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2차 중동전쟁, 1. 운하와 분쟁

구름위 2013. 6. 12.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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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중동전쟁 중, 시나이 반도에 참호를 파고 대기중인 이스라엘 군인들.


수에즈 분쟁 [각주:1] (The Suez Crisis,
Arabic: ???? ?????? - ??????? ????????; Hebrew: ???? ????)은 1956년 10월 29일부터 이집트 영토 내에서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 연합국과 이집트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각주:2] [각주:3] 1956년 7월 26일, 영국과 미국이 아스완 댐 건설 자금 지원을 취소한 보복으로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포한 것이 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각주:4]


배경

수에즈 운하는 프랑스와 이집트 정부의 재정적 지원하에 1869년 개통되었다. 표면적으로, 운하는 이집트 영토의 일부였으며 수에즈 해운 운하 회사(정식명칭은 Compagnie universelle du canal maritime de Suez = the Universal Company of the Suez Maritime Canal) 또한 당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일부였던 이집트 소속의 회사였다.

그런데 운하 건설 당시에 관심을 크게 보이지 않던 영국은 인도, 극동, 오스트레일리아, 뉴 질랜드 등에 식민지를 확보하고 있는 상황에서 본국과의 중요한 해상 연결로라는 점에서 수에즈 운하의 전략적 가치에 점점 주목하기 시작한다. 1875년 영국의 벤자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수상은 이 회사의 이집트 지분을 구매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당시 대부분, 프랑스 개인 투자자들이 지분을 소유하고 있던 수에즈운하회사에 대한 부분적인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1882년, 이집트의 분쟁에 개입한 영국은 운하에 대한 사실상의 (de facto) 소유권을 획득하여 운하의 운영, 수익, 재정 부분을 총감독하게 되었다.

1888년의 콘스탄티노플 조약은 운하가 영국 보호하의 중립지역임을 선언했고 [각주:5]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전시와 평시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국가의 선박이 운하를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음에 동의했다. [각주:6]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선박


수에즈 운하의 전략적 중요성은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에서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있던 일본에게 유리한 요소로 작용했는데,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기지인 여순(Port Arthur)에 일본이 기습공격을 가하자 러시아는 증원부대로 발틱함대를 파견하는데 영국은 이 함대의 수에즈 운하 통과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 함대는 아프리카를 돌아가야 했고 일본 해군은 양 함대가 합류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각개격파를 달성할 수 있었다. [각주:7]

수에즈 운하의 전략적 중요성은 세계대전을 통해서 더욱 명확해진다. 1차 세계대전중, 영국과 프랑스는 연합국 이외의 선박은 수에즈 운하를 통과시키지 않았으며 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는 북아프리카에서의 추축국의 일련의 군사행동이 이 지역에서의 영국의 독점적 지배권에 심각한 위협이 되기도 하였다.

석유산업사가인 데니엘 예르긴은 다음과 같은 말로 수에즈의 가치를 설명하고 있다.

"1948년, 인도가 대영제국에서 독립함으로써 그때까지 보유하고 있던 전통적인 전략적 가치를 상실하였다. 동시에, 수에즈 운하는 제국통치망의 중추가 아니라 석유운송의 중추로서 새로운 전략적 가치를 획득하게 되었다. 수에즈 운하의 존재는 유럽으로 운송되는 석유운반로를 12,000km 단축시켜주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1955년 운하를 통과하는 화물의 2/3는 유조선이었으며 유럽으로 운송되는 석유의 2/3이 운하를 통과하고 있었다." [각주:8]

1948년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가 종료되면서 영국군은 1947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철수하였으며 이스라엘은 UNSCOP(United Nations Special Committee on Palestine)의 분리독립안에 기초하여 독립을 선언했다. 아랍 연합이 UN 결의안에 의한 2국가 분리독립 승인을 거부하고 신생 이스라엘 공화국을 침공하면서 시작된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둠에 따라, 주변국가들과 이스라엘 간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달렸다.



분쟁의 원인이 되는 사건들.

1950년대 초

1950년대, 중동지역에서 주도적인 세력이었던 영국은 지역에서의 역학관계를 재조정 하고 있었다. 방대한 석유자원과 수에즈 운하는 냉전기에 중동의 가치를 급속히 상승시켰고 영국은 이곳에서의 지배권을 재확립하기 위해 이집트와 이라크 왕국에 대한 영향력 확보에 힘을 쏟고 있었다.

