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해전기록 - 8장 - 율포 해전

구름위 2013. 5. 1. 11:22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이에 우리 전선들은 사방으로 포위를 하면서 협공하기를 더욱 급히 했습니다. 돌격장이 탄 거북선은 또 층각배 아래를 똑바로 충돌하고 위를 향해 총통을 치쏘아 그 층각 부분을 깨뜨렸습니다. 다른 병선들이 또 불화살 등을 쏘아대어 비단 장막과 돛을 쏘아 맞혔습니다. 그러자 맹렬한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층각 위에 앉아 있던 왜장은 화살을 맞아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사방으로 포위’ 라는 글귀는 쌍학익진을 말한다. 이억기 함대가 가세하면서 조선 함대는 보다 다양하고 고차원적인 해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했는데, 조선 함대가 쌍학익진으로 적을 완전히 포위할 수 있었던 것은 병선의 수가 그만큼 많아졌기 때문이다.

 

당황한 왜군 함대가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왜장선을 표적으로 한 거북선의 돌격전이 시작되었다.

 

왜군 진영을 전속력으로 돌진해 들어간 거북선은 드디어 왜의 기함을 들이받았고, 용머리 포탑은 초탄부터 기함의 층각을 깨뜨렸다.

 

이순신은 용머리가 ‘층각을 깨쳤다’ 고 하면서 거북선의 표적이 기함의 층각과 왜장이었음을 적어 놓았다. 또 왜장이 층각에서 굴러 떨어진 원인이 거북선과 판옥선의 합동 공격이었음도 밝혀 두었다.

 

왜의 기함이 돛을 올렸다면 다른 왜선들도 역시 돛을 올렸을 것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거북선과 특공 판옥선단의 근접 공격을 받았으니 불길에 휩싸이게 된 것은 당연했다. 더구나 돛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급선회시 전복되는 사고도 뒤따랐다.

 

절간 같은 3층 누각, 푸른 일산, 검은 장막, 쌍돛들이 불타는 모습을 본 이순신은 ‘불화살(살탄들도 포함된다)들을 쏘아 비단 장막과 돛을 맞추자 맹렬한 불길이 치솟고’ 라고 기록해 두었다. 이순신은 이러한 공격방식을 거북선과 판옥선의 ‘협격전’ 이라고 불렀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다른 왜선 4척은 급박해진 틈을 타서 돛을 달고 달아나므로 신과 이억기 등이 거느린 여러 장수들은 패를 갈라 접전해서 모조리 포위해버리니 많은 적선의 적도들은 물에 빠지기 바쁘고, 혹은 언덕으로 기어오르기도 하고, 또는 산으로 올라 도망가기도 하는데, 군사들은 창과 칼과 활을 가지고 저마다 죽을 힘을 다해 쫓아가 잡아서 머리 43개를 베고 왜선 모두를 불살라 없앤 뒤에…

 

포구 밖으로 나와 있던 4척의 층루선들은 기함을 호위하고 나오다가 왜장이 죽고 기함이 불타자 제각기 살길을 찾아 달아날 구멍을 찾았다.

 

그러나 조선 함대는 틈을 주지 않으려고 선단을 나누어 왜군들의 앞과 뒤를 가로막은 후 집중타를 퍼부어 간단히 불살라버렸다. 이렇게 되자 왜군들의 나머지 병선들도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쉬지 않고 몰아친 함포사격에 깨지고 불타기 시작했다.

 

왜군들은 속속 바다로 몸을 던졌다. 육지까지 헤엄쳐 달아날 심산이었지만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수십 척의 협선과 포작선들이 사방에서 달려 나와 화살을 쏘고 창을 던지며 왜군들의 탈출을 저지하고 나섰다.

 

바다는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 왜군들로 넘쳐났다. 수천의 왜군들이 희뿌연 포말을 일으키며 죽을힘을 다해 헤엄치고 있었다. 워낙 많은 수가 한꺼번에 탈출을 시도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수의 왜군들이 조선 함대 수병들의 공격을 피해 육지까지 헤엄쳐 도망칠 수 있었다. 이에 일부 조선 수병들은 육지까지 추격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조선 함대에 첫 희생자가 발생했다.

 

희생자는 흥양 고을 소속의 손장수(孫長水)라는 병졸이었다. 손장수는 임진년(壬辰年) 1년간의 해전을 통해 일본도에 의해 전사한 유일한 경우였다.

 

왜군의 목을 벤 숫자가 43개였다는 것은 ‘육지까지 추격하라!’ 는 명령이 없었기 때문이었으며, 베어진 수급(首級)은 대부분 해상에서 죽은 왜병들의 시체를 건져 올려 벤 것들이었다. 더 많은 시체에서 목을 벨 수도 있었지만 기함에서 ‘목 베기에 힘쓰지 말고 오직 적을 사살하는 것에 힘쓰라!’ 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억기 함대와 원균 함대는 나름대로 수급을 베었고, 해전의 상황을 각자 조정에 장계로 보고했다. 때문에 조선 함대 전체가 벤 수급은 이보다 더 많았다.

 

당항리 앞바다는 육지까지 거리도 가깝고, 날씨도 음력 6월이어서 헤엄치기에도 좋았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왜군들이 목숨을 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왜성을 쌓아가면서 서해 진출을 도모하려던 왜군 측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또 하나의 기도함대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조선함대는 해전을 끝낸 뒤 미끼배 1척을 남겨두고 바다로 나왔다.

