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해전기록 - 10장 - 한산도 대첩

구름위 2013. 5. 1. 11:25

● 한산도 대첩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분부가 도달되기 전에 경상도 바다에 있는 왜적들이 경상우도 연해안 지방을 잠식해 들어오며 불태우고 노략질하여 벌써 사천(泗川) · 곤양(昆陽) · 남해 등에까지 침범하였으므로 본도 우수사 이억기와 경상우수사 원균 등에게 공문을 보내어 약속하고, 그 동안 혹은 적선을 온전히 잡아 적의 목을 베고 또 혹은 합력하여 무찌른 다음 6월 10일 본영으로 돌아온 연유에 대해서는 이미 장계로 올린 바 있사옵고…

 

분부가 도달되기 전에 있은 제 2차 출동 관계를 언급한 부분이다. 2차 출동은 조정의 지시가 없이 원균의 6월 27일자 구원요청 공문에 의해 긴급 출동했고, 그 후 세 수사가 함께 해전을 치르고 《당포파왜병장》을 올렸다는 언급이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분부가 적힌 서장에 의거하여 순찰사의 공문이 또 왔으므로 빈번히 드나드는 도적을 낱낱이 섬멸하도록 서로 공문을 돌려 약속하고 배들을 정비하였사옵니다. 경상도에 있는 적의 정세를 탐문한즉, 가덕 · 거제 등지에 왜선이 혹은 10여 척, 혹은 30여 척이 빈번히 출몰한다 하고, 본도 금산(金山) 지역에도 적의 기세가 성하게 벌어져 수륙 두 갈래로 침범하여 곳곳에서 일어나건마는 하나도 항전하는 자 없어 깊이 쳐 올라가게 되었으므로, 본도 우수사와 7월 4일 저녁 약속한 장소에 반드시 도착하도록 약속하였고, 7월 5일에는 7월 6일 수군을 거느리고 일제히 출발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곤양과 남해의 경계인 노량(露梁)에 이른즉…

 

‘분부가 적힌 사항’ 은 행재소에서 전라감영을 경유해 보내온 출동명령서를 말한다. 그간 막혀 있던 서해안의 해로가 트이자 조정에서는 선전관을 보내 출전을 독려하고 있었는데 조정 차원의 군영과 행정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왕과 비빈, 세자와 세자빈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하루 두 끼의 끼니로 지내야 했던 어려운 행재소 살림이었다.

 

이순신, 이억기 함대는 전라감영의 출동명령에 따라 7월 4일 여수에서 합류했다. 그리고는 7월 6일 남해도 노량에서 원균과 만났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경상도 우수사가 깨어진 전선 7척을 수리해 거느리고 와서 그곳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바다 가운데서 같이 모여 거듭 약속하고 진주 땅 창신도에 이르러 날이 저물어 밤을 지냈습니다. 7일은 동풍이 크게 불어 행선하기 어려웠습니다. 고성 땅 당포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나무하고 물을 긷노라니…

 

‘깨어진 전선 7척’ 이라고 한바, 원균 관내 포구들에서 그동안 방치되어 있던 낡은 배들을 수리해서 함께 끌고 나온 듯하다. 원균 쪽도 행재소와 경상감영의 지시를 받고 많이 분발한 모습이다. 하지만 후방 고을 가운데 사량도, 남해도, 창신도를 제외한 나머지 고을들은 왜군들의 한두 차례 분탕질로 초토화되었기에 고을들의 정상적인 뒷바라지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전라 좌 · 우도의 병선은 모두 몇 척이었는지 기록이 없다. 그로부터 두 달 후에 있은 부산포해전 때의 기록을 보면 좌 · 우도의 판옥선은 모두 ‘74척’ 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참고한다면 3차 출동시의 판옥선은 대략 60척 정도로 보여진다. 또한 판옥선과 거북선의 비율을 10:1로 본다면 거북선은 ‘변형 거북선 (위장형)’을 포함해서 6척 정도가 출전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무렵에는 대규모 해전, 즉 큰 바다에서의 해전이 예상되고 있었고 대규모 해전을 예상한다면 판옥선의 대포 사정권 밖에 놓여지는 왜선들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왜군 함대 속에 더 많은 거북선의 투입이 절실한 시점이었다.

 

더구나 큰 바다는 수심이 깊고, 깊은 바다는 거북선이 갯벌에 좌초될 위험이 없는 조건이므로 거북선의 주특기인 종횡무진의 충돌전이 빛을 발할 수 있다. 거북선의 충돌전은 왜선을 수리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놓기도 했지만 침수(侵水)로 인해 속공의 효과가 더욱 두드러졌다.

