논의에 따라 적은 성내에 갇혀 급수사정이 어려우니 차단키로 하여 별장 김응서는 一隊의 군사를 데리고 성남쪽에 있는 급수로를 차단하였다.

또 이날 염포에 있던 기요마사의 증원 군사들은 다시 태화강으로 거슬러 성으로 접근하려 하자 강 언덕을 지키던 동정군에 의해 격퇴되고 말았다.
한편으로 일본쪽의 기록을 보면 마귀는 총포를 쏘아대며 애패(埃牌)와 포염(布簾)을 매고 懸橋같은 攻城具를 가지고 성에 기어오르려하나 성중에서는 큰 돌을 굴러내리고 큰 나무도 던져 내리며 총포를 마구쏘니 시체는 산더미 같았다고 하였다.

12월 26일
경리 양호가 우리나라의 접반사 이덕경의 요구에 따라 우리 전병력은 목책안으로 기어올라가 토장 사이부터 적성 밑으로 접근하게 되었으나 적의 탄환이 비오듯 퍼부어 옴으로 우리 사상자가 너무나 많아 준비하였던 화공을 단염하고 부득이 철수하고 말았다.
한편 경리 양호는 언양에 주둔하고 있던 吳惟忠의 병력을 불러 공성군의 진용을 보강하였다.

이날 부총병 오유충은 단독으로 경리 양호를 만나 건의 하기를 “圍師는 必缺이라 병가도 말하였거니와 이제 산성이 험하여 갑자기 깨트리기 힘들 듯하오매 마땅이 한 모퉁이를 열어 놓고 적을 탈출케 한뒤에 복병을 매복하였다가 적을 잡는 것이 좋을 듯 하나이다.”하니 양호는 눈을 부릅뜨고 말하기를 “노장군은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일개 기요마사를 살려주게 되는 사람으로 만들려는 것이요”하니 다시 말하지 않았으나 양호에게는 더 좋은 계책이 마련되어 있는 것으로만 알 뿐이었다.
이날의 저녁부터 검은 구름이 뒤덮고 더욱 냉기가 심하여지니 막사 안에서는 부상자의 신음소리와 호가소리가 슬피 들려와서 처량하기도 하였다.
이날의 일본쪽 기록을 보면 식량과 물이 떨어진지 벌써 5일이나 되어 상하 모두 기갈에 지쳐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한다.

12월 27일
온종일 비가 내렸다.
짙은 안개를 이용해서 적선 한척이 태화강 하류에 떠서 바다쪽으로 달아나매 절강군사들이 포를 쏘아 깨트렸다.
또 이날 수명의 적이 창대끝에 서신을 꽂아가지고 백기를 들며 성밖으로 나오자 경리 양호가 이 글을 받아본 즉 가또오의 부장이 晋州牧使이며 전병사 成允文에게 보내온 서신으로 그 내용은 기요마사가 아직 서생포에 있다는 것과 조선장관 한사람이 서생포로 가서 강화를 꾀하자는 속임수의 서신이었다.
경리 양호는 이 사자를 타일러 기요마사가 항복한다면 조정에 주청하여 관직을 내리도록하고 후한 상으로 대할것이라 하였다.
이때 적성중에는 물이 고갈되어 매일밤 성밖에서 물을 길어갔는데 우리 별장 김응서는 부하중에 적으로부터 항복하여 온자가 있어 그들을 우물옆에 매복시켜 놓고 적을 잡으니 이날 밤에 생포한 적이 100여명이나 되었다.

성중의 적들은 식량과 물이 떨어져서 지키는 군사들의 사기가 급속히 떨어져 성중이 수심이 가득차 있었다.
뒤에 선조가 대신들에 말하기를 卒伍중에서 공을 세운자가 있어 이를 발탁할만한 자를 묻자 류성룡은 降倭 能善을 천거하였는데 能善은 급수하러 오는 거을 불러내어 혹은 4~5인, 혹은 6~7인씩을 밤마다 사로잡았다.

12월 28일
이 날은 별다른 전투는 없었으나 하루종일 찬비가 내려 온천지가 얼어 붙어있어 군사들 가운데는 동상일 걸린자가 속출하여 군사들의 사기는 매우 떨어져 있었다.
이때 경리 양호는 접반사 이덕형을 불러 “성이 험난하여 함락시키기 어려운 가운데 적의 원병이 많다하니 장차 당면한 일을 어찌하면 좋을 것이오” 하고 물으니 이덕형이 대답하돼 “기요마사가 포위당하여 조그만한 고성에 같혀있다는 것은 이야말로 천명을 다한 것이라 하겠소이다. 이제 이 일거의 결전에서 그를 놓친다면 뒤에는 다시 그를 잡을 기회를 만들 수 없을 것이외다. 적의 원병이 비록 온다 할지라도 대인께서 1만명의 병력으로써 대한다면 모조리 쓸어 없앨 수 있을 것이오이다.”하였다.
이 말을 들은 양호는 병력의 손상도 많았을 뿐아니라 날씨도 차가워서 군사들이 싸울 생각들이 떨어졌으니 포위를 풀고 후일에 다시 결전할 기회를 보면 어떨까 할 정도로 당당하던 그의 기세도 한풀꺾여 있었다.