 

※ 《난중일기》 1592년 6월 5일 ※
아침에 출항하여 고성 땅 당항포에 이르니 왜놈의 배 1척이 판옥선과 같이 큰데, 배 위에 누각이 높고 그 위에 적장이 앉아서 중선 12척과 소선 20척을 거느렸다. 한꺼번에 쳐서 깨뜨리니, 활은 맞은 자가 부지기수요, 왜장의 모가지도 일곱급이나 베었다. 나머지 왜놈들은 뭍으로 내려가 즉시로 달아났다. 그래 봤자 나머지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우리 군사의 기세가 크게 떨쳤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짐짓 배 1척을 남겨 두어 돌아갈 길을 열어 두고, 날이 어두움을 틈타서 바다 어귀로 되돌아 나와 진을 치고 밤을 지냈습니다. 6일 새벽, 방답첨사 이순신이 당항포에서 산으로 올라간 적들이 필시 남겨둔 배를 타고 새벽녘에 몰래 나올 것이라 하여 그가 통솔하는 병선을 거느리고 바다 어귀로 나가 그 나오는 것을 기다리다가 놈들을 온통 잡아 놓고 빨리 보고하기를, 오늘 새벽녘에 당항포 바깥 어귀에 도착한 즉, 좀 있다가 한 왜선이 과연 어귀로 나오므로 첨사가 불시에 습격하였습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놈들은 거의 벽여 명이나 되며 우리편 병선들이 지자 · 현자 총통 들을 쏘며, 철환 · 질려포 · 대발화 등을 연속해 쏘고 던지자 왜적들은 어쩔 줄 모르고 도망가려 하므로 갈고리를 써서 바다 가운데로 끌어내니 반이나 물에 빠져 죽는데, 그 가운데 왜장은 나이가 대략 24, 5세쯤 되어 보이고 풍채가 건장하며 의복이 화려했는데, 칼을 잡고 홀로 서서 8명의 남은 부하를 지휘하고 항전하면서 끝까지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첨사가 힘껏 활을 쏘아 맞추니 칼을 잡고 있던 자(왜장)가 화살을 10여 대나 맞고서야 소리를 지르며 물로 떨어지기에 곧 목을 베게 하고, 다른 왜인 8명은 군관 김성옥 등이 힘을 합하여 쏘고 또 목을 베었습니다.

 

‘날이 어두움을 틈타서…’ 라는 기록으로 보아 해가 있는 동안에는 바다 어귀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틈타서’ 라는 글귀를 특별히 넣어둔 것은 작전상 야간 항해를 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역시 신출귀몰한 항해법이다. 바다 어귀까지 나와서 다시 또 ‘바다에서 진을 치고’ 숙영한 것 같다.

 

6월 6일. 새벽 무렵 방답첨사 이순신의 함대가 미끼 배의 형편을 알아보고자 이순신의 허락을 받아 이동했다.

 

새벽녘에 몰래 도망치는 왜선을 잡자면 그들보다 훨씬 일찍 나가서 매복을 하고 있어야 했으므로 방담 함대가 떠난 것은 이른 새벽이었다. 매복을 했던 위치는 바다 어귀에서 조금 들어간 장군산과 노인산 사이에 있는 바다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곳 바다의 폭은 불과 200미터 정도로 매복하기에는 안성마춤이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백여 명의 왜군들이 미끼 배를 타고 당항포 앞바다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이때를 기다리고 있던 첨사의 부대는 각종 대포를 쏘면서 왜선을 공격했다. 질려포도 쏘았다고 하는데 질려포는 대포에 쇳조각을 넣어 쏘는 살상용 무기였다.

 

이순신 첨사의 방답기지는 여수항 앞을 지키는 관문에 해당하는 기지였다. 그래서 특별히 거북선 1척을 보유하고 있었고, 1척 정도의 판옥선과 여러 척의 협선과 포작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방답 함대의 병력은 약 4백 명 정도로 여수 본영, 순천기지와 더불어 전라좌수영 함대 중 최정예 함대로 손꼽히고 있었다. 또한 각종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1척의 왜선으로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왜군들도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방답 함대를 보자 바다로 뛰어들 태세였다. 하지만 왜장이 죽음을 결심한 듯 전의를 불태우자 미끼배는 어쩔 수 없이 싸울 시늉만 내며 달아날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그 순간 방답 함대가 사격을 개시했으며, 피탄되었건 피탄되지 않았건 많은 수의 왜군들이 바다로 떨어졌다.

 

방답의 병사들은 갈고리를 던져서 왜선을 바다 가운데로 끌고 나왔다. 그런데 왜장과 그의 직속 무장들은 무사도 정신을 발휘하여 끝까지 배에 남아 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전날 전투에서 왜군 사령관이 비장한 최후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20대의 젊은 왜장은 죽음을 각오한 듯 호기를 부렸다.

 

한편, 방답의 수병들은 이때 왜장을 잡는 공(功)을 서로 양보했다. 왜장은 보통 화살과 편전 등을 많이 맞아 고슴도치가 된 상태였고, 그나마 튼튼한 갑옷 덕에 간신히 견디고 있었는데, 방답첨사 이순신이 쏜 화살이 왜장의 숨통을 끊었다.

