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 들때까지 나는 집에 걸린 로버트 E. 리 장군과 스톤월 잭슨 장군의 초상화를 성부와 성자의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 조지 패튼.
스톤월 잭슨
1862년 봄이 되자 불런 전투에서 승리한 기쁨은 빠르게 사라지고 남부는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서부 전역의 도넬슨 요새와 실로에서 북군에게 연패를 당한데 이어 조지 B. 맥클랠런이 지휘하는 포토맥군은 날로 강성해지며 남부의 수도 리치몬드를 위협하고 있었다.
맥클랠런은 1861년 겨울 동안 북부 정치가들의 독전을 무시하고 남군과 싸우기 보다는 신생 포토맥군의 훈련을 강화하는데 전념했다. 워싱턴 남쪽으로 50km 떨어진 센트레빌에 주둔중인 조셉 E. 존스턴 장군의 남군을 우려한 링컨은 수차례 남부에 공세로 나설 것을 요청했지만 맥클랠런은 요지부동이었다. 존스턴 군의 병력 규모를 과대평가한 맥클랠런은 직접 존스턴 군과 교전하기 보다는 남부의 수도인 리치몬드를 공략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버지니아 반도에 해로를 이용해 접근한 다음 그곳에서 리치먼드를 공략하고 동시에 북방에서는 어빈 맥도웰 소장이, 나타니엘 P. 뱅크스 소장은 곡창지대인 섀넌도어 계곡을 통해 접근한다는 전략은 맥클랠런의 뛰어난 구상력을 보여주는 웅대한 작전이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남부의 상황은 버지니아 군사학교 교수 출신의 스톤웰 잭슨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맞춘다. 불런 전투에서 ‘스톤월’이라는 별명을 얻은 잭슨은 공세에 나서기에는 훈련과 장비가 부족한 민병대를 이끌고 병력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뱅크스의 북군과 대치중이었다. 정치가 출신의 뱅크스 장군이 포토맥 강을 건너기 전에 잭슨은 겨울동안 기병대 지휘관 터너 애슈비 대령에게 체셔피크와 오하이오 운하, 볼티모어와 오하이오 철도등을 습격하도록 지시했다. 뱅크스는 2월말 남군 기병대를 쫓아내기 위해 포토맥강을 건너 운하와 철도 지역에 병력을 전개했으며 이 상황에서 잭슨은 존스턴 군의 좌익을 맡고 있었으나 3월에 매너사스를 떠나 컬페퍼로 존스턴이 후퇴하면서 윈체스터에 있는 잭슨은 고립되어버린 상태였다.
3월 12일 뱅크스가 남쪽으로 전진해 윈체스터를 점령하자 병력에서 밀리는 잭슨은 스트라스버그로 후퇴했다. 맥클랠런의 전략에 의하면 뱅크스는 잭슨을 섀넌도어 계곡에서 완전히 몰아낸 다음, 보다 워싱턴에 가까운 지점으로 철수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그와 함께 맥클랠런은 3월 17일 뱅크스가 윈체스터를 출발해 남쪽으로 공세를 개시하는 것과 맞추어 버지니아 반도에 상륙했다.
잭슨은 현저한 병력차이 때문에 가능한한 교전을 피하되 뱅크스가 맥클랠런을 지원할 수 없도록 계속 붙잡아 두라는 어려운 명령을 존스턴에게 받고 있었다. 그런데 뱅크스는 잭슨이 이미 섀넌도어 계곡을 떠났다는 잘못된 정보를 받고는 동쪽으로 전진해 워싱턴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를 막아야만 하는 잭슨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교전을 결심한다.
1862년 3월 23일 북군은 컨스톤에서 남군과 전투를 벌여 잭슨의 섀넌도어 군 좌익에 역습을 가해 후퇴시켰다. 잭슨은 비록 전술적으로는 계곡작전 유일한 패배를 당했지만 링컨 대통령의 주의를 끌어 뱅크스의 군을 계곡에 잔류하게 하고 프레데릭스버그 주변에 주둔한 맥도웰의 3만 병력을 끌어내어 맥클랠런이 5만명의 병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전략적으로는 승리를 거두었다.
