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3차 중동전쟁, 1. 분쟁재개

구름위 2013. 6. 12. 12:15
728x90

6일전쟁 또는 1967년 중동전, 제3차 중동전, 6일전쟁, 6월 전쟁. 이스라엘과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연합군의 전쟁으로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수단, 튀니지아, 모로코, 알제리아도 아랍 연합군에 병력과 무기를 제공했다. [각주:1]

1967년 5월, 이집트가 국제연합긴급대응군(United Nations Emergency Force, UNEF)을 1956년 2차중동전 이후 평화유지를 위해 완충지대를 형성하던 시나이 반도에서 축출하고 이스라엘-시리아의 긴장고조에 대응하여 이집트는 1,000대의 전차와 병력 10만명을 국경지대에 배치했다. 그와 함께 티란 해협에서 이스라엘 기를 게양했거나 전략적 물자를 수송하는 모든 선박의 통항을 봉쇄하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아랍권의 통합대응을 요구했다. [각주:2] 이에 대응하여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은 이집트 공군에 선재공격을 개시했다. [각주:3] 이집트와 5월 30일, 상호방위조약에 조인한 요르단은 서 예루살렘과 네타냐 [각주:4] [각주:5] [각주:6] 를 공격했다.

전쟁이 끝나자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 가자지구, 요르단 서안, 동 예루살렘, 골란고원의 통제권을 획득했고 이 전쟁의 승리는 오늘날까지 지역정세에 영향을 주고 있다.

 

배경

수에즈 위기 이후

그러나, 근본적인 면에서 1956년의 전쟁은 중동에서 세력 균형을 변화시켰으며 이 지역에서 정치적 긴장도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의 독립을 인정한 아랍국은 존재하지 않았고, 소련의 영향권에 있던 시리아는 60년대 초, "인민해방전선" 계획의 일부로서 이스라엘 지역에서의 게릴라 활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제2차 중동전쟁(1956년 수에즈 위기)에서 이집트는 군사적 패배를 당했지만 정치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6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중추적인 사건으로 미국과 소련의 강력한 외교적 압박이 이스라엘에게 사니아 반도로부터 철수하게 했다. [각주:7] 1956년 전쟁후에 이집트는 UN 평화유지군이 시나이에 주둔하여 경계선 지역을 비무장화 하고, 이스라엘 국경 너머에서 팔레스타인 페다인 게릴라의 활동을 막는데 동의했다. [각주:8] 티란 해협의 봉쇄가 수에즈 사태의 촉매가 되었기에 이스라엘의 항행재개도 동의하는 등,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에는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다. [각주:9]

1956년 전쟁 이후 이 지역은 핵심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 없이 불편한 균형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떠한 아랍국가도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았고 시리아는 동구권의 영향을 받아 1960년대 초 "인민해방전선"의 일환으로 배스 당(Ba'ath Party)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게릴라 전을 지원했다. [각주:10]

이스라엘의 수자원

1964년, 이스라엘은 자국의 수자원에서 요르단 강 의존도를 축소하기 시작했다. 그 전해 아랍국가들은 수로변경 계획(Headwater Diversion Plan)을 수립하여 일단 완료된다면 이스라엘과 갈릴리로 흘러드는 바니아스 수로{Banias Stream)를 무카이바(Mukhaiba) 댐으로 흐름을 요르단과 시리아로 돌리고 하스바니(Hasbani) 수류를 레바논의 리타니(Litani) 강으로 돌아가게 된다. [각주:11]

이럴 경우 이스라엘의 수자원은 35%까지 감소되고 이스라엘 전체의 수도 공급량은 11%까지 저하될 상황이었다. [각주:12] 이에 IDF는 시리아의 공사현장을 1965년 3월, 5월, 8월에 연속적인 국경 분쟁을 일으켰고 이것은 전쟁으로 직접 이어지는 사건이 되었다. [각주:13]

이스라엘과 요르단

1966년 11월 11일, 이스라엘 국경 경비대가 지뢰에 접촉하여 3명의 군인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당하였다. 이스라엘은 이 지뢰접촉 사고를 요르단 서안의 에스 사무(Es Samu) 마을에 근거지를 둔 아랍 테러리스트의 소행으로 파악했다.