 

방답의 수병들은 자신들의 대장이 이렇게 해서 큰공을 세워 조정에 알려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방답 수병들의 입장에서는 낙안군수 신호는 옥포리에서 왜장의 투구를 노획했고, 자기네 첨사만은 아직까지 왜장의 수급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첨사에게 “미끼 왜선을 살피러 나가자” 고 건의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순신도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이들의 건의를 혼쾌히 허락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에게 큰 공이 골고루 돌아가게 하면서 장병들이 경쟁적으로 왜군을 무찔러 나라에 충성토록 여건을 조성했다. 때문에 이순신 함대에는 공을 놓고 서로 양보하는 기풍이 생겨났는데, 이러한 면도 충무공 리더쉽의 한 단면이다.

 

이순신은 방답 함대가 가져온 왜장의 수급에서 귀를 베지 않고 수급째 궤짝에 넣게 했다. 그리고 방답첨사 이순신에게 보고서를 직접 써서 조정에 올리도록 했고, 방답첨사가 큰 상을 받도록 배려했는바, 이 역시 충무공의 지도자적 자질을 옅보게 하는 단면이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그날 아침 9시쯤 적선을 불사를 때, 경상우수사 원균과 남해현령 기효근 등이 뒤쫓아 와서 물에 빠져 죽은 왜적들을 두루 찾아 건져내어 목을 벤 것이 50여 개나 되었습니다.

 

방답 함대가 왜선을 불사르고 바다에 빠진 왜군의 수급을 모으고 있을 때 원균의 함대가 나타났다. 그리고는 건져낸 시체에서 수급을 50여 개나 베었다.

 

원균 쪽은 지금까지 수급을 베는 역할을 전문적으로 맡아 왔다. 따라서 그 방면에는 기술과 장비, 그리고 전문성 면에서 앞서 있었을 것이다. 장계를 보면 원균은 이순신의 양해도 없이 현장으로 달려간 것 같고, 건진 수급이 50여 개나 되었다면 방답 함대가 벤 수(9개)보다 더 많았음은 물론 전날 좌수영 함대가 벤 전체 수급 43개보다도 많은 것이 된다. 원균은 이렇게 모은 수급에 대해 어떤 내용으로 조정에 장계를 올렸을까?

 

원균도 이순신과 같은 수사의 벼슬이기에 해전 때마다 장계를 올릴 권한과 의무가 있었다. 당시는 수급의 수에 의해 전과(戰果)가 평가되던 시대였다.

 

원균은 이렇게 모은 수급을 올리면서 ‘이순신은 겁이 나서 대충 싸우고 나서 기지로 귀항했고, 자신은 용감하게 적을 추격했기에 수급도 많이 획득할 수 있었다’ 고 보고했던 것은 아닐까?

 

이순신 함대는 해전이 끝나고 나면 곧 그 자리를 떠났다. 반면에 물에 빠진 왜군들의 시체는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야 수면 위로 떠오른다. 원균은 이순신 함대가 전라도로 귀항한 후에도 그 자리에 남아 시체 건지기에 전력했던 것 같다.

 

낙동강 700리 전선에서 왜군과 조선 의병 간의 싸움에서도 많은 수의 시체가 원균의 해역으로 떠내려 왔다. 후에 살펴보겠지만, 원균은 이렇게 획득한 수급들까지도 조정에 올려 보내면서 ‘이순신과는 별도로 싸워 승첩을 거두었다.’ 고 장계를 올렸다.

 

이에 원균의 편을 들었던 조정 대신들은 “출동 때는 원균이 수십 번 통곡을 하면서 애걸복걸하자 이순신은 겁이 났지만 마지못해 출전을 했고, 해전에서도 겁쟁이 이순신은 원균의 뒤를 노상 따라 다니면서 대충대충 싸우다 돌아갔기 때문에 원균이 더 훌륭한 장수다” 고 주장하게 된다.

 

이러한 모함을 구분할 능력이 없었던 선조는 원균을 두둔하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고, 후에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삼게 된다.

 

이순신에 대한 모함은 선조의 어전회의에서 무려 3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그 회의록은 《선조실록》에 고스란히 전해져 내려온다. 뒤에 가서 어느 기록이 맞고 왜 이런 모함이 등장했는지, 어째서 선조가 이런 모함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는지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서는 우선 이순신의 기록들을 보면서 원균의 비상식적인 모습을 지켜보았을 전라좌수영 수군들의 원균에 대한 평가가 어떠했을 지를 생각해 보자. 또한 조정이 수급을 기준으로 경상우수영 장수들에게 큰 벼슬을 내렸을 때, 전라좌수영 소속 수군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도 생각해 보자.

 

이러한 과정들을 보면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을 때 전체 병력의 80%를 차지했을 전라 좌 · 우도 수군들이 과연 원균의 명령에 순순히 복종했을지 의문이 생긴다.

 

친부모 못지않게 섬겼던 이순신을 모함해서 옥에 갇히게 하고 사형 언도가 내려지게 했던 사람이 바로 원균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훗날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취임했고, 조선 수군은 커다란 내분에 휘말리게 된다. 원균의 승진이 실력으로 오른 게 아니라 주워 모은 수급의 숫자와 당쟁의 힘으로 오른 것이었으니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에는 커다란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세계 최정상의 전력을 자랑하던 조선함대는 칠천량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했고, 힘들여 건설한 함대는 송두리째 분쇄되고 만다.