 

‘동풍이 크게 불어’ 라고 한바, 역풍 속에 항해했음을 말한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난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 있던 그 섬(미륵도)의 목자(牧子) 김천손이 신 등의 배를 바라다보고 급히 달려와서 고하기를 “적선 대 ·· 소 아울러 70쳐 척이 오늘 하오 2시경에 영등포 앞바다에서 거제 고성 땅 견내량으로 들어가 대어 있다.” 고 하므로…

 

섬에는 군마를 키우는 목장이 있고 그 목장에는 목관이란 벼슬아치가 배속되어 있는데, 그 부하인 목자(牧子) 김천손이란 사람이 난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 있다가 달려와서 “70여 척의 왜선이 오후 2시경 견내량에 모여들었다.” 고 보고해 왔다.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초대형 함대였다.

 

이순신은 후방에도 비슷한 규모의 제2, 제3의 함대가 포진해 있을 것으로 판단했고, 왜군 측에서 드디어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회전을 준비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다시 여러 장수들에게 엄히 타일러 두고…

 

‘타일러 두었다’ 는 것은 적과의 있을 해전에 대비해서 작전회의를 가졌음을 말한다. 이순신의 해전에서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은 정보가 수집되면 즉시 휘하 장수들과 정보를 분석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마련한다는 점이다.

 

이순신은 자작(自作)으로 그려둔 정밀한 지도나 그밖에 전략 전술관계 자료들을 놓고 풍부한 전략적 토대 위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작전을 세웠다. 그는 평소에도 제장들이나 병졸들과 대화가 많았다. 이러한 정보 분석은 임진왜란 7년 동안 지속되었고 그 때문에 차질 없이 작전을 수행해 나갈 수 있었다.

 

이같은 과정 속에서 장수들은 꾸준히 자질을 향상해 나갔으며 훗날 개별적으로도 탁월한 작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김천손이 보고한 바에 따라 견내량에 머물고 있는 왜군 함대의 병력을 추산해 보자. 작전회의 때 이순신 역시 적선의 종류에 따라 병력을 산출해 보았을 것이다.

 

총 병선 수 : 70여 척
큰 왜선 :   36척 × 180명 = 6,480명
중간 왜선 : 24척 × 80명 = 1,920명
작은 왜선 : 13척 × 20명 = 260명
합계 : 8,660명

 

최소 8천에서 1만의 병력이었다(일본의 전사 연구가들 중에는 한산도해전 당시 왜군 측은 사상자 수만 9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순신은 이 함대를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서 섬멸할 계획을 세우고 이억기와 원균 수사들과도 작전을 논의했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8일 이른 아침에 적선이 머물고 있는 곳을 향해 가다가 바다 중간에 이르러 앞을 바라본즉 적의 큰 배 1척과 중간 배 1척이 선봉에 서서 나와 우리 수군을 탐색해 보고는 다시 진을 친 데로 들어갔습니다.

 

이에 뒤쫓아 들어가니 큰 배 36척, 중간 배 24척, 작은 배 12척이 진을 치고 있는데…

 

‘이른 아침에 적선이 머물고 있는 곳을 향해 가다가…’ 라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함대는 이날도 이른 아침에 이동했다.

 

선두 함대는 이순신 함대였고 그 뒤를 원균, 이억기 함대가 따랐다. 그러나 유인전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의 탐색선에게 함대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도록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좌수영 함대는 한산도를 지나 곧장 견내량 쪽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원균과 이억기 함대는 방화도와 한산도 고등산 뒤쪽으로 들어가 매복을 시작했다.

 

견내량 남쪽 입구에 나와 있던 왜군 탐색선들은 ‘적선단 발견’ 상황을 본대에 알리기 위해 곧바로 견내량으로 들어갔다. 좌수영 함대의 탐색선들도 왜군 탐색선들의 뒤를 따라 견내량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그리고는 왜군 본대가 머물러 있는 곳까지 다가가서 함대의 규모 등을 파악하고는 다시 견내량을 빠져 나왔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견내량은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 같은 큰 배는 배끼리 부딪히게 될 것이기에 싸움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적은 만일 형세가 불리하면 기슭을 타고 육지에 오를 것인지라 한산도 앞바다 가운데까지 유인해서 전부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한산도는 거제도와 고성 땅 중간에 있는데, 사방으로 헤엄쳐서 갈 길도 없으며 육지에 오른다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으므로…

 

글귀 내용대로만 본다면 이순신 함대가 견내량에 직접 와서 보니 그곳의 지형이 좁아 해전을 하기에는 마땅한 장소가 아니어서 유인전을 펴게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유인전에 대한 구상은 이전의 기동훈련 때, 그리고 전날 작전회의 때 이미 결정된 것이다. 장계에는 선조와 조정 대신들이 해전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진행사항을 기준으로 기록해 둔 것이다.

 

‘견내량이 해전을 하기에 좁다’ 는 것은 당항포해전 때 선보인 쌍학익진을 펴기에는 좁다는 의미이다.

