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일. 게티즈버그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지난 이틀동안 첫날 전투에서 북군을 패주시켰으며, 둘째날은 거의 성공할 뻔했다. 하지만 북군을 격파하지는 못했고 중요 고지는 북군의 손에 있었다. 이 상황에서 남군이 취할 방법은 3가지로, 후퇴, 우회, 공격이었다.
여기서 후퇴란 7월 2일의 결과를 실패를 받아들이고 부대를 버지니아로 다시 돌아가는 방법이었다. 이는 1년전 1862년의 안티탐 전투의 재현이었다. 1년전 리의 남군은 1차 북부침공을 하여, 메릴랜드의 안티탐에서 다수의 북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냈지만, 워낙 숫적으로 열세하여 버지니아로 철수한 바 있었다. 리 스스로 가장 자부심을 가졌다는 훌륭한 전투지휘였지만, 적진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얻은 것은 없었다. 게티즈버그에서 지난 2일간 훌륭하게 싸우고 물러난다는 것은 똑같은 상황을 발생시키는 것이었다. 리의 철수와 빅스버그의 함락은 남부를 걷잡을 수 없는 침체로 몰아갈 것이다.
그럼 남은 것은 적을 우회하거나, 적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남군 총사령관 리 장군과, 선임 군단장인 롱스트리트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롱스트리트는 7월 2일의 공격에서 너무 큰 대가를 치렀기 때문에, 이 지형에서 공격하는 것은 불리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정찰병을 보내 북군 좌익을 우회하는 길을 알아보도록 하였다. 정찰 결과 우회가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자신의 군단이 북군을 경계하고 다른 군단이 차례로 배후로 돌아서 북군을 우회하는 작전을 생각했다.
하지만 리 장군은 전혀 다른 작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최초의 구상은 전날에 했던 작전의 재현이었다. 전날 거의 성공했던 작전이 실패한 이유를 공격 사이의 시간차라고 생각한 리 장군은 7월 3일날 최대한 이른 시간에 북군의 양측면을 롱스트리트 군단과 이웰 군단이 기습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전날의 결과에 대해, 롱스트리트는 북군 진지를 돌파하지 못한 점을 강조한 반면, 리는 북군을 돌파할 수 있었던 상황을 강조하여, 한번만 더 공격하면 북군 전선을 뚫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막상 아침이 되자, 리는 공격준비에 분주할 거라 생각한 롱스트리트가 전혀 준비하지 않은 사실에 놀랐다. 더욱이 롱스트리트가 우회 공격을 건의하자, 리는 고개를 저었다. “적이 저곳에 있고, 우리가 공격하지 않으면 적이 우리를 공격하여 섬멸할 것이다.” 이 때 이웰 군단에서 포성이 울렸다. 전날 리가 전언한 공격계획에 의해 이웰은 아침 이른 시간에 존슨 사단을 통해 컬프스힐을 공격한 것이다. 리는 전령을 보내 멈추게 하였지만, “이미 되돌리기에 늦어버렸습니다.” 롱스트리트와 이웰의 협조 공격은 또다시 무산되어 버렸다.
이웰의 공격은 전날의 전투가 더 한층 악화된 전투였다. 그린 여단의 북군만으로도 돌파가 힘들었던 고지에 그린 여단 소속의 윌리엄스 사단의 3개 여단이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존슨 사단 9천명이 공격을 시작하여 2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컬프스힐은 난공불락이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북군의 전면을 향한 돌파였다. 리 장군의 애초 계획은 후드 사단과 맥크로우 사단, 피켓 사단이 자신의 정면인 세미터리 리지 남단과 리틀라운드 탑을 공격하는 것이었지만, 이들 부대가 진격하면 측면이 없어져서 포위될 위험이 있었다. 더군다나 전날의 공격으로 30프로의 사상자가 발생한 상태였다. 따라서 리 장군은 계획을 수정하였다.