 

이 기록들은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남아 길이길이 전해질 것이다. 때문에 원균의 말썽은 ‘영원한 말썽’ 이 되어 역사의 교훈으로 회자될 것이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그리고 왜장선의 뱃머리에는 특별히 량방(시원하게 만든 방)을 만들었는데, 방안의 장막 곁에 작은 궤짝이 있고 문서가 가득 넣어져 있었습니다. 문서들을 집어본 즉 왜인 3천40여 명의 분군기(부대별 명단 기록)로, 이름 아래에 서명을 하고 피를 발랐는 것이 필시 맹세하던 문서인 듯하며, 분군기 6축과 갑주, 창, 칼, 활, 총통, 표범가죽, 안장 등 물건을 올려 보냅니다.” 고 하였기로, 신이 친히 그 분군기를 살펴본즉 이름을 쓰고 피를 바른 자취가 보고 된 바와 같사온바, 그 흉한 꼴이 형언키 어렵고 왜의 머리 아홉 가운데 장수의 머리는 이순신(방답첨사)이 직접 표를 하게 하여 올려 보냅니다.

 

방답첨사 이순신이 충무공에게 보고해 온 내용을 인용해 설명한 장계이다.

 

총인원 3,040명 모두가 자신의 이름 아래에 피를 발라서 무엇인가를 맹세했다고 한다. 3천여 명의 왜인들 모두 전쟁터에 나온 군인의 신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마도 왜장에게 ‘목숨을 다해 충성하겠노라’ 는 일종의 충성서약이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그것이 ‘조선 침략에 동참하겠다’ 는 충성서약이었기 때문에 ‘흉한 꼴이 형언키 어렵고’ 라고 표현했는데, 이 기록을 통해서 당항포에서 패주한 검은색 왜군 함대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이 장계에는 방답첨사 이순신이 보고한 내용이 인용 표기방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또 왜군 장수의 머리에도 이순신 첨사가 직접 표식을 하게 했는데, 아마도 충무공이 부하 장수들의 공을 돋보이게 하려고 했던 것 같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왜인의 깃발에 물들인 빛깔이 제각기 달랐는데, 전날 옥포는 붉은 기요, 오늘 사천은 흰 기, 당포는 누런 기며, 당항포는 검은 기인바, 그 까닭은 필시 그 부대를 분간하기 위함에 있는 것 같습니다. 맹세한 글이 또 이와 같으니 일찍부터 우리를 범할 마음이 품고 준비했던 상황임을 또한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날은 비가 내리고 구름이 끼었으며 바닷길을 분간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당항포 앞바다로 옮겨서 진을 치고 군사들을 쉬게 한 후, 저녁때는 고성 땅 말우장(확실치는 않지만 동해면인 듯) 바다 가운데로 옮겨서 밤을 지냈습니다.

 

피로 쓴 분군기와 함께 왜군 기동함대들의 깃발 색깔에 대해서도 기록해 놓았다. 당시 왜군들은 조선 8도의 지도를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 색깔로 표시했다고 한다.

 

○ 백색 - 경상도
적색 - 전라도
청색 - 충청도와 경기도

황색 - 강원도
● 흑색 - 함경도
녹색 - 황해도

 

히데요시는 조선의 8도를 모두 다스리고자 했다. 그렇다면 위의 지도 색깔과 왜군 기동함대와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훗날을 위한 연구과제로 남겨 두자.

 

조선 함대는 기상 여건이 좋지 않아 다시 당항포 앞바다로 들어가 바다 위에서 진을 쳤다. 그리고 저녁 때 고성 쪽으로 나와서 역시 바다 위에 진을 치고 숙영했다.

 

이 장계를 보면 옛날에는 날씨가 나쁘면 피아간에 해전을 하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과 이순신의 ‘바다에 진치고 머물기’ 작전이 확인된다.

 

● 율포 해전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7일 이른 아침은 배를 띄워 웅천(진해) 땅 증도(창원군 구산면) 앞바다에 진을 쳤는데 천성과 가덕에 있는 적의 종적을 정탐하던 탐망선의 장수 진무 이전과 토병 오수 등이 왜인의 머리 2개를 베어 가지고 10시쯤 급히 돌아와 하는 말이, “가덕 앞바다에서 왜인 셋이 한 배에 타고 있다가 우리를 보고 달아나므로 극력 쫓아가서 다 쏘아 죽이고 머리 셋을 베었는데, 경상우수사 군관으로 이름 모를 사람이 작은 배를 타고 나타나 위협을 하면서 하나를 빼앗아 갔습니다.” 하기로 각별히 술을 주고 곧 천성 등지로 다시 보냈습니다.

 

6월 7일, 이순신 함대는 24시간 넓은 탐색망과 경계망을 펴고 있었다. 그래서 왜군 측의 탐망을 사전에 차단했고, 육지 쪽의 첩보망도 꾸준히 관리해 나갔다. 반면 원균 쪽은 왜군의 시체를 건지는 데에 몰두하고 있었다.

