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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7세기 남양에서 맞붙은 왜구와 영국 해적

구름위 2012. 9. 28.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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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남양에서맞붙은 왜구와 영국 해적


얼마 전에 카리비안 뭐 어쩌고 하는 제목의 해적 영화가 상영 되었었다.

이런 서양식 해적과 동양의 대표 해적인 일본 왜구는 동종 업계이지만

그 이미지들이 잘 겹쳐서 떠오르지가 않는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해상에서 격돌하여서 일본 왜구가 참패를 당한 일이

조선의 선조(宣祖) 때인 17세기 초에 실제로 있었다.


내막을 알아보자.

민족의 주력 산업중 하나가 강도질이라면 독자들은 놀라실 것이다.

그런 강도 민족들이 있었다.

서양의 북쪽 바이킹 족이 하나고 동쪽으로 오면 왜(倭)라고 불리던

족속들이 그들이다.

왜의 강도들, 해상 강도들은 역사에서 왜구(倭寇)라고 경멸스러운

명칭으로 불리던 불순한 산업 종사자들이었다.


노략질하는 왜구들

 

한민족(韓民族)이 해상 강도 집단의 바로 이웃에 잘못 위치한 덕분에
최대로

피해를 입은 민족이 되었다.


오죽했으면 왜구에 관한 글이 우리 광개토 대왕(好太王)비에서
세계 역사상
최초로 출현했을까?

이들 왜구는 그들이 전란의 시기였던 고려 말에 극심했었고
조선조까지도
끊이지를 않았었다.


왜구들이 한반도에 내습하면 싹쓸이식 도둑질을 했다.

모든 곡식이나 의류는 물론 농기구나 소 돼지 닭같은 가축까지도
사그리
배에 싣고 떠나서 왜구들이 한번 습격한 마을은 완전히
해일이 쓸고 간
페허가 되었다.


불교가 융성했던 일본에서 온 왜구들인지라 부처님의 독실한
제자들인
기특한 왜구들도 있었다.


왜구들은 부처님 모신 절은 즐겨 털었다.

그리고 불상이건 종이건 그리고 탱화건 몽땅 털어서 일본에 가져 가

자신들의 절에 봉납했다.


일본 승려들은 이런 장물들을 양심의 가책도 없이 받아서 자기 절의

장식에 썼다.

졸지에 도둑들에게 보쌈당해 새로운 모심을 받으신 부처님의 기분이

어떠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왜구들이 싹쓸이 강도질의 한 면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조선이 들어서고 대마도 토벌을 해서 조금 나아졌지만 왜구들은

지방 군벌로 변신하여 임진란 때 침략군의 앞장을 선다.


히데요시 부대의 선봉에 섰다가 남해안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골병이

들게 두들겨 맞았다.

등당 고호니 구귀 가륭이니 하는 너절한 잡패들이 왜구 가문
소속들이다.


왜구들은 물론 한반도만 아니라 더 넒은 중국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희한한 일은 피해국 중국에서 중국인들이 조직한 짝퉁 해적들이

양산되었다는 것이다. 
짝퉁 해적들은 나중에 너무나 그 숫자가 많이 늘어나 명나라의 멸망을 재촉하는 먼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 중국 짝퉁들은 자기 나라뿐만 아니라 한반도에도 자주 나타났다.

우리나라 백성들은 오리지날과 짝퉁의 양 해적들 사이에서 죽도록

고생해야 했다.


그러나 이상했던 것이, 이 정도로 왜구들에게 시달렸으면 삼면이
바다이고
해운 활동도 그런대로 해왔던 우리 한민족에서도 짝퉁
왜구가 나와서
중국이나 일본 등을 돌아다니며 돈벌이를 조금은
해먹었을 법했는데 ----그런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외적의 침략과 강도질에 그저 당하기만

했지, 따라서 하는 범죄적 배짱은 없었던 것 같다.

그저 한반도 안에만 죽자 붙어서 이놈들에게 당하고  저놈들에게

당하기만 했었던 것이다.


일본 왜구들은 중국의 짝퉁들과 업무 제휴를 했다.

