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릴랜드 작전(1862년 9월 3일부터 9월 15일까지)
1862년 초 북부는 동부전선에서 전쟁을 끝날듯한 기세로 공세에 나섰지만 가을이 오자 상황은 뒤바뀌어 있었다. 북군은 워싱턴에 포위되는 신세였고 남군은 여름내내 이어진 공세로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지만 병력 손실이 막대했지만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듯 했다. 리는 이 기회를 이용해 개전이래 계속 방어만 하던 상황에서 역으로 북부를 공격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게 된다. 메릴랜드와 펜실베니아를 비롯한 북부 주들로 진출해 볼티모어-오하이오 철로를 끊는다면 워싱턴으로 연결되는 보급선을 차단하는 동시에 서부에서 북부가 누리고 있는 우세를 뒤엎을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게다가 계속되는 전란과 포프의 약탈로 황폐해진 남부 버지니아 주의 농장과 달리 아직 전쟁의 피해를 받지 않은 북부의 농장에서 월동할 식량을 확보할 수도 있고 지금까지 처럼 남부 내에서 맞아 싸우는 것이 아니라 북부를 공격해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면 연말의 미연방 하원선거에도 영향을 주어 링컨을 협상무대로 끌어낼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리고 잘 된다면 매릴랜드를 비롯한 남북 경계지역의 노예주에서도 호응을 끌어낼 수 있을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이 때문에 리는 9월 7일 메릴랜드의 프레더릭에서 포토맥강을 도하해 펜실베니아의 해리스버그를 노리고 북진을 시작했다. 필라델피아를 비롯한 동부의 대도시들을 노린 북 버지니아 군의 침공소식은 북부를 혼란에 빠트렸고 링컨은 반도작전이후 지위가 불분명했던 조지 B. 맥클랠런을 워싱턴 주변 전군의 지휘관으로 복귀시키는 재빠른 조치를 취한다. 맥클랠런은 다시금 행정가로서의 수완을 발휘해 북군을 빠르게 재조직하고 8만 7천명에 달하는 북군을 다시금 포토맥 군으로 통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반면 남군에서는 북부 침공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내거나 열악한 보급사정으로 북부에서의 원거리 작전 수행능력이 부족한 등의 문제들 때문에 북상할때 5만5천에 달하던 병력이 4만 5천으로 줄어들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리는 수가 줄어든 자신의 군을 나누어 여러가지 목표를 동시에 공격하게 했다.
메릴랜드 작전지도.
롱스트리트는 해거스타운으로 파견되었고 섀넌도어 계곡을 통한 리의 보급선을 지휘하고 있던 잭슨은 하퍼스 페리에 있는 북군 무기고를 점령토록 했다. 하퍼스 페리의 무기고는 대량의 총기가 보관되어 있었지만 방어병력은 부족하고 주변 지형상 3면이 감제고지로 둘러쌓여 있어서 방어하기가 어려워 남군에게 유혹적인 목표물이었다. 이 떄문에 맥클랠런은 하퍼스 페리의 방어병력을 자신의 군에 합류시킬 것을 요청했지만 북군 총사령관 할렉은 요청을 기각했다. 결국 지원없이 하퍼스 페리를 방어하던 북군은 고지대를 점령하고 포격을 시작한 잭슨에게 쉽게 패했다. 잭슨은 간단하게 저항을 분쇄하고 9월 15일 12,000명이 넘는 방어병력에게서 항복을 받아내었으며 대량의 보급품과 총기등을 노획했다.
하퍼스 페리 작전.
맥클랠런은 포토맥군을 이끌고 천천히 리를 뒤쫓아 9월 13일, 프레데릭에 도달했다. 그런데 여기서 2명의 북군 병사가 시가 종이에 쌓여 있는 리의 작전안(명령 191호) 전체 사본을 발견하면서 상황은 긴박해졌다. 명령서에는 리가 지리적으로 떨어진 목표물들을 공략하느라 군을 분산시켜두었다는 것이 상세하게 드러나 있었다. 맥클랠런은 이런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 기뻐했지만 또 다시 군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첫 부대를 움직이기까지는 18시간이나 걸렸으며 남부 동조자를 통해 맥클랠런이 작전서를 입수한 것을 알게된 리는 각개격파를 당하지 않기 위해 서둘러 병력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하퍼스 페리의 잭슨도 리와 조속히 합류하기 위해 A.P. 힐 사단에 점령작업을 맡긴채 집결지로 강행군을 시작했다.