17,000명으로 병력이 증원된 잭슨은 계곡에 흩어져 있는 북군이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할 계획을 세웠다. 자신의 목적을 숨기기 위해 험난한 기동로를 선택한 잭슨은 5월 8일 맥도웰 군을 만나 치열한 격전 끝에 북군을 격파했다. 프레데릭스버그로 후퇴한 맥도웰의 군을 증원하기 위해 뱅크스는 1개 사단을 파견해 병력이 8,000명으로 감소하자 버지니아의 스트라스버그에 있는 북군 방어선까지 후퇴했다.
5월 21일, 잭슨은 뉴마켓에 있는 사령부를 동부로 이동한 다음 북쪽으로 신속하게 전진했다. 작전중 보여준 엄청난 속도의 기동은 잭슨이 지휘하는 보병부대에 ‘잭슨의 도보기병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유명해졌으며 북군을 각개격파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잭슨은 기병을 북쪽으로 파견해 뱅크스가 잭슨의 의도가 스트라스버그를 공격하는데 있다고 기만하게 한 다음 주병력은 프론트 로얄에 있는 전초기지를 격파하고 다시 하퍼스 페리에 있는 뱅크스의 통신선을 파괴할 계획을 세우고 5월 23일, 프론트 로얄 전투에서 북군의 수비대를 기습해 쫓아내었다. 이 승리로 스트라스버그에 있는 뱅크스는 윈체스터로 재차 후퇴하게 된다.
잭슨은 전과를 확대하고 싶었지만 추격하기에는 병력이 너무 지쳐있었고 북군의 보급차를 약탈하느라 기동이 둔화된 나머지 되어 후퇴하는 북군을 쫓아가지 못했다. 기병대와 합류한 잭슨은 5월 25일 윈체스터에서 뱅크스의 군을 다시 격파해 포토맥강 너머로 쫓아내었다.
이렇게 되자 잭슨에게는 워싱턴을 공격할 의도나 그럴 역량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링컨과 전쟁장관 에드윈 M. 스탠턴은 워싱턴이 직접적으로 위협을 받을 듯한 상황이라고 판단해 잭슨을 패퇴시키는 일을 맥클랠런에 대한 지원보다 우선순위로 놓았다. 워싱턴은 맥도웰의 2만 병력으로 프론트 로얄을 탈환토록 하는 한편 프레몬트를 해리슨버그로 파견해 잭슨이 계곡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인 스트라스버그를 공략하게 했다. 리치몬드를 공격중이던 맥클랠런은 전체적인 공조가 붕괴되어 열세에 놓였다고 판단해 결과적으로는 반도전역 자체가 실패하는 원인을 만든다.
6월 2일 북군 2개 군단이 추격에 나서자 잭슨은 크로스 키와 포트 리퍼블릭에서 방서 프레몬트와 쉴즈의 병력을 8일과 9일에 연달아 격퇴했다. 북군이 계곡에서 완전히 철수해 워싱턴을 방어하는 위치로 후퇴하자 잭슨도 섀넌도어를 빠져나가 버지니아에서 맥클랠런과 대치중인 로버트 E. 리 장군에게 합류했다.
연일 계속되는 격전으로 반도전역에서의 7일전투에서는 활발한 움직임을 보일 수 없었지만 잭슨은 맥클랠런이 5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활용할 수 없도록 만드는 임무를 완수했다. 계곡작전의 성공으로 스톤월 잭슨은 남부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기동과 기습을 활용한 작전의 교범과도 같은 대활약을 펼치며 잭슨의 계곡군은 48일 동안 1,040km를 주파하면서 17,000명의 병력으로 60,000명의 적을 각개격파하는 전과를 올리며 리 장군과 함께 남부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올랐다.
“맥클랠런은 지적인 공학자이고 장교였지만 대군을 이끌만한 지휘관은 못되었다. 자신감있게 공격하고 전진하는 것도, 싸우는 것도 그와는 거리가 멀었고 그건 맥클랠런이 소심하거나 의심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는 작전을 지휘하는 것을 좋아했고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참모로 두는 것을, 군대의 퍼레이드와 힘을 즐겼다. 맥클랠런은 반군을 뛰어넘기를 원했지만 그들을 죽이거나 파괴하기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 해군장관 기드온 웰즈.
