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에 집착한 고종, 일본의 침략 야욕에 말려들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는 대원군이 내린 벼슬을 사양하면서 ‘만동묘(萬東廟:명나라 신종·의종의 사당) 복설(復設)’을 요구했다. 그 제자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이 고종 10년(1873) 11월 재차 올린 상소에서 첫 번째로 지적한 대원군의 실정도 만동묘 혁파였다.
“황묘(皇廟:만동묘)를 없애버리니 임금과 신하 사이의 윤리가 썩게 되었고, 서원(書院)을 혁파하니 스승과 생도들 간의 의리가 끊어졌고…나라의 역적이 죄명을 벗으니 충신 도리의 구분이 혼란되었고, 호전(胡錢:청나라 동전)을 사용하니 중화(中華:명나라)와 오랑캐(청나라)의 구별이 어지러워졌습니다.(
최익현의 인식은 250년 전 서인들이 인조반정이란 이름의 쿠데타를 일으키며 주창한 숭명반청(崇明反淸)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최익현이 비난한 ‘나라의 역적’은 대원군이 고종 1년(1864) 7월 복권시킨 북인 한효순(韓孝純), 남인 이현일(李玄逸)·목내선(睦來善) 등이었다. 이때 대원군이 복권시킨 102명 중에는 정조 살해를 위해 자객을 보냈던 홍계희와 심환지, 김관주 같은 노론 벽파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고종 10년(1873) 11월 최익현의 상소로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황현이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안으로는 명성왕후(明成王后)가 주관하고 밖으로는 민승호(閔升鎬:왕후의 오빠)가 명을 받들어 시행했다(
철종 사망 직후 장김(壯金:안동 김씨) 내에서 ‘고종을 세우면 두 임금이 있는 격’이라는 반대론이 일려 하자 흥선군은 김병학(金炳學)의 딸을 왕비로 간택하기로 약속해 잠재웠다. 그럼에도 흥선군은 장김 세력의 약화를 위해 약속을 어기고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삼았으니 그가 대원군의 최대 정적 민비였다. 왕비 민씨는
고종은 친정 후 자신을 국왕으로 만들어준 부친을 철천지수(徹天之讐:하늘에 사무치도록 한이 맺힌 원수)처럼 대우했다. 부호군(副護軍) 서석보(徐奭輔) 등이 ‘최익현이 골육을 이간시켰다’면서 “요순의 도리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는 것뿐[堯舜之道孝悌而已]”이라고 상소하자 직접 국문하면서 매달아 거의 죽게 만들었다가 임자도에 천극(<682B>棘:집에 가시나무를 치는 유배)시켰다. 심지어 전 현감(縣監) 유도석(柳道奭)과 조병만(曺秉萬) 등에 대해서는 ‘윗사람을 범한 부도[犯上不道]’라며 참형(斬刑)에 처하려고 하다가, ‘양주(楊州) 직동(直東)에 내려간 대원군이 대궐을 향해 격렬하게 항의하면서 자결하려고 하자 부득이 석방시켰다(
부친에 대한 증오는 대원군의 모든 노선과 정책을 뒤집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원군이 남인을 자처하자 고종은 노론을 자처하면서 “대과에 급제한 사람이 노론이면 ‘친구(親舊)’라고 부르고 소론이면 ‘저쪽[彼邊]’, 남인과 북인일 때는 ‘그놈[厥漢]’이라고 불렀고(
대외정책도 마찬가지였다. 대원군 실각 소식에 가장 발 빠르게 대응한 국가는 일본이었다. 1854년(철종 5) 문호를 개방했던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는 1868년(고종 5) 붕괴되고 명치정부(明治政府)가 수립되었다. 명치정부에서도 조선과의 외교를 맡게 된 대마도주 소 요시아키라(宗義達)는 고종 5년 12월 히구치 데쓰시로(<6A0B>口鐵四郞)를 차사(差使)로 삼아 조선에 파견했다. 조선의 왜학훈도(倭學訓導) 안동준(安東晙)은 일본이 보낸 서계(書契:외교문서) 중에 ‘황조(皇朝)’ ‘봉칙(奉勅)’ 등의 용어가 있고, 조선 조정에서 대마도주에게 내려준 도서(圖書:동으로 만든 도장)를 찍지 않았다는 이유로 접수를 거부했다. 