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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투 원정 - 칭기즈칸의 후예들

구름위 2013. 7. 13.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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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기로 성을 공격하는 몽골군 전투도(집사(集史)에 실린 삽화)

 

 

바투 원정 전쟁 개요

전쟁주체
몽골족, 루스, 폴란드-독일(슐레지엔), 헝가리
전쟁시기
1236년-1242년
전쟁터
현재의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우크라이나
주요전투
시트강 전투, 레그니차 전투, 사요강

바투 원정

18세기와 19세기. 서양인들은 기타 지역,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 곳곳에서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고 이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계몽시대 이후 발전하는 경제와 과학의 힘은 서양, 특히 유럽국가들에게 군사적 우위를 보장해 주었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전통사회들은 보다 먼 곳에서 배를 타고와 총과 대포를 쏘아대는 서양군대 앞에서 힘없이 무너졌다.

 

사실 원양항해가 현실화되기 전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한 유럽과 동아시아간의 접촉은 그리 빈번하지 않았다. 간헐적인 무역과 함께 사절단의 교환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교류는 없었고 군사적인 충돌은 더더욱 드물었다. 유럽인들은 다만 동아시아에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동을 통하여 동아시아에 대한 짧은 지식을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서양에서 르네상스의 기운이 태동하고 있었던 13세기와 14세기, 현재 몽골의 초원지대에 있는 모든 부족들을 키야트-보르지긴의 테무진(칭기즈칸)이 통일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기마를 통한 기동력을 지녔으나 정치적으로 통합되지 못하여 주변 정착제국들의 부용(附庸)세력으로서만 존재하였던 몽골족이었다. 그러나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 이들을 하나의 이념 하에 통일하고 ‘세상 끝까지의 정복’을 목표로 삼으면서 몽골기마의 기동력은 무시무시한 군사력으로 전환되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바로 만주북부에서 몽골, 중앙아시아, 카스피해와 흑해연안, 그리고 중부 유럽헝가리 평원까지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스텝지대, 이른바 ‘초원의 길’이었다.

 

 

초원의 길: 몽골인의 고속도로

로마제국이 제국의 구석까지 도로를 만든 이유는 무엇보다도 군사이동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제국 각지의 교류와 물자의 유통을 원활히 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기는 하였지만 로마 도로는 기본적으로 군도(軍道)로서 지어졌다. 동아시아, 특히 중국의 경우 육상도로가 있기는 하였지만 로마만큼의 길이와 규모는 아니었다. 중국지역을 가로지르는 많은 강과 하천이 도로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와 중국은 모두 정착문명이었고 육로이건 수로이건 체계적으로 관리할 국가체계가 있었다. 몽골을 포함한 북방에는 정착문명의 도로같은 시설은 드물었다. 인공적인 도로를 만드는 사람도, 관리하는 사람도 없었다.

 

 

 

서부 카자흐스탄의 초원지대 모습.

 

 

 

그러나 말을 탄 유목민들은 널리 펼쳐진 초원을 따라 자유롭게 이동하였다. 세간도 많지 않았고 집도 천막의 형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체하여 수레에 싣고 이동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유목민들의 이동은 계절에 따라 가축이 살기 좋은 곳으로 옮겨 다니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다른 부족과의 경쟁에서 패하는 경우, 또는 인근 정착국가로부터의 압박이 심해지는 경우 자신들이 살고 있던 곳을 떠나 아예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유목민의 이동은 일부 예외적인 경우를 제하고 대부분 초원의 길을 따라 이루어졌다. 평원과 낮은 구릉으로 이루어진 초원은 말 탄 유목민들의 이동을 용이하게 하였다. 지금의 헝가리를 건국한 마쟈르족은 원래 우랄산맥 남쪽 끝에 살고 있었으나 흑해 북부연안을 거쳐 중부 유럽을 장악하였다. 고대로부터 유라시아의 정착문명을 괴롭힌 스키타이(사카), 사르마타이, 아바르, 투르크(돌궐), , 흉노, 몽골 등 유목민족들은 모두 초원의 길을 따라 활동하였다. 정착문명의 농경민들에게 초원의 길은 농사지을 수 없는 쓸데없는 땅이 끝없이 이어진 불모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기마가 일상인 유목민들에 있어 초원의 길은 수천 km떨어진 곳을 이어주는 고속도로였으며 이를 따라 유라시아의 유목민과 정착문명간에 치열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초원의 길을 구성하는 몽골땅에서 태어난 칭기즈칸은 초원의 부족들을 통일하여 강력한 기마군을 만들고 금과 서하, 코레즘을 멸망시켰다. 그가 1227년에 텡그리신의 곁으로 돌아갔을 때 몽골과 바이칼호 인근의 대초원과 중앙아시아, 북중국이 몽골 울루스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이미 몽골 울루스는 거대한 제국이었지만 몽골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칭기즈칸은 ‘땅끝까지 정복하라’는 유언을 남겼고 몽골의 쿠릴타이는 이 유언에 따라 다음 목표를 설정하였다. 1221년에 수부타이와 제베가 정찰하였던 러시아가 불행하게도 몽골 기마병들의 다음 제물로 선택이 되었다. 그리고 러시아를 정복하면 그 다음에는 유럽을 짓밟을 예정이었다. 유럽인들이 유라시아 동쪽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조차 모르고 있을 때, ‘악마의 기마병’들은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천연의 고속도로인 ‘초원의 길’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서양인들의 무의식속에 황화(黃禍)로 자리잡게 되는 몽골의 서방침공이 시작된 것이다.