반도작전 진행도
맥클랠런은 불런 전투의 패배로 사기가 땅에 떨어진 북군의 지휘를 맡아 포토맥군을 훈련시키며 1962년 겨울을 보냈다. 북부 정치가들은 워싱턴을 위협하고 있는 존스턴 군과 한없이 늘어나는 전비에 대한 걱정으로 하루라도 빨리 공세에 나서도록 지시했지만 맥클랠런은 요지부동이었다. 워싱턴 주변에 포진한 남군의 병력이 북군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본 맥클랠런은 정면으로 공격에 나서기 보다는 우세한 해군력을 이용해 우회해서 리치몬드를 공략해야 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제시했다. 라파해넉 강의 어바나까지 수로로 접근해서 존스턴이 돌아오기 전에 먼저 리치몬드를 포위한다는 그의 작전안에 워싱턴의 정치가들은 지나치게 대담하다는 점을 들어 난색을 표명했지만 맥클랠런은 요지부동이었다. 버지니아 주의 교통 시설이 열악하기 때문에 수로를 이용하는 것이 효율적이며 수도에는 방어병력을 배치할 것이고, 일단 북군이 리치몬드로 병력을 보낸다면 존스턴도 분명히 따라올 것이라며 맥클랠런은 정치가들을 설득시켜 나갔가. 장장 3개월에 걸친 토론 끝에 1862년 3월에야 링컨은 맥클랠런의 제안을 승인했다. 그러나 정작 작전을 실행하려고 하자 3월 9일에 존스턴이 컬페퍼의 센트레빌로 병력을 후퇴시켜 버렸고 맥클랠런이 기껏 세워둔 어바나 상륙계획은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차선책으로 그가 제시한 것은 포트 먼로에 상륙한 다음 그곳에서 제임스 강과 요크 강 사이의 버지니아 반도를 북상해 리치몬드로 향한다는 안이었다. 이로써 작전의 가능성과 필요성에 의문점이 생긴데다가 본격적인 작전에 들어가기 앞서 센트레빌에 가벼운 공세를 취하면서 존스턴 군이 지금껏 빈약한 병력으로 위장전술을 펴왔다는 것이 확인되자 맥클랠런의 소극주의는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3월 11일 링컨은 험난한 작전을 앞두고 있는 맥클랠런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이유로 그를 북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4개월간 스스로가 전쟁성과 장교단의 도움을 얻어 북군의 총지휘를 맡기로 결정한다. 한편, 남군이 철갑선이라는 신병기를 이용해 북군의 제해권을 위협하자 가뜩이나 추진이 어려워진 작전에 다시금 미묘한 변수가 생겨났다. 3월 8일과 9일 사이, 햄튼 수로에서는 CSS 버지니아와 USS 모니터간에 세계 최초로 철갑선 간에 전투가 벌여졌으나 무승부로 끝나버렸고 북군은 병력을 수송하는 동안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출발이 다시금 지연된 포토맥군은 3월 17일에야 포트 먼로를 향해 출발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해군으로부터 제임스 강이나 요크강에서 작전을 수행할 경우 보호할 수 없다는 경고를 들은 맥클랠런은 요크타운에 대한 직접 공격을 포기해야 했고 버지니아 반도를 전진하는 것은 4월 4일이나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5월 5일이 되자 맥클랠런은 링컨이 섀넌도어 계곡의 잭슨 때문에 포트 먼로로 이동하기로 계획되어 있던 어빈 맥도웰에게 새로 워싱턴 방어 임무를 맡겨버려서 애초에 제공받기로 약속되어 있던 수준의 병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계획된 대로 병력을 제공받지 못한다면 더이상 공세를 진행하지 않겠다고 항의했지만 워싱턴도 요지부동이었다. 처음부터 어긋난 작전은 한정없이 지연되기 시작했다.
리치몬드로
요크타운의 서전에서 남군을 간단히 격파한 북군은 해군이 햄튼 수로를 장악하고 노포크를 점령해서 배후의 위협도 제거해 가장 위험하다는 상륙작전에 성공했지만 공성장비들을 수송하느라 요크타운에서 장기간 지체해야 했다. 서서히 반도 북서쪽으로 전진하면서 북군은 5월 말까지 별다른 저항도 만나지 않고 리치몬드를 몇km남겨둔 지점까지 전진했지만 그 속도는 지극히 느렸다. 대규모 공성작전을 위해서 대구경 박격포를 다수 준비해온 맥클랠런은 열악한 기후와 도로사정 속에서 기어가다 시피했다. 게다가 맥클랠런이 신경과민상태에서 적이 두배나 더 많다고 상상해서 끈임없이 척후를 내보내고 정찰하고 진지를 구축하는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가뜩이나 느린 전진속도를 몇배나 더디게 만들었다. 실제로는 북군이 거의 두배 가까운 병력으로 압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맥클랠런은 들어오는 정보를 모두 거부하고 끝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조셉 E. 존스턴의 지휘하에 리치먼드로 후퇴하는 남군의 기만작전도 북군의 전진속도를 늦추는 요인이었다. 전쟁 전에 아마츄어 배우였던 존 B. 맥그루더 휘하의 사단은 소수의 부대가 같은 곳을 계속 반복해서 지나가게 하는 맹랑한 방법으로 대규모 부대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는 방법을 써서 맥클랠런의 우려에 부채질을 했다.
