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일, 게티즈버그에서 가장 치열했던 둘째날이 밝았다. 전날 공격하지 못했던 세미터리힐과 컬프스힐은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어 있었다. 리 장군은 이웰 장군에게 고지를 접수할 수 있는 지를 물어보았다. 이웰은 “롱스트리트가 남쪽을 공격해서 북군의 주의를 돌리기 전에는 어렵다.”는 의견을 보였다. 단독 공격으로는 효과를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리 장군은 작전계획을 결정했다. 우선 롱스트리트의 1군단이 남쪽의 고지인 리틀라운드탑을 점령한다. 전날 격전을 벌인 힐의 3군단은 중앙을 지키며 북군의 공격을 방어하다가 롱스트리트의 공격에 참가한다. 마지막으로 북군이 대부분의 병력을 이들 공격에 대응하는 동안 이웰의 2군단이 컬프스힐과 세미터리힐을 점령한다.
리가 롱스트리트에게 남쪽 공격 명령을 내린 시간은 오전 9시. 하지만 2시간이 지나도록 롱스트리트의 군은 공격지점에 도착하지 않았다. 리틀라운드탑의 북군의 정찰을 피하면서 기동한다고 너무 멀리 돌아간 것이다. 최초에 리는 존스턴 대위를 보내 남쪽으로의 기동로를 관측하게 했는 데, 처음에 봐둔 루트가 롱스트리트가 기동할 때 쯤에는 북군의 경계병이 관측되는 위치였다. 다시, 루트를 결정하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이동해야 했다. (문제는 북군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이렇게 고생해서 갔지만, 리틀라운드탑의 북군은 관측을 했다는 사실이다.)
롱스트리트 군단이 리틀라운드탑을 공격할 위치에 도착한 것은 무려 오후 4시였다. 롱스트리트는 북군이 세미터리 리지에서 리틀라운드탑 사이에 있을 것을 예상했지만 다수의 북군이 그 전방인 복숭아밭에 전진해 있었다. 시클스의 3군단으로, 원래 미드는 세미터리 리지에 배치하도록 하였지만 전방의 복숭아밭에 비해 고지가 낮았기 때문에 자의적 판단으로 전진해버렸다. 전에 첸슬러슨빌 전투에서 후커의 말을 명령그대로 따랐다가 고지를 싸우지도 않고 내준 뼈아픈 기억이 생각났던 것이다. 미드는 뒤늦게 이사실을 알고 대노하여 시클스를 뒤로 이동하도록 명령하면서 예비로 남겨뒀던 5군단의 병력들을 리틀라운드탑과 3군단의 후방으로 보내 지원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롱스트리트 군단이 공격을 시작하고 3군단은 복숭아밭에서 전투를 해야 했다.
롱스트리트는 3개 사단으로 이루어졌는 데, 피켓 사단은 북버지니아군의 후방을 지키다가 이 날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따라서 7월 2일 전투는 후드 사단과 맥크로우 사단의 만 4천 5백명의 병력으로 치러졌다. 맥크로우 사단은 복숭아밭의 3군단을 공격하고, 후드 사단은 남쪽의 ‘악마의 소굴’과 리틀라운드 탑을 공격했다.
후드 장군은 공격 직전에, 시클스의 3군단이 전방으로 이동한 탓에 남쪽의 리틀라운드탑과 빅 라운드탑에 북군이 없는 것을 발견했다. 후드는 롱스트리트에 전갈을 보내, 북군을 우회하여 라운드탑을 접수하자고 간청했다. 하지만 롱스트리트는 최초의 리 장군의 명령이 에미츠버그를 통해 정면에서 북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이행하라고 말했다. 후드장군은 시클스의 군단이 이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미츠버그를 통한 공격에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기 때문에 부대를 우회해야 된다고 3번이나 간청한다. 하지만 롱스트리트는 이를 묵살해버린다.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북군을 우회해서 좌익을 때리는 작전을 롱스트리트는 리 장군에게 몇 번이나 건의했다는 사실이다. 즉 북군이 차지한 위치가 너무나 좋기 때문에, 롱스트리트는 부대 전체를 좌익으로 선회하여 워싱턴과 북군 사이에서 남군이 진지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리 장군은 “정면의 북군을 상대로 우회할 수도 없고, 우리가 싸우기 원치 않지만 적이 여기 있기 때문에 어쩔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아마 롱스트리트는 이틀에 걸쳐 리와 격론을 벌인 문제를 자신의 임의대로 우회공격을 허락하기에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어쨌든 롱스트리트는 후드의 건의를 모두 묵살하고 공격을 명령하였다.