 

 

 

 

서방 원정군, 진군을 시작하다

칭기즈칸의 사망 이후 새로이 대칸으로 등극한 오고데이의 주재 하에 열린 쿠릴타이에서는 이후의 군사작전에 대한 사항이 논의되었다. 러시아와 유럽침공에 대한 결정은 1229년에 몽골 울루스의 ‘수도’인 카라코룸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이루어졌다. 남송, 고려, 그리고 페르시아에 대한 전쟁을 계속하는 동시에 새로이 러시아와 유럽을 치기로 한 것이다. 수부타이는 1221-2년의 정찰을 통하여 러시아와 유럽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수집하였고 다시 몽골로 귀환하면서 현지에 많은 첩자들을 남겨놓았다. 이들은 계속하여 수부타이를 위시한 몽골 수뇌부에게 자신들이 담당한 지역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였다. 몽골 울루스의 정복활동은 대개 첩자들과 현지인들에게서 얻은 많은 정보를 토대로 적의 강약(强弱)을 철저히 가늠한 후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오고데이칸은 러시아/유럽 원정군의 규모를 설정하였는데 15만에 달하였다. 코레즘을 정복할 때와 맞먹는 수치였다. 다른 군사들이 이미 고려와 페르시아등지에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다소 무리한 동원일 수도 있었다.

 

이러한 대군을 동원한 이유는 단 한 가지, 몽골은 단순히 유럽을 공격하여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복속과 점령을 원했기 때문이다. 몽골의 정보담당자들은 아울러 우랄산맥에서 서쪽의 대해(大海)까지의 지역을 완전히 복속시키는데 16년에서 18년이 걸릴 것이라 추정하였다. 단순한 공격이 아닌 점령을 위한 대규모 원정군이었고 일개 장군에게 맡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에 원정군의 총사령관에는 서쪽의 영지를 받았던 칭기즈칸의 맏이 조치의 아들인 바투가 임명되었다. 서방을 향한 몽골의 대군은 1235년에 원정길에 나섰다. 비록 바투가 총사령관이었기는 하였지만 그는 불과 28세였고 전쟁경험도 많지 않아 원정군의 실질적인 지휘는 바투의 할아버지 칭기즈칸의 심복이자 명장이었던 수부타이가 맡았다.

 

1221년의 칼카강 전투에서 러시아 남부의 18개 공국의 연합군이 몽골군에게 궤멸되었을 때 남부 러시아 공국의 귀족 대부분이 전사하였고 그나마 전투에서 살아남은 키에프의 므티슬라프는 몽골군에게 처형되었다. 오직 갈리치아의 므티슬라프(앞서 인물과 동명이인)만이 몸을 건져 서쪽으로 달아날 수 있었을 뿐 남부 러시아는 사실상 공백지대가 되었지만 다행히도 1221년의 몽골군은 정찰부대에 지나지 않았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로 돌아갔다. 몽골군이 러시아에 대한 정벌전을 시작하였을 때 주요 목표는 북부의 여러 공국들이었다. 북부 러시아의 공국들은 남부에 비하여 수가 많고 따라 인구와 군대도 상대적으로 많았지만 남부와 마찬가지로 분열되어있었고 그나마 서로 싸우는 바람에 정치적인 통합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몽골군은 러시아를 치기로 결정하기 이전부터 이러한 분열상을 훤히 알고 있었다. 첩자들을 통하여 러시아 지역의 소식이 몽골에 속속 전해졌기 때문이다. 몽골군은 북부 러시아의 공국들이 하나로 뭉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감을 가지고 서방원정을 추진할 수 있었다.

 

 

 

러시아의 도시들.

 

 

 

북부 러시아의 파멸

지금의 러시아에 진입한 몽골의 정벌군에게는 북부를 치기 전에 우선 할 일이 있었다. 러시아와 유럽을 치기 전에 혹시라도 방해가 될 만한 인근의 세력을 전부 소탕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목표는 지금의 볼가강(江)과 카마강이 만나는 지점(지금의 러시아공화국 카잔 근처)에 있는 불가르족의 왕국(발칸 반도에 세워진 불가르 제국과는 다른 나라)이었다. 소위 볼가-불가르 왕국은 몽골군 앞에 소멸되었고 그 수도가 함락될 때에 무려 5만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불가르 왕국을 깨뜨린 몽골군은 카마강과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모든 도시와 촌락을 불태우고 그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싸울만한 남자들은 강제로 몽골군에 편입되었다. 몽골족에게 이미 복속된 쿠만족과 새로이 복속된 불가르족은 기본적으로 기마민들이었다. 몽골군은 이들은 몽골 전술을 훈련시킨 후 몽골군에 편입시켜 병력을 보충하였다. 전쟁포로들에 의한 병력충원이 이루어지면서 몽골원정군의 군세(軍勢)는 20만까지 불어났다. 이후 볼가-불가리아가 있던 곳은 이후 금장한국이 되는 조치 울루스의 일부분이 되었다.

 

볼가-불가리아를 일소한 바투는 1237년 11월경에 블라디미르(현 러시아 공화국 블라디미르 오블라스트) 대공인 유리 2세에게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이 사절은 외교를 위하여 블라디미르로 간 것이 아니었다. 몽골의 사절이 요구하는 것은 단 한가지, 유리의 항복과 블라디미르의 복속이었다. 유리는 사절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약 한 달 후 주변의 큰 도시였던 리아잔이 몽골군에 의하여 포위되었다. 이 당시 러시아에는 중세 유럽이나 중국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인 의미의 성(城)이 거의 없었다. 다만 도시 주변에 수비시설로서 목책(木柵)을 길게 둘러치고 귀족들은 중앙부에 지은 큰 저택에서 거주하였다. 이 당시의 몽골군은 단순히 활만 쏘는 기병이 아니라 중국과 서하, 코레즘과 싸우면서 공성(攻城)의 경험도 축적하였고 몽골군대에는 중국과 코레즘의 공성기술자들이 종군하고 있었다. 이러한 몽골군을 목책으로 막을 수 있을 리가 만무하였다. 몽골군이 리아잔의 목책을 무너뜨리는 데는 5일 밖에 걸리지 않았고 도시 안으로 난입한 몽골군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고 집들을 불태웠다. 남자들은 거리에서 보이는 족족 살해되었고 몽골군은 정교회 사제들과 여인들이 피신하여있는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몽골군이 리아잔에서 물러갔을 때 리아잔에는 살아 움직이는 것이 거의 없었다. 다른 기록자가 “죽은 자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릴 자도 없었다”고 쓸 정도였다. 사실 리아잔이 공격당하는 동안 그 지도자들이 유리 대공에게 구원군을 청하는 사절을 보냈지만 유리는 움직이지 않고 리아잔의 파멸을 지켜보기만 하였다.