포토맥 군은 14일 밤 사우스 마운틴에 있는 북버지니아 군의 후퇴로에 공격을 가해 통로 셋을 모두 점령한다. 이로써 리는 병력이 분산된 상태로 중요한 거점마저 상실해 휘하 병력은 2만도 안되었으며 북군에게 완전히 열세에 놓여 무사히 후퇴하는 것도 벅찬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 맥클랠런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리는 그냥 퇴각하기 보다는 잭슨과 합류해 메릴랜드의 샤프스버그에서 북군을 맞아 싸우기로 한다.
앤티텀
9월 16일 맥클랠런은 샤프스버그 근처의 안티텀 크리크 서쪽에서 리와 마주한다. 앞에 개울이 흐르는 언덕으로 구성된 이 지역은 방어에 유리하긴 했지만 우회 기동할 공간이 부족했고 배후에는 포토맥강이 흐르는 이른바 ‘배수의 진’이었다.
앤티텀 작전도.
북군이 도착했을 때 수적으로 3배에 달하는 우위에 있었으나 남군의 다른 부대들이 위치가 불명해 배후의 위협을 우려한 맥클랠런은 공격을 하루 늦췄다. 이런 지연 덕분에 남군은 방어진지를 강화할 시간을 얻었으며 롱스트리트와 잭슨의 군이 무사히 본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아침 5시 30분 부터 7시 30분까지. 북군이 남군 좌익과 옥수수밭을 사이에 두고 전투개시
아침 7시 30분부터 9시까지. 북군의 공격으로 남군 방어선 일부가 뚫림
아침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롱스트리트가 증원해서 양군이 혼전상태
아침 10시부터 오후 4시 까지. 번사이드의 도섭작전.
9월 17일 새벽녘에 북군의 조셉 후커 군단이 남군 좌익에 맹공을 퍼부으면서 안티텀 전투가 시작되었다. 맥클랠런은 전체적인 작전을 명확히 하지 않아 각 지휘관들이 연계하지 못한채 좌익과 우익 공격이 모두 별개로 이루어졌다. 오전에는 좌익의 후커 군단이 맹공을 개시했다. 덩커 교회 근처의 밀러 옥수수밭을 사이에 두고 양군이 사격하는 가운데 성큰로드를 따라 이루어진 북군의 돌격은 남군의 방어선 일부를 돌파했으나 연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전과를 확대할 수 없었다. 오후에는 번사이드의 군단이 안티텀 크리크의 석교를 지나 남군의 우익에 공격을 개시했다. 도섭지점을 놓고 혈전을 벌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도착한 A.P. 힐 사단이 반격에 나서 북군은 격퇴되었다.
링컨과 맥클랠런
앤티텀에서 리의 북진을 막아내는 공로를 세웠음에도 맥클랠런이 리를 추격하기 보다는 재편성과 재정비에만 몰두하자 링컨은 1862년 11월 7일, 결국 그를 해임시키고 포토맥군 사령관직에 앰브로즈 번사이드를 임명한다. 앤티텀 전투에서 북군의 좌익을 맡았으나 돋보일만한 활약은 없던 번사이드는 장군으로서의 재능보다는 멋진 구렛나루와 후장식 총기 등 각종 무기개발 관련 능력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한편 리는 무리한 공세로 지쳐있는 북버지니아 군에 병력을 증원하고 재정비를 하며 북부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지휘관이 절대로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 두가지 있다. 첫번째는 언제나 가능한한 적을 착각시키고 기만해서 기습하는 것이다. 그리고 적보다 우세한 상황이 되어 공격할 때에는 힘이 남아있는 한 적군이 괴멸되기까지 추격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맹열히 추격하다보면 적은 당황하게 되고 그럴때는 절반의 병력만으로도 괴멸시킬 수 있다. 또 한가지는 승산없는 상황에서 일부라도 아군을 빼낼 수 있는 상황있다면 절대로 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계속 승리를 거듭한다면 소규모 부대라도 능히 대군을 각개격파할 수 있고 그렇게 승리를 반복하게 되면 무적의 군대가 된다.” ? 스톤월 잭슨
프레데릭스버그
링컨 행정부와 할렉 총사령관의 공격독촉을 받은 번사이드는 늦가을에 남부에 대한 공격 계획을 입안했고 11월 9일 할렉과 적전안을 검토했다. 번사이드가 세운 작전의 골자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육로를 통해 리치몬드로 접근하는 것으로 로버트 E. 리를 따돌리고 프레데릭스버그에서 라파해넉 강을 건넌 다음 남군과 리치몬드 사이를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작전이 시작되자 계속해서 차질이 빚어졌다. 리의 북버지니아 군이 반응하는 것보다 먼저 방어에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작전상 기동속도가 가장 중요한 요소임에도 강을 건너는데 필수적인 부교 도착이 계속 늦어졌다. 가을비로 라파해넉 강이 계속 불어나는 사이에 리는 남군을 집결시키고 프레데릭스버그 뒤편 고지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다른 도하지점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번사이드는 결국 배후 고지에 위치한 강력한 북군 포병대의 지원사격을 믿고 남군 바로 앞에서 강을 건넌다는 대담한 작전을 그대로 실행하기로 한다. 12월 11일 북군의 공병기사들은 6개의 부교를 설치했고 포병의 엄호를 받으면서 도강에 성공한다.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개략도.