그것은 전날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피켓 사단과 7월 1일날 전투한 헤스 사단 (사단장 헤스는 부상으로 후송되고 여단장이던 패티그루가 지휘함)과 팬더 사단 예하 2개 여단을 묶은 트림블 사단을 북군 중앙의 세미타리 리지로 돌격시키는 것이었다. 즉 패티그루 사단, 트림블 사단과 피켓 사단 1만 5천명을 중앙에 돌진시켜 승부를 보겠다는 전략이었다.
남군의 진지인 세미나리 리지에서 북군 중앙의 세미타리 리지까지는 1마일의 벌판이 나무 한그루 없이 펼쳐져 있으며, 세미터리 힐에서 리틀라운드 탑까지 126문의 포가 이 벌판을 사정권으로 두고 있었다. 더군다나 북군은 돌담벼락 뒤에서 몸을 은폐할 수 있었다.
이 계획을 들은 롱스트리트는 전율하였다. 약 반년 전, 프레데릭스버그 전투에서 돌담벼락에 위치한 자신의 군단은 북군의 공격을 13차례나 무찌르고 학살하였다. 8천명 가까운 북군을 도살하는 동안 자신의 군단의 피해는 1천4백이었으며, 돌담 뒤에서 죽은 사람은 3백명 남짓이었다. 이 엄청난 결과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발생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롱스트리트는 전에 두 번이나 건의했던 사항을 다시 상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리 장군님, 저는 평생을 군에 있었으며, 분대부터 군단까지 지휘해 봤습니다. 따라서 군인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알고 있습니다. 1만 5천명으로는 저 능선을 점령할 수 없습니다.” 마침내 리의 인내력에 한계가 왔다. 롱스트리트는 훗날 “장군은 더 이상 대화를 원치 않았고, 작전에 대한 이행만이 남은 상태였다.”라고 당시의 긴장된 상황을 회고했다.
결국 북군의 중앙에 대한 3개 사단의 공격이 결정되었다. 사전에 동원 가능한 모든 포로 북군의 진지를 ‘부드럽게’ 만든 다음에 사단을 돌격하여 북군의 중앙을 돌파하기로 하였다. 스튜어트 기병대는 동쪽의 배후에 대기하여, 북군이 패주하면 후퇴로를 차단하기로 하였다.
리 장군의 오른팔이었던 불세출의 전략가 잭슨이 죽은 지금, 이런 막중한 임무를 담당할 사람은 롱스트리트 뿐이었다. 하지만 롱스트리트는 자신의 계획과 전혀 다른, 엄청난 유혈을 초래할 작전을 입안하는 데 큰 의욕을 보이지 못했다. 사람은 원치 않은 일을 하면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법인데, 7월 3일의 롱스트리트가 그랬다. 남군의 최고 전략가 중 한 사람인 롱스트리트는 부대 편성에 있어 중요한 문제점을 간과하게 된다. 즉 패티그루 사단과 트림블 사단이 7월 1일의 전투로 만신창이된 상태인지라, 이날의 공격에는 무리라는 사실이었다. 이는 담당 군단장인 힐 장군이 롱스트리트에게 언급하거나, 서로 상의하여 조정할 상황이었지만, 공교롭게도 힐과 롱스트리트는 결투까지 할 정도로 사이가 심하게 안 좋았다. 단지 힐 군단의 가장 오른쪽에 있었다는 이유로, 심한 타격을 입은 부대들을 공격에 가담케 한 것이다.
또다른 문제는 사전 준비포격에서 발생했다. 롱스트리트는 포격을 자신의 휘하 포병대령인 포터 알렉산더에게 맞겼다. 리 휘하 최고의 포술가라는 포터 알렉산더는 138문의 포를 배치하였지만, 선임사령관인 펜들톤 장군에 의한 몇가지 문제를 놓치고 만다. 하나는 롱스트리트와 힐 군단의 포를 사용할 뿐, 이웰 군단의 포는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고지 너머에 대한 포격은 탄착점을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였지만, 적진에 대한 종사가 가능한 포들이었기 때문에 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재앙이었다. 또 하나는 적의 사격을 피해 예비탄약을 남쪽에 보낸 사실이다. 이를 펜들톤 장군은 깜빡 잊고 알렉산더 대령에게 말하지 않았다.