 

  

 

일종의 본보기로서 리아잔을 철저히 짓밟고 불태운 몽골군은 콜롬나로 향하였고 블라디미르의 본성(本城)으로부터 100km도 떨어지지 않은 콜롬나 역시 본보기 파괴와 학살의 현장으로 변하였다. 이 와중에 몽골군을 막기 위하여 군을 이끌고 오던 유리의 아들이 몽골군에게 패하고 죽었다. 그제서야 유리가 군을 이끌고 움직였고 영지 곳곳에 전령을 보내어 군을 이끌고 시타(Sita)강가에 집결할 것을 명령하였다. 블라디미르군이 느릿느릿 시타강가로 모이는 동안 빠르게 이동하는 몽골군은 모스크바강(江) 위에 있는 조그만 성인 모스크바를 포위하였다. 모스크바는 강가의 가파른 고지 위에 지어진 요새도시였고 유리는 모스크바 수비군이 몽골군을 맞아 잘 버텨주기만 한다면 전군을 모아 모스크바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모스크바 수비군은 몽골군이 오기도 전에 겁을 먹고 요새를 포기하고 달아났다. 모스크바를 구원하기 위하여 움직이던 구원부대 하나는 몽골군에게 요격당하여 전멸당했다. 중대한 위기임을 깨달은 유리는 시타 강가에 모이고 있는 군대의 지휘를 위하여 블라디미르 본성을 떠났다.


수즈달(Suzdal)에서 몽골군의 학살을 묘사한 중세의 기록화.

 

 

 

블라디미르는 시타강가에 대군을 모아 몽골군과 결전을 기하고자 하였으나 수부타이는 유리가 원하는 데로 움직여줄 마음이 없었다. 유리가 시타강가로 향하는 동안 수백 km를 우회하여 블라디미르 본성으로 쳐들어갔다. 또 다른 부대는 약 40km 북쪽에 떨어진 도시인 수즈달로 향했고 수즈달은 단 하루 만에 함락되었다. 마침내 1238년 2월초, 블라디미르 본성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고 블라디미르 본성은 이틀 만에 떨어졌다. 몽골군은 목책을 불태우고 도시에 난입하였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약탈과 파괴가 시작되었다. 이 와중에 블라디미르 교회가 불타고 그 주교는 몽골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유리가 시타강가에서 몽골군을 기다리는 동안 몽골군은 블라디미르를 떠나 시타강가로 조용히 움직였다. 시타 강가에서 나무와 흙으로 방벽을 쌓아놓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던 유리는 여러 날이 흘러도 몽골군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3000명을 정찰대로 삼아 주변을 돌아보게 하였다. 정찰대는 몽골군이 이미 근처까지 몰려와 블라디미르 본군의 방벽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유리는 방벽 뒤에서 수비하는 대신 전군을 이끌고 몽골군과 결전을 하려 하였다. 그러나 주변은 온통 눈으로 덮여있었고 소수의 기병 뒤에 농민출신 보병들이 뒤따르고 있는 블라디미르군은 눈 속에서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웠다. 많은 수의 병사들은 몽골군이 있는 곳으로 가기도 전에 멀리서 날아오는 몽골군의 화살에 맞아죽었고 그나마 몽골군과 맞닥뜨린 몇몇의 기사들 역시 난전 중에 모두 쓰러졌다. 유리는 달아나다가 뒤 쫓아온 몽골군과 싸우다가 패하고 목이 잘려 죽었다.

 

북부 러시아에서 가장 큰 세력이었던 블라디미르군을 전멸시킨 몽골군은 북쪽으로 진군하여 로스토프, 유리에프와 야로슬라블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역시 철저히 파괴하였다. 바투는 러시아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인 노브고로드를 공격하기 위하여 다른 방향으로 진격하였다. 수부타이군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드미트로프와 트베르등의 도시도 역시 몽골군의 말발굽에 짓밟혔다. 1238년 2월을 지나 3월이 되었을 때 북부 러시아에 온전한 도시는 거의 없었다. 노브고로드를 향하던 바투의 군단은 중간에 토르초크라는 조그마한 도시를 지나게 되었다. 몽골군은 토르초크를 쉽게 함락하리라 생각하였지만 토르초크의 몇안되는 수비병들과 도시민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죽기 살기로 방어하였다. 몽골군은 의외의 장애물을 만난 셈이었고 토르초크 공격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토르초크는 힘이 다하여 결국 함락되기는 하였지만 바투의 군단은 토르초크 공격에 2개월을 허비하였다. 토르초크가 마침내 함락되었을 때 이미 계절은 봄으로 접어들었고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아 진창으로 변하였다. 아울러 쌓였던 눈이 녹아 하천으로 흘러들었고 겨울에 몽골군의 이동로 역할을 했던 시냇물과 강의 얼음판은 격류(激流)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노브고로드 인근 역시 습지가 넓게 펼쳐져 있었고 봄이 되자 거대한 진흙벌판으로 변해버렸다. 녹은 땅과 범람하는 하천 사이에서 몽골군의 움직임은 심각하게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몽골군은 노브고로드의 습지에서 갇혀버릴 우려가 있었고 몽골군은 결국 노브고로드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측방에서의 위협을 두고 물러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북부 러시아의 다른 세력들이 사실상 멸망한 상태에서 노브고로드의 군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홀로 몽골군을 대적할 수도 없었고 자신들의 도시를 지키기에도 급급하였다. 수부타이 역시 노브고로드가 홀로 남음과 동시에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말머리를 돌려 철수한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각 지역이 몽골군에게 공격당할 때, 다른 도시에서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움직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몽골군이 겨울 두 달에 걸쳐 12개의 도시를 땅 위에서 지워 없애는 동안 북부 러시아 지역에서 몽골군에 맞서서 동맹군은커녕 그 비슷한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1223년에 비록 지휘권을 통일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힘을 합쳐 몽골군과 싸우러 나선 남부 러시아 18개 공국과는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결국 몽골군이 첩자들로 받은 정보는 정확했던 것이다. 북부 러시아의 도시들은 힘을 합치지 못하고 몽골의 침공을 맞고도 눈치만 보았고 결과는 공멸(共滅)이였다.