11월 13일 이른 아침, 지난 3년간 이스라엘의 외상 아바 에반과 골다 메이어와 비밀 협상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고 평화협정을 맺으려 노력해온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Hussein bin Talal)은 이스라엘군이 지뢰사고에 보복하기 위하여 요르단 국경을 침범할 의도가 있는지를 이스라엘측에 확인하고 그럴 의도가 없다는 답변을 확인한다. [각주:14] 그런데, 아침 5:30분 후세인 국왕은 'PLO의 테러 활동에 대한 보복'이라는 명목으로 이스라엘 군이 약 4,000여명이 거주하는 요르단령 에스 사무를 공격 하여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시리아로 소개하였다는 보고를 듣게 된다. [각주:15]

전차와 항공기의 지원을 받는 3,000~4,000명의 이스라엘 군이 영내 대기 예비대와 2개 습격대로 나뉘어 요르단강서안으로 진입했다. 주력군은 센츄리온 8대와 개방형 반궤도 차량 40대에 탑승한 400여명의 공수부대원 및 10대의 반궤도차량에 분승한 공병대원 60명과 추가 반궤도차량 10대로 구성되어 사무로 향했고 조공부대는 3대의 전차와 100명의 공수부대원 과 10대의 반궤도차량에 탑승한 공병대로 구성되어 키르베 엘-마르카스(Kirbet El-Markas)와 키르베 짐바(Kirbet Jimba) 마을로 돌입했다.

이 사건에 대한 보고는 대단히 혼란스럽고 아직도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테렌스 프리티(Terrence Prittie)의 저서 Eshkol: The man and the nation에 의하면, 50채의 가옥이 파괴되었으나 민간인들은 몇시간 전에 마을을 비웠다고도 한다. 공식적으로는 아사드 간마(Asad Ghanma)대령 지휘하의 요르단 군 제48보병대대와 이스라엘 군이 샤무 북서쪽에서 교전을 벌였고, 북동쪽에서 접근하던 2개 사단은 이스라엘 군에 공격을 당했다. 사무에 배치되어 있던 요르단 군은 2문의 106mm 무반동포로 무장한 1개 소대로 교전에서 3명의 요르단 민간인이 사망하고 50명의 군인이 전사했으며 54명의 병사가 부상을 당했고 96명의 민간인이 부상당했다. 이스라엘 군 공수대대 지휘관 요압 샤함(Yoav Shaham) 대령이 전사하고 병사 10 여명도 부상당했다. [각주:16] [각주:17] 이스라엘 정부에 의하면 50명의 요르단인이 사망했다고 발표되었지만 요르단에 의한 정확한 피해자 발표는 사기 유지와 후세인 정부의 존립을 위해 비밀에 붙혀졌다. [각주:18]

2일후, 미국의 대통령 특별보좌관 월트 로스토우는 존슨 대통령에게, "보복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탱크와 비행기의 지원을 받고 있는 3천여명의 이스라엘 부대는 도발의 수준을 벗어난 것으로 목표를 잘못 잡고 있다."라고 메모를 남겼으며 이 사건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익관계에 미칠 악영향에 대해서 "이스라엘과 후세인 국왕간의 암묵적 합의를 파괴 하게 될 것이다. … 이스라엘 측이 후세인 국왕을 잘못 판단한 것으로 우리(미국)는 5억달러를 들여 이스라엘이 가장 긴 국경선을 접하고 있는 지역을 안정화 시키며 시리아-이라크의 완충지대가 되도록 후세인을 지원해왔다. 이스라엘의 공격은 주변 아랍국과 요르단내 팔레스타인으로부터 가해진 반격 요구에 더해 후세인 정권의 주요 지지기반이며 피해를 보복할 기회를 원하고 있는 요르단도 반격을 원하게 되었다. ... 원하는 요구가 강해지도록 이번 사건으로 요르단 쪽은 다시 아랍민족주의 쪽에 기울게 될 것이다. … 이스라엘이 소련 영향권 하에 있는 시리아는 공격하지 않 았는데 미국이 지원하는 요르단이 공격을 당한 것은 상황을 오판하도록 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적었다. [각주:19]

팔레스타인, 아랍 연합국들을 비롯하여 요르단 국내에서 사무를 방어하라는 여론이 강해지자 후세인 국왕은 11월 20일에 국가 총동원령을 선포한다. [각주:20]

