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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妓生)

구름위 2013. 5. 1. 17:55

조선시대 평민과 천민 계급 중에서 유일하게 양반 사회의 주변에 머물며 문장과 음악에 능했던 계층은 기녀라는 여성 집단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궁중 잔치 등에 동원 돼 노래와 춤으로 흥을 돋우는 일을 맡았지만, 실제 삶은 왕족과 양반 사대부의 성적 노리개로 봉사하는 위안부로서의 기능이 강했다. 말하자면 예술인과 창녀라는 두 가지 극단적인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기녀의 기원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유랑집단 기원설과 무녀 기원설 등이 전할 뿐이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기녀의 시작을 버드나무로 키나 소쿠리 등을 만들어 팔던 유랑 집단인 '양수척'으로 보았다. 양수척은 고려가 후백제를 정복할 때 가장 거세게 항거한 집단이었다. 이들은 소속도 없고 부역에 종사하지도 않으면서 떠돌이 생활을 하였는데, 고려에 의해 노비화하면서 남자는 노비로, 여자는 춤과 노래를 익혀 기생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또 다른 견해로는 무녀 기원설이 있다. 고대 제정일치 사회에서 신권을 행사하던 무녀가, 점차 정치와 종교가 분화되면서 신성성을 잃고 퇴락하여 기녀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지방의 토호들과 연결되어 매춘부가 되거나, 노래를 직업으로 하는 가척, 춤을 직업으로 하는 무척으로 나뉘어 지배권력층에 봉사했다는 것이다.

기녀의 기원이 어디서 비롯됐던지 간에 국가에 소속된 예술인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부터다. 조선시대에 이르자 기녀는 모두 관에 소속돼 월급을 받는 관기가 되며, 그 명칭도 기녀·기생·창기·여악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관기는 다시 소속된 관청에 따라 서울 기녀와 지방 기녀로 나뉘었다.

서울의 기녀들은 궁중의 음악과 무용을 담당하는 장악원이라는 관청에 소속되었다. 이곳에서 노래와 춤을 교육받고, 주로 궁중 연회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춤과 노래를 하였다. 지방의 기녀들은 대체로 수청을 맡았다. 기녀의 음악을 '여악(女樂)'이라고 부르면서 기생의 다른 호칭으로 사용한 것은 바로 예능인으로서의 역할 때문이었다.

기녀는 모두 관에 소속된 노비였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일을 보다 능숙하게 하도록 엄중한 교육을 실시했다. 기녀 교육 중 가장 중요시 된 과목은 악기·춤·노래 등이었다. 이는 장악원 관리의 지휘 아래 선배 기녀나 악사들이 담당했다. 기녀들은 15세부터 20세까지 1년 중 약 6개월 동안 실습 위주로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악기나 가무 이외에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말기에 '권번'이라는 기생조합에서 시조·가무·한문·시·서 등의 5과목을 교육시켰던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도 이 같은 교육이 행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녀들은 교육의 성취도에 따라 각기 다른 스승에게서 수업을 받았다. 나라에서는 이들의 교육 상황을 수시로 점검하여 재주가 뛰어나지 못하면 매를 맞는 것은 물론, 심한 경우에는 고향으로 돌려보내기까지 했다. 징계는 기녀에게만 내려지는 게 아니었다.

스승들도 기녀의 성취도에 따라 벌을 받았고, 장악원의 관리들도 기녀들이 음악을 연주하는데 소흘하거나 능숙하지 못하면 책임을 물어야 했다. 따라서 기녀들의 교육은 매우 엄격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단종 원년에는 국상중에도 기녀들에게 음악을 연습시켜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기녀들은 이렇게 철저한 교육을 받은 뒤에야 궁중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무대에 서면 자신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웃는 얼굴로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야 했다. 만일 궁중의 연회에서 대충대충 노래하다 적발되면 바로 궁중에서 내쫓겼다. 실제로 소홍립이란 기녀는 연산군이 종친들과 벌인 잔치에서 수심에 찬 얼굴로 노래를 했다가 궁궐에서 국경지방으로 쫓겨나기도 했다.

조선왕조 실록에 때때로 조정에서 관리하는 기생들을 없애고자하는 토론도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이처럼 기생들은 정치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것으로 추정된다. 이를테면 당/청나라의 사신들을 접대하거나, 조정의 대신들을 달래기 위해 이용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기생에도 계급이 있었다.
1패 기생, 2패 기생, 3패 기생 이렇게 있는데 이 중 우리가 주로 알고 있는 기생은 3패 기생으로써, 다른 말로 '창기'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우리가 또 알고 있는 '관기'는 2패 기생으로써 관청에서 주로 관리를 했다. 또, 1패 기생은 지금의 연예인 급으로, 지금의 벼슬과 비슷한 것도 받았고 또 정부에서 따로 관리를 하였다. 주로 궁중 여악으로써 활동을 했는데 다른 말로는 '여악', '경기'라고 불렀다.

경기(1패 기생)들은 주로 궁중에서 사신을 대접하거나 왕이 행차를 할 때 도우미(?)로써 이용되었다. 이들은 따로 또 계급이 있었고 예술인으로써 활동도 두드러졌다.

춤추는 기생을 무기, 노래를 부르는 기생을 가기, 또 시를 잘 쓰는 기생은 시기로 불렸는데 그들은 예술인이엇으며 또 동시에 지식인의 역할을 하였다. 양반의 술 시중을 들면서 그들은 술 시중 뿐 아니라 양반과 똑같은 위치에서 대화도 나눌 줄 알아야 했다.

기생의 의미가 퇴폐화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일제시대로 넘어가면서 반상의 신분사회보다는 돈많은 갑부들이 사회의 상류를 이루게 된다. 기생이 상대하던 학식있는 양반에서 돈많은 상인계층이나 일제간부들을 주로 대면 하다보니 학식을 갖출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고 그러다보니 고급기생들은 차츰 사라져가버렸고 어설픈 춤과 몸둥아리를 파는 기생들로 하향평준화가 돼버린 것이다.

노래와 춤을 많이 가르치던 권번도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그 교습이 어려워져 없어지는데 따라서 30년대 말에는 그나마 권번도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기생하면 흔히 우리 뇌리속에 매춘여성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남는 이유도 바로 그런 맥락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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