영국은 이 지역에 상당수의 병력을 주둔하고 있었고 수에즈에는 약 8만여명[각주:9] 의 경비병력이 상주하여 세계최대규모의 병력 주둔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비록 이 때문에 전통적인 이집트-영국의 우호관계에 균열이 생기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었기는 했지만, 이곳은 중동에서 영국의 국가전략에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런데 2차대전을 겪은후 이집트의 내부 정세는 경제적 불균형과 인플레이션, 고용불안 등으로 급진적인 변화를 맞게 되었다. 사회 불안이 심해지자 공산당이나 무슬림 형제당같은 급진적 정단단체들이 영향력을 확대하갔고 영국과 이집트 내부에 미치는 영국의 영향력에 대한 적대감도 급속히 확장되었는데, 특히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영국에 대한 적대감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고, [각주:10] 이러한 상황변화는 이집트 정부의 정책에 반영되었고 반 영국 정책이 이집트에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1951년 이집트 정부는 일방적으로 1936년에 체결된, 20년간에 걸쳐 영국에게 수에즈 기지를 임대하는 1936년 영국-이집트 조약의 종료를 선언한다. [각주:11] 영국은 조약을 근거로 수에즈에서 철군하지 않고 다만 주둔병력의 규모를 감축하겠다고 답했으나 이후로 영국과 수에즈 주둔 영국군에 대한 이집트의 반응은 이집트 당국이 무간섭을 표방한 가운데 적대감의 강도를 더해갔다. 1952년 1월 25일, 영국은 분란을 일으킨 이스마일리아(Ismailia)의 경찰 주둔지역을 무장해제하였고 그 와중에 41명의 이집트 인이 사망했다. [각주:12] 이 때문에 카이로에서는 대규모 반 서방 폭동이 발생하여 11명의 영국인을 포함한 다수의 외국인이 사망하고 재산이 파괴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각주:13] 이윽고 이 폭동은 반 이집트 왕정을 목표로 바뀌게 되었다.

1952년 7월 23일, 무하마드 나기브(Muhammad Neguib) 장군을 내세운 가말 압둘 나세르의 이끄는 "자유 장교단"이
영국의 충실한 동맹자였던 파로크 1세(King Farouk I)의 정부를 전복시키는 쿠데타를 일으켜 독립적이고 아랍민족주의에 충실한 성향을 가진 집단이 이집트의 정치적 지배세력이 되어 공화국을 수립했다.


혁명 이후

영국은 쿠데타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와의 친선을 회복하고자 노력했으며 이러한 교섭의 일부는 1953년과 1954년에 그 성과를 나타내었다. 1953년 이집트는 나일 계곡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면서 그 대가로 영국은 1956년에 수단에서의 식민지배를 종식했고, 1954년 10월에 영국과 이집트는 수에즈 기지의 반환문제에 합의하여 20개월 이내로 영국군이 철수하면서 기지 자체의 반환은 7년 후까지 보유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각주:14]

그러나, 영국과의 합의를 통한 관계개선에도 불구하고 나세르는 영국과 관계를 장기간 유지할 마음은 없었다. 수단에 대한 영향력을 포기한 대신, 향후 2년간에 걸쳐 영국에게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을 수차례 요구했으며 이 문제는 나세르에게는 1954년 그의 암살시도가 있을 정도로 혼란한 내부 정국을 개선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쿠데타로 집권했기 때문에 지지기반이 확실하지 않은 나세르는 자신의 통치기반을 확고히 하고 이집트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집트가 아랍권의 지도층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1955년의 바그다드 조약은 영국과 우호적인 이라크를 중심으로 아랍권을 재편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오인케 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에 대한 반응으로 이집트는 이 지역에서의 영국의 영향력에 도전하는 형태로 표출되었고 이것은 수에즈 운하 사태를 촉발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각주:15]


영국과 나세르 간의 불화

1955~1956에 걸쳐 나세르는 중동에서 영국의 의도에 반하는 일련의 정책들을 실시하고 이것은 영국과 이집트 간의 적대도를 상승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나세르는 "서방측의 방위조약들 대부분에 대하여 식민 정책의 일환이며, 아랍의 분열과 약화를 획책하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으며, 특히 이스라엘과 관련된 문제들은 영국의 음모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다." [각주:16] 또, 바그다드 조약을 영국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에 대한 영향력 확대와 지역 재편의 의도로 판단하여 하시미트 왕가와 잠재적 경쟁관계에 있는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친교를 추진하는 동시에 암만에서의 반대시위를 지원하였고, 1956년 3월에는 영국 출신의 유능한 요르단 군 지휘관 글룹 파샤를 해임하도록 후세인 국왕을 부추키는 등 영국의 중동정책을 혼란으로 몰고갔다. [각주:17]