왜구들은 중국 짝퉁들과 무역도 했고 정보도 교환했던 것 같다.


서양인이 그린 중국 정크-- 아래 일본 안택선과 선체가 비슷한
점이 보인다.

그러면서 왜구들은 동북아에서 주변 나들이만 하던 활동 반경을
넓혀서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이들 왜구들은 남쪽을 들락거리며 진귀한 남방 물건을 가져다 일본에서

정신이 아득한 폭리를 붙여 팔았다.

상품들은 무역으로 손에 넣기도 했지만 도둑질을 대부분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한반도 해안가 부락에서 싹쓰리 빈민형 강도 짓을 하던
왜구들은
세월이 변하면서 스타일이 기업형의
반도반상(半盜半商)의 해적으로 변한 것이다.


왜구가 앞장섰다고 믿어지지만 일본인들의 남방 경영은 일찌감치
발동을
걸었다. 

제일 큰 수확으로 사스마 번이 물산 풍부한 유구국을 집어 먹은 것이

있었을 것이고 부도나 모도니 팔장도니 유황도니 하는 태평양의
섬들을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빼앗기지 않고 자기들의 영토로
삼은 것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  유럽인들이 이 해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에 유일하게 출입하며 무역을 하게 허락 받은

네델란드와 이 일본의 범죄 조직과 교류가 있었던 것 갈다.


일본 도쿠가와 막부가 나가사키에 해변에 조그만 섬을 만들어 놓고

네델란드인들을 이 섬 밖으로의 출입을 금해서 일반 일본인들과의
접촉을
금해버렸다.

그런데도 이 금지된 장소가 있는 육지가 아니라 바다 위에서
일본 배와의 접촉을 금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서로 접촉이 있었던듯하다.


왜구들뿐만이 아니라 보통 일본 상선들까지도 네델란드제
범포와 나침반과 망원경을 썼다는 사실은 유의해보자.


네델란드인들도 칼쌈 잘하는 일본인들의 전투력을 눈여겨 두었다.

그 무렵 향료가 나는 몰루카 제도를 두고 스페인, 포루투갈, 영국,
네델란드는 박 터지는 결투를 벌이고 말았다.


해외에 비교적 늦게 진출해서 짭짤한 식민지가 없었던 네델란드는

이 현금 덩어리로 보이는 몰루카 제도 점령에 쌍심지를 켜고
덤벼들었다.


네델란드는 국력을 기우려 막강한 군사력을 이 지역에 투입했다.

세계를 지배하던 영국도 사생결단하고 덤벼드는 네델란드에 결국

손을 들고 물러났다.


네델란드는 인도네시아 전체를 확보하고 설립된 동인도회사를
통하여
식민지 경영을 하였다.


이 식민지 획득 전쟁에서 전투력에 목말라 하던 네델란드는
이들 일본인들 무뢰한들을 100여명이나 고용했다.

일본인들은 전투는 물론 포로로 잡은 영국인들이나 현지인 포로들이
참수형에 처해 졌을때 목을 치는 망난이 역할도 했다.


일본인들은 왜구뿐만 아니라 상인들도 활발히 남방으로 진출하여
마닐라는 물론 태국 방콕항도 부지런히 드나들면서 무역도 했다.

태국에는 이렇게  내왕하던 사람이 많다보니 일본인 촌까지도
생겼었다.


이야기가 잠시 딴 길로 나갔다.

왜구들은 부지런히 오키나와 남쪽으로 내려가서 진기한 물건들을

강도질했다. 


그러나 지구 저편에서 유럽인 상선들이 향료를 찾아서 이 남방까지

진출하자 파리 같은 존재들이 끼어들었다.

해골 깃발을 휘날리는 유럽 해적들이 나타 난 것이다.

이들이 노리는 것들은 돈이 되는 차(茶)나 도자기 또는 향료를 실은

무역선이었다.

‘나다니엘의 육두구’라는 책에 한 기묘한 전투가 소개되어 있다.


유럽 해적 무리에 이상한 배경의 인간이 한 명 끼어든다.

