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는 몽골군이 유럽군의 공격을 견디다 못해 달아나는 것으로 판단하였고 잠시 후 하인리히의 본대 전체가 몽골군의 추격에 나섰다. 이후 유럽군 전체의 진격이 이어졌다. 그러나 몽골군의 후퇴는 진정한 후퇴가 아니라 몽골군과 싸워본 러시아인들, 코레즘군, 그루지아군이 처절히 깨달았듯이 적의 주력인 기병을 꾀어내려는 몽골군의 전형적인 술책이었다. 적의 기병을 유인함으로서 보병과 기병을 분리시키고 적군 보기(步騎)의 합동작전을 무산시킴과 동시에 단단히 뭉친 적의 진형을 흩어놓기 위함이었다.
유럽군의 기병이 보병과 멀리 떨어졌을 때 새로운 몽골군 경기병대가 양 옆에서 나타나 기사들에게 무자비한 화살공격을 가하였다. 이 와중에 몽골군이 피워 올린 연기가 유럽군 기병대를 에워쌌다. 이로서 유럽군의 기사들과 뒤쳐진 보병대는 완전히 분리되었다. 이에 몽골 중기병들이 가까이 다가와 근거리 사격을 시작하였고 경기병대는 연기 속에서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뒤쳐진 보병들을 마구 쏘아 죽였다. 기사들은 단단한 갑옷을 입은 덕택에 화살에 맞아죽는 수는 많지 않았다. 이것을 본 몽골군은 기사들이 타고 있는 말들을 사격하였고 말에서 떨어진 기사들은 중기병의 좋은 먹이감이 되었다. 유럽군중 성당기사단(템플러) 출신들은 하나로 뭉쳐 싸우고자 하였고 결국 싸우다가 마지막 1인까지 남김없이 죽었다.
대형이 완전히 무너진 유럽군은 오합지졸에 불과하였고 이 시점부터는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었다. 요행히 목숨을 건져 도망친 소수를 제외하고는 슐레지엔/폴란드/튜턴기사단 연합군은 모조리 시체가 되었다. 하인리히는 전투 중 참수되고 옷이 벗겨 발가벗겨진 체 전장에 널브러졌다. 이후 전장에 남편의 시신을 찾으러 온 하인리히의 아내는 여섯 발가락이 달린 시신의 왼발을 보고서야 시신을 수습했다 한다. 몽골군은 전공(戰功)확인을 위하여 유럽군 병사들의 시신에서 귀를 잘라냈고 아홉 개의 바구니를 가득 채웠다. 레그니차 전투는 중기병 돌격과 기사들의 개인 전투능력에 의존하는 당시 유럽의 전투시스템이 몽골군 같이 효과적인 제병협동을 구사하는 군대 앞에서 얼마나 취약한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더군다나 레그니차의 전투는 몽골의 주력군도 아니고 조공(助攻)을 담당하였던 외곽 견제부대에 의한 승리였다. 발틱연안지방에서 몽골군을 피해 도망치던 피난민들은 몽골군이 무려 20만이라는 소문을 퍼뜨렸지만 카이두가 맡은 조공부대의 규모는 불과 2만에 불과하였다.
비록 레그니차에서 승리하기는 하였지만 카이두의 몽골군도 사상자가 적지 않았다. 그들의 임무는 독일이나 폴란드의 본격적인 침공도 아니고 주공에 위협이 될 만한 적 부대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2만의 병력으로 전장으로 달려오고 있는 5만의 보헤미아군과 정면충돌할 이유도 없었다. 이때 즈음하여 중부 유럽으로 향하는 주력군은 카르파티아 산맥을 완전히 넘어 사요강에서 헝가리군을 궤멸시키고 있었다. 총사령관 수부타이는 전령을 보내 카이두의 귀환을 종용하였다. 카이두는 발틱연안으로 가서 슐레지엔을 돕기위하여 오고 있던 리투아니아군을 격파한 후 발틱연안을 철저히 짓밟아 몽골군에게 위협이 될만한 세력이라면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모두 없애버렸다. 그리고 본군에 복귀하기 위하여 헝가리 방면으로 물러났다.
사요강 전투: 몽골 대 헝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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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파티아 산맥을 돌파한 몽골군은 세 방향에서 헝가리로 진입하고 있었다. 몽골군은 지나는 지역마다 약탈을 하였고 벨라는 남쪽에서 진입하고 있던 몽골군을 막으려고 일군(一軍)을 파견하였지만 몽골군은 이 부대를 간단히 눌러버렸다. 1241년 3월에 벨라는 이미 몽골군이 헝가리에 본격적으로 진입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귀족들의 총회를 소집하여 몽골군을 어찌 막을 수 있을지 논의하였다. 그러나 총회가 진행되는 도중에 이미 몽골군의 선봉부대는 도나우 강가의 페스트(Pest)인근에 도착하였다. 때는 봄이라 눈이 녹아 도나우강은 범람할 듯이 넘쳐흐르고 있었고 페스트는 강고한 성벽에 보호되고 있어 벨라는 자신이 군을 모아 싸움에 나아갈 때까지 페스트가 충분히 버텨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4월초까지 벨라의 휘하에는 10만명이 모였고 벨라는 대군을 몰고 몽골군과 싸우러 나섰다. 그러나 몽골군은 헝가리군의 진격에 맞서지 않고 서서히 물러났다. 헝가리군은 해가 지면 멈추었다가 다음 날 몽골군을 향하여 움직였고 그럴 때마다 몽골군은 싸우지 않고 물러났다. 거의 9일이 지나 몽골군과 헝가리군은 사요강가에 이르렀고 몽골군은 강을 건넜다.
