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는 1929년부터 1992년까지 약 60여년간 존속했다가 콩가루가 되버린 나라이다.
유고는 또 열 다섯개 국가로 쪼개진 러시아 다음으로 많이 쪼개진 나라로 기네스북에 올라있기도 하다.
당시 유고의 맏형격이었던 세르비아는 이 분열을 막으려고 몸부림쳤지만 끝내 실패했다.
자 그럼 왜 이렇게 되었는지, 당시 생생했던 그 현장으로 가보겠다.
1. 유고슬라비아의 성립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1929년 알렉산데르 1세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이 후 제2차 세계대전중 티토가 이끄는 빨치산에 의해 해방을 맞이하였으며,
1945년 티토를 수반으로 하는 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티토의 강력한 카리스마는 유고슬라비아를 똘똘 뭉치게 했으며,
그가 주창한 비동맹주의는 제3세계 지도자들을 한 곳으로 집결시켰고,
유고연방의 전 국민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존경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가 사망한 1980년 부터 유고연방엔 콩가루 스멜이 퍼지기 시작했다.
한 국가안에 3개의 종교와 7개의 민족이 섞여 있으니 이 보다 좋은 폭발물이 어디 있겠는가!
발칸의 화약고가 점점 뜨거워지는 가운데 마침내 점화플러그가 작동을 시작했으니,
그것이 바로 1989년의 소련 붕괴였다. 드디어 불꽃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2. 분열의 서막
유고연방에 자유주의 물결이 불어닥치자 북풍이 먼저 시작되었다.
가톨릭을 믿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준비한 것이다.
"자, 잠깐만~ 너희들 거기서 한 발짝만 움직이면 알지?"
유고의 맏형인 세르비아가 황급히 이들의 출입문을 가로 막았다.
그러나 이미 활시위를 벗어난 민족주의는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이어서 서쪽의 보스니아와 몬테네그로 그리고 남쪽의 마케도니아까지 꿈틀거렸다.
"아~ 이거 어디부터 손대야 하나, 잘못하다간 걸레가 되겠어!"
당황한 세르비아는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세르비아는 고민끝에 가장 급한 불부터 끄기로 했다.
"그래~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는 죽어도 안돼!!"
세르비아는 곧바로 전쟁준비에 돌입했고 포신을 북쪽으로 돌렸다.
50년 전 두 지역은 세르비아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전력이 있었다.
2차 대전 때 유고를 점령했던 독일군이 이 지역에 괴뢰정권을 세운 뒤
영내에 거주하는 세르비아인들을 모두 쓸어버리라고 한 것이다.
당시 독일군에게 가장 극렬하게 저항했던 민족이 바로 이 세르비아인이었다.
이때 희생된 세르비아인은 무려 70여 만명에 이르렀다.
이런 잔인무도한 인종청소를 경험한 세르비아인들은 두 지역의 독립을 두려워하였다.
"두 나라가 독립하면 그 안에 살고있는 우리 민족의 신변이 또 위험해져!"
당시 그 지역에 거주하는 세르비아인들은 무려 100만 명이 넘었다.
3.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독립
마침내 1991년, 맨 북쪽의 슬로베니아가 먼저 독립을 선언했다.
"아이씨~ 일단 먼저 튀어 나온 놈부터 조지자!!"
세르비아군은 슬로베니아를 향해 닥치고 돌격을 개시했으나
유럽의 강대국들이 개입하여 3개월간 휴전에 돌입했다.
"아~ 짜증나네... 왜 남의 가정사에 자꾸 끼어들지?"
세르비아는 5개월 후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로 쳐들어갔다.
이 때 UN의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지만 전쟁을 막지 못했다.
전쟁이 계속 번져가자 국제 사회는 세르비아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다음해 1월, 전열을 재정비한 크로아티아군의 반격이 개시됐다.
내전이 격렬해지자 이곳에 살던 수 십만의 세르비아인이 고국으로 탈출했다.
그러나 미처 피하지 못한 주민들은 혹독한 보복을 당했다.
"아이씨~ 이거 어떻게 하지?"
이 와중에 벌써 남쪽에선 마케도니아가 독립을 선언했으며,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공식화했다.
드디어 세르비아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이 참에 아예 피아를 확실히 구분해 놓고 밟아버리자!!"
세르비아는 몬테네그로와 연합하여 '신유고연방'을 결성하였다.
"이 금 밖에 나가 있는 놈들은 다 죽을 줄 알아!!"
4.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분쟁
세르비아는 이성을 잃고 가속패달을 밟았다.
차선을 무시한 세르비아의 전선은 보스니아로 옮겨 붙었다.
"형~ 우린 독립만 하고 아무짓도 안할께. 우린 중립이야~"
"웃기고 있네~ 잔 말 말고 묘자리나 알아봐 임마~"
(보스니아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당시 보스니아의 주민 60%는 독립에 찬성하고 있었지만
30%에 달하는 세르비아인들은 이에 반대하며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어서 양측의 민병대가 충돌하여 처참한 살육전이 벌어졌고 25만 명이 사망했다.
이 학살의 뒤에는 세르비아 본국의 막대한 지원과 음모가 있었다.
마침내 미국이 주도하는 NATO가 개입하여 세르비아를 맹폭격했다.
"아~ 그만해요 제발~ 휴, 휴전~!!"
95년 12월, 3년 6개월간의 내전이 끝나고 보스니아가 독립했다.
이로써 세르비아는 몬테네그로만 겨우 붙드는데 성공했고 나머지를 몽땅 잃어버렸다.