후드 사단은 4개 여단으로 이루어졌으며, 좌측의 로버트슨 여단과 앤더슨 여단이 악마의 소굴을 공격하고, 우측의 로 여단과 베닝 여단이 리틀라운드 탑을 공격하였다.
로 여단 예하 15앨라배마 연대는 빅 라운드 탑의 북군 전초병을 밀어내고 고지를 차지했다. 연대장 오츠 대령은 이 고지야 말로 게티즈버그 전체를 제압할 수 있는 고지라는 것을 간파했다. 오츠는 후드 장군에게 이 사실을 알리도록 전갈을 보냈다.
하지만 전령이 돌아와서 후드 장군이 전투 초기에 부상을 입었으며, 로 여단장이 그 뒤를 이었고, 로 장군의 명령은 지체없이 리틀라운드 탑을 공격하라는 것이었다. 오츠 대령은 명령에 복종하여 부대를 이끌고 리틀라운드 탑을 공격하려고 떠났고, 남군은 이 지역 일대를 제압할 수 있는 중요한 고지를 차지하고도 스스로 내려와야 했다.
로버트슨 여단과 앤더슨 여단은 악마의 고지를 공격하였다. 로버트슨 여단은 과거 후드가 지휘한 바 있는 유명한 ‘텍사스 여단’이었다. 북군은 3군단에서 가장 큰 여단인 와드 여단으로 2200명의 병력이었다. ‘악마의 소굴’이라 불린 이유는 거대한 바위들이 즐비해 있는 곳이기 때문이며, 30분도 안되는 시간동안에 20 인디애나 연대는 병력의 반이상을 잃었다. 남군이 북군 한개 방어선을 뚫으면 하나의 방어선이 생기며 엊치락 뒤치락 하였다. 마침내 ‘바위’ 배닝 여단의 일부 병력과 앤더슨의 조지아여단이 지원을 와서 공격을 도왔다. 격전 중에 앤더슨 여단장은 오른 발에 부상을 입는다. 격전은 로 여단이 북군의 좌측 측면에 위치하게 되면서 양상이 달라진다. 측면이 위험해진 북군은 퇴각하게 된다.
악마의 소굴 공격으로 탈진한 후드의 3개 여단은 리틀라운드탑 공격에 참여하지 못한다. 이제 남쪽의 고지인 리틀 라운드탑의 접수여부는 로 여단에게 달려있었다. 앞서 북군 3군단의 전진에 따라 리틀라운드 탑은 비어 있었지만, 미드가 보낸 5군단 예하 빈센트 여단이 로 여단보다 10분 먼저 도착하였다. 빈센트 여단은 1350명이 었고, 여단의 최좌익을 맡은 부대가 그 유명한 챔벌라인의 매인 20연대였다. 빈센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위치를 사수하도록 챔벌라인에게 명령하였다.
매인 20연대를 상대한 남군이 앞서 언급된 오츠대령의 15앨라배마 연대였다. 오츠 대령은 챔벌라인의 좌측면을 우회하듯이 공격하였고, 챔벌라인은 부대를 두배로 연장시켜서 대응했다. 무려 5번이나 남군이 돌격을 하였지만 그 때마다 북군은 뒤로 밀려나면서도 전선을 유지했다. 옆에 있는 다른 연대들도 남군의 공세에 밀려 고전하고 있었다.
격전끝에 챔벌라인의 매인 20연대는 거의 탄약이 떨어졌다. 남군도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오츠대려은 재차 공격을 명령한 상태였다. 북군 최좌익이 무너지려는 그 순간, 챔벌라인은 부대원에게 착검을 명령하고 돌격하였다. 완전히 허를 찔린 남군은 북군에게 돌파되었고, 로 여단의 남은 부대들도 퇴각하게 되었다. 아슬아슬한 승부였다.
북군은 몇 번의 아슬아슬한 순간을 거쳐 리틀라운드탑을 사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가없는 승리가 아니였다. 빈센트 여단장은 전사하고 증원온 140뉴욕연대의 로케 대령도 전사했다. 전체 참전 병력의 34프로에 달하는 780명의 사상자를 냈다.
후드 사단이 악마의 소굴을 점령한 뒤, 맥크로우 사단이 복숭아밭의 북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복숭아밭의 북군 진지는 위치 자체는 다소 높을지 몰라도, 전방의 남군 진지가 더 높았고, 치명적으로 좌우측의 북군과 연결되지 않아서 비어 있었다. 우측끝은 후드가 악마의 소굴을 접수함으로써 위험한 상태에서, 케르사 여단과 앤더슨 여단이 북군의 좌익을 공격하고, 샘즈여단은 정면을, 박스데일과 울포드여단이 우측 측면을 공격했다.