그러나 영국에게 가장 뼈아팠던 것은 나세르가 1955년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무기를 수입함으로써 [각주:18] 무기체계를 전환하면서 부터였다. 이집트는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200대의 탱크와 150문의 야포, 120여기의 미그 제트기, 50기의 제트 폭격기, 20기의 수송기에 15기의 헬리콥터를 비롯하여 수백대의 차량과 수천정의 현대식 소총, 기관총 등을 구입했다. 무기들은 즉각 배성송되었으며 대금의 지불은 12년에 걸쳐 이집트가 체코슬로바키아에 면화를 수출하는 것이 계약이었다. 이집트가 확보한 무기의 양은 일찌기 아랍구나이 접해본 적이 없는 것이었으며 시리아도 100대의 탱크와 100여기의 미그기를 포함한 수백개의 무기와 체코출신 훈련교관 및 군사원조단을 파견하는 것과 발맞추어 이루어졌다. 불가리아도 상당수의 지뢰 제거기를 이집트와 시리아에 판매했으며 불가리아는 다시 4척의 구축함과 2척의 잠수함, 1척의 프리깃 함을 이집트에 판매하고 2척의 잠수함과 1척의 미사일 발사정을 시리아에 판매하였다.

이러한 대규모 무기 거래는 체코슬로바키아와 불가리아가 이 지역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보이게 된 것 이상으로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무기를 이집트와 시리아에 제공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미국의 긴장감도 높아졌다. 영국 내각도 상황을 주목하면서 앤소니 이든 수상이 나세르를 무솔리니에 비교하는 등 [각주:19], 영국과 이집트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운하의 국유화와 위기로 가는 길.

영국은 나세르의 혈기를 다독이면서 미국이 지원해주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당시에 워싱턴은 중동문제에 관하여 미적지근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 미국의 가장 든든한 동맹국인 사우디 아라비아는 근본적으로 이집트와 체결한 바그다드 조약에 의거하여 요르단에 반대하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이것은 미국의 중동에 대한 태도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던 시기였다. 하지만, 바그다드 조약은 근본적으로 영국이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는 점에서 실패였고 "영국은 나세르 정부를 전복시키기를 원했으나 미국은 체코와의 무기구매를 못마땅하게 여기기는 했어도 이것이 나세르에게 도움이 된다면 용납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각주:20]

한편, 이 위기를 더욱 확대시킨 것은 1956년 봄부터 여름에 걸친 시기의 일로, 5월 16일, 나세르는 반둥회담 이후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중공을 승인함으로써 타이완에 호의적인 미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와 미행정부의 반감을 샀다. [각주:21] 이 때문에 미국은 7월 19일, 아스완 댐 건설에 관련된 미국의 차관제공을 중지하겠다는 통보를 했고 이미 이집트 경제력의 한계를 훨씬 상회하고 있었던 아스완 건설로 골머리를 앓게 된 나세르는 이에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로 맞선다. 7월 26일, 알렉산드리아에서 행한 연설에서 나세르는 신중하게도 페르디낭 드 레셉스(Ferdinand de Lesseps) [각주:22] 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이집트 군이 수에즈 운하의 통제를 맡고, 운하를 국유화하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연설을 통해 [각주:23]
영국계 자본이 지분의 44%를 소유하고 있던 수에즈 운하회사의 국유화를 선언한다.

이제 중동에서 영국의 입지가 약화되었음은 명백해졌고, 대영제국 유지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수에즈 운하는 적대적인 외국의 소유가 되었다. 게다가 더욱 큰 문제는 수에즈 기지에서 병력을 철수하고 반환한다면 이 지역의 문제에 조속히 대응할 수 없게 되는 점이었다. 영국은 미국이 압력을 가하여 나세르의 결정을 취소하기를 원했지만 미 행정부는 영국의 동기를 잘못 판단했을 뿐 아니라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 문제로 고심하느라 이 지역에서 일체의 실력행사도 거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제 프랑스와 연합하여 무력을 행사함으로써 미국과 불화를 빚으며 영국-아랍 관계가 결정적인 파국을 맞게 할 것인가, 아니면 아무것도 행하지 않다가 이 지역에서 영국의 위신을 완전히 잃어버릴 것인가 라는 딜레머에 빠지게 된 영국은 설상가상으로 내부적으로는, 1956년의 상황을 1930년대에 뮌헨 회담으로 나찌스에게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던 것과 비교하고 있던 보수당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제 영국은 절망적인 상태로 프랑스와 이스라엘과 군사협정을 통해 수에즈 운하를 탈환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아랍의 이스라엘에 대한 경제-군사적 압력

이스라엘을 압박하기 위하여 아랍권은 1950년대 초부터 일련의 경제 제재 조치를 실시하고 있었으며 이런 제재 중에는 이스라엘의 주변지역을 모조리 봉쇄하여 모든 형태의 통신, 교통수단을 차단하려는 움직이밍 있었다.