수부타이는 군의 대부분을 데리고 강을 건넜지만 일대(一隊)를 남겨 사요강에 있는 유일한 다리를 지키게 하였는데 이는 헝가리군을 막기보다는 헝가리군의 성급한 공격과 도강(渡江)을 유도하여 몽골군이 있는 강의 동안(東岸)에서 기습하려는 유인책이었다. 그러나 벨라는 유인책에 속지 않고 서안(西岸)에 이르러 군을 멈추었다. 그리고 수비진영을 구축하기 전에 일군을 보내어 몽골 유인부대를 쫓아버리고 다리 동쪽에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 몽골군은 투석기에 중국제 화약폭탄을 장전하여 교두보 부대를 공격하였다. 비록 폭발력은 약했지만 화약이 터지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 헝가리군은 폭음에 매우 놀라 우왕좌왕하였고 바투는 지체없이 교두보의 헝가리군을 공격하였다. 교두보를 지키고 있던 헝가리군은 화약의 폭발과 몽골군의 공격에 다리를 건너 무질서하게 도주하였다.
교두보가 무너지면서 몽골군은 본격적으로 다리를 건너 헝가리군을 공격하였다. 헝가리군은 이들이 단지 선봉부대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의외로 많은 수의 적을 맞게 되면서 본대의 본격적인 공격을 맞고 있음을 깨달았다. 몽골군의 전면적인 공격에 잠시 당황한 헝가리군은 우고린과 마티아스의 지휘하에 뒤에 펼친 수레방진을 기반으로 강력한 반격을 펼쳤다. 강을 뒤에 두고 있어 기동력이 제한된 몽골군은 근거리에서의 난타전에 돌입하게 되었고 싸움은 몽골본대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았다. 바투의 근위대까지 전투에 뛰어들었고 30명이 전사할 만큼 치열한 싸움으로 변하였다. 헝가리군이 나름대로 선전을 하면서 이길 수도 있다고 생각한 순간 수부타이가 이끄는 세 개의 토우만(3만)이 헝가리군의 측면을 찔렀다. 예기치 못한 기습에 헝가리군은 패하였지만 다행히 그들이 구축한 수레요새로 질서정연하게 후퇴할 수 있었다. 수부타이는 이미 전날 저녁에 3만명을 이끌고 강을 건널 수 있는 곳을 찾아 남쪽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그곳에서 서쪽으로 뻗은 반도(半島)지형을 발견했고 이를 다리삼아 주변의 얕은 강물을 건넜다. 그리하여 바투의 본대가 헝가리군과 한창 싸우고 있을 때 난데없이 나타나 그 측방을 기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헝가리군의 수레요새는 상당히 단단하였고 이를 정면으로 공략할 수 없음을 안 몽골군은 다리 반대편에서 공성기를 가져와 갖가지 인화물질과 흑색화약 폭탄으로 헝가리군의 수레요새를 공격하였다. 화약 폭발하는 굉음이 사방에 가득하고 요새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하면서 헝가리군은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수부타이는 수레요새로 들어간 헝가리군을 추격하면서 요새를 포위하였는데 완전히 포위하는 대신 포위망에 약간의 틈을 남겨두었다.
폭음과 불에 견디지 못한 일부 헝가리 병사들이 몽골군이 의도적으로 남겨둔 간격을 통하여 도주하였고 몽골군의 공격이 거세지면서 도주하는 병사의 수는 늘어갔다. 몽골군은 도주하는 병사들을 막지 않고 오히려 그대로 두었다. 결국 요새안에 있던 헝가리 병사와 기사들은 사기가 완전히 떨어졌고 이들은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간격이 없어지기 전에 앞다투어 탈출하려고 난리법석이었다.
이것이 바로 수부타이가 노린 것이었다. 포위망을 너무 단단하게 하면 생명의 위험을 느끼는 적들이 목숨을 걸고 발악적으로 싸우면서 몽골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수부타이는 헝가리군을 구석에 몰린 쥐보다는 놀라서 달아나는 토끼로 만들려고 하였던 것이다. 수부타이는 병사들에게 말을 갈아타고 도주하기에 정신이 없는 헝가리군에게 일제 공격을 가하였다. 몽골군은 무기도 제대로 들지 않고 달아나는 헝가리 병사들과 기사들을 ‘사냥’하였다. 대부분은 길 위에서 몽골군의 칼에 희생되거나 화살에 맞아 죽었고 혹시라도 마을로 숨어든 자들은 몽골군의 철저한 색출작업으로 끌려나와 죽었다. 가장 보수적인 견해로도 사요강 전투에서 1만명의 헝가리군이 죽었고 심지어 7만명이 넘는 헝가리군이 죽었다고 보는 일부 견해도 있다. 사실 사요강 전투는 몽골군의 일방적인 승리는 아니었다. 교두보에서의 전투에 이은 바투의 정면승부는 몽골군의 강점인 기동력을 스스로 제한시킨 우매한 결정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강을 뒤로 두고 앞에는 헝가리군이 있는 상태에서 몽골군의 포위섬멸전술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였다. 강을 건넌 3만의 병력이 헝가리군의 측면을 들이치기 전에는 대등한 전투였다. 그러나 헝가리군에는 백전노장인 수부타이에 맞설만한 지휘관이 없었고 전장에서의 병력운용측면에서 뒤져 결국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