 

 

남부러시아 진멸(盡滅)

노브고로드에서 물러난 몽골군은 휴식을 위하여 돈(Don)강의 너른 초원지대로 이동하였다. 북부 러시아 지역을 휩쓸기는 하였지만 수많은 공성전과 전투가 있었고 몽골군의 피로와 피해가 누적된 것이다. 특히 토르초크에서는 의외로 힘든 싸움을 치르면서 사상자가 상당하였다. 그 해 봄과 여름에서는 돈 강가에서 휴식을 취하고 기력을 회복하면서 다음 전투를 기약하였다. 그러나 몽골군이 가만있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1238년 여름에 크림반도를 휩쓸었고 돈강 유역에서 말리 떨어지지 않은 모르도비아 사람들이 몽골군에 대한 반항의 기미를 보이자 이를 공격하여 철저히 제압하였다. 러시아의 가을 역시 봄과 마찬가지로 ‘진흙장군’이 기승을 부리기 때문에 몽골군은 땅이 얼어붙기 시작하는 늦가을까지 기다렸고 다시 진군을 시작한 몽골의 정벌군은 1221년에 공격하였다가 물러난 남부 러시아를 본격적으로 공격하였다. 1239년 겨울, 체르니고프와 페레예슬라프가 몽골군에게 떨어진 것을 시작으로 남부 러시아의 도시들은 다시 몽골군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북부 러시아의 공국들도 그리하였듯이, 그리고 1223년과는 대조적으로 남부 러시아 도시들은 힘을 합치지 못하였다. 물론 남부 러시아의 도시들이 다시 몽골군에게 참패하는 이유 중 1223년에 칼카강 전투에서 패한 타격에서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것도 있을 것이다. 남부 러시아의 도시들은 연합전선을 형성하지 못하고 각기 군을 동원하여 몽골군과 싸우러 나섰다. 그러나 소수의 귀족 중기병만이 훈련이 되어있고 병력의 대부분이 도시에서 징집된 민병이거나 시골에서 동원된 농민인 군대들이 어릴 때부터 기마전술을 배운 몽골군의 상대가 될 리가 만무하였다. 나름 싸워보려고 나온 병력들은 몽골군의 기사(騎射)와 돌격에 대패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몽골군은 다시 휴식하였다가 전쟁을 재개하였고 1240년 늦가을 11월에는 남부 러시아의 대도시인 키예프 앞에 도착하였다. 키예프는 예전 루스(Rus)시절부터 수도 역할을 하였고 많은 성당과 사원이 있는 종교의 도시이기도 하였다. 동시에 북부 러시아와 흑해연안, 나아가 비잔틴 제국과 중동지역을 잇는 무역도시이기도 하였다. 다른 러시아 도시들과는 달리 키예프는 단단한 석벽(石壁)에 의하여 보호되고 있었다. 이때 키예프는 이전에 칼카강에서 몽골군과 싸웠던 므티슬라프의 사위인 다닐로 할리츠키가 다스리고 있었고 그의 장군인 보이보데 드미트로가 수비를 맡고 있었다. 몽골군의 침공을 맞아 드미트로는 수비군과 성민(城民)을 지휘하여 한동안 잘 싸웠다. 키예프군의 수비가 만만치 않자 몽골군은 작전을 바꾸어 키예프 성벽의 구간 중 폴란드 대문(Polish Gate) 근처 목재로 만든 부분을 집중 공격하였다. 몽골군이 러시아의 도시들을 공격할 때 수훈갑은 중국에서 가져온 공성무기였다. 몽골군은 중국제 공성무기를 총동원하여 목재성벽을 타격하였고 12월 5일, 이 목책구간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에 몽골군은 중기병을 동원하여 무너진 구간으로 돌입하려고 하였으나 러시아 수비군의 총력방어로 인하여 1차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수비군은 너무나 지쳐있었고 다음 날 12월 6일에 몽골군의 공격이 재개되었다. 결국 몽골군은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성내로 진입하여 수비군을 난전 끝에 전멸시켰다. 키예프에서 역시 힘든 전투를 치른 몽골군은 키예프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도시 전체에 불을 질렀다. 과거 루스의 수도이자 유서 깊은 종교도시 키예프는 결국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로 변해버렸다. 6년 후에 어떤 사람이 키예프 인근을 지나면서 남긴 기록은 몽골군의 파괴행위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알려준다.

“그곳에는 겨우 움막들만이 서 있었고 땅은 여전히 죽은 자들의 두개골과 뼈다귀로 덮여 있었다.”

그나마 버티고 있던 키예프가 무너진 후 남부 러시아도 지리멸렬하였다. 다닐로 할리츠키의 영지에서 가장 중요한 두 도시라고 할 수 있는 할리치와 볼로도미르-볼린스키 역시 점령되었다. 크레메네츠, 체르벤, 페르제미츨등의 도시도 몽골군의 공격 앞에 무너졌다. 이 시점에서 각 러시아 도시들의 귀족들은 이미 동유럽 방향으로 도주한 뒤였고 남겨진 백성들이 몽골군의 침입을 온 몸으로 받아야 했다. 남부 러시아는 완전히 무너지고 러시아인들은 향후 200년간 몽골인들의 강권통치하에서 몽골의 칸들을 섬기면서 살아야했다.