롱스트리트의 기본적인 작전 브리핑이 끝난 뒤, 준비포격이 시작되었다. 알렉산더 대령은 15분의 사격을 예상하였지만, 북군의 진지를 관측할 고지가 없던 탓에, 남군은 탄착점을 관측하지 못한다. 즉 대부분의 탄알이 진지를 넘어가버렸다. 뭔가 뚜렷한 계기를 기대하면서 알렉산더는 2시간이나 사격을 한다. 마침내 북군 포대가 침묵하였는 데, 남군을 속이고 공격을 유도하기 위한 위장이었다.
롱스트리트는 애초에 엄청난 비극이 될 것을 예측하였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포병대령을 통해라도 이 공격을 막으려고 하였다. 즉 알렉산더에게 “만약 공격하기에 적절한 순간이 오면 전갈을 보내시오”라는 것이었다. 이에 알렉산더는 “적의 반응을 통해서 밖에 파악하는 길이 없으며, 설령 대성공을 거둔다해도 엄청난 유혈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라고 답장을 보냈다. 이 후 2시간이 지난 상태에서, 탄약이 거의 떨어지게 되었다. 롱스트리트는 보충해서 계속 쏘라고 하지만, 알렉산더는 예비탄약이 남쪽으로 갔기 때문에, 가지러 가는 동안에 북군이 진지를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쇠가 뜨거운 동안에 두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롱스트리트는 쌍안경으로 북군 진지를 살펴보면서 다음과 같이 중얼거린다. “나는 이 공격이 실패할 거라 믿는다. 하지만 사령관이 공격하기를 원한다.” 이 때 피켓 사단장이 와서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롱스트리트는 차마 말을 못하고 있었지만, 피켓 사단장의 간청에 고개를 끄덕인다.
마침내 운명의 순간이 온 것이다.
흔히 피켓 대공세를 남군이 가진 모든 것을 보여줬다고 한다. 즉 비할바 없는 용기, 서전의 승리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최종적 파멸.
피켓 사단장은 자신의 부대가 이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는 사실에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롱스트리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 부하를 전진시키겠습니다.’ 하고 나는 듯이 돌아갔다.
여기서 공격 대형을 한번 살펴보면, 패티그루 사단과 트림블 사단은 7월 1일의 전투로 상당히 타격을 받은 상태였고, 피켓 사단은 7월 2일 저녁에 도착한 사단으로 공격의 주력은 자연스럽게 피켓 사단이 맡게 되었다. 이것이 이 마지막 대공세가 ‘피켓 대공세’라고 불린 이유이다.
피켓사단은 본래 5개 여단이었지만, 롱스트리트가 남쪽 캐롤라이나 주에 가 있던 동안 5개 여단 중 2개 여단을 그 지역 사령관인 DH힐 장군이 보내지 않았다. 대신 시원치 않은 브로켄브로 여단과 데이비스 여단을 보냈는 데, 이들이 공교롭게도 패티그루 사단에 배치되었다. 즉 이날의 대공세에 북버지니아군의 정예 여단이 빠지고 그 빈자리를 변변치 않은 여단이 메운 셈이었다.
피켓 사단의 3개 여단은 가네트, 캠퍼, 아미스테드 여단장이 지휘했다. 3명다 우수한 여단장으로 필요한 경우 사단의 지휘까지도 능히 가능하다고 인정받는 장군들이었다. 캠퍼는 5번이나 버지니아 주의회 의원을 지낸 성공한 정치인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대령으로 지휘를 시작하여 여단장까지 올라간 베테랑이었다.