아랍국가들은 항구에서 이스라엘 국적이거나 이스라엘을 향하는 모든 선박의 입항을 금지했으며 만약 이스라엘의 항구에 들리려는 선박은 도착하기 전이나 후나 어떠한 항구에도 입항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되고, 이 때문에 이스라엘의 해운 무역은 거의 봉쇄될 상황에 놓였다.

또, 이스라엘을 경유했거나 착륙했던 어떠한 항공기도 아랍의 영공을 통과할 수는 없었으며 이스라엘 비자를 여권에받은 적이 있는 인물은 무조건 아랍국가의 입국이 금지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랍 정부들은 사기업들이 이스라엘과 연관된 사업을 하는 것도 금지하였으며 다른 국가들도 금수조치에 참가하도록 압력을 불어넣는 중이었다.

1950년 7월, 이집트는 자국 항구를 통과하는 모든 선박의 선장은 모든 운송물의 최종 목적지를 밝혀야 한다는 법안을 통과했고, 이 제한은 명백히 중립국 항구를 거쳐 이스라엘로 반입되는 물자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모든 조치들은 이스라엘 경제에 영향을 미치기는 했으나 [각주:24] 이스라엘 경제는 여전히 성장세를 이어나갔다. [각주:25]

"이집트는 파라오의 후손들, 이슬람의 전사들이 주축이 되어 이스라엘을 '정화'시켜야 한다. ... 우리는 이스라엘과 싸울 것이며 그 결과는 이스라엘의 멸망이다. 우리와 이스라엘 간에 평화란 있을 수 없다."

 - 나세르. 1955년 8월


"나는 이스라엘과 홀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나의 임무는 아랍세계에 반이스라엘 정서를 일으키는 것이다. 우리의 증오는 매우 강력하며 이스라엘과 평화적인 협상과 대화의 여지는 없다. 협상의 여지는 '조금도' 있을 수 없다."

- 나세르. 1955년 10월 14일.


"종전협정이 발호된 이후, 지난 6년간 이집트-이스라엘 국경에서는 1,843회의 무장 강탈 행위가 있었으며 1,339건의 무장충돌이 있었다. 이집트 군은 435회 영토을 침범하였으며 이집트 군은 172회에 걸쳐서 소규모 국경 충돌을 야기하였다. 이집트의 이런 일련의 군사적 행동들의 결과로 28명의 이스라엘 인이 사망하고 127명이 부상당하고 있다."

- 이스라엘 UN대사 아바 에단. 1956년 10월 30일.


한편, 나세르의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 국경선 근처에서 활동하는 아랍 게릴라(Fedayeen)들을 후원했다. 이집트 정보부는 아랍 게릴라들에게 군사훈련과 무기를 제공하면서 이들을 이용하여 적대적인 행동에 들어갔는데, 이들은 이스라엘 영토내에서 사보타지와 살인을 자행했고 개중에는 요르단을 근거지로 하는 아랍 게릴라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여기에 반격에 나섰으며 이러한 준군사활동은 모두 1949년 휴전협정을 위반하는 행위였으나 UN 안보리에서 비난을 받은 것은 이스라엘 뿐이었다. [각주:26] 이런 상황에서 양측의 적대감은 고조되었고 이스라엘은 아랍 게릴라들과 주변 아랍국에 보복할 방법을 찾게 된다.

당시 가자 지구는 이스라엘 남부에서 아랍 게릴라 활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고 이스라엘 방위군은 1953년부터 수차례에 걸쳐 가자 지구에 보복공격을 가했고, 아리엘 샤론이 이끄는 101 특수부대가 보복공격을 실시한 것이 다비드 벤구리온의 강경파와 모세 샤렛의 온건파 사이에서 주요 쟁점이 되고 있다. 



영국-프랑스-미국 외교관계

자유진영의 세축을 이루는 미영프 삼국은 8월 1일, 영국 수상관저에서 영국 외무장관 셀윈 로이드(Selwyn Lloyd)와 주영 미국대사 로버트 머피(Robert D. Murphy), 프랑스 외무장관 크리스티앙 피노(Christian Pineau)가 참가한 자리에서 앞으로의 대처를 논의했다. [각주:27] 이후 영국 수상 이든 경과 프랑스 국무총리 가이 모렛(Guy Mollet)은 공조를 이루어 런던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참모총장에 스톡웰 장군(General Stockwell)과 바요 제독(Admiral Barjot)을 임명했다.
다른 한편으로 영국은 이스라엘의 이집트에 대한 공격을 미루기 위해 1956년에 미국과 공조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고,
1956년 7~10월, 미국은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을 긴장관계를 완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양자간에 운하의 운영에 대한 국제회의를 주선하였으나 아무런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프랑스는 이스라엘 과의 비밀 접촉을 통해 영-프 연합군과 공조할 현지 세력을 마련하고 미국의 핵우산을 무력화 하기 위해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각주:28]



세브르 의정서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회사를 국유화한 후 3개월 동안, 이스라엘과 프랑스 영국은 파리 근교의 세브르에서 회담을 가졌다. 3국은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로 진출하면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하는 상황에서 이집트 군과 이스라엘 군이 상호간에 운하 16km 밖으로 에 주둔하고 이집트와 협상을 진행하여 중요지역을 이집트 군에게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하면서 운하지역의 경비를 영국과 프랑스가 중립구역으로 경비한다는 내용의 세부사항에 합의하였다.