복숭아밭 전투의 최대 공헌자는 박스데일 여단장이었다. 박스데일은 북군 우익의 험프리 사단의 우익에 쇄도하였고, 힐 군단의 앤더슨 사단의 예하 윌콕스 여단의 지원까지 받아서 북군을 돌파하였다. 이 승리의 대가로 박스데일은 전사했다. 북군 시클스 군단장도 자신의 다리를 잃었다.
롱스트리트의 할 일은 이제 끝났다. 후드 사단은 악마의 소굴을 점령하고 맥크로우 사단은 복숭아밭을 점령했지만 리틀라운드 탑을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이제 힐 군단의 중앙 돌파와 이웰의 컬프스힐 점령에 기대하는 수 밖에 없었다.
힐 군단은 전날 2개 사단이 격전을 치뤘기 때문에, 앤더슨 사단만을 투입할 수 있었다. 앤더슨 사단은 5개 여단인 7천 백명의 병력으로, 북군 중앙 세미터리 리지를 향해 공격하였다.
세미터리리지의 북군은 북군 군단장 중에 가장 우수하다는 핸콕장군이었다. 반도 전투에서의 능력으로 맥클레란이 “최고의 핸콕”이라고 불렀던 이 영민한 군단장은 전날 도착하여 북군의 진지를 컬프스힐에서 리틀라운드 탑까지 배치하도록 하여, 남군을 고전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예하 사단 중 칼드윌 사단을 3군단 지원을 위해 보낸 상태에서, 기본 사단을 배치하여 앤더슨 사단에 대적하게 하였다.
북군 3군단이 후퇴하여 핸콕의 좌측면이 비어버린 상태에서, 앤더슨 사단의 윌콕스 여단이 빈틈으로 쇄도하였다. 이 빈틈을 메울 부대를 찾기 위해 빗발치는 총알 속을 누빈 핸콕은 (수행원 중 2명이 죽었다.) 별로 크지 않은 연대 하나를 발견하였다. 1 미네소타 연대. 핸콕은 쇄도하는 윌콕스 여단을 가리키며 “저 군기를 노획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1800에 달하는 윌콕스 여단을 향해 돌격한 이 용감한 연대의 병력은 260명. 이들은 북군의 빈틈을 메울 증원군이 도착하기 까지 15분의 시간을 벌어주었으며 67퍼센트가 사상되었다.
앤더슨의 사단 중 라이트 여단과 포시 여단은 핸콕 군단의 정 중앙을 향해 공격했다. 포시 여단은 북군 전초병과의 싸움으로 진격의 탄력을 잃었고, 라이트 여단은 1마일의 벌판을 넘어 핸콕의 군단을 향해 쇄도하였다. 마혼 여단은 전방의 북군을 격파하고 세미터리 리지에 올라가는 데 성공하였다. 북군 중앙을 절단낼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증원군이 오지 않았다. 당시 앤더슨 사단 중 마혼 여단은 북쪽에 있었는 데, 라이트의 거듭된 간청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앤더슨 사단장이 대기하도록 명령하였다는 것이다. 앤더슨 사단장은 전투 때 수백미터 뒤의 숲속에서 관망하고 있었고, 힐 군단장은 사령부에 있지도 않았다. 라이트여단은 세미터리리지를 차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북군 한복판에서 1개 여단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라이트 여단은 철수해야 했다.
힐군단은 딱히 명확한 이유도 없이 부대의 증원을 거절하고 중요한 순간에 결정을 내려야할 사령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리가 가진 3장의 카드 중 2장이 실패했고, 이제 마지막 기회는 이웰에게 달려 있었다.
이웰군단의 목표는 1차가 컬프스힐, 2차가 세미터리 힐이었다. 이웰은 리의 명령에 따라 북군이 이동하는 순간을 기다려서, 컬프스힐의 북군 6개 여단 중 5개가 빠져나간 순간에 존슨 사단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컬프스힐의 북군은 그린여단으로, 1400 병력이었다. 존슨 사단은 4700병력. 하지만 컬프스힐의 지형은 너무나도 완벽한 방어요새였다. 지형자체가 가파른 고지인데다 전날 북군은 야전축성을 완성해논 상태였다. 남북전쟁 전기간을 통틀어, 고지에 야전축성이 완성된 상태에서 이를 돌파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단 한가지 기회는 존슨 사단의 스튜어트 여단이 남쪽 배후로 돌아서 진지의 측면을 공격하는 것이어지만. 북군 137뉴욕연대는 메인 20연대가 북군 최좌익을 사수했듯이 북군 최우익을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이제 해는 완전히 지고 달빛에 의존하여 싸우게 되었다.