가네트는 과거 잭슨 장군의 밑에서 유명한 스톤웰 여단을 지휘하였는 데, 부하들이 잭슨 보다 가네트를 더 선호하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퀸스타운 전투에서 잘못된 정보를 받고 공격하다가 불가피하게 후퇴하게 되었을 때, 잭슨은 비겁과 불명예를 이유로 가네트를 기소하였다. 비록 부하들의 증언이 가네트를 변호하여 재판은 가네트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잭슨은 자기 부하로 가네트를 두는 것을 거절하였다. 이 사건은 가네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다. 챈슬러슨빌에서의 잭슨의 전사는 가네트는 자신의 불명예 혐의를 완전히 씻을 수 있는 방법을 앗아가 버렸다. 중세적 명예관이 강했던 당시 남군 군영에서, 이유여하를 떠나 자신의 불명예를 씻을 수 있는 방법은 명예로운 전사뿐이었다.
아미스테드는 전쟁 전의 정규군에서 22년을 복무했던 매우 엄격한 장군이었다. 안티탐 전투 당시 흐트러진 군의 기강을 잡기 위해 헌병대를 감독하기도 했던 아미스테드는 웨스트포인트 시절 얼리의 머리를 접시로 내려쳐 유명해졌다. 정규군 시절 북군의 핸콕장군과 같이 근무를 했는 데 마치 형제처럼 친했다고 한다. 이제 두 장군은 서로 북과 남으로 갈라져서 사선에 서는 사이가 되었다.
피켓의 사단 병력은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5830명이었다. 패티그루 사단의 병력은 7월 1일 8000에 달했지만 격전 끝에 7월 3일 날은 4300명이 참가했으며, 트림블 사단은 2개 여단으로 불과 1700명이었다. 여기에 피켓 사단의 남쪽의 북군을 차단하기 위해 윌콕스 여단과 랑 여단을 투입하기로 했는 데 이들 역시 1700 정도였다. 즉 14000이 좀 넘는 정도였다.
피켓사단장이 내려오고, 각 부대는 정렬을 시작하였다. 마침내 정렬이 끝나자 피켓 사단장이 진격 명령을 내린다. “전방의 고지를 점령하라, 오늘, 우리가 버지니아인 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마라!” 각 여단장들의 진격 명령이 떨어지고, 마침내 1만 2천명의 남군이 진격을 시작한다. (윌콕스와 랑 여단은 나중에 출발한다.)
남북군 모두 공히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었다고 증언한다. 1만이 넘는 대군이 군기를 앞세우고 포대가 즐비한 적진을 향해 전진하였다. 피켓 사단장은 말을 타고 이를 선도하고, 가네트와 캠퍼가 뒤를 이었다. 아미스테드는 후방에서 2여단을 보좌하였다.
이들의 목표인 세미터리 리지를 담당한 장군은 핸콕 장군, 전날의 위기에 기민하게 반응한 이 장군은 이날도 최상의 지휘를 하였다. 좌우 측면의 북군을 서서히 전진하여 공격하는 남군 대오의 측면을 감쌌다. 전진하는 남군은 서서히 북군의 화망에 걸려들고 있었다.
무엇보다 처참했던 것은 120문이 넘는 북군의 대포였다. 2시간의 준비포격 때 거의 포탄을 소진한 남군과는 달리, 북군은 충분한 탄약을 비축하고 우수한 시계를 확보하고 있었다. 남군과 북군 사이의 1마일은 전진하기에는 너무 먼거리였지만, 세미터리힐과 리틀라운드탑의 북군 포대에게는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남군 정면의 세미터리 리지에서는 맥길리버 포대의 포만 39문이나 되었다. 이들은 탄종을 장거리탄에서 서서히 산탄, 이중산탄으로 바꿔가면서 남군의 대오를 파괴하였다.