 

천성과 가덕(모두 가덕도에 있는 포구)에 나가 있던 전라좌수영 함대의 척후선단이 대포를 쏘아 왜군 탐색선을 깨치자 원균의 군관이 들이닥쳐 수급 하나를 빼앗아 갔다. 이순신으로서는 개탄스러운 일이었지만 크게 내색하지 않고 고생한 척후병들에게 술을 주고 위로했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정오 때쯤 영등포 앞바다에 이르렀는데 왜의 큰 배 5척, 중간 배 2척이 율포에서 나와 부산 쪽으로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이에 여러 전선들이 바람을 거슬러 노를 재촉하고 서로 바라보이는 5리쯤 되는 율포 앞바다까지 쫓아가자 왜적들은 배안에 실은 짐짝을 모두 물 속에 던지는데, 우후 이몽구가 왜의 큰 배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적의 수급 7개를 베고, 또 1척은 육지로 끌어내어 불살라 버렸으며, 사도 첨사 김완은 왜의 큰 배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적의 수급 20개를 베었으며, 녹도만호 정운은 왜의 큰 배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적의 수급 9개를 베었으며, 광양현감 어영담과 가리포 첨사 구사직은 협력하여 왜의 큰 배 1척이 상륙하려 할 때 쫓아가서 불살랐고, 구사직은 적의 수급 2개를 베었습니다.

 

여도군관 김인영은 적의 수급 하나를 베고, 소비포 권관 이영남은 작은 배를 타고 뚫고 들어가 쫓아가서 활을 쏘아 죽인 후 적의 수급 둘을 베었으며, 그 나머지 빈 배 1척은 바다 가운데서 불살랐는데, 왜인들은 목이 잘리고 혹은 빠져죽어 남김없이 섬멸되니 여러 전선 장병들은 마음이 상쾌했습니다.

 

영등포에 이르렀을 때 부산 쪽으로 도망치던 7척의 왜선단을 발견했다. 이에 선봉 함대가 쫓아가 불살랐고 다수의 수급을 베었는데, 공을 세운 명단을 보면 이번에는 우후 이몽구가 큰 공을 세웠다. 경상도 수군 소속의 이영남도 협선을 몰아 공을 세웠다.

 

순천부사 권준과 방답첨사 이순신의 이름이 없는 것은 이미 공을 세웠기 때문에 다른 장수들에게 공을 양보했던 것 같다. 전라좌수영 함대는 2차 출동 때도 관내 10개 기지들이 나란히 공을 세워 표창을 받았다.

 

이순신이 장계에 ‘마음이 상쾌했습니다’ 라고 기술해 둔 것은 왜란을 당한 이후 무겁고 두려웠던 조선 수군들의 마음이 연이은 대승으로 비로소 가벼워지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기대를 모았던 거북선이 제몫을 다했고, 함대의 규모도 150여 척에 1만의 병력이었다. 병사들 스스로도 이 같은 상황들에 대해서 가슴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그리고 가덕, 천성으로 향하다가 몰운대(부산시 다대포)에 이르러 양편으로 나누어 협공하면서 적의 무리를 수색했으나 적들은 멀리 도망가고 아무 흔적도 없었습니다.

 

초저녁에 거제 온천량 송진포에 도착하여 밤을 지내고 8일 창원 땅 마산포, 안골포, 제포, 웅천 등지로 적의 종적을 찾아보기 위하여 배를 보내놓고 창원 땅 증도 남포 앞바다로 나가 진을 쳤습니다.

 

저녁때 망 보는 배가 돌아와 말하기를 “어디에나 적의 종적이 없다.” 고 하므로 송진포로 다시 돌아와 밤을 지내고, 9일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웅천 앞바다에 이르러 진을 치고 작은 배를 가덕, 천성, 안골포, 제포 등지로 갈라 보내어 적의 종적을 다시 살피게 하였으나 적의 그림자도 없었으므로 당포에 와서 밤을 보냈습니다.

 

10일 미조항 앞바다에 이르러 우수사 이억기와 원균 등과 진을 파하고 각기 돌아왔습니다. 가덕 서쪽에서 종횡으로 드나들던 적들은 이미 배가 많이 불태워졌고 사상자도 많았으나 육지로 올라가 빠져나간 놈들은 필시 부산 등지로 달아나 우리 군대의 위엄을 자세히 이야기했을 것이므로 (북상한 왜적들은) 이제부터는 뒤를 돌아다보는 걱정이 있을 것입니다.

 