이때 일본에서 정한론(征韓論)이 일기도 했으나 아직 외국과 전쟁할 처지는 아니었다. 고종은 친정 후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과 왜학훈도 안동준을 대원군파로 지목해 유배 보내고 안동준은 끝내 목을 베어 죽였다. 대원군 실각 후 일본은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를 다시 파견했는데 이때도 여전히 ‘대일본(大日本)’ ‘황상(皇上)’ 같은 문구를 사용했다. 고종은 “올라온 서계를 끝까지 받아 보지 않는다면 자못 성신(誠信)의 도리가 아닌 듯하다(
그러자 모리야마는 외무성에 “쇄국파가 아직 그 기세를 되찾지 못하고 있을 때 힘을 사용한다면 가벼운 힘의 과시로도 목적을 이루기 용이하다(
고종 13년(1876) 1월 특명전권대사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가 3척의 군함과 함께 부산을 거쳐 강화도에 상륙해 회담을 요구하자 조야가 크게 경동했다. 최익현이 다시 상소를 올려 “저들이 왜인이라고 하나 실은 양적(洋賊)이니 화호(和好)하는 일이 한번 이뤄지면 사학(邪學)이 전수되어 전국에 두루 찰 것입니다(
고종의 친정을 가져온 이른바 ‘최충신(崔忠臣:대원군 반대편에서 최익현을 지칭한 별명)’은 거꾸로 역적으로 몰려 유배길에 올랐는데
고종 13년(1876) 2월 3일 신헌과 구로다가 조·일 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체결했다. 12개 조관(條款) 중 1관(款)이 “조선국은 자주국으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것이었다. 일본과 동등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조선에 대한 청국의 종주권을 부인하기 위한 속셈이었다. 9관은 “백성들이 각자 임의로 무역할 때 양국 관리들은 간섭·제한·금지할 수 없다”는 것으로 조선의 관세권을 부인한 불평등조약이었다. 당시 조선인이 일본에 가서 무역할 상황은 아니었다. 10관도 개항장 일본인들의 치외법권을 인정한 조항이었다. 개국이란 정책방향은 올발랐지만 그 형식이 불평등조약이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프랑스·미국과 싸워 승전한 전과를 무기로 활용하면 평등조약을 맺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신헌은 고종에게 ‘저들(일본)이 말하기를 지금 천하 각국이 군사를 쓰는 때를 당하여 귀국의 산천이 매우 험하기 때문에 싸우고 지키기에 넉넉하나 군비가 매우 허술하다면서 부국강병의 방법을 누누이 말했습니다’고 보고하자 고종은 “그 말은 (일본의) 교린(交隣)하는 성심에서 나온 듯하다. 우리나라는 군사의 수효가 매우 모자란다(
조선의 군사력에 대한 일본의 관심을 ‘침략의 야욕’이 아니라 ‘교린하는 성심’으로 여기는 고종이 문호를 활짝 열었던 것이다.
* <1> 조·일 통상장정 기념연회도. 조·일 통상장정은 일본인의 무역에 대한 무관세가 논란이 된 끝에 1883년 체결된 조약이다. 강화도조약에서 인정되지 않았던 조선의 관세권이 언급됐다. <2> 신헌 초상. 고려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외국과의 조약 체결 경험이 없었던 신헌은 불평등조약을 맺었음에도 고종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사진가 권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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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무당 옛터. 1876년 조·일 수호조규(강화도조약)가 체결된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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