에드워드 미셀본이라는 경(卿)의 칭호를 가지고 있는 영국 귀족이다.


이 사람은 줄을 놓아 영국 왕으로부터 동남 아시아 지역의 무역

허가까지도 확보한 사람인데 막상 인도네시아 쪽에 가보니까
별로 일이
잘 안 풀렸던 모양이었다.

그는 해적으로 변신해서 일대 해역을 돌아다니며 대상을 가리지 않고

강도질을  해댔다.


그가 해적질에 써먹은 배는 별로 크지도 않은 250톤짜리 범선이었고

정찰이나 심부름 등을 하는 작은 종선(從船)을 하나 달고 다녔다.

해적선의 이름은 타이거 호였다.



영국 해적왕 키드가 타던 해적선의 모형

타이거호가 해적질을 신장개업 했지만 성과는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말레이(Malay)연안을 따라 항해하던 타이거호의

에드워드는 멀리서 넓은 돛을 두어 개 단 중국풍의 정크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


조선 판옥선에 대비되는 일본 안택선 -- 대형함이었으므로 먼 항해를
해야하는 왜구선은 이와 비슷한 크기와 형태를 가졌었을 것 같다.

때는 1605년이었다
선장 에드워드는 즉시 종선을 보내 정찰을 했다.

그 커다란 정크에서 80여명의 앞머리를 홀딱 밀어 버린 키 작은
인간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영국선이 다가가서 검문을 하자 이들 키 작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일본사람이라고 몸짓으로 대답했다.


배의 용도가 뭣이냐고 물어보자 그들은 대답을 흐렸다.

그러나 생긴 모습과는 달리 그들은 검문하는 영국인 해적들에게

예의 바르게 대했다.

종선이 돌아오자 에드워드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힘들게 털어서 아무 것도 안 나오면 인건비만 낭비 할뿐이었다.

그는 그러나 사업이 신통치 않던 판이라 별 수가 없었다.

그는 기회를 보다가 이 배를 약탈하기로 했다.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퇴시킨 드레이크의 겔리온 선 '골드 하인드'호
윗 사진의 해적왕 키드의 해적선과 다층의 덱크와 높은 고물과 이물의
특징이 보인다. 복제한 것이다.


일단 습격하기로 결심했지만  에드워드는 배를 그 쪽 배에 붙이고

한 번 더 정찰대를 보내서 그 배에 무엇이 실렸는지 정밀 조사를

하기로 했다.

일본인들은 다시 찾아온 영국인들에게 예의 친절함으로
정중하게 대했다.

그들은 시종 겸손한 태도로 배안을 다 보여 줬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가장 값비싼 물건까지도 숨기지 않고 다 보여 주었다.


감동스럽게 친절을 다한 이들은 배를 다 조사하고 떠나는
영국인들에게
다시 정중하게 자기들도 영국 배를 방문해서
구경을 해도 되냐고 물었다.

즉 답례 방문을 해도 되냐는 의전상의 부탁을 한 것이다.


너무도 친절한 응대에 완전히 속은 영국인들은 거절한 명분이 없었다.

그들은 그러라고 허락을 하고 말았다.

선장 에드워드는 상대 배에 타고 있는 인간들이 뭔지 전혀 모르고

피의 격투를 스스로 부르는 실수를 한 것이다.


먼저 머리를 면도질하고 훈도시만 입은 윗몸에 긴 옷을 입은
이 인간들이 전부 칼을 차고 있는 사실을 그냥 넘겨버렸다.

일본에서는 오로지 무사들만 칼을 차도록 허가가 되어 있었다.

배를 모는 뱃사람들을 칼을 찰 수가 없었던 것인데 이들은
전원 칼을 차고 있었던 것이다. 
이 들이 범죄자 집단임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더해서 영국인들은 칼을 찬 일본인들이 전부 새 짚신을 신고 가는
새끼로
두어 곳을 위 아래로 동여 맨 것이 무었을 뜻하는지도 몰랐다

칼싸움에 대비해서 미끄러운 갑판 위에서 안 미끄러지도록 준비를
단단히 한 것이다.