세미터리힐에 대한 공격은 얼리 사단의 2개 여단, 헤이의 루이지애나 타이거 여단과 아베리의 노스캐롤라이나 여단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들은 전투에 단련된 정예들로, 특히 헤이의 루이지애나 타이거 여단을 “리의 호랑이”라고 불리는 부대였다.
세미터리힐의 북군은 하워드의 11군단. 자타가 공인하는 시원치 않은 부대였지만 문제는 포가 너무 많았다. 25문의 포가 고지에서 남군을 향하고 있었고, 달빛을 받으며 루이지애나 타이거와 아베리의 여단은 세미터리힐의 동쪽으로 돌격하였다.
엄청난 손실끝에 포진지에 돌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증원부대가 도착하지 않았다. 세미터리 서쪽의 로저스 사단이 기동하는 중에 시간을 다 보내버렸고, 얼리도 로저스의 증원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고든 여단을 움직이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너무나 자주 발생했던, 선두부대가 잘 싸웠지만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증원군이 도착하지 않아 후퇴해야 하는 상태가 이 마지막 순간까지 발생하였다. 헤이와 아베리 여단은 철수하였다. 전투가 완전히 끝나는 때는 저녁 10시 반이었다.
마침내 7월 2일 전투가 종료되었다. 전투의 핵심은 롱스트리트 군단에 있었기 때문에 사상자가 많았다. 후드 사단은 후드 자신이 왼팔을 잘라야 했고, 4여단장 중 2명이 부상을 입었다. 18명의 연대장 중 9명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맥크로우도 자신의 4여단장 중 2명이 죽었다. 20명의 연대장 중 6명이 죽거나 다쳤다.
남북 양측의 사상자는 9천에 달했으며, 각 방면에서 남군은 북군을 위협하였지만 어디에서도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다. 냉정하게 말해서, 리가 지휘한 전투 중에서 최악이었다. 남군은 상호 공격이 전혀 연결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각 방면에서 축차적으로 공격하였고, 유기적 지원이 전혀되지 않았다. 전투에 참여한 부대는 너무도 잘 싸웠지만, 그들을 받쳐주는 세력이 전혀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전투가 종료된 이후, 피켓사단과 스튜어트 기병대가 합류했다. 스튜어트 기병대에 대해서 좀 설명하면, 팬실베니아에서 리의 주력과 분리된 이유로 가장 큰 것은 남군의 ‘자신감’이었다. 북군의 후커에 대해서 매우 우습게 생각했던 남부 사령부에서는, 적진을 한바뀌 돈 후에 남군 주력과 합류하는 장면을 연출하고 싶어했던 공산이 크다. 당시 참전했던 포병대령 포터 알렉산더는 전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했으며, 내 기억 중에서 전쟁 중에 저지른 거의 유일한 만용이었다.” 스튜어트가 맥클레란의 주력을 두 번이나 선회한 사실이 위와 같은 모험을 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스튜어트는 5개 여단 중 2개 여단을 남겨뒀지만, 리는 이 부대를 세넌도어 계곡의 고갯길을 막는 데나 사용하였다. 실력이 미덥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스튜어트는 두 번이나 북군의 진격에 대한 전령을 보냈지만 이들은 남군에 도착하지 못했다. 더욱 안 좋은 것은 남군의 최초 공격 예정지와 게티즈버그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스튜어트가 이리저리 해메다가 전투 첫날과 둘째날 부재했다는 것이다.
결국 스튜어트 기병대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으며, 리의 과신에도 크게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리는 북부로 침공하기 전에 후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 군은 적절히 지휘하는 한 불패의 군이며, 지구 상 어느 군이라도 섬멸할 것이다.”라고 자신의 군에 강한 자신감을 가졌다. 리가 북버지니아군 사령관이 된 이후 게티즈버그 전투까지 불패의 신화를 쌓아 왔기 때문에, 자신의 군에 크나큰 자신감을 가졌지만, 이 자신감이 뒷날의 재앙을 불러온다.
7월 2일 전투가 종료하였다. 남북전쟁의 일반적인 전투에서는, 전투가 2일이상 지속되는 경우가 드물다. 북군과 남군은 이 날 하루에만 거의 18000 이상의 손해를 본 왠만한 회전 못지 않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하지만 리는 결코 북군에게 전장의 주도권을 남겨놓고 떠날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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