이 협상에서 각국의 입장은 서로 달랐는데, 영국은 제국의 남은 부분들을 상실할 것에 노심초사 중이었고 프랑스는 나세르가 자국의 북아프리카 식민지 지역에 대해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운하가 석유의 주요 운송로로 기능해주기를 원했고 이스라엘은 운하를 통해 이스라엘의 선적을 재개하면서 남쪽 국경의 방어를 강화하는 동시에 위험하고 강력한 적대국가를 약화시키기를 원했다.

작전에 우선해서 영국은 미국인들과 신중히 교섭을 진행해 나갔다. 당시 영국은 나세르가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하는 것 때문에 고심하는 미국이 결국은 영국과 프랑스를 지지하리라 예측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식민제국의 결정적인 패착이었음이 후일 드러나게 될 것이다

 

침공




시나이 전역 작전도.



카데시 작전 : 이스라엘의 시나이 반도 작전

카데시 작전은 시나이 북부에 위치한 신명기(Deuteronomy)에 언급되는 고대도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작전에서 이스라엘의 군사적 목표는 샬름 엘 세이크(Sharm el-Sheikh), 알 아리쉬(al-Arish), 아부 우와율라(Abu Uwayulah), 가자 지구(Gaza Strip)라는 4대 목표를 점령하는 데 있었다. [각주:1] 이집트의 티란해협 봉쇄망 중심에 있는 샬람 엘 세이크를 점령하게 되면 이스라엘은 1953년 후 처음으로 홍해를 접하여 인도양으로 통하는 연결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가자 지구가 선정된 이유는 아랍 게릴라들의 훈련시설이 위치한 이곳을 점령함으로써 역으로 이스라엘이 이곳을 이용해서 게릴라 전술을 이집트에게 펼칠 수도 있다는 경고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또, 시나이 반도에서 이집트의 병력, 장비, 주요 통제소가 위치하고 있는 알 아리쉬와 아부 우와율라는 이스라엘 군의 신속한 전진으로 발생할 수 있는 측면 공격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 공격 목표로 선정되었다. 이들 목표지점을 모두 점령한다면, 시나이 반도 전역에서 이집트의 전략계획에는 치명타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이집트 군이 본국으로 후퇴하면 나머지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떠맡아서 이집트의 반격을 적절히 처리하게 되어 있었다.



남 시나이 반도의 초동작전

이스라엘군 총참모장 모세 다얀 소장은 초기 단계에서 미틀라(Mitla Pass)를 점령, 통로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기에 이스라엘 독립전쟁에 참전했고 후일 이스라엘군 총사령관이 될, 라파엘 에이단 중령(Lieutenant Colonel Rafael Eitan)이 지휘하는 202 공수여단 1대대를 요충지인 제벨 하이탄(Jebel Haitan) 근처 파커 기념비(Parker's Memorial)에 투입할 계획을 세운다. 202 공수여단의 잔류 인원은 아리엘 샤론(Ariel Sharon) 대령의 지휘하에 전진해서 항공투입된 1대대와 합류할 예정이었다.

1956년 10월 29일, 3시 30분, 16대의 다코다 수송기가 텔아비브 공항을이륙함으로써 시나이 점령을 위한 카데쉬 작전이 개시되었다. 실행단계에서 작전은 예정되로 진행되지 않아 당초 목표되었던 지점에서 몇 km정도 떨어진 지역에 투입되어 시간과 노력이 들긴 했지만 결국 지정 위치까지 이동하는 데 성공한 선발대는 항공기에서 투하된 중장비도 수령하여 참호를 구축하고 대기 태세에 들어갔다.



아카바 만의 초기 작전과 중부전선

한편, 제9보병 여단은 샬름 엘 세이크를 공격하기 위한 주요한 거점이 될 라스 알 나크브(Ras al-Naqb)를 포위한 다음 정면 공격 대신 일부를 배후로 우회하던 중 통로를 찾아내어 이집트 군이 방어태세를 갖추기 전에 기습하는데 성공, 큰 피해가 따르리라 예상한 것과는 달리 한명의 사상자도 없이 이집트 군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요시프 하르파 대령(Colonel Josef Harpaz) 지휘하의 제4보병 여단은 아부 우와율라를 공격하기 위한 거점이 될 알 쿼세이마(al-Qusaymah)를 점령했다.