12월 29일
이날은 매우 차가웠는데 도원수 권율은 울산성에 대하여 화공을 감행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명나라 군사들도 화전 등 모든장비를 동원하여 총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비가 다시 쏟아져 총포의 탄환이 나가지 않아 하는 수 없이 공격을 중지하였다. 이날 역시 몹시 차가워서 병사들 가운데는 동상으로 손가락이 떨어져 나간자도 있었다.
오후에 태화강 하류에서 적선 26척이 거슬러 올라와서 적성이 서로 보이는 곳까지 왔다.
이때 적장 1인이 군사 5~6명을 거느리고 성밖으로 나와 선상의 적을 부르고 있음으로 명군은 많은 총포를 쏘았더니 하오5시에 적선은 물러갔다.

또 동정군 안에 있던 항복한 왜병 오가모도라는 자는 양호와 마귀의 명령을 받고 적성가까이 가서 항복하기를 권하는 한편, 양군의 장수들이 다시만나 회담하기를 요구하니 기요마사는 성안에 양식이 떨어지고 탄약도 부족한 터라 동정군 공격의 예봉을 피하려고 함고 동시에 구원군이 오기까지의 시간을 끌기위해 다가오는 정월 3일에 회담하기를 동의하였다.
이날 야반에 왜적 수십여명이 몰래 성을 나오므로 부총병 吳惟忠의 군병들이 매복하였다가 공격하여 목벤자 6級이었고 여적들은 부상하여 성안으로 달아났다.

12월 30일
가또오는 성안의 방어시설을 강화하고 샘을 파서 수원을 얻고자 하였으나 수량이 미치지 못하여 곤경에 빠졌고, 한편으로 김응서의 단수작적으로 드디어 말의 목을 찔러 그 피를 빨아 마셨으나 군마마져 없어지자 마침내 소변을 마시는 참변을 당하였다.
적성내의 극에 달한 궁한 양상을 일본측 자료를 통해보면 종의와 벽토를 끓여 먹으며 牛馬로 충식하였고 밤에는 몰래 성밖으로 빠져나와 못물을 마셨으나 못물은 군사들의 죽은 시체가 많아 물은 피로 오염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근근 갈증을 면할 수가 있었다.
또 죽은 군사들 시체를 뒤적거려 지니고 있던 양식을 빼내어 허기를 채우기도 하였다.

성안에서는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을 때 고바야가와, 모오리의 구원군이 오는가 하면 제장들이 서생포에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
또 지난밤에 적병 30여명이 급수를 위해 성밖으로 나온 것을 별장 김응서와 降倭를 매복시켜 5명을 사로잡고 5명을 베었다.

선조31년(1598) 正月 1日 부총병 이방춘과 해생(해생)의 두 장수는 군사를 데리고 강 서쪽 연안으로 가서 주위에 있던 인가를 불을 놓고 이 불타는 연막을 이용해서 배를 타고 일거에 성에 돌입하려 하였으나 적진에서 이 작전을 알아차리고 일시에 포격을 하는지라 접근하던 배가 파선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 날도 급보를 받은 왜군의 여러장수들은 구원병을 이끌고 속속 서생포성으로 모여 들고 있었다.

 1월 2일
이날은 서생포와 부산포에서 온 왜군의 배가 염포 앞바다에 수백척이 떠 있었다.
이를 알게된 경리 양호는 유격장 파새와 파귀에게 병력을 데리고 전탄(태화강 하류) 방면에 달려나가 막게하는 동시에 부총병 吳惟忠과 유격장 茅國器의 병력을 강안으로 나가 그들의 상륙지점을 차단케 하였다.
이때 공성구의 사기는 연일 계속되는 한파로 군사는 추위에 떨고 군마 또한 기한으로 죽어 군영은 쓸쓸하기 그지없고 성을 함락시키려던 희망은 사라지고 있었는데 이때 서생포의 모오리는 여러장수들과 회의하여 원군의 부서를 정하고 병력 1만3천명이 이날 서생포를 떠나 약40리 북상하여 下倉(청량면 상북리) 부근에 진을 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구원군이 오는 것을 눈치챈 성안의 적군 사기는 높아갔으나 보급상태는 아사 직적에 있었다.
이날 명군에 종군하고 있던 오까모도가 살짝 성밑에 와서 명군측에 詭計가 있음으로 내일 會盟에는 기요마사가 나오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밀고하고 돌아 갔다.

