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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군주 - 고종② 민생파탄

구름위 2013. 6. 19.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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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중건은 왕조 붕괴 앞당긴 허영뿐인 대역사

 

 

대원군의 극적인 등장은 대왕대비 조씨와 대원군 사이의 정치적 밀약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 해 전인 철종 13년(1862) 2월 4일 경상도 단성(丹城)에서 농민들이 관아를 공격해 현감이 도주했고, 열흘 뒤에는 경상도 진주에서 농민들이 관아와 양반 사대부가를 공격했다.

농민항쟁의 불길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일대로 삽시간에 퍼져나가 삼남농민항쟁(임술농민항쟁)으로 확대되었다. 제주도와 함경도까지 확산된 전국적 규모의 농민봉기는 개국 이래 초유의 일이었다. 소수 노론벌열이 독점한 세도정치는 이런 난국을 극복할 능력이 부족했다. 극복은커녕 세도정치의 통치행태가 민란의 원인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했고 이것이 안동 김씨조차 대원군의 집권을 저지하지 못했던 한 요인이었다.

농민들을 봉기하게 한 직접적 이유는 삼정(三政) 문란이었다. 삼정은 농지에 대한 세금인 전정(田政), 병무행정인 군정(軍政), 빈민 구제행정인 환정(還政)을 뜻하는데 각종 탈법과 부정부패가 난무했다.

 

전세(田稅)는 신분을 막론하고 농토가 있는 모든 백성에게 부과되어야 하지만 양반 사대부들은 수령·서리(胥吏:아전 등)들과 결탁해 자신들의 농지를 부과 대상에서 누락시키는 은결(隱結:탈세전)로 만들었다. 반면 상민(常民)들은 농지는 없지만 전세가 부과되었는데 이것이 ‘없는 땅에 징수한다’는 백지징세(白地徵稅)였다. 대원군은 전국적인 농지조사사업[査結]을 벌여 막대한 은결에 세금을 부과했다. 비록 문제의 본질인 지주-전호(佃戶:소작)제의 문제점에까지 손을 대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도 노론 일당독재 체제에서는 보기 힘든 개혁이었다.

환곡(還穀)은 곡식이 부족한 춘궁기(春窮期)에 가난한 백성들에게 관곡(官穀)을 빌려주었다가 가을 수확기에 1할의 이자를 덧붙여 받던 빈민 구제책이었다. 삼국사기 고구려 고국천왕 16년(194)조에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수천 년 지속된 빈민구제책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들어 환곡은 백성들의 등골을 빼는 강제 고리대로 전락했다. 심지어 중앙정부도 환곡을 빈민구제책이 아니라 부족한 재정을 메우는 수단으로 활용했으니 지방정부는 말할 것이 없었다. 수령과 아전들은 백성들에게 강제로 환곡을 배정하는 억배(抑配)나 강제로 빌려주는 늑대(勒貸)를 실시했는데, 겨나 쭉정이 심지어 모래까지 섞어 주었다. 강제로 떠맡겨진 환곡이 한 집당 8~9섬(石)에서 50~60섬까지에 이르렀다. 환곡을 거두어들일 때는 낙정(落庭:벨 때 땅에 떨어진 곡식)·간색(看色:곡식 검사비 및 보관비)·인정(人情:뇌물 형식의 선물) 등이 1섬(石)당 7~8말(斗)까지 이르면서 이자만 7~8할에 이르는 악성 고리대가 되었다.

장부상으로만 남아 있는 허류(虛留) 환곡이 막대했는데 대부분은 수령과 아전들이 빼돌리거나 세도정권에 상납한 포흠(逋欠:착복)이었다. 대원군은 120만 석에 달하는 포흠 환곡을 탕감하는 한편 1000석 이상 포흠한 경우는 효수형에 처했다. 그리고 고종 4년(1867)에는 환곡제를 사창제로 바꾸었다. 환곡제가 관 주도라면 사창제는 민(民) 주도라는 점이 달랐다. 백성들은 면 단위로 사수(社首), 마을[洞] 단위로 동장(洞長)을 선출해 환곡을 자율적으로 운영하게 한 제도였다. 이자도 한 섬당 한 말 다섯 되로 한정했다.(고종실록 4년 6월 11일)

군정(軍政)의 폐단도 환곡 못지않았다. 다산 정약용은 순조 3년(1803) 유배지 강진에서 끔찍한 소식을 들었다. 생후 삼일 된 아이가 군적(軍籍)에 올라 군포(軍布)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전에게 소를 빼앗긴 백성이 “이 물건 때문”이라며 자신의 음경을 잘랐고, 그 부인이 피투성이가 된 음경을 들고 관아에 와서 울부짖었다는 소식이었다. 이때 다산이 지은 시가 ‘애절양(哀絶陽:양근을 자른 것을 애달파함)’이다.

