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구름위 2013. 6. 26.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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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38년 윤 5월 13일, 창경궁에서는 전대미문의 참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영조는 창경궁에 행차하여 세자를 불러 자결할 것을 명했다. 세자는 "부왕이 죽으라고 명한다면 죽겠다"고 하면서옷소매를 한 폭 찢어 목을 묶어 조였으나 엎어져버렸고 신하들이 달려와서 세자의 목에 묶은 끈을 풀어주었다. 이러기를 두 번.

세자의 아들인 세손(후일의 정조)이 달려와서 할아버지인 영조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영조는 세손을 데리고 나가도록 명했다. 이때 뒤주가 들어왔다. 영조는 세자에게 뒤주 속에 들어갈 것을 명했다. 세자가 뒤주에 들어가자 영조는 손수 뚜껑을 닫고 자물쇠를 잠근 뒤 큰 못을 박고 동아줄로 묶어 봉하도록 했다. 세자는 뒤주에 갇힌지 9일째 되던 날 죽었다.

이 사건은 왕세자의 아사사건, 또는 임오화변(壬午禍變)으로 불린다. 임오화변이 일어나게 된 과정에는 숱한 이야기가 전한다. 개중에는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서 비롯된 이야기들이 많다. 우리는 영조와 사도세자가 성격적 차이로 인해 불화를 빚고 있었는데다가 당쟁이 부자의 사이를 더욱 악화시켜 조선왕조 최대의 비극인 임오화변이 일어난 것으로 이해해왔다.

그러나 성격적 차이와 당쟁이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굶어죽이는 참화를 낳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성격적차이가 없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을까? 당쟁이 원인이라고 하지만 정치에서 파벌 투쟁이 없는 때가 있기나 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버지와 아들의 성격 차이나 당쟁만으로 사도세자의 비극을 설명하기에는 미흡하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도 권력의 충돌이라는 배경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로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비정하고 의심 많은 권력이라는 속성에서 이 사건을 조명해야 한다.

시도세자는 영조의 나이 42세에 얻은 귀하고 귀한 아들이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효종으로보터 현종. 숙종. 경종. 영조로 이어지는 오직 한 사람의 유일한 혈손이었다. 이 점에서 그의 세자로서의 지위는 확고부동했다.

영조는 성군으로 꼽히는 군주이다. 그는 정치력이 뛰어났고 왕으로서 매우 성실했다. 영조가 이룩한 업적은 조선후기에 조선문화의 르네상스를 가능케 할 만큼 탁월했다. 그런데 영조는 한 인간으로서는 매우 비정상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집착적이고 편집광적이었다.

영조의 편집광적인 성격은 그의 성장과정과 왕위 즉위 과정에 원인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조의 생모 최씨는 미천한 무수리 출신이었기 때문에 영조는 평생 자신의 출생에 대한 열덩감을 안고 살았다. 신분사회였던 조선왕조에서 국왕이라 해도 신분적 하자는 문제가 있었다. 또 영조는 왕위에 오르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고, 왕위에 올라서는 이복형인 경종을 살해했다는 혐의까지 쓰게 되었다.

영조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미워하는 극심한 애증의 편중현상을 드러냈다. 사도세자는 귀한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조가 그 모든 것을 미워 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영조의 이러한 성격적 결함이 사도세자와의 갈등을 일으킨 하나의 요인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결정적인 원인은 달리 찾아야 한다. 세자를 폐위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굳이 죽여야 했다면 그 것은 세자가 부왕의 권력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왕권을 위협했던 것이다.

사도세자 아사사건의 발단은 나경언의 고변에서 비롯되었다. 나경언은 역적모의를 고발하는 과정에서 영조에게 '세자의 비행 10여 조'를 올렸다. 이때 나경언이 올린 10여 조의 내용은 전부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내용은 세자의 비행에 관한 것들 뿐이다. 영조는 나경언이 열거한 세자의 실행과 실덕을 이유로 아들을 죽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세자를 폐위시킬 만한 사안은 되지만 뒤주에 가두어 죽일 정도의 사안은 아니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문제는 수수께끼로 남겨진 세자의 평안도 여행이다. 사도세자는 1761년(영조37년) 봄에 석 달 가량 평안도를 여행했다. 아버지의 질책을 무릅쓰고 세자는 평안도를 석달이나 여행했던 것이다. 당시 사도세자는 대리청정 중이어서 대궐을 비워서는 안되는 입장이었다.

평안도에는 조선의 변방을 지키는 정예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평안도는 세금으로 거둬들이는 곡식을 중앙정부로 수송하지 않고 현지에서 사용했다. 이런 조건을 갖춘 평안도는 쿠데타 시도에 가장 좋은 거점이 될 수 있었다. 사도세자는 평안도 여행을 통해 쿠데타를 모의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른 정황도 세자의 쿠데타 시도의 가능성을 설명한다. 사도세자와 영조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일로에 있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에게 심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한편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은 영조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줄곧 영조의 불만을 사고 있었다.

게다가 사도세자는 영조의 집권 과정의 타당성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소론은 사도세자를, 노론은 영조를 지지하여 왕과 세자의 정치적 기반도 달라지고 있었다. 사도세자를 후원하는 소론은 사도세자가 집권했을 경우 권력의핵심부에 등장할 수 있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쿠데타의 지지기반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기록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물론 세자의 쿠데타 기록이 왕실기록에 담겨져 내려올 리가 없다. 효가 최상의 덕목인 조선왕조에서 세자의 반란을 기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추론밖에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을 수는 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이기로 결심하기 바로 전에,

"여러 신하들은 역시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왕후(세자의 법적 모친)의 신령이 정녕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했다." 고 했다. '변란'이라는 영조의 말에는 사도세자 죽음의 결정적인 단서가 담겨 있다. 이 말을 하고는 영조는 곧바로 사도세자를 죽이기 위해 창경궁으로 갔다. 반란의 주인공은 바로 사도세자였던 것이다. 불태워져 전부 전해지지는 않지만 나경언의 고변 10여 조 속에는 변란의 주도자로 사도세자가 지목되어 있었을 것이다. 사도세자의 어떤 실책 보다도 사도세자의 쿠데타 시도와 그 가능성이야말로 영조가 아들을 죽여야 했던 원인이었다.

이 비극은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에게 평생 한이 되었다. 11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할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갇혀 굶어죽는 엄청난 비극을 몸소 겪은 정조는 자신을 표현하여 '하늘을 꿰뚫고 땅에 사무치는 원한을 안고서 죽지 못해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아버지의 입장을 옹호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할아버지의 입장을 옹호할 수 도 없는 위치에서 자신에게 부과된 비극을 견뎌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