프레데릭스버그를 약탈한 북군은 12월 13일 도시 후면 고지에 방어선을 구축한 남군 우익의 작은 틈에 미드 사단이 공격하면서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한다. 기븐과 더블데이의 사단의 지원을 받으며 미드 사단은 남군 우익에 맹공을 퍼부었으나 안개로 북군 포병의 지원이 어려웠던 데다가 주변 부대와 보조가 맞지 않는 상황에서 남군의 반격을 당해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와 함께 마리예 고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북 버지니아 군 좌익에 후커와 섬너가 지휘하는 북군 6개 사단의 돌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포병의 지원없이 좁은 통로를 통해 고지에 위치한 방어선에 돌격한다는, 이 지나치게 무리한 공격으로 북군은 6,000명에 가까운 대규모 손실을 입으면서 작전 자체가 실패로 돌아갔다. 이날 하루동안의 작전으로 북군은 12,000명이나 되는 병력피해를 입었고 남군의 피해는 5,000명에 불과했다. 전투라기보다는 학살에 가까운, 북부의 참패였다.
1862년 12월 13일 오후 1시 섬너의 돌격.
1962년 12월 13일 오후 3시 30분. 후커의 돌격. 남군에 피켓이 증원되었다.
프레데릭스버그의 대패로 워싱턴은 좌절했지만 번사이드는 아직 지휘권을 유지했다. 프레데릭스버그 남쪽에서 공세를 재개하려고 했던 번사이드는 1963년 1월 전례없는 동계작전을 강행하던 중 3일간 계속된 겨울비 속의 ‘진흙 행군’으로 휘하 군단장과 격심한 마찰을 빚게 되었다. 이 때문에 번사이드는 자신이 사임하거나 휘하 군단장들을 모두 교체하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워싱턴에 통보했고 결국 그를 대신해 조셉 후커 군단장이 포토맥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챈슬러스빌
스톤월 잭슨의 죽음
겨우내 프레데릭스버그를 사이에 두고 대치해온 남군을 앞에 두고 후커는 그동안 다양한 활약을 보여온 젭 스튜어트의 남군 기병대처럼 북군 기병대를 집중시켜 운용해서 남군의 보급선을 교란시키는 것으로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다. 그와 함께 대치상태에서 무리하게 강을 건너는 것보다 2배가 넘는 병력 우위를 살려 세드윅의 1개 군단은 프레데릭스버그에 남아 리의 주의를 끌고 나머지 부대가 은밀하게 기동해 리 뒤쪽으로 돌아가 측면에서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한편 대치중인 리는 북군이 다른 지역에서 강을 건널 수 없게 하기 위해 가뜩이나 열세인 병력을 쪼개어 롱스트리트에게 병력 일부를 맡기고 사우스 버지니아까지 방어하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리는 57,000명의 병력으로 97,000에 달하는 북군을 상대해야 되는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 전략은 나중에 남군에서도 그때까지의 북군 전략중 가장 탁월한 작전이었다고 인정할 정도로 북군은 안개를 틈타 남군이 눈치채기 전에 상당한 거리를 우회했고 5월 1일 포토맥 군 주력이 라피단 강을 건너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기병대의 대부분이 후방교란에 동원되어 정보능력이 크게 떨어져 있다는 것과 경험이 부족한 신임 사령관의 잘못된 판단이 결정적인 화근이 되었다. 버지니아 군의 리는 대치중인 세드윅 군단이 적극적인 공격이 아니라 양동작전을 실시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병력면에서 열세인 상황에서 적을 앞에 두고 부대를 분할하는 모험을 시도했다. 챈슬러스빌로 급히 이동한 남군이 북군 일부와 조우전을 벌이게 되자 후커는 갑작스럽게 자신감을 상실하고 예정대로 공격해서 지금껏 전진한 지역 주변의 고지대를 점령하는 대신 후퇴해서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했다. 리는 이 상황에서 재차 병력을 분할해 스톤월 잭슨에게 2만명의 병력을 주고 다시 우회 가동하여 북군 우익을 기습하도록 했다. 북군의 기병정찰 능력이 제한된 것 때문에 잭슨은 올리버 O. 하워드가 지휘하는 북군 6군단이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완벽한 기습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조우전에서 북군이 교전없이 물러나는 바람에 고지대를 점령한 남군 포병대의 화력앞에 북군은 다시금 방어선을 후퇴시켜야 했다.