그 시대의 보통 일본인이 보았더라도 이들이 영국인을 도륙 내려고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금방 한 눈에 알아챘을 것이다.


더해서 에드워드는 동남 아시아에 진출한 일본인들이 원체 흉포해서

평판이 안 좋았으며 몇몇 항구에서는 이들이 기항하면  

허리에 찬칼을 출항 때까지 압수해두기도 한다는 사실도 몰랐다


타이거 호가 상대하고 있는 이 일본 배는 해적선이었다.

이 왜구들은 일본을 출항하여 중국 해안을 따라 약탈을 해오며

동남아 일대로 진입해왔다.

캄보디아도 약탈했고 보르네오 연안에서 여섯 척이나 되는

배를 습격해서 약탈을 하였다.


이제 집을 나온 지 오래되었고 창고도 다 찼으므로 일본 본토로

귀환하는 중에 이 괜찮아 보이는 부자나라의 배를 발견하고 마지막

한탕을 노리는 중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에드워드는 예의와 겸손으로 위장한 이 흉악한

도둑들이 칼을 차고 타이거 호에 올라오도록 허락했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자기들을 환대했듯 배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했고
배의 타륜을 움직여 보게도 했고 선원들과
럼주도 한잔씩 마시게 했다.


그러나 일본 배에서 영국 배로 넘어오는 일본인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지만 에드워드나 다른 선원들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동양과 서양의 해적들이 이렇게 화기애애한 가운데 갑자기 칼을 빼든 일본 해적 두목이 곁의 영국인을 후려치는 것을 신호로 일본 해적들은 미친개처럼 주변의 영국인들을 마구 베기 시작했다.


선상은 삽시간에 도살장처럼 변해버렸다.


일본인들은 기합을 지르며 되는대로 베고 찔렀다.

순식간에 갑판은 영국인 시체들이 쌓여갔다.

앞 간판의 영국인들을 대충 처리한 일본인들은 무기실로 난입했다.


무기실에서는 일등 항해사 데이비스가 필사적으로
총에 장탄을 하고 있었다.

그는 동남 아시아를 여러 번 항해했었기 때문에 영국 제일의 항해사로 명성이 높았으며 에드워드가 이번 항해를 위해서 특별 초빙한
인물이었다.


해도와 나침반이 정확하지 않았을 당시 인도네시아의 복잡한
해로를
잘 아는 능력 있는 항해사의 역할은 무척 컸다.


이 보물 같은 항해사를 일본인들이 알아볼 리가 없다.

그는 열 번 가까운 난도질을 당하고 간신히 갑판으로 올라왔지만

다량의 출혈로 죽고 말았다.


기세가 오른 일본인들은 전신에 피를 뒤집어쓴 귀신같은 꼴로
다른 목표를 찾아 선교로 몰려왔다.

영국인들은 다 죽임을 당하고 배의 탈취는 시간 문제인 것 같았다.


그래도 이런 위기 상황을 돌파 한 것은 선장 에드워드 미셀본이었다.

그는 성한 선원들을 불러 모아 창으로 무장시켰다.

그리고 매섭게 반격에 나섰다.


(일본인들이 아무리 칼을 잘 쓴다 해도 칼은 창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이 사실은 일본 역사 제일의 검사(劍士)라고 불리는 미야모도 무사시

(宮本 武藏)가 그의 저서 오륜서에서도 서술된 것이다.

우리 전쟁 사극에서 병졸들이 전투 초부터 서로 어울려서
병정놀이처럼 칼을 휘두르는 것은 실전에서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전장에서 활과 창이 주역이고 칼은  긴창을 쓸수 없을 정도로
뒤얽힌 난전이 되었을 때 그 필요성이 나타났다.


더구나 좁은 배안에서 집단으로 창을 내지르는 집단에게는 칼질을

잘한다 해도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의 창 부대는 날뛰는 서 너 명의 일본인을 죽였다.