 

세 명의 수사들은 전날 계획한 작전대로 유인전에 돌입했다. 이억기와 원균은 각기 화도와 고등산 뒤에 함대를 매복시켰고, 이순신은 해간도 어귀에서 유인전을 준비했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먼저 판옥선 5, 6척으로 적의 선봉을 쫓아가 공격할 기세를 보이자, 여러 배의 왜적들이 일제히 돛을 올리고 뒤쫓아 왔습니다 …

 

‘먼저 판옥선 5, 6척으로… 공격할 기세를 보이자…’ 라고 했는데 협선과 포작선 10여 척도 가세하고 있었다.

 

와키자카 함대는 “조선 함대를 섬멸하라!” 는 히데요시의 특명을 받고 출동한 입장이었다. 때문에 조선 함대의 유인 선단을 보자 거침없이 추격에 나섰다.

 

유인 선단을 기다리는 동안 이순신 함대는 해간도 어귀에서 2단계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이순신의 마음은 야릇한 흥분과 긴장감으로 가득 찼고 또 한편으로는 낚싯줄을 놓고 고기의 입질을 기다리는 어부의 심정처럼 여유도 있었다.

 

걸려들기만 한다면 잽싸게 낚아채서 단숨에 박살내버릴 심산이었다. 계획대로 적을 견내량에서 끌어내기만 한다면 일단 작전은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해간도에서부터 한산도 앞바다까지는 적을 유인해 내기가 보다 쉬울 것이라는 게 이순신의 생각이었다. 40여 척의 대선으로 선단을 구성한 것이나 견내량에 진을 친 것을 보면 이들은 필시 조선 함대의 섬멸을 벼르고 출동한 함대였고, 저들 역시 마음 놓고 접전을 펼치고자 한다면 보다 넓은 바다를 선호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약속된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멀리서 총포성이 들려 왔다. 그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또렷해졌다.

 

1단계 작전이 성공했음을 예감한 좌수영 함대 진영에는 침묵의 환호가 터졌다.

 

‘아! 하늘이 우리를 도우시는구나!’

 

곧이어 1단계 유인전에 나섰던 전선들이 견내량을 빠져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지금까지는 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규모의 왜선들이 노도와 같은 기세로 따라붙고 있었다.

 

적선단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 좌수영 병선들은 해간도를 지나자 기다리고 있던 본대에 곧장 합류했다.

 

총포 소리가 좁은 협곡에 부딪히며 천지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2단계 유인전이 시작되었다.

 

좌수영 함대는 선수를 돌려 한산도 쪽을 향했고, 추격하던 왜의 선봉은 이를 놓칠세라 해간도 앞을 신속하게 통과했다. 선두가 통과하자 중간과 후미의 선단들도 모두 견내량을 빠져 나왔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우리 배가 거의 다 물러나 돌아옴에 적들도 줄곧 뒤쫓아 나왔으며, 그래서 바다 중앙까지 왔습니다.

 

왜군 함대 사령관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자신의 함대가 견내량을 반쯤 통과했을 때 ‘이순신이 혹시라도 두 동강 내기 작전으로 나오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걱정을 했다. 그러나 전 함대가 무사히 견내량을 통과하자 일단 안심했고, 이순신의 본대마저 36계 줄행랑을 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조선 육군이 전날 천험의 요새라는 문경새재를 고스란히 내주더니 이번에는 싸움을 제법 안다는 이순신마저 남해안 최고의 요새를 거저 바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한 와키자카는 조선군의 어리석음을 재차 확인하면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소리쳤다.

 

“이순신 너도 별 수 없는 조무래기가 아니냐! 나 와키자카님이 오늘 너에게 큰 가르침을 주고자 왔느니라!”

 

군사적 관점에서 볼 때 견내량을 무사히 통과만 하면 노량해협까지는 이렇다 할 험로가 없었다. 그래서 한려수도 해안을 차지하고나면 전라도 지역은 쉽게 공략할 수 있기 때문에 와키자카로서는 일단 신명나는 일이었다.

 

이 천혜의 해협을 거저 얻게 된 사실에 대해 경우에 따라서는 한 번쯤 의심해 볼 필요가 있었건만 와키자카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순신의 이같은 행동을 충분히 납득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순신이 용인에서 자기에게 패한 전라감사 이광의 부장이라는 점이었다. 와키자카는 이순신이 자기가 온 줄도 모르고 싸움을 걸어왔다가 기함에 나부끼는 자신의 깃발을 보고는 줄행랑을 친 것으로 생각했다.

 

이제 이순신도 달아났고 견내량도 차지했으며, 앞은 탁 트인 바다였기 때문에 와키자카는 기습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쾌속선을 보내 도주하는 적의 앞을 가로막기만 하면 조선 함대는 독 안의 쥐가 되어 일망타진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와키자카의 입장에서 보면 승리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승리는 단순한 승리가 아니었다. 승리 이상의 승리였으며 자신이 천하명장으로 자리매김 되는 참으로 위대한 역사였다. 그의 참모들 역시 승리를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승리를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달아나는 적을 신속히 일망타진하는 것만이 유일한 과제였다. 이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와키자카의 추격령이 왜군 함대에 하달됐다.