자벨 하탄 전투와 202 공수여단의 공격

아리엘 샤론이 지휘하는 202 공수여단은 1대대와 합류, 모래바람을 틈타 점령지를 손쉽게 점령하는 데 성공하여 30일에는 나클라(Nakla) 근교의 이탄(Eytan) 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한다.

전선이 너무 확대될 것을 우려한 모세 다얀은 더 이상 미틀라를 통해 진군하지 말도록 명령했지만 샤론은 자벨 하탄의 이집트군 주둔지를 바로 공격하기로 결심한다. 중화기와 항공기의 지원을 받는 이집트 군 주둔지를 경무장 공수부대 만으로 공격하는 것은 무리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극심한 손해를 입으면서도 이집트 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나중에 샤론의 책임 문제로 논쟁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볼때, 이스라엘이 입은 인명 손실의 대부분은 자벨 하탄 공격에서 입은 것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의 작전 계획도.



영국과 프랑스의 대응군

침공을 지원하기 위하여 대규모 공군이 키프로스와 말타에 배치되었으며 수많은 항공모함이 이 지역에 배치되었다. 키프로스의 두 공군비행장과 증설된 세번재 비행장은 수많은 프랑스 군용기들로 가득차 있었고 말타 섬은 영구공군의 루카 폭격비행대가 근거지로 활용하고 있었다. 영국은 항공모함 HMS Eagle, Albion, Bulwark를 이 지역에 파견하였고 프랑스도 항모 Arromanches, Lafayette를 파견하였다. 이에 더하여 영국 해군은 HMS Ocean, Theseus를 영국 헬리콥터 공수부대의 공수작전을 위한 경유지점으로 준비해두었다.(세계최초의 헬리콥터 공수작전).

한편, 이스라엘 국경 경비대는 이스라엘-요르단 접경지대에서 준군사집단화 하여 요르단 강 서안을 포함한 중립지대에서 군정활동을 벌였고 이 와중에 10월 29일, 이스라엘 군에 의하여 48명의 아랍 민간인이 사망하는 카프르 카심 학살 사건(Kafr Qasim massacre)이 일어났다.

10월 30일,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에 최후통첩을 보내었고 31일, 삼총사 작전(Operation Musketeer)을 발동하여 대규모 폭격을 시작했다. 11월 3일, 제 14, 15 비행대 소속의 F4U-7 콜세어 20기가 프랑스 항모 아로망쉬와 라파예트에서 이륙, 카이로 공항을 폭격했고, 이에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에 있던 선박 40여척을 모두 침몰시키고 57년 초까지 더이상의 선박통행을 금지시키는 것으로 화답했다.

11월 5일에는 영국의 제3공수대대가 엘가밀 비행장(El Gamil Airfield)에 공수되어 이 지역을 점령하고 항공지원 기지를 확보하여 항공지원 및 수송로를 확보했다. 이에 발맞추어 11월 6일 미명에는 영국의 42, 40 코만도 왕립 해병대가 2차대전 시절의 상륙정을 사용, 해변에 상륙하였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전함전대는 지원을 위해 해변에 일제포화를 퍼부어 해안의 이집트 포대를 철저히 파괴했다. 이 와중에 포트 사이드 시가지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또, 영국군과 연계하여 프랑스도 알제리에서 제2식민 공수 여단(2eme RPC) 소속의 중무장 공수부대원 500여명을 노라틀라스 노르드 2501 항공기로 알 라스와 다리(al-Raswa Bridge)쪽에 투입하였으며 연속으로 공병단과 방어병력을 투입해왔다. 2명의 병사가 사망하기는 하였으나 서쪽 가교들은 프랑스 공수부대에게 순조롭게 제압되었고 14, 15 비행대 소속의 F4U 콜세어는 일련의 항공 폭격을 수행하여 수대의 SU-100 대전차 포를 파괴했다. 동시에 F-84F 부대는 포트 사이드의 대규모 유류저장탱크를 파괴하기도 하여 시가지 대부분의 수일 동안 불길과 매연에 덮이는 피해를 입혔다. 이집트군의 잔존부대가 미약한 저항을 시도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주요 부대는 거의 저항없이 붕괴되어 버렸다.



포트사이드의 프랑스 제 2공수부대 1956년 10월.


정오에는 프랑스의 제1공수부대(Regiment Etranger Parachutiste, 1st Foreign Parachute Regiment) 소속의 공수부대원 522명이 포트 포드(Port Fouad) 근교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프랑스 공군의 콜세어들의 항공지원을 받기로 되어 있었으나 항모 라파예트에서 사출기 고장이 발생하여 예정에 훨씬 못미치는 40기 정도만이 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상륙작전에서 프랑스는 10여명의 병사들이 사망하고 30여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게 되었다.