5월 1일과 2일 챈슬러스빌 주변의 상황. 시클스가 전진중에 후커의 명령으로 고지를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다. 배후로 돌아온 잭슨은 와일더니스를 통해 하워드를 측면에서 기습해 북군을 몰아넣는데 성공. 그 와중에 스톤월 잭슨이 전사한다.
이제 주공을 맡은 포토맥군 주력은 방어에 묶였고 후커는 세드윅에게 강을 건너 공격을 나서도록 지시했지만 통신이 원활하지 않아 세드윅은 명령을 너무 늦게 받았다. 역시 기병대 부족으로 정찰이 어려웠던 세드윅은 강 건너편의 남군이 훨씬 더 규모가 방대하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안개에 쌓인 강 너머에 있는 것은 얼리가 이끄는 1개 사단과 리가 만약을 대비해 남겨놓은 1개 연대 뿐이었다. 세드윅은 앰브로즈 번사이드가 그토록 원했지만 실패했던 프레데릭스버그의 마리예 고지 점령을 성공했으나 후커의 독촉으로 리의 배후를 위협하기 위해 무리하게 서쪽으로 전진하던 중 후커가 방어선을 굳히는 것을 확인하고 주력을 돌린 북 버지니아 군에게 반격을 당했다. 서둘러 전진하느라 프레데릭스버그 주변의 진지도 점령하지 못한 세드윅은 큰 피해를 입고 도로 강을 건너가야 했고 이로써 후커의 작전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5월 3일의 상황. 스튜어트가 잭슨의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남군 좌익이 챈슬러스빌에서 북군을 밀어붙이는 가운데 세드윅의 남군은 프레데릭스빌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지연작전에 말려들었다.
5월 4일의 상황. 다시 방어를 전환한 남군에게 세드윅도 포위됨.
5월 7일 결국 후커는 전군을 라파해넉 강 이북으로 후퇴시켰다. 리는 2배에 가까운 북군을 상대로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군의 25%에 가까운 13,000명의 병력을 상실했다. 더 큰 손실은 자신의 휘하 장군 중 가장 공세적인 스톤월 잭슨이 북군 6군단을 공격하고 정찰하던 중 아군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북군도 17,000명의 병력을 상실했지만 비율로 본다면 전 병력의 12%로 더 적은 피해였지만 실패한 작전이었다. 연이은 실패로, 특히 그동안 자신만만한 준비를 갖추었던 챈슬러스빌의 패전은 북부의 사기에 더욱 큰 상처를 입혔다.