“시아버지 삼년상 이미 지났고 갓난아이 배냇물도 안 빠졌는데/ 삼대 이름이 모두 군적에 실렸네(舅喪已縞兒未<6FA1>/三代名簽在軍保)… 부호들은 일년 내내 풍류나 즐기면서/ 낟알 한 톨 비단 한 치 바치는 일 없구나(豪家終歲奏管弦/粒米寸帛無所捐).”


상민들의 갓난아기는 황구첨정(黃口簽丁), 죽은 사람은 백골징포(白骨徵布)로 군포를 징수했지만 양반 사대부는 합법적으로 군포 납부 대상에서 면제되었다. 견디다 못한 백성이 도망가면 가족에게 씌우는 족징(族徵), 가족이 모두 도주하면 이웃에게 씌우는 인징(隣徵)이 덮쳤고, 이웃도 도주하면 마을 전체에 씌우는 동징(洞徵)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았다. 이는 상민뿐 아니라 양반 사대부도 군포를 납부하면 해결되는 문제였지만 양반들은 “우리가 어떻게 상놈들처럼 군포를 낼 수 있느냐”라면서 강하게 반발했다. 그래서 영조도 양반 사대부는 계속 면제하되 상민들의 부담만 매년 2필에서 1필로 반감해 주는 균역법으로 미봉했던 것이다.

 

 

 


대원군은 수백 년 지속된 이 폐단에 과감하게 칼을 대 고종 8년(1871) 양반·상민의 구별 없이 모든 집이 군포를 내게 하는 호포법(戶布法)을 강행했다. 비로소 양반들도 병역의무를 수행하게 된 것이다. 대원군은 삼정을 개혁했지만 자신의 독자적 발상은 아니었다. 삼남민란이 거세게 일던 철종 13년(1862) 5월 세도정권은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했다. 대원군의 개혁안은 대부분 삼정이정청에서 논의된 내용들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세도정권은 삼정 문란으로 발생하는 이익구조의 정점에 있었기 때문에 실천의지가 미약했던 반면 대원군은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실천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대원군 집권 기간에는 철종 말엽의 삼남 농민항쟁 같은 대규모 민란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원군 집권기에 발생했던 민란들은 그 성격이 과거와는 달랐다. 고종 6년(1869) 3월 전라도 광양에서 민회행(閔晦行)이 주도한 민란은 조선 왕조의 전복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다. 고종 6년(1869)부터 8년(1871)까지 충청도 진천과 경상도 진주·영해·문경 등에서 연속 변란을 기도했던 이필제(李弼濟)도 마찬가지로 조선왕조의 전복을 목표로 삼았다. 이들 향반(鄕班:몰락 양반) 지식인들은 정감록(鄭鑑錄)이나 동학 등을 이념으로 조선 왕조 자체를 부인했다. 고종 31년(1894) 전국을 휩쓰는 동학농민혁명의 불씨가 이미 여기저기에 뿌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삼정의 문란은 백성들을 들고 일어서게 하는 표면적 동기에 불과했다. 그 내면에는 새로운 체제를 갈구하는 흐름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대원군은 이런 시대적 변화를 읽어내지 못하고 왕권 강화라는 봉건적 틀 속에서 문제에 접근했다. 경복궁 중건사업이 대표적인 시대착오적 정책이었다. 고종 2년(1865) 4월 영건도감(營建都監)이 설치되면서 경복궁 중건사업이 시작된다. 표면상으로는 대왕대비 조씨의 명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처럼 막대한 일은 나의 정력으로는 모자라기 때문에 모두 대원군에게 위임했으니 매사를 반드시 의논하여 처리하라(고종실록 4년 4월 3일)”는 대왕대비의 지시처럼 대원군이 주도한 것이었다. 이 문제로 회의가 열렸을 때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이경재(李景在)가 “현재 국가경영[國計]은 대역사를 벌이지 않아도 오히려 군색해지고 넘어질까 우려됩니다”라고 우려한 것처럼 대역사를 벌일 때가 아니었다. 반면 판중추부사 이유원(李裕元)은 “모든 백성이 제집 일처럼 떨쳐나설 것”이라고 거들고 좌의정 김병학(金炳學)은 “나라에 큰 공사가 있을 때 백성의 힘을 빌리는 것은 어버이의 일을 도우려고 아들들이 달려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가세했다.