1마일을 가는 데 걸린 시간은 20분. 20분 동안 남군은 북군의 120문의 포와 전방의 북군 8000명이 쏘는 소총탄을 견디면서 진격해야 했다. 벌판 중간을 가로지르는 애미츠버그 로드에서 많은 남군의 이탈자가 발생했다. 울타리를 넘어 더 진격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마침내 최좌익의 브로켄브로 여단이 무너졌다. 패티그루 사단의 최 좌익에서 전진하던 이 시원찮은 여단은 세미터리힐의 사격을 못 견디고 여단장과 기수가 모두 도주해 버렸다. 피켓 사단장은 즉시 전갈을 보내 롱스트리트에게 증원을 요청한다. 나머지 여단은 계속 전진한다.
에미츠버그를 넘어, 이제 북군 보병의 라이플 사정거리에 도달하였다. 앞서 핸콕이 전진시킨 북군 부대가 측면을 위협하여, 피켓 사단의 최우익인 캠퍼 여단이 위험하였다. 캠퍼는 즉시 배후의 아미스테드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한다. 아미스테드는 구보로 진격시킨다.
이제 가네트와 캠퍼 여단이 북군 진지에 거의 도달하였다. 하지만 북군 돌담 근처에서 두 여단장은 중상을 입는다. 가네트는 말을 타고 북군 돌담을 거의 돌파하려는 순간 머리에 치명상을 입는다. 비로소 그는 자신의 명예를 지켰다. 캠퍼도 돌담 근처에서 북군에게 중상을 입었지만, 북군의 포로가 되기 직전에 구출해내는 데 성공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여단장 아미스테드. 아미스테드는 모자를 군도에 꽂고 부하들을 돌아봤다. “가자, 버지니아인! 놈들에게 총알 맛을 보여주자! 누가 나를 따르겠는가?” 하면서 돌격하였다. 이때 아미스테드를 뒤따라 북군 진지까지 돌파한 부하들은 겨우 150명. 이들은 마침내 북군 진지를 넘어 포대 하나를 노획하는 데 성공했다. 이 순간을 흔히 피켓 대공세의 절정이라 하여 ‘High Water Mark'라고 부른다. 남군의 필사적인 돌격의 상징으로 남았다.
혹자는 이 때 아미스테드에게 800명 정도라도 남아있었으면 세미터리 리지의 북군 진지를 돌파해버리고 증원군이 올 때까지 (만약 온다면) 확보할 수 있었을 거라고 한다. 하지만 이 완벽한 살상공간에서 이 이상의 병력이 쫒아오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아미스테드의 용감한 부하들이 북군 진지에 머문 시간은 불과 10여분. 적의 포대를 돌리려는 아미스테드는 결국 3발의 총알을 맞고 쓰러진다. 10분 뒤에 더 이상 어쩔 수 없음을 안 부하들은 후퇴하고 만다. 일부 병사는 이 상황에서도 끝까지 남아 사격을 하는 놀라운 투혼을 보인다.
아미스테드는 적의 포대 옆에서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서서히 의식이 흐려가고 있을 때, 북군 군의관이 달려왔다. “나는 핸콕 장군과 무척 친한 사이다. 지금 장군님을 보고 싶은 데, 어디에 있나?” 하지만 공교롭게도, 아미스테드가 중상을 입은 것과 거의 동시에 핸콕도 남군의 사격에 중상을 입었다. 핸콕은 중상을 입고도 전황이 확실해 질 때까지 후송을 거절했다. 그 소식을 알자 “핸콕에게 이 아미스테드가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전해주게”라고 말한다. 아미스테드는 조국을 등진 사실보다 친구를 저버린 것이 더욱 괴로웠던 것이다.