"아~ 한 순간에 기와집이 무너지는구나...ㅠㅠ"
이렇게 모든걸 잃어버린 세르비아가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뭔가 발 아래서 꼼지락거리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뭐지? 이 불길하고 기분 나쁜 움직임은?"
5. 코소보 분쟁
코소보는 세르비아 민족의 정신적 원천이다.
세르비아인은 과거 14세기에 오스만 제국군과 맞서 이곳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이 후 오스만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자국민들이 모두 쫓겨나게 되었는데,
이 때 알바니아인이 들어와 절대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건의 시작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세르비아는 동방정교회, 알바니아는 이슬람을 신봉하고 있다.
그들이 민족 최고의 성지로 여기는 이곳이 이슬람교도의 땅이라니...
세르비아 입장에서는 이들이 눈엣가시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 쟤들을 어떻게 하지? 죽일 수도 없고, 쫓아낼 수도 없고...
생각 같아선 확~ 밀어버리고 싶지만, 보는 눈도 있으니 그것은 안되겠고,
아무튼 우리와 안맞으니까, 좀 떼어 놓고 조용히 살라고 하지 뭐"
1971년, 세르비아는 코소보인들에게 자치를 허용해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허울좋은 명목일 뿐 코소보인은 2류 국민으로 취급되었다.
결국 인내의 한계를 느낀 코소보인들은 집단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다 1989년, 자유의 바람을 타고 독립을 요구하게 되었다.
"뭐라구? 이것들이 약 먹었나~!!"
열 받은 세르비아는 그 해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해 버렸다.
이것은 팔팔 끓는 기름에 화약을 던져 놓은 꼴이 되었다.
"착검 완료! 노리쇠 일발 장전!!"
1995년, 코소보 해방군이라는 무장조직이 창설되었다.
이들의 저항이 거세지는 가운데 1998년, 세르비아 경찰이 살해되었고
세르비아 정부군의 주도로 본격적인 내전이 발발했다.
결과는 알바니아인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로 이어졌다.
이를 보다 못한 국제사회가 중재안을 내 놓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1999년, NATO는 결국 세르비아에 대한 두 번째 공습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그 해 6월 독재자 밀로세비치가 체포되었고 내전은 종식되었다.
포성은 멈췄지만, 여전히 세르비아는 발칸의 화약고다.
보스니아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30%의 세르비아인들이 기회를 노리고 있고
세르비아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코소보인들은 여전히 숨고르기를 하고 있다.
만에 하나, 어느 한 쪽이 긴장의 끈을 놓는 순간 또 터지게 될 것이다.
6. 몬테네그로 독립
1991년 유고연방이 쪼개지기 시작할 때 몬테네그로도 독립을 선언했었다.
이 때 다급해진 세르비아는 그대로 몸을 날려 몬테네그로의 치마폭을 부여 잡았다.
"당신마저 떠나버리면 난 외로워서 못 산다오!"
그러자 마음이 약해진 몬테네그로는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 보따리를 풀었다.
"정~ 그렇다면 한 번 더 기회를 드릴께요. 앞으로는 잘하세요!"
"그래 그래~ 이제는 당신 하고싶은대로 다 해도 돼!"
몬테네그로는 완전한 자치를 얻었고 이들의 보금자리는 '신유고연방'으로 정해졌다.
이 후 세르비아는 앞서 말한대로 이웃집에 행패를 부리고 다녔다.
이를 지켜보는 몬테네그로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을 것이다.
"나한테 잘해주면 뭐하나, 저 원수 때문에 밖에 나갈수가 없는데!"
몬테네그로는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 이 커플은 국명을 '세르비아-몬테네그로'로 바꿨다.
하지만 입양아 코소보 때문에 세르비아는 편두통에 시달렸다.
결국, 세르비아의 가정폭력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러다 2006년, 몬테네그로는 다시 보따리를 싸기 시작했다.
"이럴바엔 차라리 내가 나가 사는게 속 편하지...!"
"아니~ 여보! 이제는 진짜 잘할께~"
"시끄러워요!!"
몬테네그로는 연방분리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투표 결과 55.4%가 찬성하여 국제 사회가 정한 55% 기준을 가까스로 넘겼다.
"야호~ 드디어 이혼이다!!"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를 뒤로 하고 버스를 탔다.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세르비아는 깡소주를 마시며 눈물을 흘렸다.
"당신까지 떠나면 난 어떡하라고...!!"
여기까지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연애사입니다.
자료가 부족한 관계로 이 내용은 자의적으로 해석한 부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커플은 좀 쿨하다는 것입니다.
최근 국제 경기에서 단일팀을 구성하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가 있죠.
사실 이들은 언어와 정서적으로 닮은 점이 많이 있습니다.
아마 이들은 또 언젠가는 다시 합칠지도 모릅니다.
7. 콩가루 집안사 마무리
솔직히 세르비아 입장에서는 좀 억울한 측면도 있습니다.
이들은 발칸반도를 지키기 위해 그 어느 민족보다도 더 많은 희생을 치렀죠.
14세기에 오스만 제국군에 맞서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코소보에서 쫓겨났으며,
20세기에는 독일군에게 저항하다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서 대량 학살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희생의 대가로 지금의 인구는 2,400만 명 밖에 되지 않죠.
현재 발칸반도의 군사적 서열은 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순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세르비아가 오스만에 그토록 저항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서열은 많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이토록 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세르비아는 왜 콩가루 집안의 대명사가 될 수 밖에 없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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