 

 

러시아를 모두 점령하고 헝가리로 향하다

몽골군이 북부와 남부 러시아를 모두 점령하고 유럽의 문턱에까지 다다랐지만 유럽인들은 몽골군이 와있다는 사실 조차 잘 몰랐다. 간혹 풍문을 들은 사람들도 있기는 하였지만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있을 때 남부 러시아에서 쫓겨난 쿠만족이 헝가리로 진입하였다. 몽골군의 침공에 고향을 잃고 서쪽으로 도망친 이들은 유럽인들에게 무시무시한 군대가 근처에 와있다고 하면서 러시아의 참상을 전하였다. 몽골군을 피하여 달아나는 처지였던 쿠만족은 헝가리의 왕 벨라 4세에게 기독교로 개종할 터이니 자신들을 백성으로 받아달라고 하였고 벨라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벨라가 갑자기 헝가리로 들이닥친 이방인들을 받아주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헝가리는 스스로가 유럽인들에게 야만인으로 취급받던 마쟈르족이 세운 나라였다. 11세기 초반에 초대왕인 스테판 1세가 스스로를 기독교 국가로 자임하고 나라를 열었으며 교황에게 기독교 국가임을 ‘인증’까지 받았다. 백성들 대부분이 기독교(카톨릭)으로 완전히 개종하였다. 따라서 국민들 대부분이 상당히 독실하게 카톨릭을 믿었으며 많은 성당과 수도원이 지어졌음에도 기독교 세계의 변방취급을 당하였다. 왕가의 교회중시 정책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고 성당과 수도원들에게는 엄청난 땅이 주어졌다. 이에 비례하여 카톨릭 사제들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이 급증하였고 대장원을 경영하고 있는 헝가리의 귀족들은 이를 상당히 불편하게 여겼다. 벨라 4세 재위 시에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해져 사제들이 아예 왕의 심복이 되어 아예 궁정으로 들어와서 정치를 요리하였다. 왕의 궁정 내에서 왕과 가장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 역시 고위 사제인 콜로차의 주교 우고린과 그란의 주교 마티아스였다.

 

 


 

귀족들과 사제들의 갈등이 점증하는 가운데 20만의 야만인들이 제 발로 들어와서 백성이 되고 기독교도가 될 것이니 받아달라고만 하자 벨라는 뛸 듯이 기뻤다. 한 둘도 아니고 무려 20만을 개종시켰다고 로마에 보고하면 유럽 카톨릭 세계에서 자신의 지위는 급격히 치솟을 것이었다. 그러나 벨라는 쿠만족이 몽골군에게 대해서 하는 말은 별로 귀 기울이지 않았다. 원래가 호전적인 족속이었고 강력하기로 유럽 기독교 세계에서 손꼽히는 자신의 군대가 거뜬히 몽골군을 물리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수부타이는 3만명의 병력을 떼어 새로이 점령된 러시아에 주둔군으로 남아있게 하면서 몽골군의 보급로/교통로를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12만 대군을 이끌고 키에프를 떠났다. 몽골군의 주된 목표는 당시 카톨릭 세계의 동쪽에서 유럽을 지켜주고 있던 헝가리였다. 한달 후 몽골군은 비스툴라 강을 건너 카르파티아 산맥의 동쪽 기슭인 할리체(지금의 우크라이나 서부 할리치)에 도착했다. 수부타이는 군을 넷으로 나누었는데 가장 북쪽의 군은 오고데이의 손자인 카이두에게 맡겨 폴란드와 독일방면으로 향하게 하였다. 헝가리를 치는 동안 보헤미아, 독일, 폴란드 등지에서 원군이 와서 측면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나머지는 카르파티아 산맥을 세 방향에서 횡단하기로 하였다. 남은 군의 지휘는 각각 바이다르, 바투(수부타이), 그리고 쿠유크가 맡았다. 바이다르는 북쪽에서, 쿠유크의 군은 남쪽으로 몰다비아와 트란실바니아를 거쳐 진군하였고 바투와 수부타이의 군은 그 가운데의 길을 택하여 헝가리의 대도시인 그란과 페스트로 향하였다.


 

 

 

 

 

별동군에게 전멸당한 독일/폴란드군: 레그니차 전투

폴란드 방향으로 향한 카이두의 별군은 대도시인 크라코프를 향하여 질주하였고 크라코프의 왕인 볼레슬라프 5세는 가족과 왕실의 보물을 가지고 모라비아 방면으로 피신하였다. 왕이 없는 크라코프의 수비는 그 시장인 블라디미르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그나마 남아있던 귀족들과 영주들은 그들의 병력을 빼서 달아나기에 바빴고 결국 블라디미르는 마지막까지 남은 약간의 근위대를 데리고 츠미엘니크에서 몽골군을 기다렸다. 처음부터 수적으로나 전술적으로 상대가 안되는 싸움이었고 근위대는 전멸당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와 근위대를 모두 죽인 몽골군이 크라코프에 도착했을 때 이미 도시민들은 인근의 숲 속으로 피신한 후여서 도시 안에는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다. 카이두의 몽골군은 크라코프에 방화하고 계속 진군하였다.

 

오데르강을 건넌 카이두의 군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하나는 발틱해 방향으로, 하나는 브레스라우로 향했다. 발틱해 방면으로 간 몽골군은 닥치는 데로 약탈과 방화를 하면서 주변을 휩쓸었고 엄청난 수의 피난민이 서쪽으로 도망하면서 몽골인들의 공포스러움에 대한 소문을 퍼뜨렸다(이는 몽골군이 자행하는 파괴행위의 목적이기도 하다.) 브레스라우로 간 두 개의 토우만(만인대)는 브레스라우의 성벽이 너무 견고해 보여 이를 우회하기로 하였다. 카이두는 군을 이끌고 슐레지엔으로 진격하였다. 몽골군이 진격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슐레지엔 대공(大公) 하인리히는 인근의 영주들에게 동원령을 내림과 동시에 튜턴 기사단(Teutonic Knights)에도 도움을 청하였다. 아울러 처남인 보헤미아왕 웬츨라스에게도 연락을 하였고 연락을 받은 웬츨라스는 5만의 대군을 이끌고 북진하였다. 정찰병을 통하여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던 카이두는 두 군이 힘을 합치면 힘든 싸움이 될 것임을 알고 먼저 병력이 상대적으로 적은 하인리히가 있는 방향으로 진격하였다.