요크타운 전투
세븐파인즈 전투
간신히 리치몬드 외곽 방어선에 도달한 북군은 치카호미니 강변에 위치한 리치먼드를 공략하기 위해서 병력을 강을 사이에 끼고 둘로 나누었다. 이 때문에 둘로 나뉜 병력의 연결이 안좋아졌다는 걸 확인한 남군은 5월 31일부터 6월 1일까지 강 남쪽에 있는 북군에 맹공을 펼쳤다. 이렇게 시작된 세븐파인스 전투는 전술적으로는 무승부였지만 전략적으로는 대단히 중요한 두가지 효과를 가져왔다. 우선 남군의 지휘관 존스턴 장군이 부상을 당하면서 보다 공세적인 성향의 로버트 E. 리 장군이 북 버지니아 군의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맥클랠런은 공세를 포기하고 링컨에게 요청한 증원병력이 도착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게 되었다. 리는 맥클랠런이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한달 동안 리치몬드의 방어를 강화해 제임스 강 남쪽으로 피터스버그까지 방어선을 구축했다. 50km에 달하는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한 리는 소규모 부대의 수를 늘려 실제보다 더 많은 병력으로 보이게 하는 방법을 써서 맥클랠런을 기만하고 공세에 나설 준비를 갖추었다. 한편 젭 스튜어트 장군의 과감한 기병대 운용도 북군의 신경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후 반도작전에서 북군은 전략적 관성을 상실한채 내내 남군에게 끌려가게 된다.
맥클랠런, 남북전쟁 최대의 수수께끼
일반적으로 야전지휘관으로써 맥클랠런에 대한 평가는 낮지만 일부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의 속죄양이었을 뿐 유능한 지휘관이라는 견해도 있다. 미국내에서는 무엇보다 대통령 선거에서 남부와의 평화협상을 공약으로 링컨과 대립한 점과 그랜트와의 대조를 고려해보면 명장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해외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전장외에서 훈련과 조직관리 면에서는 굉장히 뛰어나 오합지졸의 지원병 집단 포토맥군을 남부의 북버지니아 군에 맞설만한 ‘군’으로 조직해낸 업적은 대단하지만 자신이 양성한 부대를 좀처럼 사용하려고 하기 보다는 틈만나면 훈련을 실시하면서 장병의 대우를 개선하는 등 연마하는데에만 열심이었다. 이러한 그의 관리능력은 게티스버그에 버금가는 피해를 낸 7일전투와 안티텀 전투에서 패배한 군을 회복시킨 원동력이 되었으며 장병 개개인의 지지도도 높았다.
전쟁터에서의 소극적인 지휘가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것은 내란 초기 웨스트 버지니아에서의 활약을 보면 명백하다. 스티븐 시어스 등은 자신이 손수 훈련시킨 병사들을 전장에서 잃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전투를 회피한 것으로 전장에서 병력을 지휘하는 데에는 부적합하지만 전략을 수립하는 능력에서는 대단히 뛰어나다고 평하고 있다. 특히 반도작전에서 그가 보인 소극성은 리치몬드를 점령하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해상봉쇄로 보급이 제약되어있는 남군이 북부로 침입할 수 없게 하는 것만으로도 전략적인 가치가 크기 때문에 상황에 맞춘 전법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런점 때문에 맥클랠런에 대한 평가는 논란이 많아.
전후 율리시스 그랜트는 자신보다 훨씬 더 뛰어난 전술가인 맥클랠런이 왜 해임되었는지가 수수께기라고 평가한적이 있다. 한편 남북전쟁 최고의 용병가로 명성이 높은 로버트 E. 리는 북군 최고의 명장이 누구냐는 질문에 "’이론의 여지없이 맥클랠런’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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