패티그루와 트림블 사단은 피켓 사단보다 더 열악한 상태에서 더 멀리 있는, 더욱 높은 지역의 북군 진지를 향해 돌격해야 했다. 당연히 처참한 피해를 입고 실패하였다. 하지만 그들 역시 놀라운 감투정신을 발휘하여, 이 공세에서 가장 멀리까지 돌파한 부대가 패티그루 사단의 데이비스 여단에서 나왔다. 하지만 전세를 뒤집을 수 없이 물러나고 만다. 패티그루 사단장은 팔에 부상을 입었고, 트림블 사단장은 발에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된다. 트림블 사단장은 "오늘 나의 영예로운 부대가 점령하지 못한 진지는 누구도 점령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출발한 윌콕스와 랑 여단의 부대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눈송이가 난로에 녹듯이, 북군의 화망에 녹아버렸다. 다만 앞서 분투한 피켓사단의 생존자들이 후퇴할 수 있게 북군의 주의를 끌어준 것이 그들이 한 용감한 공격의 유일한 의미였다.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났다. 리에게 있어 북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던 마지막 기회가 사라졌다. 이 공세에서 발생한 사상자는 7678명. 총 공격자 중 55퍼센트가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장군들의 피해는 더욱 컸다. 3명의 사단장 중 2명의 중상. 11명의 여단장 중 3명이 죽고 3명이 부상당했다. 피켓 사단에 15명의 연대 장 중 6명이 죽고 5명이 다쳤다.
이 엄청난 참극에 공격 전에 그토록 흥분했던 피켓 사단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거의 주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통곡을 하면서, 죽은 부하들을 쳐다보며 울부짖고 있었다. 어떤 장교가 생존자들을 정렬하여 북군의 역습에 대비하려고 하자, 피켓은 그만두라고 소리치면서 숙영지까지 후퇴하라고 한다. 이로써 공격했던 북군 전방에 위치한 남군은 사라지게 되고, 공간이 발생한다.
북군이 역습할 지도 모르는 위급 상황에서, 롱스트리트 군단장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전방의 포진지로 달려간다. 북군의 역습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포대들의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해, 스스로 앞에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북군은 공격하지 않는다. 당시 총사령관인 미드는 상황 판단이 너무 늦어 남군의 공격이 격퇴된 것을 늦게 알게 된 데다가, 예비 공격을 할 5군단과 6군단이 너무 멀리 있거나 분산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남군의 130문이 넘는 포가 너무나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공격하면 똑같은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포대에 탄약이 거의 떨어졌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군단장인 힐과 롱스트리트 그리고 사단장인 피켓이 처참한 결과에 질려 넋을 잃고 있을 때, 총사령관인 리가 정면에 나선다. 이 패배의 책임을 자신에게 있음을 분명히 알리면서, 부상자들을 위로하고, 생존자들을 다독여서 북군의 역습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당시 영국군 관전장교인 프리멘틀은 ‘그 모습이 너무도 장엄해서, 달리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생존자들은 이 처참한 상황에서도 리 장군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다. “오늘의 일은 저 영감 때문이 아니다. 로버트 아저씨는 우리를 곧 워싱턴으로 진격하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그를 믿는다.” 한 중상을 입은 생존자는 부하들의 부축을 받고 오다가 리 장군이 있는 것을 목격한다. “장군님, 중상입니다.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손을 잡아 볼 수 있을까요?” 리 장군은 그 병사의 손을 오랫동안 잡았다. “내가 죽은 뒤 저 영감을 부탁하네. 하느님의 가호가 있기를..” 주변의 동료들에게 그 병사가 한 말이었다.
리는 이 패배의 결과가 자신에게 있음을 뼈저리게 알고, 이를 부하들에게 상기시켰다. 윌콕스 여단장이 울면서 자신의 여단이 파괴되었음을 알리자 “울지마시오, 장군. 이 패배는 모두 나의 책임이고 여기서 패배한 것은 나요. 당신은 이 패배를 극복하기 위해 도와주시오.”라고 하였다. 리는 그 당시는 물론, 전후에도 게티즈버그의 책임이 자신에 있으며 부하들에게 잘못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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