 

“적을 섬멸하라!”

 

● 학익진

 

견내량 북쪽 사등면 포구에서 한산도 앞바다까지는 약 18km의 거리다. 앞의 장계에서 ‘일제히 돛을 올리고 뒤쫓아 왔습니다’ 라는 글귀를 보면 아마도 북풍이 다소 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추격전을 편 것으로 볼 때 노젓기도 병행했을 것이다.

 

9시에서 12시 사이라면 조수(潮水)는 견내량에서 한산도 쪽으로 흐른다. 조수의 유속을 시속 2km 정도로 보면, 노젓기를 감안했을 때 왜군 함대는 약 18km를 2시간에 걸쳐 노를 저어온 것이 된다.

 

반면에 전라좌수영 측은 대부분의 선단이 해간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노를 저어온 거리도 짧았고, 대포 사격이 주된 공격수단이었으므로 설사 팔 힘이 빠진다 해도 그것이 전력에 큰 손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또 조선함대 측에서 힘이 빠진 함대는 이순신 함대뿐이었다. 이억기와 원균의 함대는 섬 그늘에 숨어서 비축된 힘을 가지고 전날 저녁의 작전회의를 되새기면서 왜선단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왜군 함대는 조총, 활, 일본도가 주된 공격수단이었기 때문에 팔 힘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 하는 것이 전력에 큰 영향을 주었다.

 

2단계 유인전을 시작한 이순신 함대는 뱀섬을 돌아 방화와 화도 앞을 경쾌하게 내달렸다.

 

신바람이 난 것은 왜군측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곧 주무기인 조총과 일본도 앞에서 일망타진될 조선 함대를 그리면서…

 

이 시각 화도와 고등산 뒤쪽에 매복해서 퇴로 차단과 협공을 준비하고 있던 나머지 두 함대는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한 폭의 그림을 목도하면서 감탄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전날의 계획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이 점차 완성단계에 접어들자 이억기, 원균 함대 진영에는 피가 멎는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지막 그림의 완성은 이들 함대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뒤도 돌아보지 않고 쫓겨가던 이순신 함대는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갑자기 세 갈래로 분항(分航)하기 시작했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이때에 다시 여러 장수들에게 학익진 대형을 이루도록 명령을 내리고…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두 쪽으로 갈라진 함대의 좌우측 선수가 이내 왜선단을 향해 빠른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와키자카와 그의 참모들은 정연한 모습으로 순식간에 대형을 바꾸고 있는 이순신 함대를 바라보며 놀란 듯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알 수 없는 광경에 아연 긴장하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하다! 놈들이 왜 저러는 것이냐?”

 

와키자카가 참모들을 향해 소리쳤다.

 

병법에도 도망가던 적이 머리를 돌리는 것은 반드시 어떤 계교(計巧)가 숨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와지자카로서는 이순신 함대의 이같은 움직임이 무엇을 의도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의아스럽기는 그의 참모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숨겨진 계략(計略)’ 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을 때, 드디어 임진왜란 최고의 하이라이트인 한산도 앞바다에서의 학익진이 왜선단 코앞에서 요란한 군악과 함께 장엄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선수를 되돌린 좌수영 함대의 중앙부는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러더니 양쪽 날개 쪽은 포위를 하려는 듯 군악을 울리면서 각기 방향을 틀어 급행(急行)했다.

 

‘저건 또 왜 저러는 것일까?’

 

적의 앞을 가로막아 서는 것은 전장에서 다반사로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왜군 측에서는 저렇게 적은 숫자로 자신들을 포위한다는 것은 아무런 실효가 없는 부질없는 짓으로 보였다.

 

뜻밖의 상황에 부닥친 와키자카는 모든 정황을 종합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순신이 도망쳐도 결국에는 잡힐 것을 알고는 사생결단으로 나오는구나. 용맹한 장수라고 하더니 틀린 말은 아니다…!’

 

와키자카는 드디어 총공격을 가할 시점이 무르익었다고 판단했다. 이에 지휘봉을 들어 공격을 명하려는데 갑자기 등 뒤쪽에서 “쾅! 쾅!” 하는 포성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린 와키자카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화도와 고등산 뒤편에서 또 다른 병선들이 떼를 지어 군악을 울리며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복병이다! 이것이 이순신의 계교였구나!”

 

와키자카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고 다시 고개를 들어 전방을 응시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말로만 듣던 거북 모양의 맹선들이 각기 한두 척의 병선을 이끌고 정면과 좌우에서 달려 나오고 있었다.

 

“장군! 저것이 바로 소경배로 알려진 조선의 돌격선인 듯합니다! 속히 공격을 명하시어 놈들의 접근을 막게 하십시오!”