창을 휘 두르는 영국인 부대가 수적(數的)으로 일본인들을 압도하고

일본인들에게도 기습의 효과가 다 없어지자 전투의 주도권은

영국인 쪽으로 돌아왔다.


일본인들은 기합과 함께 칼을 휘두르며 자신들의 배로 돌아가고자

돌진을 시도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일본인들은 선실로 다시 내몰렸다.


에드워드는 선실로 일본인들을 다 몰아 넣은 뒤 바다를 향해있던

대포 두문을 이 선실로 돌려 수백발의 산탄을 장탄하고 주저 없이

발사했다.

굉음과 함께 배의 나무 벽에 수 없는 구멍이 나고 연기와 함께
여러 명의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리다가 곧 조용해졌다.


화약연기와 먼지가 살아진 뒤 선실로 들어가 보니 두 발의

산탄 포격에 스물 두 명이 전부 몰살당하고 한명의 부상자만이

살아남아 신음하고 있었다.

선실은 갈가리 찢어진 시체 토막과 핏자국으로 지옥도를 상상케 했다.

단 두발의 산탄 사격이 만든 전과치고 끔찍했다.

일본인 생존자는 살기가 등등하게 오른 영국인들에게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타이거 호에 올라와서 공격을 했던 일본인들이 전멸을 해버리자

에드워드는 복수에 들어갔다.

그는 모든 포를 일본 배에 돌리고 지근거리에서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정크선의 일본인들은 처음에는 갑판에 꿇어 앉아 살려주기를
애걸했지만
에드워드는 다시 속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조총을 쏘며 저항했다.

계속된 산탄 포격에 일본 정크의 일본인들은 모두 죽고 배는
거의
완파 수준이 되었다.

일본인 한 명이 포격을 피해서 바다에 뛰어들어 타이거까지 헤엄쳐

건너와서 항복을 했다. 


에드워드는 그를 심문했다.

“왜 공격 했는가?”

“이 배를 빼앗고 선원들을 모두 목을 베어 죽일 계획이었습니다.”


영국인들은 그가 비록 항복했지만 살려 둘 생각은 없었다.

자기의 운명을 깨달은 일본인이 목을 베어 고통 없이 죽여주기를

바랐지만 에드워드는 그를 돛대에 목을 매달아 교수형에 처했다.

해적이 해적을 교수형에 처하는 기묘한 광경이 연출 된 것이다.

교수형은 영국에서 해적들을 사형집행 할 때 쓰는 방법이다.


처형 과정에서 목을 맨 줄이 끊어져 그는 바다에 떨어졌다.

아마도 목이 부러져 죽었을 것이다.

배 주인들이 다 죽어버린 일본 해적선도 약탈하고 불을 질러서

격침시켰다.


이 사건이 있던 해는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지던

국토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여념이 없던 때였었다.

그런 시대 한반도의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머나먼 바다까지
와서
노략질을 하던 왜구는 한 수 위인 영국 해적에게 이렇게
최후를 마쳤다.


그러나 동남아시아까지 내려가서 활동을 하던 왜구들이나
다른 일본인들이 이 동남아시아 진출로 유럽의 여러 문명이나
문화의 정보에 접 할 수 있었던 사실을 주목하자.


더 해서 일본은 세계를 향해  바늘구멍처럼 뚫어놓은 나가사키에서
여러
정보를 오랫동안 접할 수가 있었다.


일본이 대담하게 세계를 향하여 문을 연 개혁인 명치유신은 이렇게
해서 얻어진
유럽의 선진 문물에 대한 수 백 년의 정보가 축적된 정보가
판단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조선 대원군의 수구 정치를 비난하지만 이런 유럽 정보의 축적이

극히 미약했었던 조선에게는 일본 같은 대 개방은 무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신으로 건설한 강대한 일본 해군은 자기들 선조 해적들이

드나들던 남방에 대한 유전적인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남진 정책을

추구 하다가 멸망해버리고 말았다.


세계는 이미 피정복 민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해적근성이나

다를 바 없는 제국주의 시대는 끝이 났던 것이다.

  


 

출처 : 요트고래사냥
글쓴이 : 베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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