앤티텀 전투에서 남군과 북군의 전력차이는 거의 2:1에 달했지만 맥클랠런은 최후까지 1/3 이상에 달하는 2개군단 5만여 병력을 전혀 전투에 투입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리는 좌익과 우익을 차례로 공격한 북군에게 전군으로 대응해 전열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전투는 오후 5시 30분에 끝났으나 이날 하루동안 23,000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북군은 총병력의 25%를 남군은 31%를 상실했으며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날이었다. 리는 부상자를 교환한 다음 일시적으로 휴전하고 북 버지니아 군에게 포토맥강을 건너 섀넌도어 계곡으로 철수하게 했다. 이로써 리의 메릴랜드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앤티텀 전투는 전술적으로 무승부였지만 남군의 침공을 막아내었다는 점을 이용해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선언함으로써 유럽 열강이 전쟁에 참여할 수 없게 함으로써 북부는 전략적으로 승리를 거둔셈이 되었다
우리가 언덕(리틀 라운드 탑)에 도달했을 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가득한 연기와 불길 너머로 보이는 물웅덩이에는 주인을 잃은 말과 싸우고, 도망치고, 쫓아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공기는 화약냄새로 가득하고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돌격선의 외침소리, 덜컥거리는 총소리, 포탄의 폭발음 그리고 부상자들의 비명소리가 화음을 이루어 마치 밀턴의 실낙원에 나올 듯한 지옥의 모습 그 자체가 펼쳐져 있었다. - 북군 대위 포터 폴리
1863년 6월 로버트 E. 리는 챈슬러스빌의 승리를 발판으로 1862년의 전략을 따라 북부로 진격할 계획을 세운다. 북부로의 진격은 전쟁때문에 피폐해진 버지니아의 농부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북부의 사기를 위협하면서 펜실베니아의 주도인 해리스버그나 볼티모어, 메릴랜드 등의 주요 도시를 점령할 수 있을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 그러나 작년에 경험한 바로는 북부로 진격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부담이 따르는 일로 충분한 지리정보와 주민들의 호응이 없는 북부로 공격했을때 남군이 지금까지와 같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게다가 미시시피 강에 남은 남부의 유일한 거점인 빅스버그가 율리시스 S. 그랜트의 북군에게 포위당해 함락직전인 상태는 큰 걱정거리였다. 하지만 리는 빅스버그를 구원하기 위해 병력을 이동시키는 것보다 워싱턴을 직접 위협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또 작년에 맥클랠런이 그렇게 정확히 자신의 작전을 꿰뚫어본 것이 실수로 작전계획서를 잃어버린 것 때문임을 알게된 것도 같은 전략을 반복할 수 있는 자신감을 제공했다.
북진에 앞서 리는 자신의 오른팔과 같던 잭슨이 죽음으로써 그동안 2개 군단으로 유지해오던 북 버지니아군의 지휘체계를 3개 군단 체제로 바꾸었다. 그동안 1군단장 직을 맡아오던 제임스 롱스트리트 중장은 유임하고 잭슨 밑에서 사단장을 맡아오던 리처드 S. 이월과 A.P. 힐이 각기 군단장이 되었다. 이들을 지휘해서 리는 프레데릭스버그로부터 섀넌도어 계곡을 통해 블루 리지 산맥으로 병력 이동을 은닉한 채 북부로 남군을 이동시켰다. 한편 포토맥 군의 사령관 조셉 후커는 리가 병력을 이동하자 기병대를 파견해 북 버지니아 군의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파견된 북군 기병대는 6월 9일 브랜디 스테이션에서 젭 스튜어트의 남군 기병대를 공격해 남북전쟁중 최대규모의 기병간 전투가 벌였으나 무승부로 끝났다. 이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스튜어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재량권을 활용해 북 버지니아군 사령부의 통제를 벗어나 북군의 동쪽을 우회해 여러 도시들을 약탈하고 철도를 파괴하는 장거리 기병활동을 개시했다.
게티스버그 작전도
후커는 포토맥군 전체를 지휘해 리의 추격에 나섰으나 챈슬러스빌에서 입은 자신감의 상처는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하퍼스페리 수비문제로 북군 총사령관 할렉과 언쟁을 벌인 그는 결국 사직서를 제출했고 6월 28일 링컨은 후커를 대신해 5군단장 조지 G. 미드를 포토맥군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미드는 갑작스럽게 지휘관직을 맡아 당황했으며 남군의 3개 군단이 어디있는지 확인하지 못했음에도 일단 남군의 진격속도에 맞추어 추격하기 시작했다. 기병대가 없는 리는 북군의 움직임을 모르고 있었으나 첩보원들을 통해 북군이 남군과 병행해서 추격해오고 있음을 알자 당황했다. 포토맥 강을 넘어 북진한 북버지니아 군은 이미 메릴랜드를 넘어 펜실베니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상태로 리처드 이월은 서스퀘하나 강을 건너 해리스버그를 향하고 있었고 제임스 롱스트리트는 챔버스버그의 산악지역에 있었다. 북군의 위치와 의도등을 알려주어야 할 젭 스튜어트의 기병대는 장거리 파괴활동을 하느라 사령부와 연락이 닿지 않고 있어 리는 장님인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리는 전군이 각개격파되기 일단 캐쉬타운으로 집결하도록 명령을 내렸으나 6월 30일 캐쉬타운으로 이동한 힐군단의 노스캐롤라이나 여단이 게티스버그에 접근했다가 북군 기병대와 조우하면서 예상치 않게 게티스버그가 남군과 북군의 격전지가 되었다.