 

1241년 4월 9일, 하인리히가 레그니차에 도착하였을 때 보헤미아 병력은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상태였고 몽골군이 근처에 와있는 상황에서 하인리히는 결전을 기하여야 했다. 레그니차 성안에 있다가 몽골군이 도착하였을 때 빨리 포진하지 못할 것을 우려한 하인리히는 그의 기사군이 싸우기 수월한 벌판에 나가 군대열을 정비하였다. 이는 기사군의 장기인 기마돌격을 돕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치명적인 패착이 되었다. 결국 하인리히가 선택한 전장(이 전투의 다른 이름은 ‘발슈타트’. 전투의 이름은 ‘전장’이라는 뜻의 독일어에서 나왔다) 에서 두 군은 격돌하였다.

 

하인리히의 유럽군은 4개의 부대로 나누어져 있었다. 제 1대는 폴란드와 실레시아에서 선별된 정예기사들과 용병들로 구성되었다. 제 2대는 갑옷위에 십자가가 그려진 하얀 옷을 입은 튜턴 기사단이었다. 제 3대는 폴란드인으로 구성된 기병대였고 제 4대는 전직 광부들로 이루어진 보병대였다. 먼저 전투를 시작한 것은 1대를 구성하고 있는 폴란드 기사들이었다. 볼레슬라프가 이끄는 폴란드 기사들은 몽골의 중군을 향하여 돌격하였고 충돌한 후 난전을 펼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몽골군은 양 옆으로 갈라져 폴란드 기사들에게 화살의 비를 퍼부었다. 폴란드군은 뒤에서 후속부대가 올 때까지 기다려보았지만 후속부대는 오지 않았고 볼레슬라프는 후퇴를 명할 수밖에 없었다. 볼레슬라프가 후퇴하는 것을 본 하인리히는 제 1대의 본대에게 돌격을 명하였고 본대는 몽골의 중군에 충돌하였다. 잠시 동안 난전이 이어지는 듯 하더니 몽골 중군은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630년에 그려진 레그니차 전투묘사도. 몽골군이 하인리히의 머리를 창끝에 꿰어 진군하고 있다.

 

 

 

하인리히는 몽골군이 유럽군의 공격을 견디다 못해 달아나는 것으로 판단하였고 잠시 후 하인리히의 본대 전체가 몽골군의 추격에 나섰다. 이후 유럽군 전체의 진격이 이어졌다. 그러나 몽골군의 후퇴는 진정한 후퇴가 아니라 몽골군과 싸워본 러시아인들, 코레즘군, 그루지아군이 처절히 깨달았듯이 적의 주력인 기병을 꾀어내려는 몽골군의 전형적인 술책이었다. 적의 기병을 유인함으로서 보병과 기병을 분리시키고 적군 보기(步騎)의 합동작전을 무산시킴과 동시에 단단히 뭉친 적의 진형을 흩어놓기 위함이었다.

 

유럽군의 기병이 보병과 멀리 떨어졌을 때 새로운 몽골군 경기병대가 양 옆에서 나타나 기사들에게 무자비한 화살공격을 가하였다. 이 와중에 몽골군이 피워 올린 연기가 유럽군 기병대를 에워쌌다. 이로서 유럽군의 기사들과 뒤쳐진 보병대는 완전히 분리되었다. 이에 몽골 중기병들이 가까이 다가와 근거리 사격을 시작하였고 경기병대는 연기 속에서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뒤쳐진 보병들을 마구 쏘아 죽였다. 기사들은 단단한 갑옷을 입은 덕택에 화살에 맞아죽는 수는 많지 않았다. 이것을 본 몽골군은 기사들이 타고 있는 말들을 사격하였고 말에서 떨어진 기사들은 중기병의 좋은 먹이감이 되었다. 유럽군중 성당기사단(템플러) 출신들은 하나로 뭉쳐 싸우고자 하였고 결국 싸우다가 마지막 1인까지 남김없이 죽었다.

 

대형이 완전히 무너진 유럽군은 오합지졸에 불과하였고 이 시점부터는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었다. 요행히 목숨을 건져 도망친 소수를 제외하고는 슐레지엔/폴란드/튜턴기사단 연합군은 모조리 시체가 되었다. 하인리히는 전투 중 참수되고 옷이 벗겨 발가벗겨진 체 전장에 널브러졌다. 이후 전장에 남편의 시신을 찾으러 온 하인리히의 아내는 여섯 발가락이 달린 시신의 왼발을 보고서야 시신을 수습했다 한다. 몽골군은 전공(戰功)확인을 위하여 유럽군 병사들의 시신에서 귀를 잘라냈고 아홉 개의 바구니를 가득 채웠다. 레그니차 전투는 중기병 돌격과 기사들의 개인 전투능력에 의존하는 당시 유럽의 전투시스템이 몽골군 같이 효과적인 제병협동을 구사하는 군대 앞에서 얼마나 취약한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더군다나 레그니차의 전투는 몽골의 주력군도 아니고 조공(助攻)을 담당하였던 외곽 견제부대에 의한 승리였다. 발틱연안지방에서 몽골군을 피해 도망치던 피난민들은 몽골군이 무려 20만이라는 소문을 퍼뜨렸지만 카이두가 맡은 조공부대의 규모는 불과 2만에 불과하였다.

 

비록 레그니차에서 승리하기는 하였지만 카이두의 몽골군도 사상자가 적지 않았다. 그들의 임무는 독일이나 폴란드의 본격적인 침공도 아니고 주공에 위협이 될 만한 적 부대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2만의 병력으로 전장으로 달려오고 있는 5만의 보헤미아군과 정면충돌할 이유도 없었다. 이때 즈음하여 중부 유럽으로 향하는 주력군은 카르파티아 산맥을 완전히 넘어 사요강에서 헝가리군을 궤멸시키고 있었다. 총사령관 수부타이는 전령을 보내 카이두의 귀환을 종용하였다. 카이두는 발틱연안으로 가서 슐레지엔을 돕기위하여 오고 있던 리투아니아군을 격파한 후 발틱연안을 철저히 짓밟아 몽골군에게 위협이 될만한 세력이라면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모두 없애버렸다. 그리고 본군에 복귀하기 위하여 헝가리 방면으로 물러났다.