이스라엘과 시리아

시리아는 대 이스라엘 게릴라를 후원하는 한편, [footnote[ Oren, Michael. "The Six-Day War", in Bar-On, Mordechai. Never-Ending Conflict: Israeli Military History, Greenwood Publishing Group, 2006, ISBN 0275981584, p. 135. [/footnote] (종종 이런 작전이 요르단 영토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 문에 후세인 요르단 국왕은 이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DMZ 근처에 이스라엘과 시리아 양측 모두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지역에 관한 통제권 분쟁으로 갈릴리 북동쪽의 골란고원에서 이스라엘 민간인 지역에 기습적인 포격을 가하곤 했다. [각주:21] 이스라엘 영토에의 공격에 관련하여 시리아는 엘파테(El-Fateh)와 엘아세파(El-Asefa)에서의 활동에 대한 책임을 지거나 점령지역의 해방이 목표라고 공언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조직의 부흥에 책임을 질 수 없었다. [각주:22] 시리아는 비무장지대에서 이스라엘이 아랍 농부 작업을 방해하고 시리아 주둔지에 포격을 가했다고 비난하면서 이스라엘 기갑부대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 장갑 트렉터가 아랍영역을 불법적으로 경작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시리아는 긴장상태가 조성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아랍의 경작권을 훼손함으로써 점령지역을 확대하는 행동을 정당화 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시리아는 매 포격시마다 이스라엘이 평화로운 아랍측 농작민이나 시리아 전초기지에 대한 포격에 대한 대응이라고 주장했다. [각주:23] 9년 뒤에 전쟁당시 이스라엘 국방상이었던 모세다얀은 이와 비슷한 진술을 하고 있다. [각주:24]

"시리아와의 경계선 지역에는 농장도, 난민캠프도 없고 오직 시리아 군대만이 존재했다. 키부츠(이스라엘의 집단농장제도)는 지속적으로 높은 생산성을 보유한 농지를 개척해 나갔으며 개척을 통해서 영향지역을 넓혀 가고 있었다.  ... 결국, 나는 적어도 80%의 충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80%이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단 80%라고 말해두자. 충돌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우리는 비무장 지역 내에 전혀 경작이 불가능할 듯한 트렉터를 보내곤 했으며 그럴 경우 시리아가 총격을 개시할 것을 알았다. 시리아가 총격을 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침내 시리아 측이 분노해서 총격을 가하기 까지 트렉터를 좀 더 전진시키게 했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포병과 공군도 동원했고 그렇게 된 것이다.  ... 그리고, 시리아군은 우리가 예측한대 로 행동했다. 전쟁 4일째, 시리아는 더 이상 우리의 위협거리가 못되었다. "

한편, 1966년, 이집트와 시리아는 군사 동맹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한쪽이 공격을 당하면 서로가 지원하기로 협약을 맺었다. 인다르 짓 리크혜(Indar Jit Rikhye)에 의하면 이집트 외무장관 마흐무드 리아드(Mahmoud Riad)는 소련이 두가지를 염두에 두고 이집트에게 방위조약을 추진토록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시리아의 독단적인 공격을 줄일 것,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가 시리아에서 확고한 영향력을 확보할 것. [footnote[ Rikhye, 1980, p. 143 (author interview) [/footnote]

이스라엘 외무장관 아바 에반은 1967년 2월 런던을 방문했을때,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은 레바논과 요르단 정부가 관계개선을 통하여 통합아랍공화국을 형성하여 대 이스라엘 연합전선을 구성하려는 시도를 “희망과 두려움”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시리아가 말로만이 아닌 실제로 국경지역에서의 적대행위를 줄여줄 것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각주:25]

