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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 시체에서 이빨 뽑기

구름위 2013. 7. 11.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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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평생 이빨이 두 번 납니다. 어린 아이일 때 나는 젖니(유치)와 성장한 후에 나는 영구치죠. 영구치는 12~3세부터 나기 시작해서 젖니를 하나씩 대체하게 되고, 이런 대체작업은 18~20세 쯤에 사랑니가 나면서 마무리가 됩니다. 요즘은 사랑니가 아예 안 나는 사람도 많지만요


하지만 인간의 치아는 죽을때까지 건강할 수는 없습니다. 충치가 생기든가 사고로 부딪히든가, 아니면 뭔가에 맞거나 해서 종종 빠지게 되죠. 만의 하나 정말 관리를 잘 했다고 해도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이 빠지는 이가 나오게 됩니다. 오늘날에는 이가 빠지면 얼른 주워들고 치과에 가서 그자리에 다시 박든가, 인공으로 의치를 해넣습니다. 의치의 재료도 가격에 따라 제각각이죠.

과거에는 어땠을까요? 오늘날과 같은 인공 재료가 없었을 때는?


오랜 옛날에도 의치는 있었습니다. 가장 오래된 유물로는 BC 3000∼BC 2500년 무렵의 고대 이집트인 미라의 어금니 부분에서 치아와 치아가 서로 금줄로 연결되어 있는 사례가 발견되었습니다만, 이것이 보철(補綴)을 위한 것인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보철을 목적으로 제작된 확실한 것으로는 BC 750년 무렵에 만들어진 에트루리아인의 금제(金製)브리지가 가장 오래된 것인데, 빠진 부위에 진짜 이빨을 넣고 인접한 치아에 황금 테두리를 감아붙인 형태입니다. 형태상으로 보아 지금의 브리지의 원조라고 볼 수 있겠지요.


 
 
 


이것들이 위에서 이야기한 에트루리아의 "의치"들입니다. 금띠로 고정시킨 이 의치들은 실제 사람의 치아만이 아니라 동물의 이빨을 가공한 것도 포함되어 있지요. 에트루리아인들은 진짜 사람의 이빨 이외에 코끼리의 상아나 황소의 이빨도 사람의 이빨 모양으로 깎아 의치로 사용했습니다.


 
 
 


이 사진들은 페니키아의 영토인 시돈에서 발굴된 브리지(?)입니다. 에트루리아와 비슷하게, 페니키아인들도 이런 형태의 브리지를 사용해서 의치를 끼운 것으로 추측되는데, 에트루리아인들과 달리 페니키아인들은 금줄을 사용했습니다. 이에 구멍을 뚫고 금줄을 고정시킨 것이 확인되시지요? 이는 앞에서 이야기한 이집트의 그것과 비슷합니다. 페니키아는 이집트와 근접한 문화권이므로, 이집트의 보철 기술이 전해졌다는 방증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에트루리아 사람들은 이걸 깎아서 의치를 만들었지요



하지만, 당연하게도 의치의 재료는 시대마다 약간씩 변천합니다. 중세에는 아예 충치를 제대로 빼고 의치를 해 넣는 기술이 잊혀져 버려서 사람들이 일찌감치 겉늙어갔지요.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던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의 경우, 노령으로 앞니가 빠지자 의치 대신 천을 접어서 만든 패드를 입술 밑에 끼우고 다녔다고 하는데, 16세기에는 하마와 해마의 엄니가 의치의 재료로 사용되기 시작합니다만 여왕이 사용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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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이빨하고



 

 


 

얘 이빨도 깎아서 의치로 씁니다.



17세기 말에는 상아를 대충 깎아서 명주실로 붙들어 매는 의치가 나왔고, 영국 궁정의 귀족들은 금이나 은, 마노로 만든 의치를 끼기도 했습니다. 단, 이 화려한 이빨들은 식사할 때는 빼놓아야 했기 때문에 정작 이빨로서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수행하지 못했습니다만^^;; 일부 귀족 여성들의 경우에는, 이를 제자리에 고정시키기 위해 의치에 낚싯바늘 같은 형태의 꼬챙이를 달아 잇몸을 뚫어 고정시키기도 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엄니는 좋은 의치 재료가 아니었습니다. 기공이 많아서 잘 변색되는데다가 고약한 입냄새가 났거든요. 1850년에 작성된 어떤 개인적인 기록을 보면 "틀니를 하루에 여섯 번씩 닦고 밤에 뽑아서 씻더라도" 그 악취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적고 있을 정도지요.

18세기 말부터는 인공 재료로 만든 의치가 사용됩니다. 자기(瓷器)로 만든 의치가 프랑스 혁명 직전 파리에서 처음 제작이 됐거든요. 그러다가 20세기로 들어서기 직전에는 셀룰로이드로 만든 의치가 시중에 나옵니다. 하지만 이 의치는 가연성이 높다는 점이 문제여서(셀룰로이드에요, 셀룰로이드!!) 담배를 피우다가 의치에 불이 붙은 사람이 있었다고 하네요. 20세기로 접어들고도 이런 재료들이 꽤 쓰였지만, 요즘은 더 이상 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인공의치의 개발이 이루어지고 그 재료가 계속 발전하고 있다고 해도 진짜 사람의 이를 끼우는 것도 19세기 중후반까지는 계속 유행합니다. 인공으로 진짜와 똑같은 이를 만든다는게 사실 그렇게 간단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진짜 이"라는 게 주는 감이 다르거든요. 문학작품에서도 그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장발장에 나오는 "가엾은 여자" 팡틴느도 테나르디에 부부에게 딸 코제트의 약값을 보내기 위해 "진주처럼 반짝이는" 앞니 두 개를 뽑고, 그 값으로 20프랑 짜리 나폴레옹 금화 두 닢을 받지요.

자...그럼 전쟁 이야기와 이빨 이야기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그건 바로, 의치로 사용되는 이빨이 산 사람에게서 사들인 것만 사용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의 이빨도 사용했는데 이게 전쟁터의 전사자들에게서 이빨을 뽑아 의치로 사용하는 사례가 흔했거든요(...) 대표적인 예로 워털루 전투와 미국 남북전쟁의 예가 있지요.

 


 이런 전쟁터와

이런 전쟁터에서 이빨을 뽑아다 의치로 쓴 겁니다.




이중에서도 "워털루 이"는 유럽에서 나이든 멋장이들이 꼭 끼우고 다니는 필수품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의사들이라고 해서 시체에서 뽑은 이빨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실제로 도자기 이빨을 개량한 미국 의사 한 사람의 경우, 죽은 사람의 이를 취급한다는 게 기분나쁘고 싫어서 도자기로 의치를 만들었거든요.

 

하지만 치과학에 끼친 전쟁의 영향은 크다고 할 수는 없어서, 겨우 이 정도였습니다. 사실 치과학은 질병학이나 신체성형, 수혈, 화상치료 등의 분야와는 달라서 전쟁과 직접적인 관계은 별로 없는 의학의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런 학문들은 전쟁터에서의 시급한 수요 때문에 급발전을 했지만, 사실 이는 평화시에도 때 되면 다 빠지는 물건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