 

기함 사령부와 각 함대 대장들은 자신들이 적의 계략에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이미 기동을 시작한 거북선단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거북선의 돌격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확실한 대안이 마련돼 있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적이 자신들의 예상을 깨고 갑자기 대공세로 전환한 자체가 이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와키자카는 이렇게 된 이상 우선 이순신의 기함이 버티고 있는 정면의 적부터 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급히 돌격선단에 돌격을 명령했다.

 

“돌진하라!”

 

정면 돌파였다.

 

그 방법만이 지금까지의 여세를 몰아 눈앞의 이순신과 조선 함대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으로 보였고, 좌우와 후미의 적들은 이순신의 기함을 깨고 나면 손쉽게 해치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좋다! 나머지는 나중에 손봐주기로 하고 우선 네놈들부터 상대해 주마!’

 

그러나 왜군 돌격대 중 제1진 5척이 정면돌파를 시도하기 직전 조선 함대의 그림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그림의 모습은 적을 완전히 포위한 ‘쌍학익진(雙鶴翼陣)’ 이었다.

 

학익진의 양쪽 날개를 이루는 선단은 좌우 척후장, 좌우 거북선 돌격장, 좌우 별도장(특공조의 지휘관)의 병선들이었다.

 

정면에는 중위장 권준과 이순신의 선단이 포진해 있었다. 이 정면의 선단이 전라좌수영의 주력이었다. 권준과 이순신의 기함은 주력 함대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전라좌수영의 주력은 여수 본영을 중심으로 방답과 순천기지 함대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함대들은 평소 훈련이나 해전법 개발, 그리고 거북선의 개발에까지 이순신과 호흡을 맞춰 왔다. 이들은 천자포와 지자포 등으로 무장되어 있었으며, 각종 사격훈련이나 장탄 훈련도 가장 많이 해온 최정예 함대였다.

 

왜군 측이 돌진해 오자 조선 함대 측에서도 즉각적인 응전을 시작했다.

 

중위장 권준은 한 차례 북을 울려 주력 함대에 “제1진 앞으로!” 를 명령했다. 이에 5~8척의 판옥선들이 진영을 빠져나와 적선을 향해 횡으로 늘어섰다. 소형 학익진이었다.

 

소형 학익진이 완성되자 권준은 목표 정면의 왜군 돌격선 5척을 향해 정면대포와 좌현대포를 동원한 연속 사격령을 하달했다.

 

왜군 돌격선이 50m 지점을 통과해 올 즈음, 어느 쪽이 먼저인지도 모르게 양측에서는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한 사격전을 개시했다.

 

“쾅! 쾅!”


“타타탕!”

 

대포 사격에 이어진 중발화 · 대발화탄의 연쇄적인 폭발음도 엄청났다. 바다를 뒤흔드는 포성과 함께 자욱한 흑색 화약 포연이 선체와 바다를 뒤덮으면서 순식간에 양측 함대의 시야가 가려졌고, 그 순간 메케한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왜군 측은 15문(5척×3문)의 왜식 대포가 사격에 나섰고, 5척의 층루선에 승선하고 있던 조총수들이 사격에 가담하고 있었다. 선당 층루선에 승선하고 있던 조총수들이 사격에 가담하고 있었다. 선당 50정이면 무려 750발의 조총탄이 날아온 셈이다.

 

반면에 조선함대 측은 정면과 좌현대포 쏘기를 연속했으므로 80문의 대포들이 5척의 왜군 돌격선에 포탄을 집중시켰다.

 

왜군 대포의 구경은 4~5cm. 사정거리는 약 2~3백 미터였다고 일본 측 기록에 전해지고 있다. 말하자면 큰 조총격인데 왜군의 대포로는 두께가 10cm에 달하는 70m 밖의 판옥선의 방탄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판옥선의 수병들은 왜군들을 향해 활이나 승자총통으로 사격하지 않았다. 열쇠 구멍을 거꾸로 뚫어 놓은 것과 같은 대포 구멍으로 일본 대포보다 사정거리가 길고 구경이 큰 대포를 내밀어 조준한 후, 심지에 불을 붙였을 뿐이었다.

 

오늘날에 와서 분석해 보아도 당시 양측의 화력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 결과 조선함대 측은 경미한 손실만을 입었고, 왜군 돌격대 1진인 5척의 층루선단은 완파 내지는 반파되어 전열에서 이탈해야만 했다.

 

돌격선단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박살나는 광경을 지켜본 와키자카는 혀를 내두르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든 것이 그저 꿈만 같았고, 그렇게 큰 대포 소리도 난생 처음이었다. 특히 조선 수군이 저런 대포를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달아나던 조선함대가 어느 순간 군악과 함께 펼쳐보인 학익진, 그 다음 자신이 내린 돌격령, 그리고 나란히 열을 맞춰 앞으로 나와 선 10여 척의 조선함대 병선들…

 

“정면 쏘아! 좌현 쏘아!” 를 번갈아 가며 매 단계마다 왈칵 왈칵 토해내는 자욱한 포연, 그리고 불타기 시작하는 돌격선…

 

이 모두가 실제가 아닌 그림을 보는 듯했고, 그 짧은 순간에 조선함대가 선보인 변화무쌍한 진법과 전법들은 환상적이다 못해 왜군 함대를 경악케 했다.