영국의 제 45코만도 특공대는 헬기로 공수기습작전을 수행하여 해안포대를 공격하기로 하였으나 항모에서 출동한 영국항공기들의 오인폭격으로 인하여 45명의 특공대원과 사령부가 파괴되는 대가를 치루어야 했고, 시가전에 돌입하면서 잘 은폐되어 있던 이집트 저격병들에 의하여 더욱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라파 전투

가자지구의 전략적 요충지 라파에서 2차 중동전을 통털어 양측모두 가장 많은 희생자를 발생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곳은 시나이 반도의 핵심인 가자지구를 점령하기 위한 최고의 요충지였으며 협상테이블의 카드로 사용하기 위해 중요한 지역이었다. 다급해진 이스라엘 총사령부는 제 1보병여단과 제 27기갑 여단을 급파하지만 이 전투가 마치 무인지대를 질주하는 것 같았던 다른 전투와는 전혀 다를 것이었다.

이집트군은 이곳에 6개 보병대대와 1개 포병연대, 셔먼전차 1개 중대를 비롯하여 아처 대전차 자주포 15문을 배치해두고 강력한 진지와 지뢰밭, 철조망 지대로 보강된 방어진을 구축한 상황이었기에 단기간의 작전은 무리였지만 상황은 너무 긴박했다. 공군 또한 너무 근접한 양측의 위치로 인하여 지원을 할 수 없었다.

11 1, 새벽3시 이스라엘군은 일제 공격을 개시하여 지뢰지대를 개척하고 참호에 육박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피아간 구분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 제 1보병여단 1대대 A중대장 요나단 대위는 악전고투 끝에 점령목표인 25진지에 돌입하는데 성공하였고 인접한 진지를 할당받은 나할 중대원들과 합류한 이스라엘 군은 운좋게도 26진지와 이어진 좁다란 교통호를 발견하여 대혼란에 빠진 적을 교통호를 통해 기습하는데 성공한다. 날이 밝으면 전차부대가 돌입할 것이었으며 완전히 적진지를 장악하지 못한 이상 전차대의 위기가 문제시 되어 이스라엘 기갑부대의 지휘관들은 전차를 안전지대로 철수 시키고 참호를 파서 장기전에 대비하자고 건의하였으나, 총사령부는 의견을 기각했다. 이스라엘 기갑부대는 공병들이 간신히 개척한 통로를 통해 진지에 육박전을 펼쳤고 결국 이날 라파 방어선을 이스라엘군이 점령했다.

이스라엘 군은 시나이 반도 전역에서 후퇴하는 이집트 군을 추격하기 시작했고 전선이 붕괴된 이집트 군은 아카바만의 요새, 셀름 알 세아크에서 항복하여 시나이 반도에서의 군사행동을 포기하게 된다.



정전과 철수

군사적으로, 수에즈 운하 작전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으나 정치적으로는 외부적인 요인들로 인하여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수에즈를 둘러싸고 미국은 소련과 헝가리 사태에서 혁명의 유혈진압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이던 미국은 유럽의 주요 동맹국의 행동으로 인하여 소련을 비난할 외교적 카드를 잃게 되었다. 게다가 미국은 소련 및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이집트 편을 들어 전쟁이 더욱 확대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으며, 런던과 파리, 텔아비브를 향하여 "어떤 종류의 파괴적인 무력 행사"도 배제할 수 없다는 위협을 받고 있었으나, 사실 당시 동구권은 헝가리 소요 사태를 진압하는데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예상한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이제나워 행정부는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에게 휴전을 권고하였으나 연합군은 이에 대해서 응하지 않았다. 미국은 침공 정지를 요구하면서, UN 안전보장 이사회에 정전결의를 요구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에, 미국은 UN 총회에 안건을 상정하면서 재차 병력 철수를 요청했고 총회는 "즉각적인 정전"을 요청하는 한편, UN긴급대응군(United Nations Emergency Force)의 구성 등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 1001호 (resolutions 1001)을 승인했다. [각주:2] 게다가 포르투갈과 아이슬란드는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에서 철군하지 않는다면, NATO에서 제명하자는 제안을 내놓기 까지 하여 [각주:3], 국제 외교에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영국과 프랑스는 1주일 만에 이 지역에서 철군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과 NATO는 영국에게 재정적인 압박을 가하였으며 아이젠하워는 미 정부가 영국의 파운드화 보유분을 매각해서 영국 경제를 붕괴시키겠다고 위협했다. 또, 사우디 아라비아가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석유 수출 금지를 선언하자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원조 요청을 거부했고, NATO의 다른 회원 국가들도 아랍으로 부터 수입한 석유를 영국과 프랑스에 제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각주:4] 동시에, 영국연방(British Commonwealth) 내에서도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져, 캐나다 수상 루이스 로렌트와 오스트레일리아 수상 멘지스의 비난 성명도 당시까지 영 연방 회원국을 대영제국의 일원이며 국제사회의 역학관계에서 영국의 자동적인 지지자로 간주하고 있던 영국정부에게 타격이 되었다.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 영국 정부와 파운드화는 심각한 압력을 받게 되었고 이든 수상은 사임하였으며 영국은 1956년 11월 6일 이 지역에서 프랑스와 이스라엘은 따르지 않을 것이라 경고하면서 철수했다. 포트 사이드의 부대는 런던의 사령부에서 추가 지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결국 1956년 12월 22일, 영국-프랑스 작전부대는 UNEF(UN 긴급대응군)의 덴마크, 콜롬비아 군에게 임무를 인수 인계하고 철수했다. [각주:5]한다. 이스라엘 군은 57년 3월에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하였다.