왕조의 전복을 꿈꾸는 세력이 여기저기서 꿈틀거리고 있는 판국에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대역사를 국가와 백성을 부자관계로 설정하는 시대착오적 발상으로 합리화했다. 공사자금이 부족하자 대원군은 ‘자진해서 납부한다’는 원납전(願納錢)을 징수했는데, 원납전은 결국 관직매매전으로 변질되었다. 그래도 자금이 부족하자 기존의 전세(田稅)에 1결당 전 100문(文)을 더 받는 결두전(結頭錢)을 신설했다. 원납전은 원망하며 낸다는 원납전(怨納錢)으로 불렸고, 결두전은 신낭전(腎囊錢:사내라면 내는 돈)으로 불렸다. 게다가 대원군은 현실을 무시한 각종 경제정책으로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갔다. 고종 3년(1866) 당백전(當百錢)을 유통시키더니 이듬해에는 가경통보(嘉慶通寶) 같은 값싼 청나라 동전[淸錢]을 대량 수입해 유통시켰다. 실질가치가 명목가치의 20분의 1에 자니지 않는 당백전이나 2분의 1 내지 3분의 1에 불과한 청전(淸錢)은 상평통보(常平通寶)를 무력화시키면서 악성 인플레이션을 유발시켰다. 경제가 무너지자 백성들은 대원군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내정의 실책보다 더 큰 문제는 시대착오적인 대외정책이었다.

 

* 대원군이 거주하던 운현궁의 노안당(사진 위)과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쓴 것으로 대원군을 뜻하는 ‘석파선생’이란 글자가 눈에 띈다. 사진가 권태균

* 당백전 앞면과 뒷면.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 비용이 부족하자 실질가치와 명목가치가 다른 당백전을 유통시켜 경제를 혼란에 빠뜨렸다.

쇄국론자 대원군, 쇄국론자 최익현의 공격에 무너지다

 

 

고종 1년(1864) 2월 28일 함경감사 이유원(李裕元)은 경흥부(慶興府) 망덕(望德) 봉수장(烽燧將) 한창국의 “두만강 건너편에 이상하게 생긴 사람들[異樣人]이 나타났다”는 치보(馳報:급보)를 조정에 알렸다. ‘이상하게 생긴 사람들’이란 통상을 요구하는 러시아인들이었다. 경흥부사(慶興府使) 윤협이 “이런 문제는 지방관이 독단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자 러시아인들은 돌아갔지만 조선은 이미 서세동점(西勢東漸: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밀려옴)의 가시권에 들어갔다.

 

3년 전인 철종 11년(1860) 제2차 아편전쟁으로 영·불 연합군은 북경의 원명원(圓明園)을 점령했고 러시아는 청나라와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맺어 우수리강 동쪽 영토를 차지했다. 조선은 뜻하지 않게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야 했다. 청나라는 이미 1841년 제1차 아편전쟁에서 패해 홍콩을 할양하고 광주(廣州)·상해(上海) 등의 항구도시를 개항하는 남경(南京)조약을 맺었고, 일본도 1854년에 미국에 5개 항(港)의 문을 여는 가나가와(神奈川) 조약을 맺었다. 조선만이 계속 진공지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대원군은 러시아인들이 두만강 건너편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내통하는 조선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색출을 지시했다. 비변사(備邊司)의 지시를 받은 함경감사 이유원은 그해 5월 15일 김홍순·최수학을 러시아인과 내통한 혐의로 두만강가에서 효수했다. 대원군도 서양인과 내통한 조선인의 목을 베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조선에는 이미 서양인 신부들이 여러 명 들어와 있으며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 사망 직후 노론 벽파가 정조 때 성장한 이가환·정약용 등의 남인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일으킨 신유박해(辛酉迫害:1801)와 노론 벽파 풍양 조씨가 천주교에 관대한 노론 시파 안동 김씨를 몰아내기 위해 일으킨 기해박해(己亥迫害:1839)로 조선 천주교는 거의 초토화됐다.