6월 9일. 조선 함대는 수색전을 병행하면서 동진을 계속했다. 그러나 더 이상 적 함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한성의 우키타 사령부에서는 “전라도를 속지화하라!” 는 히데요시의 지령에 따라 수군들로 하여금 사천포 등지를 거점화해서 왜육군의 전라도 공략을 지원케 했다. 아울러 각 함대들에게는 서해안 돌파를 서둘러 이행하라고 재촉했는데, 현장에서는 이같은 지시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잠깐 동안이나마 남해안 일대에는 평화가 찾아온 듯했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가덕에서 수색하던 날, 그대로 부산 등지로 가서 적의 종자를 섬멸해버리고 싶었으나 연일 큰 적을 만나 바다 위를 돌아다니며 싸우느라 군량이 벌써 떨어지고 군사들도 피곤해졌으며 부상자도 많아, 피로해진 우리들이 편히 쉬고 있는 적을 대적함은 실로 군사상 좋은 계책이 아닐뿐더러 양산강의 지세가 좁아 겨우 배 하나를 수용할 만한데 적선이 오래 머물러 이미 험고한 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싸우려 하면 적이 나와 싸우지 않을 것이요, 우리가 퇴각한다면 도리어 약점만 보이게 될 터이니, 설사 부산을 향해 간다 하더라도 양산의 적이 응당 서로 호응하여 뒤를 포위할 것이므로, 다른 도에서 온 객지 군대로 진군하여 깊이 들어가 앞뒤로 적을 받는다는건 진실로 만전한 계획이 못되옵고 또한 본도 병사(최원 전라좌병마사) 공문 내용에 ‘서울을 침범한 흉악한 적들이 수송선을 빼앗아 타고 서강을 거쳐 내려온다’ 고 하였사온데, 수송선을 빼앗아 탄다는 것은 결코 그럴 리가 없을 것이나, 의외의 사변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어 신은 이억기와 의논하고 다시 가덕 등 섬을 수탐했으나 끝내 적의 종적이 없으므로 곧 본영으로 돌아왔습니다.

 

조선 함대는 왜의 수군이 서쪽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강하게 밀어붙였고, 내친김에 부산까지 진격하려 했지만 수차례의 해전으로 군량과 화약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또 부산은 일본 수륙군의 집결장이었기 때문에 김해강과 양산강, 다대포 등지에 의외로 많은 왜군들이 주둔해 있었다. 이순신은 이 지역에 대한 공격을 위해서도 ‘만전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에 최원 병마사로부터 ‘한성의 왜군들이 한강을 타고 전라도 침공을 계획하고 있다’ 는 공문이 전해졌다.

 

수사들로서는 노약자들이 지키고 있는 전라도 관내 후방 기지와 고을들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라감사, 병마사 등과의 협의를 통해 왜군들의 전라도 진출을 막기 위한 대책도 시급했기 때문에 각 함대는 일단 본영으로의 귀항을 서둘렀다.

 

※ 《난중일기》 1592년 6월 9일 ※
맑다. 곧장 천성 · 가덕에 이르니 왜적이 하나도 없다. 두세 번 수색하고 나서 군사를 돌려 당포로 돌아와 밤을 지냈다. 새벽도 되기 전에 배를 출항하여 미조항 앞바다에 이르러 우수사와 이야기하였다.

 

1차 귀항 때와 마찬가지로 여수항은 환호와 열광의 분위기로 넘실댔다. 이 열광의 분위기는 곧바로 대승을 전하는 남풍이 되어 피폐된 조선반도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조선 함대가 남해안의 왜군들을 간단없이 쳐부수었다는 소식은 각지에서 의병들의 봉기를 자극했고, 위축되어 있던 조정과 육군 부대들에게도 큰 힘이 되어 결사 응전의 태세를 갖추게 했다.

 

그 결과 조선 육군은 한 달 후에 있은 전주 · 이치 · 웅치 · 금산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해전에서는 한산도 · 안골포 해전의 승리로 이어졌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무릇 전후 적을 토벌할 때에 남해 동쪽 웅천 등 7, 8읍에서는 남녀노소 피난하는 무리들이 산골짜기에 숨어 엎드려 있다가 신 등이 적선을 추격하는 것을 바라보고서 다시 살길을 얻은 것만 같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모두 내려와 적의 거취를 말하면서 전부 가리켜 주었습니다. 그 정상이 참으로 측은하기로 왜선에서 얻은 쌀과 포목 등 물건을 갈라주어 편히 있도록 했사오며, 귀화인들과 보자기(주거 부정의 어민으로 군에 징용된 사람, 포작선 승무원)들이 부모처자들을 데리고 이웃 친척과 함께 본영 성내로 들어오는 자가 연속부절인데, 전후 의탁해온 수가 거의 2백여 명으로 제각기 제 직업에 부지런하며 오래도록 편안히 살도록 본영에 가까운 장생포 등 땅이 넓고 기름지고 인가도 많은 곳에 갈라 들여 편안히 살려오는 것은 왜적의 목을 베는 것과 다름없는 공로이므로 왜선을 불태울 때에는 각별히 찾아내고 조심하여 함부로 죽이지 말 것을 신칙했습니다.

 

다음 장계는 당항포 해전 중 다시 찾아온 사삿집 종 억만이라는 13세 소년의 증언인데, 이순신의 적정에 대한 해독과 백성들을 살피는 사례이며, 무엇을 조정에 알리고자 했는 지를 알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다.

 

‘하늘은 백성을 낳고 임금으로 하여금 돌보게 했으며, 임금은 백성들의 소리에서 하늘의 소리를 들으라’ 고 했기에 이순신은 그 백성들의 소리와 비참한 참상을 열심히 임금에게 알렸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여러 장수들이 적에게 포로가 되었던 남녀들을 다시 빼앗은 것이 모두 6명인데, 그들 중에 다른 사람들은 나이가 어리거나 포로 되었던 지가 얼마 안 되어 적의 하는 짓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그 중에서 당항포 바깥 바다에서 녹도만호 정운이 빼앗아온 동래 사는 사삿집 종 억만은 금년에 나이 13살로서 머리를 깎아 왜인 같이 되었는데, 문초해 본 내용은 이렇습니다.