1962년 이집트-이스라엘 국경지역의 UNEF소속 캐나다 군.

철수가 이루어지기 전, 캐나다 내각의 외무장관이며 훗날 캐나다 수상이 될, 레스터 피어슨(Lester Pearson)은 국제연합 비상군(UNEF)이 수에즈에 배치되어 "정치적인 협상이 완성되기 전에 경계선을 유지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국제연합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외교적인 협상의 기간 중에 NATO나 바르샤바 조약기구 같은 주요 동맹기구들과 관련이 없는 중립국가 군이 "인간띠"를 구축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UN 평화유지군이 창설되었으며 피어슨은 이 공로로 5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으고, 현대적인 "평화유지"개념의 대부가 되었다.



래스터 B 피어슨




결과



이스라엘 군 공식 잡지, B'Mehaneh 11월 4일자. 이스라엘 군, 육해공에서 승리를 거두다.


참전세력 이스라엘, 영국, 프랑스 이집트
참전병력 이스라엘 : 175,000
영국 : 45,000
프랑스 : 34,000
이집트 : 300,000
사상자 이스라엘 사망 197명
영국 사망 56명 부상 91명
프랑스 사망 10명 부상 43명
이집트 사망 650명
부상 2,900명
포로 2,000명




영국에게 이 전쟁은 포클랜드 전쟁 이전에 최후로 해외에서 미국의 도움 없이 군사력을 이용한 사건이었고, 그 결과는 이든 수상의 불명예스러운 퇴임이었다. 그러나 나이젤 애쉬튼(Niegel Ashton)은 "수에즈 사건으로 이 지역에서 영국의 국제전략이 변화된 것은 별로 없다"고 평했으며 해롤드 맥밀란(Harold Macmillan)은 이든의 모든 결정은 나세르의 폭주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평하고 있는 등, 외교적인 패배가 가져온 영향에 대해서는 분분한 논란이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의 위상이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또, 이 사건은 NATO 동맹의 약함과 무계획성, 공조 부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드골의 관점에서 수에즈 사건은 프랑스가 외교 정책 추구에 있어서 더이상 연합군, 특히 미국에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후, 1957년 프랑스는 사하라 사막에서 핵실험을 강행하고, [각주:6] 소련만이 아니라 프랑스에 대한 잠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대응군(Force de frappe)을 창설하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시작하고 1966년에는 NATO의 군사 지휘체계에서 탈퇴했다.
또, 세브르 협약에 따라, 프랑스는 비밀리에 기폭기술을 비롯한 자국의 핵기술을 이스라엘에 넘겨준다. [각주:7]

국제무대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취약성이 드러났고 나세르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아랍세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으며 범아랍민족주의를 전진시키고 이스라엘과 서방에 대한 강경론을 부각시켰다. 동시에, 이 위기는 식민시대에 조종을 울렸고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대부분이 이후 몇년 내로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수에즈 사건 이후, 아덴과 이라크가 중동에서 영국의 핵심적인 기지가 되었으며 프랑스는 베이루트와 튀니지의 비제르타를 근거지로 하게 된다.

국제연합평화유지군은 시나이에서 주둔하면서 1956년부터 1967년까지 지역에서 소규모의 충돌은 있었지만 이 지역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예산 문제로 1967년에는 병력이 3,378명까지 축소되었으나 이 때부터 이집트는 다시금 시나이 반도에 무장병력을 배치하였으며 유엔군에게 철군을 요청하고 티란 해협을 봉쇄하며 지역에서 군사적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이는 결국 6일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수년후, 아이제나워는 미국이 수에즈 위기에서 미국의 냉전시기 유럽에서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었던 프랑스와 영국의 힘을 약화시키는 결정을 하는 최대의 실수를 저질렀다고 회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