게티스버그 (July 5?14)
게티스버그에 집결한 양군 병력 16만명이 3일간 벌인 전투는 남북전쟁의 전환점으로 알려지게 된다.
게티스버그 1일차 작전도
7월 1일 아침 5시에 전초부대간의 교전에서는 남군의 헨리 히스 사단이 뷰포드가 이끄는 북군 기병대와 존 F. 레이놀드 1군단에게 격퇴되었지만 게티스버그 북쪽에 반원형 방어선을 구축한 북군 6군단과 1군단이 오후에 이월과 힐이 방어선의 측면을 공격당해 게티스버그 남쪽으로 후퇴했다. 남쪽의 세미터리 힐에 북군은 재차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리는 이월에게 ‘가능하면’ 세미터리 힐을 점령하도록 지시했으나 잭슨의 직설적인 명령법에 익숙한 이월은 피해를 각오하고 적극적으로 공격하기 보다 기다리는 것을 선택했다. 그동안 휘하 장군들의 자율성을 존중해 좋은 결과를 거두었던 리였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전투 2일째와 3일째에 남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는 결과를 낳아 결정적 패착이 되었다.
게티스버그 2일차 작전도
7월 2일 리는 북군 좌익과 우익에 맹공을 퍼부었다. 낚시바늘 모양으로 방어선을 구축한 북군은 리틀 라운드탑, 데빌스 덴, 휘트필드, 복숭아 과수원과 세메터리 힐 동편, 컬프스 힐에서 남군과 치열한 교전을 거듭했다. 원래 리는 좌익과 우익의 공격순서를 조율해 북군이 방어병력을 재배치 못하게 하려 했지만 스튜어트의 기병대가 전장에 없었던 관계로 불확실한 정보에 기인해서 세워진 작전이 되었다. 챈슬러스빌에서 방어에 유리한 고지를 앞두고 명령에 따라 후퇴했다가 작전 전체를 망친 경험이 있는 북군의 시클스 군단은 세미터리 힐 남쪽의 방어구역을 벗어나 보다 방어에 유리한 서쪽의 리틀 라운드탑으로 전진하다가 롱스트리트에게 집중 공격을 당했다. 이 때문에 리틀 라운드탑을 둘러싸고 격렬한 교전이 벌어졌으며 시클스의 제3군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미드가 보낸 예비전력의 도움으로 북군은 결국 방어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게티스버그 3일차 작전도
7월 3일 리는 전날과 같은 방식으로 북군의 방어선을 뚫으려 노력했으며 양군 포병이 맹렬한 포격을 교환한 다음 피켓이 3개 사단을 이끌고 북군 중앙부에 돌격을 시도했다. 이 돌격으로 북군 방어선 일부가 무너지기도 했지만 북군 증원부대가 재빨리 방어선의 빈틈을 매꾸면서 결국 3개 사단을 투입한 피켓 돌격은 실패했다. 이 시점에서야 스튜어트가 돌아와 북군 배후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주전장 동쪽에서 북군 기병대와 교전을 벌이느라 목적 달성에는 실패했다.
게티스버그 후퇴도.
양군은 7월 4일까지 게티스버그에 머물렀지만 결국 리는 더 이상의 공세를 포기하고 포토맥 강을 건너 버지니아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같은 날 빅스버그를 북군이 점령하면서 전황은 미시시피 강을 제압당해 동서로 분단되어버린 남부에 결정적으로 불리해졌다. 미드는 후퇴하는 남군의 추격에 나섰으나 결국 리의 후퇴를 막지 못했고 1863년 가을 브리스토와 마인 런에서 시작된 두번의 공세에도 모두 패배하면서 게티스버그의 승리를 전쟁 전체의 승리로 확대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7월 14일 양군을 합쳐서 5만명 이상의 희생자가 나온 게티스버그 전역은 종결되었지만 사망자 매장등 사후처리는 4개월이 지나 링컨이 게티스버그 추모연설을 할때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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