 

 

사요강 전투: 몽골 대 헝가리

카르파티아 산맥을 돌파한 몽골군은 세 방향에서 헝가리로 진입하고 있었다. 몽골군은 지나는 지역마다 약탈을 하였고 벨라는 남쪽에서 진입하고 있던 몽골군을 막으려고 일군(一軍)을 파견하였지만 몽골군은 이 부대를 간단히 눌러버렸다. 1241년 3월에 벨라는 이미 몽골군이 헝가리에 본격적으로 진입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귀족들의 총회를 소집하여 몽골군을 어찌 막을 수 있을지 논의하였다. 그러나 총회가 진행되는 도중에 이미 몽골군의 선봉부대는 도나우 강가의 페스트(Pest)인근에 도착하였다. 때는 봄이라 눈이 녹아 도나우강은 범람할 듯이 넘쳐흐르고 있었고 페스트는 강고한 성벽에 보호되고 있어 벨라는 자신이 군을 모아 싸움에 나아갈 때까지 페스트가 충분히 버텨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4월초까지 벨라의 휘하에는 10만명이 모였고 벨라는 대군을 몰고 몽골군과 싸우러 나섰다. 그러나 몽골군은 헝가리군의 진격에 맞서지 않고 서서히 물러났다. 헝가리군은 해가 지면 멈추었다가 다음 날 몽골군을 향하여 움직였고 그럴 때마다 몽골군은 싸우지 않고 물러났다. 거의 9일이 지나 몽골군과 헝가리군은 사요강가에 이르렀고 몽골군은 강을 건넜다.

 

수부타이는 군의 대부분을 데리고 강을 건넜지만 일대(一隊)를 남겨 사요강에 있는 유일한 다리를 지키게 하였는데 이는 헝가리군을 막기보다는 헝가리군의 성급한 공격과 도강(渡江)을 유도하여 몽골군이 있는 강의 동안(東岸)에서 기습하려는 유인책이었다. 그러나 벨라는 유인책에 속지 않고 서안(西岸)에 이르러 군을 멈추었다. 그리고 수비진영을 구축하기 전에 일군을 보내어 몽골 유인부대를 쫓아버리고 다리 동쪽에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 몽골군은 투석기에 중국제 화약폭탄을 장전하여 교두보 부대를 공격하였다. 비록 폭발력은 약했지만 화약이 터지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 헝가리군은 폭음에 매우 놀라 우왕좌왕하였고 바투는 지체없이 교두보의 헝가리군을 공격하였다. 교두보를 지키고 있던 헝가리군은 화약의 폭발과 몽골군의 공격에 다리를 건너 무질서하게 도주하였다.

 

교두보가 무너지면서 몽골군은 본격적으로 다리를 건너 헝가리군을 공격하였다. 헝가리군은 이들이 단지 선봉부대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의외로 많은 수의 적을 맞게 되면서 본대의 본격적인 공격을 맞고 있음을 깨달았다. 몽골군의 전면적인 공격에 잠시 당황한 헝가리군은 우고린과 마티아스의 지휘하에 뒤에 펼친 수레방진을 기반으로 강력한 반격을 펼쳤다. 강을 뒤에 두고 있어 기동력이 제한된 몽골군은 근거리에서의 난타전에 돌입하게 되었고 싸움은 몽골본대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았다. 바투의 근위대까지 전투에 뛰어들었고 30명이 전사할 만큼 치열한 싸움으로 변하였다. 헝가리군이 나름대로 선전을 하면서 이길 수도 있다고 생각한 순간 수부타이가 이끄는 세 개의 토우만(3만)이 헝가리군의 측면을 찔렀다. 예기치 못한 기습에 헝가리군은 패하였지만 다행히 그들이 구축한 수레요새로 질서정연하게 후퇴할 수 있었다. 수부타이는 이미 전날 저녁에 3만명을 이끌고 강을 건널 수 있는 곳을 찾아 남쪽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그곳에서 서쪽으로 뻗은 반도(半島)지형을 발견했고 이를 다리삼아 주변의 얕은 강물을 건넜다. 그리하여 바투의 본대가 헝가리군과 한창 싸우고 있을 때 난데없이 나타나 그 측방을 기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헝가리군의 수레요새는 상당히 단단하였고 이를 정면으로 공략할 수 없음을 안 몽골군은 다리 반대편에서 공성기를 가져와 갖가지 인화물질과 흑색화약 폭탄으로 헝가리군의 수레요새를 공격하였다. 화약 폭발하는 굉음이 사방에 가득하고 요새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하면서 헝가리군은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수부타이는 수레요새로 들어간 헝가리군을 추격하면서 요새를 포위하였는데 완전히 포위하는 대신 포위망에 약간의 틈을 남겨두었다.

 

폭음과 불에 견디지 못한 일부 헝가리 병사들이 몽골군이 의도적으로 남겨둔 간격을 통하여 도주하였고 몽골군의 공격이 거세지면서 도주하는 병사의 수는 늘어갔다. 몽골군은 도주하는 병사들을 막지 않고 오히려 그대로 두었다. 결국 요새안에 있던 헝가리 병사와 기사들은 사기가 완전히 떨어졌고 이들은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간격이 없어지기 전에 앞다투어 탈출하려고 난리법석이었다.