그러나 헌종 11년(1845) 조선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金大建)이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페레올 신부를 밀입국시키는 데 성공할 정도로 천주교는 다시 살아났다. 김대건은 이듬해(1846년) 5월 인천 옹진군 순위도(巡威島)에서 체포돼 사형 당하지만 3년 뒤에는 조선인 제2대 신부 최양업(崔良業)이 귀국한 데 이어 프랑스 외방선교회 소속 신부들이 잇따라 밀입국했다. 다블뤼 주교가 ‘경상도 여러 마을에서 주교가 지나갈 때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길가에 나오곤 했다’고 말할 정도로 천주교는 공공연하게 전파되었다.

 

천주교는 대원군의 집 안채까지 전교하는 데 성공했다. 베르뇌 주교는 1864년(고종 1년) 외방선교회에 편지를 보내 “임금의 어머니(부대부인 민씨)는 천주교를 알고 교리문답을 배웠으며 몇 가지 기도문을 매일 외웠는데 아들(고종)이 왕위에 오른 것을 감사하는 미사를 드려 달라고 청했습니다(샤를 달레, 한국천주교회사(1874))”라고 보고했다. 베르뇌는 “궁중에 머물러 있는 왕의 유모(박씨)도 신자”라고 보고했다. 자신의 아내와 왕의 유모가 신자라는 사실을 대원군이 모르지는 않았다. 대원군은 국내의 천주교 세력을 러시아 견제용으로 활용하려고 계획했다. 베르뇌는 대원군이 “내(베르뇌)가 만일 러시아 사람들을 쫓아낼 수만 있다면 종교 자유를 주겠다”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에 고무된 천주교 지도자 홍봉주(洪鳳周)는 대원군에게 접근했다. 김대건이 기해박해 때 부친을 잃은 것처럼 홍봉주도 신유박해 때 조부를 잃고 기해박해 때 부친과 모친 정소사(丁召史:정약용의 조카)를 잃은 순교자 집안이었다. 홍봉주는 영국·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해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저지한다는 ‘방아책(防俄策:러시아를 막는 방책)’을 작성해 대원군 딸의 시아버지인 조기진(趙基晉)을 통해 대원군에게 제출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이 편지를 읽고 또 읽고 하더니 아무 말 없이 깔고 앉았다(샤를 달레, 한국천주교회사)”는 기록처럼 답변을 보류했다.

그때 대원군의 부인 민씨가 “내 남편에게 편지를 한 번 더 올리라”고 권유해 전 승지 남종삼(南鍾三)이 다시 대원군을 만났다. 5~6명의 대신과 함께 남종삼을 만난 대원군은 “프랑스 주교가 러시아를 막을 수 있느냐”고 물었고, 남종삼이 “가능하다”고 답하자 주교를 만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고 대원군의 태도는 돌변했다. 그 이유에 대해 ‘주교가 지방에서 늦게 상경하자 대원군이 화를 냈기 때문’이라고 전해지고 있지만 그보다는 대왕대비 조씨의 반대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크다.

신앙의 자유를 바라는 천주교도들의 희망과는 정반대로 고종 3년(1866:병인년) 천주교에 대한 대박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남종삼과 홍봉주는 “나라를 팔아먹을 계책을 품고 몰래 외적을 끌어들일 음모를 꾸몄다”고 사형당했다. 대왕대비 조씨는 천주교도들을 “모두 소탕한 뒤에 그치도록 해야 할 것”이라면서 숨겨준 자들까지 ‘코를 베어 죽여야 한다’는 전교를 내렸다. 정조 사후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내린 ‘사학엄금교서’의 복제판이었다. 극단적인 공포정치가 자행됐는데 박제형(朴齊炯)은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1886)에서 “나라 안을 크게 수색하니 포승에 결박된 죄인이 길에서 서로 바라보일 정도였고, 포도청 옥이 가득 차 이루 재결(裁決)할 수 없었다…시체를 수구문(水口門) 밖에다 버려서 산같이 쌓이니 백성들이 벌벌 떨며 위령(威令)을 더욱 두려워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 조선 입국 21년째인 다블뤼 주교가 유창한 조선어로 천주교 교리를 변호한 뒤 사형당한 것을 비롯해 프랑스 선교사 9명과 8000여 명에 달하는 조선인 신자들이 사형당했다.