 

이것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조선함대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마치 무엇에 홀려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와키자카는 비로소 적의 실체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할 수가 있었다.

 

“2진을 내보내라!”

 

누상(樓上)의 와키자카가 절규하듯 재차 돌격령을 내렸다. 부릅뜬 그의 두 눈은 무슨 큰일이라도 낼 듯한 위엄이 서려 있었지만 칼을 잡은 그의 손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왜군 돌격대 제1진을 간단히 격파한 10여 척의 판옥선단은 이번에는 우측으로 선체를 돌렸다. 2차 돌격전을 준비하던 왜군 돌격대에게 ‘너희들도 나올 테면 나와 보라!’ 는 태도로 보였다.

 

때문에 왜군 돌격부대들은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나서기를 주저했다. 왜군 돌격대장들은 불과 얼마 전 용인전투에서 5만의 조선군을 평원의 소떼 몰 듯 흩어지게 했던 와키자카 직속의 무장들이었다. 그런데 조선의 수군은 그때 보았던 조선 육군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그들에게 비친 해전의 상황은 놀랍고 놀라울 뿐이었다.

 

돌격대의 돌격전이 먹혀들지 않자 와키자카 함대는 바다 한가운데에 정체된 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렇게 우물쭈물 하고 있는 사이 왜군들을 당황스럽게 만든 사건이 또 터졌다. ‘소경배’ 로 알려진 거북선들이 자신들의 진영 속을 헤집고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거북선에 대해서는 이미 들은 바가 있었던 터라 왜장들은 “맹선을 막아라!” 며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내질렀다.

 

거북선들은 커다란 용머리와 도깨비 머리(충돌용 돌기)를 앞세우고 왜군 함대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선단 양쪽 테두리에 진을 치고 있던 왜군들은 말로만 듣던 거북선의 모습을 확인하자 소스라치게 놀랐고 아우성쳤다.

 

용머리의 크기는 작은 배만 했고, 선수 아래에 불쑥 솟아 있는 도깨비 머리는 쳐다보기에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시무시해 보였다.

 

‘저 아가리에서 대포를 쏘고, 저 도깨비 대가리가 우리 배를 들이받는다면…?’

 

이런 저런 생각에 왜군들의 심장은 바짝 오그라들었다. 그리고 등줄기에서는 연신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그러는 찰나, 마침내 거북선 1척이 “쿵!” 하는 충돌음과 함께 층루선 1척을 들이받았다. 다른 거북선들도 연달아 직충전을 감행해 들어왔다. 이에 외곽의 왜선단과 막기 위해 거북선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렇게 모여든 왜선들을 향해 거북선단에서는 전후좌우 30여 문의 대포를 일제히 가동했다. 사정거리 10m 내외에서 발사된 포탄과 살탄, 산탄형 포탄들은 정확하게 표적으로 날아갔다.

 

“장군! 맹선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장군과 기함입니다! 일부의 선단으로 저 배들을 막게 하시고 전 함대를 그대로 돌진케 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와키자카의 참모 하나가 위기 돌파를 위한 방안으로 정면승부를 주장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파탄의 국면으로 접어들 것’ 이라고 생각하던 접현전을 준비케 했다.

 

그러나 와키자카 함대의 주력이 막 전진을 시작하려는 순간, 양 옆을 돌아 포위 대형을 갖춘 조선함대가 이윽고 속력을 높여 왜군 함대 좌우측 옆구리를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이와 때를 맞춰 후미의 조선함대들도 거리를 바짝 좁혀 오고 있는데, 2척의 거북선이 정면의 해역을 막아섰고, 그 뒤로 10여 척의 판옥선들이 대포를 정조준 한 채 늘어서 있었다.

 

‘저들도 그같은 대포로 공격해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파탄이 아니라 전멸이 아닌가! 그래서 지금껏 모두가 당했구나!’

 

와키자카는 자신이 성급하게 덤벼들었음을 후회했다. 하지만 100여 미터 전방에는 이순신의 기함이 보였고, 적 기함에 펄럭이는 전라좌수영의 대장기가 와키자카를 유혹하듯 손짓하고 있었다.

 

“선봉으로 하여금 적의 맹선과 대선들을 맡게 해라! 내가 직접 함대를 이끌고 이순신을 칠 것이니…!”

 

와키자카 함대는 정면을 향해 발진했다. 그러나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조선 함대는 이 순간 포위망을 바짝 좁혀 들어왔고, 더욱 요란하고 빠른 템포의 군악과 함께 신기전 · 대장군전 · 장군전 · 차대전 등을 동원한 일격필살의 집중타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들 살탄들을 판옥선 1척당 5발씩 쏘았다면 ‘판옥선 60×5발=300발’ 이었다. 이 300발은 왜군 기함과 호위함들을 목표로 날아갔기 때문에 왜군 지휘부는 ‘살탄들의 장대비’ 를 얻어맞은 꼴이 되어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다.

