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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교과서에서 왜구를 설명하며 "그들은 일본인 외에 조선인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라고 쓰고 있다. 참으로 양심이 없는 표현이다. 왜구를 가장한 드문 도둑 사례를 침소봉대한 것이다. 이차대전 말기 미군의 일본 폭격은 여러 군사도시를 초토화했다. 이를 설명하면서 "미군의 일본 본토 폭격과 오키나와 공격은 효과적으로 전개되어 일본인들이 무서워했다. 미군 중에는 일본계 미군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라고 서술했으면 어떠했을까. 일본의 역사학 연구 수준은 높다고 평가를 받으나 왜구연구자는 판단력이 부족한 것 같다. 왜구를 일본인과 조선인의 연합체처럼 보는 인식이 극우의 부실한 역사교과서에 들어가도록 조장했다. 이런 허상을 배우면 역사문제에 바른 판단력을 갖기 어렵다. 일본의 왜구 연구는 우습다. 일본인의 해외활동과 대륙침략의 선구로서 그 활약상을 과시하면서 조선과 명에서 두려워했다는 전투력을 알리려고 한다. 동시에 통상을 하다가 약탈도 하게 됐고, 왜구 중엔 조선인과 중국인이 있기 때문에 꼭 우리만 나쁜 게 아니라고 변명도 하고 있다. 잔인했던 이 범죄집단을 미화하면서 숨기려는 복잡한 생각이 왜구연구에 들어가 설명과 결론이 비틀려 있다. ■ 처음에는 해적금지령 내려지기도 | ||||||||
시코쿠 에히메와 혼슈 히로시마 사이에 있는 무라카미(村上) 해적도 엄청난 무력을 가진 도요토미의 명령에 순종해야 했다. 무라카미 일파 중 구루시마(來島) 소굴은 도요토미에게 직속되었고, 노시마(能島) 소굴은 모리에게 소속되었다. 오사카의 와다나베와 사가의 마쓰우라, 그리고 기쥬의 구마노 등 큰 해적 무리부터 에히메의 나가노와 히로시마의 고바야가와 무리까지 재편되었다. 일본 사료에는 망상을 유도하는 기사가 적지 않다.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 기사가 대표적인데 그 허세에는 섬나라의 열등감과 협량감이 배어나온다. 도요토미도 조선과 명을 침공하겠다는 망상을 가졌다. 그것은 1930년대 후반 일본군 참모본부가 “소련을 타도하고 신중국을 건설하며 미국과 전쟁에 승리하여 전 세계를 지배”하겠다고 추진했던 전쟁계획과 비슷하다. 1592년의 조선 침략은 이런 망상과 함께 왜구의 경험을 과대평가한 것이었다. 왜구가 조선과 명에서 노략질을 쉽게 해오자 만만히 보았다. 그래서 대군만 보내면 쉽게 점령할 줄 알았다. 조선 침공에는 해상세력을 총동원해야 했다. 각 영주들이 예속시켰던 왜구는 물을 만났다. 왜구의 경험과 정보를 밑천으로 각각 육군과 수군에 편성되어 침략군을 선도한 것이다. 해로 안내와 물자 수송, 그리고 노획물 확보와 조선인의 일본 납치 등 할 일이 많았다.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연파한 적은 이런 왜구 수군이었다. 두목의 면면을 보면 아와지(淡路) 해적을 이끈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시마(志摩)의 해적 구키 요시타카, 구루시마(來島)의 무라카미해적인 토쿠이 미치유키(得居通幸)와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 구마노(熊野) 해적 호리노우치 우지요시(堀內氏善), 이요(伊予)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이다. 왜란은 왜구 노략질의 확대판이었다. 임란 때 15만 8천여 왜군이 내륙 깊숙이 쳐들어가 분탕질을 쳤고 정유재란 때는 14만여 왜군이 재침하였다. 전란의 양상은 약탈 방화 살육 도굴 납치 등 왜구의 수법 그대로였다. 정유재란 때는 각 분야에서 선진기술을 보유한 사람들을 기획 납치해갔다. ■ 기획 납치된 이삼평과 심수관의 도자기 | ||||||||
당시 중국은 한창 전란 중이었다. 임란 원병 등으로 쇠약해진 명은 청의 팔기군을 막을 힘이 없었다. 중국은 한 동안 혼란기가 계속되었고, 유명한 징더전(景德鎭) 청화자기는 유럽 판로가 막혔다. 이마리 자기는 그 틈을 타서 유명세를 높였다. | ||||||||
가고시마의 사쓰마번 영주 시마쓰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작심하고 여러 기술자들을 납치해왔다. 목화재배, 의학, 자수, 양봉, 토목, 기와, 도자기 등 분야도 다양했는데 심수관의 가마에서 생산한 질 좋은 도자기로 인해 '사쓰마'는 일본 도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 ||||||||
■ 야마구치와 가고시마의 왜구 문화 전승 조선과 일본에서 전승된 임란의 경험은 전혀 다르다. 임란을 겪은 유생들의 문집에는 의병의 전통이 가득하다. 왜적이 야기한 재난과 억울한 희생, 그리고 의병들의 충절이 절절히 담겨있다. 그 모든 전승에는 반일감정이 곁들여졌고,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았다. 야마구치와 가고시마를 비롯한 세토내해와 규슈 여러 지역에서 전해진 경험에는 전쟁의 참상이 없었다. 다만 언제든 기회가 오면 다시 조선에서 한탕을 하겠다는 꿈이 전승을 통해 키워졌다. 야마구치 하기의 병학자 요시다 쇼인이 배운 군사학에는 조선 침략이 내재되어 있었고, 제자들에겐 필생의 사업으로 강조하였다. 가고시마의 사무라이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7~77)는 유신 직후 국가를 뒤바꾸는 개혁을 앞에 두고도 침략을 주장하였다. 심지어 자신이 조선에 가서 말썽을 부리고 죽을 테니 그걸 이유로 전쟁을 일으키라고 선동하였다. 쇄국의 통제가 사라지자 이런 전쟁광이 속속 나와서 활약하였다. 어디에서 그런 발상이 나왔을까? 이들이 살던 지역이 왜구의 소굴이었다. 그리고 임란 때 횡재한 경험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 횡재는 수백 년 간 왜구 문화를 살찌우는 가훈으로 기능하였고,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자 침략군으로 부활하였다. ■ 왜구도 왜란도 침략도 막지 못해 한국사에서 왜구와 그 후예들에게 시달려온 일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세계 최강 몽골군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고려군의 기상은 어디론지 사라졌다. 조선에 들어와 왜구를 대비한 관방체제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왜군의 진격로 위에 있던 산성이나 읍성은 차단벽이 되지 못했고, 쓸만한 군대도 없었다. 정보력은 절망적이어서 전쟁이 닥쳐도 그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다. 한 시기를 지배한 정권 담당자는 군대를 알지 못했고, 장군들은 군대를 지휘할 역량이 부족했다. 화승총이나 후장총과 같이 세계 각지에서 무기가 끊임없이 발전하고 전투 방식도 달라지고 있었으나 그걸 파악할 안목이 없었다. 임란과 같은 커다란 경험을 단지 반감 수준으로만 전승하게 되면 화를 키우게 된다. 왜구를 경험한 사회가 왜란과 외침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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