대원군은 남인을 자처했지만 정조 때 남인들이 지녔던 개방성과는 전혀 다른 노론 벽파식 정치행태를 자행한 것이다. 이때 조선인 천주교도의 보호로 겨우 목숨을 건진 리델 신부가 청나라 산동반도의 지부(芝<7F58>)로 탈출해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프랑스 신부 처형 사실을 전하면서 병인양요의 서막이 올랐다. 주청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가 청나라 공친왕(恭親王)에게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 호조(護照:여권) 발급을 요청하자 청의 총리아문은 “조선은 중국에 조공은 바치지만 일체의 국사를 자주(自主)하고 있다”고 거부했다.

그러자 프랑스는 직접 조선 원정을 감행했다. 7척의 함선에 1500여 명 규모의 프랑스 함대는 강화도 갑곶이(甲串鎭)와 김포의 문수산성을 점령하고 학살 책임자 처벌과 조선·프랑스 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의 양헌수(梁憲洙)가 이끄는 결사대가 그믐밤에 강화도 정족산성을 장악하자 강화도의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해 퇴각했다. 같은 해(1866) 8월 평양 대동강에서 평양감사 박규수(朴珪壽)는 화공(火攻)으로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를 소각하고 선원 24명을 몰살시켰다. 고종 8년(1871:신미년) 미국의 로저스 제독은 5척의 함선에 1200여 명의 군사로 조선을 공격했다. 이 신미양요도 미국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돌아갔지만 강화도 광성보(廣城堡)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은 데 비해 조선군은 350여 명이 전사했다는 사료도 있을 정도로 큰 피해를 보았다. 내용은 조선의 패전이지만 형식은 승전이었다. 이때 대원군이 형식상 승전의 여세를 몰아 개국을 단행했다면 조선은 서구 열강과 평등한 조약을 맺는 최초의 동양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형식상 승전에 고무된 대원군은 그해 8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主和賣國]”이란 내용의 척화비(斥和碑)를 전국 각지에 세웠다. 대원군은 군사력으로 쇄국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망상을 품었고 막대한 군사비를 조달하기 위해 환곡제를 부활시켜 자신의 개혁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호포제와 서원 철폐로 양반 사대부들의 지지를 잃은 데다 경복궁 중건, 환곡제 부활 등으로 상민들의 지지까지 상실했다.

드디어 고종 10년(1873) 10월 25일 동부승지 최익현(崔益鉉)이 “나라[公]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괴격(乖激:이지러지고 과격함)하다고 하고 개인[私]을 섬기는 사람은 뜻을 얻습니다. 염치없는 사람은 때를 얻고, 지조 있는 사람은 죽게 됩니다”라는 대원군 공격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 대해 고종이 뜻밖에도 “매우 가상하다”면서 호조참판을 제수했다. 황현(黃玹)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이때 대원군은 분통을 참지 못해 문을 닫고 앉아서 정사를 사절했지만 고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전한다. 쇄국론자 대원군이 쇄국론자 최익현의 상소로 무너진 것은 대원군 정치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고종은 자신을 국왕으로 만들어준 부친을 버리는 것으로 즉위 10년 만에 정치 전면에 비로소 등장했다.


* 정족산성 동문.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다. 병인양요 때 양헌수가 이끄는 결사대가 프랑스 군대를 물리친 곳이다. 사진가 권태균

* 수자기(帥字旗). 총사령관의 군영에 세우는 깃발인데, 신미양요 때 어재연 장군이 사용하던 것이다. 미군은 광성보를 점령한 후 수자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한 후 수자기를 미국으로 가져갔다.

* 척화비. 경북 구미에 있는 것으로, 자연석을 거의 그대로 사용한 것이 이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