 

와키자카의 지휘부가 집중공격을 받게 되자 와키자카 함대는 순식간에 와해되기 시작했다.

 

“장군! 속히 퇴각을 명하소서!”

 

절체절명의 위험에 직면한 참모들이 와키자카를 향해 소리쳤다. 사태의 심각성을 동감한 와키자카도 망설임 없이 즉각 퇴각령을 내렸다.

 

“후퇴하라! 후퇴하라!”

 

이것이 파국 수습을 위한 그의 첫 번째 명령이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너무 늦은 것이었다.

 

퇴각의 나팔이 울리자 왜군 함대는 방향을 돌려 견내량 쪽으로 퇴각을 시도했다. 그 광경을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충무공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 ※
일제히 진격하여 각기 지자 · 현자 등 각종 총통을 쏘기 시작해서 먼저 2, 3척을 깨뜨리자 여러 배의 왜군들은 기가 꺾여 도망갈 기미를 보였습니다.

 

와키자카 함대가 퇴각의 기미를 보이자 조선함대에는 총공격 명령이 내려졌다. 승세를 굳혔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거북선단의 돌격전을 지원하기 위해 전 함대에 조이기 식 공격을 하달했다.

 

왜군 함대와의 거리는 약 50m. 좌현대포와 우현대포의 연속 사격으로 이어진 조선 함대의 함포사격은 엄청난 위력을 과시했다. 근접한 상태에서 정조준으로 쏘는 사격이었으므로 쏘는 것마다 백발백중이었고, 좌우와 후미의 함대들도 일제히 사격을 가했기 때문에 왜군 함대는 초반부터 심각한 타격을 입어야 했다.

 

퇴각을 시도한 왜군 측은 전력이 약한 후미가 선봉이 되었다. 이억기 함대 역시 10여 척씩 나뉘어 조준사격을 가하여 왜군 함대의 1차 탈출을 차단했다. 선본이 된 후미의 왜선단은 포탄을 맞지 않으려고 오히려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런데 물러나는 과정에서 어처구니없는 문제가 발생했다. 함대의 진형이 더욱 오밀조밀하게 밀착되면서 대응 사격에 나설 수 있는 왜선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 외곽에 위치한 병선들이 하나 둘 불타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화염으로 인한 포위망’ 하나가 더 생겨버린 꼴이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몇몇 무리의 왜선들이 화염망을 통과해서 조선 함대의 포위망을 각개로 돌파하고자 돌진해 나갔다. 그러자 조선 함대에서도 비슷한 숫자의 선단이 이들의 돌파를 막아섰고,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몇 차례 저지 사격으로 불이 붙은 왜선들을 향해 이번에는 방패를 빽빽이 세운 협선들이 뛰쳐나와 발화탄을 투척했다. 왜군들은 해전이 있기 직전에 선체에 물을 끼얹어 두었기 때문에 불은 쉽게 붙지 않았다. 그러나 판옥선들이 대포를 쏘고, 그 깨진 구멍으로 협선들이 발화탄을 계속 던져 넣자 불은 속수무책으로 번져 나갔다.

 

협선들의 역할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집중 사격으로 발이 묶인 왜선단 주위를 돌면서 선수를 왜선의 노에 부딪히게 해서 왜선들의 노를 사정없이 부러뜨렸다.

 

왜군들에게 여분의 노는 다소 있었다. 그러나 한 차례의 충돌로 수십 개나 되는 1인용 노들이 왕창 부러져 나갔기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는 표류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그 상황에서 또다시 포탄이 날아왔고, 뚫린 구멍으로 발화탄을 매단 불화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결국 왜선들은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도주를 시도한 각각의 왜선들은 이런 식으로 하나 둘 최후를 맞았다. 그 결과 자신들의 앞을 막아선 조선함대의 저지망을 뚫을 수 있는 왜선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누구도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와키자카 함대에 배속된 왜군들 중에는 이미 조선함대와의 해전에서 생지옥을 체험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죽었구나’ 생각했고, 절망감에 빠져 감히 달아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들의 절망감은 흡사 전염병처럼 번져 나갔다. 그리고 왜군 진영을 옴짝달싹 못하게 마비시켜 버렸다.

 

파멸의 문턱까지 쫓긴 와키자카는 견내량 쪽과 해상으로의 탈출은 단념해야 했다. 천하명장의 꿈을 키웠던 와키자카였지만 그 역시 위기의 순간에 직면하게 되자 두 가지의 선택을 놓고 갈등해야 했다.

 

하나는 최후의 순간까지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육지 쪽으로의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한산도 해전에서도 이순신의 속공전은 빛을 발했다. 승리의 원천은 여러 가지가 복합된 것이었지만 거북선의 활약이 더욱 돋보인 해전이었다.