1967년 4월 7일, 골란 고원에서 발생한 소규모 국경분쟁은 급작스럽게 전면 공중전으로 확대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시리아 공군의 MIG-21전투기가 이스라엘 공군의 데저트미라쥬3에 의하여 6기 격추되었고 승리한 이스라엘 공군은 다마스커스 상공을 비행했다. [각주:26] 이에 시리아군은 탱크와 중포, 박격포를 티베리아 호수 남동쪽의 비무장 지대의 76km에 이르는 접경지대에 배치했다. 이 전에도 두차례 작업중인 트랙터를 공격했던 시리아 군은 4월 7일 아침, 갈릴리 지역에 포격을 개시했고, 이스라엘은 장갑 트랙터로 개간을 계속하면서 포격을 교환했다. 이스라엘 공군기는 시리아군 포대에 급강하 폭격으로 250~500kg 폭탄을 투하했다. 시리아는 이스라엘과의 접경지역에 포격을 가했고 이스라엘도 이에 맞서 제트기로 폭격을 실시하여, Sqoufiye 마을의 가옥 40채를 파괴했다. 7일 15시 19분, 골란고원의 시리아 포대가 가돗(Gadot) 키부츠에 포격을 가하여 300여발의 포탄이 40여분간 쏟아졌다. [각주:27] 결국, 유엔평화감시단이 사격중지를 명령하였으나 시리아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농지개간이 중지되지 않는 한 협조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각주:28]

시리아의 집권 마파이 당과 예루살렘에서 5월 11일, 회견을 가진 이스라엘 수상 레비 에쉬콜은 국경 분쟁이 다시 발생한다면 이스라엘은 4월 7일처럼 주저없이 대규모의 공군폭격으로 보복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같은날, 이스라엘의 전권대사 기드온 라파엘도 이스라엘 정보국장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스라엘은 주위의 위협에 대응하여 자위권을 발동해야 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각주:29]

5월 12일, 텔아비브 발로 제임스 페론은 이스라엘 지도부가 시리아를 상대로 무력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고 보고하면서 “기간과 지역을 제한한 상태로 상당한 규모의 병력 ”을 사용할 것이며 “신빙성있는 소식통”에 의하면, “이집트(공식적으로는 통합 아랍 공화국)와 시리아는 아랍 권에서 가장 밀접한 동맹국가이므로, 이스라엘에 적대행동을 취할 수 있다”라고 전했다. [각주:30] 5월 초, 이스라엘내각은 결국 시리아에 대한 제한적인 공세를 승인했으나, 이즈하크 라빈은 배스 당 정부의 에쉬콜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각주:31] 보다 대규모의 공세를 허락할 것을 요청한다.

 

보웬 보고서 (이스라엘과 시리아 간의 충돌에 관한 1967년 4월7일, 다마스커스 영국대사관의 보고서.)

가장 사태를 비관하고 있던 소식은 UPI의 5월 12일 보도 내용으로 “이스라엘 고위 소식통이 오늘 밝힌 바에 의하면, 이스라엘 군은 시리아가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적 위협행동을 중지하지 않을 경우, 다마스커스의 군사 정권에 적대적인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군사소식통들은 그런 상황이 발생할 경우,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시 리아 정부에 대한 치명타가 될 것이다.” 서방과 아랍국가들은 모두, 그 익명의 소식통이 이즈하크 라빈일 것으로 보았으나 사실은 이스라엘 국방첩보부장 알론 야리브가 밝힌 것이었다. 자서전에서 야리브는, 시리아에 대 한 전면 공격으로 다마스커스를 점령하는 것은 가능한 최악의 경우를 상정한 것이었으나 아랍국가에게만 긴장이 강화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시리아에 대한 공격은 계획보다 훨씬 대규모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각주:32] [각주:33]

국경지대에서의 군사적활동이 증가됨에 따라, 아랍권 지도자들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이스라엘의 협상 안을 묵살하기로 합의하였으며, 이집트는 아랍진영의 핵심인물로 자리잡은 나세르의 승인 하에 시나이 반도 에 군사력을 재배치 하는 것으로 응수하기로 했다. 시리아도 강경대응 책을 확인했으나 즉각적인 침공준비를 준비하지는 않았다. 소련은 아랍국가들을 군사적으로 지원했고, 후일 소련 첩보부장 니콜라이 포드고르니가 5월 13일, 이집트 부 통령 안와르 사다트에게 이스라엘 군이 시리아 국경선으로 침공을 시작했다는 잘못된 첩보를 제공했다는 것 이 밝혀졌다. 1967년 5월, 시리아 국방상 하페즈 아사드(Hafez Assad)는 “우리군은 (이스라엘군의)공세에 대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해방전쟁을 수행하여 아랍권에서 시오니스트들을 축출할 준비가 되어있다. 시리아 군은 통합되고, 준비되어 있으며 나는 군인으로써, 전멸전(battle of annihilation)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는다.”고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