 

“동래 동문 밖 연지동에 살던 사람으로 난리가 일어나던 즉시 부모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왔는데, 날짜는 기억이 안되나 4월에 왜병들이 수없이 몰려와 성을 다섯 겹이나 둘러싸고 남은 왜적들은 들판에 깔렸습니다. 선봉에 서 있던 적은 갑옷을 입고 각기 큰 길개(방패를 말하는 듯)를 잡고 넓고 큰 투구를 쓴 놈 100명씩 달려들어 성을 무찌르면서 한편으로는 대나무 사닥다리를 가로 세우고 곳곳에서 넘어왔습니다. 성이 함락된 뒤에는 수없이 죽였는데, 소인은 허둥지둥하다가 부모와 형을 잃어버리고 갈 곳을 몰라 하늘을 향해 울고 있던 차에, 왜놈이 손을 잡고 억지로 끌고 가서 곧바로 부산에 이르렀습니다.”

 

왜군들은 겹겹이 동래성을 포위하고 천둥 같은 총성을 울리며 성을 공격했고, 화살 정도의 무기로만 응전했던 동래성 병사들은 그 엄청난 소리에 전의를 잃고 말았다.

 

‘선봉에 서 있던 적’ 은 왜군 돌격대를 뜻하며, 왜군 돌격대는 100여 명 단위로 대나무 사닥다리를 타고 성벽을 기어올랐다. 소지한 투구와 방패는 조선군의 화살 ·· 뜨거운 물 등의 공격을 적절히 막아주었기 때문에 왜군들은 순식간에 성벽을 넘었다.

 

왜군 돌격대가 성을 넘자 성내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장계의 기록에 의하면 선량한 ‘백성들은 어찌할 줄 몰라 그저 하늘을 쳐다보고 울부짖었다’ 고 한다.

 

세종대왕께서는 일찍이 후세에 사변이 닥쳐 하늘이 낸 백성들을 울리지나 않을까 염려했다. 이에 28년 동안이나 애쓴 끝에 조선식 대포를 개량하고 관련 책자를 발행하면서 “훗날 긴히 쓰일 날이 있을 것이니 영구히 보관토록 하라.” 는 당부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래성 전투 기록에는 대포를 가지고 싸웠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당시는 기송사장의 시문놀이와 붓글씨 쓰기, 예절론, 절개론, 의기론, 명분론에 사로잡혀 있던 시대였다. 그래서 “송상현 동래부사는 죽음을 앞두고 의로웠다.” 든가, 그의 애첩이었던 ‘김섬의 절개론’ 등을 들먹이며 지극히 명분론적인 이야기들만이 오늘에까지 전해져 온다.

임진왜란을 앞두고 동래성은 부산성과 더불어 남해안 최고의 전략기지였다. 따라서 100여 문의 현자대포라도 준비해 놓고 100여 명 단위로 성곽 돌파를 시도하는 왜병들을 산탄으로 공격했더라면 최소 20일 가량은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동래성이 이 정도만이라도 버텨 주었더라면 조선측에서는 대구와 문경 새재에 제2, 제3의 방어진을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사이 전라 수군이 부산포의 왜군 선단을 두들겼을 것이고, 그랬다면 임진왜란은 조기에 수습될 수 있었을 것이다.

 

동래성이 불과 2시간 만에 함락된 원인은 결국 대포 등의 화약무기류를 준비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순신도 동래성의 이같은 점을 분하고 원통하게 생각했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그곳에서 5, 6일을 묵은 뒤에 배로 옮겼습니다. 그 배에는 왜놈 7, 8명이 있어 나를 보고 떠들며 칼을 휘둘러 치려 하자 데리고 갔던 왜인이 팔을 벌려 막아주고서는 배 밑에 감추어 주었으므로 왜선의 수효는 알 수 없습니다.

 

배에 실린 지 5, 6일 뒤에는 큰 배 30여 척이 동시에 떠나서 우도(경상우도)로 향하여 떠나는데, 그 중에 층각배에는 장수가 있고 여러 패들이 그 아래 모여들어 명령을 듣는 것 같은데, 이따금 두세 척씩 패를 갈라 도적질하여 여염집을 분탕질하고 칼로 소와 말을 찔러 죽이며, 곡식과 각종 물건을 운반하여 배에 싣는데, 이렇게 하기를 어떤 날은 두세 번씩 하였습니다.

 

거쳐온 섬이나 마을 이름은 모르겠으며, 이번 6월 5일에는 4척의 배 모두가 진해(진동) 선창으로 가서 반 가량은 성으로 들어갔는데, 얼마 되지 않아 진해 성밖에서 수천 명 무장병이 고을로 쳐들어와 기세가 드높으매, 성으로 들어갔던 왜적들이 아우성치며 돌아와 배를 타고 노를 재촉하여 바다 가운데로 나왔을 때 또 보니 돛을 단 전선이 서쪽 바다에서 오므로, 적도들은 스스로 종적을 감추지 못할 것을 알고 입술이 타고 침이 마르고 간담이 떨어져 모두 큰 배를 버리고 작은 배에 모여 타고 멀지 않은 포구로 노를 재촉하여 도망해 들어갔습니다. 소인과 어제 잡혀온 진해 사는 사노 나근내 등은 모두 큰 배에 내버려졌기 때문에 그대로 잡히게 되었습니다.