 

사실 왜군 함대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판옥선단의 ‘일시집중타’ 였다. 그러나 거북선들이 적진을 파고들어 왜군 함대의 발을 묶어 놓지 않았다면 집중타의 효과는 크게 떨어졌을 것이다.

 

거북선은 개조형을 포함해서 6척 정도가 참전하고 있었다. 그 중 2척은 이순신의 기함을 호위하면서 접근하는 왜군 돌격대의 돌격전에 대비하고 있었고, 양 날개 선단에 배치된 4척은 학익진을 펼 무렵 왜선단 옆구리 쪽을 비스듬히 쑤시고 들어갔다.

 

왜선단에 접근한 때는 좌수영 주력 선단 10척과 왜군 돌격대 제1진이 타격전을 교환할 무렵이었다. 나란히 돌파해 들어간 위치는 왜군 돌격대 제 3진과 4진이 포진해 있던 옆구리 쪽이었다. 그래서 왜군 돌격대 3진과 4진은 자연히 발이 묶이게 되었다.

 

이렇게 적진 속을 침투해 들어간 거북선들은 전후좌우의 막강한 화력을 과시하며 와키자카의 기함을 향해 밀치고 들어갔다. 거북선의 기함을 향한 돌격전에 당황한 왜군 측은 정예 층루선단으로 하여금 거북선의 공격에 과감히 맞섰다. 속공 돌격전이 주특기인 4척의 거북선들도 왜군 측의 기함을 지키려는 결사항전에 더 이상의 전진은 무리였다.

 

그래서 1차 사냥 목표를 36척의 층루선으로 바꾸었다. 거북선단이 공격목표를 기함에서 층루선으로 바꾼 것은 이미 이러한 상황에 대비한 또 하나의 작전이었다. 전날 작전회의에서 이순신은 이 같은 가능성을 주지시켰고 돌격장들에게 이렇게 일러둔 바 있었다.

 

“적선이 70척이 넘는다 하니 뚫고 들어가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따라서 1차로는 기함을 깨뜨릴 것이지만, 여의치 않을 시는 대선들의 함교를 우선 공격하라!”

 

돌격장들은 전날의 작전회의를 떠올리면서 목표를 일반 층루선으로 바꾸었고, 이내 거북선의 용머리 포탑은 층루선의 층루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거북선 4척이 36마리나 되는 호랑이들의 눈을 공격하고 다녔던 것이다. 조선 함대의 일시집중타는 바로 이 무렵 시작되었다.

왜군 함대는 동시에 진행된 거북선단의 돌격전과 판옥선단의 집중타를 견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방향감각을 잃고 자중지란에 빠져들었다.

 

해전 초까지만 해도 그 위용을 뽐내며 바다 위를 내달리던 호랑이들은 급소를 공격당하자 곧바로 무너졌고 더 이상의 반격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판옥선단과 거북선단의 협공으로 와키자카의 대 함대는 철저히 유린당했던 것이다.

 

왜군 측도 처음에는 대포와 조총의 집중사격으로 강력히 맞섰다. 그러나 그것들은 선체가 굵은 참나무, 통나무로 만들어진 거북선에 “쿵!” 하고 박히거나 튕겨져 나왔다.

 

백병전으로 맞서고자 했던 돌격대들도 불과 2, 3미터 거리에서 터져 나오는 거북선의 산탄형 근접탄의 탄막을 뒤집어쓰고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더 가까이 다가간 돌격대들은 거북선이 들이받으면서 층루를 날려버렸기 때문에 궤멸적인 손상을 입었고, 불타는 층루선들은 원상회복이 어려워 왜군들은 결국 배를 버리고 바다로 뛰어들어야 했다.

 

비교적 선단 안쪽에 위치해서 거북선과의 접전을 피할 수 있었던 층루선들도 결코 안전을 보장받지는 못했다. 장군전과 차대전 등 대형 살탄들이 날아와 앞을 가린 방패들을 마른 장작 쪼개듯 한 번에 후려 쳐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왜선에는 갑판 위에 이동식 방패를 세워 놓았는데 왜병들은 이것을 두 가지 용도로 사용했다. 하나는 방패, 또 하나는 적선에 걸쳐 건너가는 용도의 사다리였다. 방패 뒤에서 조총을 쏘다가 거리가 가까워지면 그 방패를 적선에 걸쳐놓고 ‘돌진 앞으로!’ 를 감행하는 것이 일본 수군의 주된 전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방패 뒤쪽은 사다리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방패들이 살탄의 후려치기 공격에 날아가 버리자 갑판은 졸지에 벌거숭이가 되었다. 이 틈에 산탄과 동시다발형 피령전, 편전들이 우박처럼 날아들었고, 장탄에 1분이나 소요되는 조총으로는 반격 자체가 어려웠다.

 

산탄, 피령전, 편전 등을 한두 발씩 맞은 왜병들은 “왝!” 하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