 

이것이 바로 수부타이가 노린 것이었다. 포위망을 너무 단단하게 하면 생명의 위험을 느끼는 적들이 목숨을 걸고 발악적으로 싸우면서 몽골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수부타이는 헝가리군을 구석에 몰린 쥐보다는 놀라서 달아나는 토끼로 만들려고 하였던 것이다. 수부타이는 병사들에게 말을 갈아타고 도주하기에 정신이 없는 헝가리군에게 일제 공격을 가하였다. 몽골군은 무기도 제대로 들지 않고 달아나는 헝가리 병사들과 기사들을 ‘사냥’하였다. 대부분은 길 위에서 몽골군의 칼에 희생되거나 화살에 맞아 죽었고 혹시라도 마을로 숨어든 자들은 몽골군의 철저한 색출작업으로 끌려나와 죽었다. 가장 보수적인 견해로도 사요강 전투에서 1만명의 헝가리군이 죽었고 심지어 7만명이 넘는 헝가리군이 죽었다고 보는 일부 견해도 있다. 사실 사요강 전투는 몽골군의 일방적인 승리는 아니었다. 교두보에서의 전투에 이은 바투의 정면승부는 몽골군의 강점인 기동력을 스스로 제한시킨 우매한 결정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강을 뒤로 두고 앞에는 헝가리군이 있는 상태에서 몽골군의 포위섬멸전술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였다. 강을 건넌 3만의 병력이 헝가리군의 측면을 들이치기 전에는 대등한 전투였다. 그러나 헝가리군에는 백전노장인 수부타이에 맞설만한 지휘관이 없었고 전장에서의 병력운용측면에서 뒤져 결국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한 것이다.

 

 

1493년의 부다 묘사도 (뉴렌베르크 연대기).

 

 

 

사요강에서 패한 후 벨라는 오스트리아로 갔다가 인질로 잡혀 영토할양을 약속하고 겨우 풀려났고 풀려난 뒤 지금의 크로아티아 연안으로 달아나는 등 온갖 수모를 당하였다. 헝가리군을 격파한 몽골군은 헝가리를 철저히 약탈하여 경제적으로 무력화 시킨 후 꼭두각시를 임명하여 몽골의 속령으로 다스리려 하였다. 그러나 원래가 호전적인 족속이던 헝가리인들은 자신들의 왕이 패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산 위의 요새나 숲 속에 들어가 게릴라 전술로 몽골군을 괴롭혔다. 이에 아랑곳없이 몽골군의 영지화 작업이 계속되었고 몽골군은 이탈리아 북부와 오스트리아 빈 근방으로 정찰부대를 보냈다. 어떤 지역이 과연 먼저 공격을 받을 것이냐의 문제였을 뿐 ‘악마의 기마병’들은 다시 유럽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유럽은 야전에서 몽골을 꺾을 수 있는 군대가 없었다.

 

그러나 몽골군의 유럽본토 진격에 최대의 장애물인 헝가리가 제거되고 몽골군이 다시 공격을 하려는 찰나, 몽골 본국에서 전령이 와서 대칸인 오고데이의 죽음을 알렸다. 몽골의 관습에는 대칸이 사망할 경우 왕자들과 왕족들은 모두 몽골로 돌아와 다음 칸의 선출을 위한 쿠릴타이에 참여하여야 했다. 수부타이는 바투에게 왕족으로서의 의무를 상기시켰고 몽골군은 헝가리에서 철수하여 동쪽으로 사라졌다. 결국 유럽본토에 대한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몽골군은 과연 유럽을 정복할 수 있었나?

 

 

벨라가 몽골군에게 패하여 도주한 후 최종 도착지였던 클리스 요새. 현재 크로아티아 아드리아 해안에 있다.


상당수의 역사가들이 오고데이칸의 죽음과 이로 인한 몽골군의 철수가 유럽을 ‘살렸다’고 평가한다. 물론 오류라고 할 수 있지만 몽골군이 쉽게 유럽을 점령하고 통치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아니 가질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몽골군이 가장 먼저 들이칠 것으로 예상되는 독일 지역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군사화’된 지역이었다. 서유럽 최정예 병력이라고 할 수 있는 튜턴기사단과 템플러들이 상주하고 있었고 도시가 목책으로 둘러싸인 러시아와는 달리 거의 모든 요지가 석성(石城)에 의하여 보호받고 있었다. 아울러 독일 지역의 민병들은 지역에 대한 애착이 상당히 강한 편이었고 일정수준의 훈련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고향이 공격받을 경우 매우 치열하게 싸웠다. 아울러 독일지역은 해안을 제외하고는 하천과 삼림이 많았다.


독일의 약점은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기사들과 훈련된 민병들을 하나로 뭉키게 만들 수 있는 권력중심부가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에서와 마찬가지로 각개격파 당했을 것이고 어찌하여 몇몇 영주가 병력을 모아 회전(會戰)을 벌일 경우에도 전술운용이 뛰어난 몽골군이 이겼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싸움에서 이기는 것과 어떤 지역을 점령하고 통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몽골군이 독일지역에 대한 점령을 시도할 경우 끝없는 공성전과 게릴라전에 지쳤을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싸움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오래 통치를 하지 못하고 물러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즉 오고데이칸의 죽음이 바투군의 유럽공격을 중단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유럽문명’을 살렸느냐의 여부는 조금 더 세심히 살펴보아야 하는 문제이다. 아울러 원정군을 이끌고 있던 바투는 서방보다는 몽골제국 내에서의 권력투쟁에 더욱 관심이 많았다.

 

 

 

바투 원정의 영향력은 서유럽보다는 몽골이 점령하고 향후 200년 이상을 다스린 러시아 지역에 강하게 미쳤다. 키에프 루스가 무너진 후 사실상의 도시국가/열국 상태였던 러시아에서 기존의 통치체제는 무너지고 몽골에 의한 강압통치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 이미 유럽에 비하여 발전수준이 낙후되었던 러시아 지역은 몽골의 압제로 인하여 그 발전이 더욱 더뎌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각지의 영주들과 도시의 장(長)들은 금장한국의 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후신(候臣)이 되어야 했다. 몽골의 통치는 물리적 강압과 군사적 위력에 기반한 통치였고 후대 역사에 나타나는 러시아 군주들의 강압적 통치의 근원을 몽골에서 보는 논자들도 있다.

 

비록 오고데이의 죽음으로 인하여 몽골군이 사라지기는 하였지만 바투의 원정은 초원과 정착문명의 사이에서 보이는 약탈기습이 아니었다. 동쪽에서 일어난 원정군이 유럽을 침공하여 점령하려고 한 본격적인 시도였다. 몽골군의 공격은 아틸라의 훈족과 함께 유럽인들의 무의식 속에 깊이 각인되었으며 후일 나타나는 황화론의 모티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