 1월 3일
이날 아침에 적장 가또오는 동정군의 경리 양호와 회담키로 약속되어 있었으나 나오지 아니하였고 군사를 보내보았으나 가부간의 답변조차 없었다. 이게 격분한 양호는 성 주위로 大炬를 만들어 세우고 이튼날 새벽까지 공성을 계속했으나 희생자만 많았고 성에는 단 한사람도 접근하지 못하였다.
이때 양산성에 있던 구로다는 6백의 군졸을 이끌고 울산근방에 진출하여 성중의 기요마사와 연락하기에 이르렀고 고니시등의 2천병력도 해로로 순천을 떠나 이날 울산근해에 그 깃발을 나타내었다.

또 우기다의 병력도 부산으로부터 울산의 10리밖까지 와서 진을 치고 이들이 동정군을 역포위 할 기세를 보이었다.
이러한 적군의 움직임을 척후병으로부터 보고 받은 경리 양호는 그 대책을 강구하기를 명일을 기하여 승패를 가름하는 마지막 총공격을 가하기로 하고 여러장수들에게 통달하였느나 날씨는 차기만 하고 천지는 얼어붙어 있었다.

 1월 4일
이날 새벽에 최후의 총공격을 감행하여 결전을 서둘렀다.
경리 양호와 제독 마귀는 모든 군사를 총동원하여 4面에서 성을 공격함에 있어 화공으로 적을 성 밖을 몰아내기 위해 炬火를 피워놓고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경리 양호는 퇴각하는 군사의 목을 한칼로 베게하는 한편, 싸움에 뜻이 적은 유격장 李化龍을 포박하여 진중에 돌려 보이게 하니 군사들은 서로 앞다투어 나가 싸웠다.
그러나 동천이 밝기시작하자 적은 일제히 반격에 나서 포화를 퍼부어 공성군에 사상자가 5백에 이러렀다.
그 뿐 아니라 성에는 아무도 오르지 못하였다.

이때 남강에 떠 있던 왜선 90여척이 일제히 태화강에 들어와 군사를 상륙시켰고 또 육지의 적군도 우리군의 배후에서 퇴로를 차단하려하여 정세는 급변하였다.
그리하여 양호는 접반사 이덕경을 불러서 “매일 우리가 공격해도 워낙 성이 험하여 뺏기 힘들 뿐 아니라 군사 또한 많이 없어졌소, 이 판에 왜군의 구원병이 많으니 그냥 철군했다가 뒤에 다시 공격을 꽤해야 겠소”라고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이날밤 경리 양호는 파새와 양등산은 후위를 맡게 하고 물러나서 밤사이에 경주에 이르렀다.
적의 구원병들은 동정군의 철퇴를 알고 다투어 상륙하여 30리까지 추격하여 동정군의 희생자가 많았다.
도원수 권율은 몸소 마지막 후미에서 추격하는 적중에 뛰어들어 수십명의 목을 베니 적은 더 따라오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가고 말았다.
또 경상우병사 정기룡은 철수하는 도중에 포위되어 말았는데 말을 급히 몰아 검을 휘두르며 돌격하여 좌충우돌 적의 목을 베니 도적들은 길을 열어주고 감히 추격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동정군측에서 절강의 군사와 祖承訓의 馬兵은 뒤늦게 철수하다 전멸했으며 유격 진우,양만금 진우중 등이 적탄에 쓰러지고 조명양군이 내버리 식량과 무기는 길 위에 이루다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4. 울산성 전투의 공략 실패와 원인
울산성 공략 실패의 원인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찾아진다.
먼저 왜군의 구원병이 각지에서 급속히 집결할 수 있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구원병이 곧 도착할 것이라는 사실은, 수성군에게는 커다란 희망을 주는 대신, 공성군에게는 초조감과 불안감을 안겨주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구원군은 신속히 도착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공성전이 12월과 1월의 혹한기에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기후의 한냉과 불순은 수성군보다 공성군에게 더욱 크게 불리하다.
수성하는 자는 냉기를 어느정도 피할 만한 진지나 참호 등이 있으나 공성자는 한냉하고 불순한 풍우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음은 공성 준비가 부족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전투경과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듯이 눈에 띄는 공성 장비를 발견할 수 없었다.
예로부터 공성군의 병력과 장비가 수성군의 것보다 3배가 많아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전술의 정설로 이해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수성군이 오히려 준비가 치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먼저 신성을 높고 견고하게 구축하였다. 아성과 제2, 제3의 본성을 쌓았으며, 그 외곽에 다시 토제와 목책을 둘러치고, 한편으로 성 남쪽면을 태화강과 연결시켜 수성군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