 

왜인들은 제각기 창과 칼과 총탄을 가졌고, 아침 저녁 먹는 밥에는 모래와 흙이 반이나 섞여 있었으며, 다른 일은 말이 달라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 하였습니다.

 

왜의 수군들은 30척 단위로 서진했고, 중간 중간 약탈에 나섰음을 알 수 있다. 소년의 증언에 의하면, 이 왜군 함대는 5월 초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율포해전 때 구출해 온 천성 수군 소속의 14세 소년 병사 장달망의 증언이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율포 앞바다에서 접전할 때 녹도만호 정운이 도로 빼앗아온 천성 수군 정달망은 나이 이제 14살인데 심문한바 문초 내용은 이렇게습니다.

 

“난리가 난 뒤 부모를 따라 산으로 들어가 배고프고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던 차에,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나, 6월 초순께 천성 가까운 들판 보리밭에서 이삭을 주어 연명하려고 내려왔다가 왜적에게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왜인들은 그날 영등포 기슭에 배를 대고 얻은 물건들을 볕에 쬐고 바람을 쏘이는데, 우리나라 수군이 불의에 돌격해 오니 왜인들은 갈팡질팡 닻줄을 끊고 떠들어대면서 배를 타고 멀리 바깥 바다로 도망가다가 힘이 다하여 잡혔습니다.” 고 했습니다.

 

이 아이들이 모두 어린 나이에 왜에게 포로가 되어 친척과 고향을 떠나 보기에 측은하므로 잡아온 관원에게 구휼하여 잘 있게하고 난리가 평정된 후 고향으로 보내도록 각별히 타일렀습니다.

 

율포의 왜군들은 처음에는 영등포 해변에서 약탈한 물건을 햇볕에 말리고 있다가 율포까지 도망치는 도중에 궤멸되었다. 그 당시의 닻은 나무 닻이 많았다. 그 위에 돌무덤을 만들어 고정시켰으므로 빨리 감아 올리기가 불편해서 급할 땐 칼로 닻줄을 끊어야 했다.

 

해전의 방식이 달랐던 만큼 이순신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수급을 기준으로 하는 방식으로 공로를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종합평가 방식을 채택했는데, 이순신이 해전에서만 특출했던 게 아니라 사후 공로 평가와 같은 인사관리 분야에서도 매우 창조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왜선을 불태워 버린 것이 72척(사천포해전에서 율포해전까지)이요, 수급을 벤 것이 88개인데, 왼쪽 귀를 베어서 소금에 절여 궤짝 속에 넣어 올려 보냅니다.

 

신이 당초 약속할 때, 여러 장수와 군사들이 공로와 이익을 탐내어 서로 다투어 적의 수급을 베려 들다가는 도리어 해를 입어 사상자가 많이 나기 쉬우니 쏘아 죽인 뒤 비록 수급을 베지 못하더라도 힘껏 싸운 자를 으뜸가는 공로자로 하겠다는 것을 거듭 명령했기에 매번 접전할 때 활에 맞아 죽은 왜적이 무척 많았지만, 수급을 벤 것은 많지 않습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접전한 이튿날 협선을 보내어 시체를 거의다 거두어 수급을 베었습니다. 경상 연해안의 보자기들도 화살을 맞아 죽은 왜적의 수급을 많이 베어 왔사온데, 신은 다른 도의 대장으로서 받는 것이 온당치 않으므로 원균에게 주라고 말하며 보냈습니다.

 

원균과 이억기 등이 적의 목을 벤 것이 200개나 되며, 혹 바다에 떠내려가고 혹은 벤 것을 물에 빠뜨려버린 것도 그 수가 많았습니다.

 

옛 싸움에서 수급 베기와 전리품 노획은 항상 말썽의 원인이 되었다. 수급을 얻으려다가 적절한 공격 시점을 놓치기 일쑤였고, 주의가 산만해져서 오히려 역습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명나라 장수 이여송도 평양을 공격할 때 “적의 수급을 베지 말라!” 는 명령을 내린 바 있었고, 곽재우 장군은 그의 군관이 왜군의 목을 베려다가 시체 밑에 숨어 있던 왜군의 저격을 받고 죽자 다음과 같은 개탄의 말을 남겼다.

 

※ 곽망우당집 ※
내가 왜적의 목을 탐내지 말라고 얼마나 타일렀더냐. 그러나 네가 그 목을 탐하다가 죽고 말았구나. 아깝고 분하다!

 

이순신도 예로부터 내려오는 수급을 기준으로 하는 공로평가 제도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또 자신이 새로 개발한 해전법은 수급을 기준으로 한 논공행상 방식과 맞지 않았으므로 (20세기에 와서나 볼 수 있는)나름대로의 종합평가제도를 만들어 1등, 2등, 3등 방식으로 공로를 평가했다.

 

그러나 새로운 제도가 정착되려면 많은 노력과 시간이 소요된다. 때문에 이순신은 해전 때마다 수급 베기에 욕심을 두지 말고 전체적으로 잘 싸워주기를 강조했다.

 

당시는 수급 하나가 쌀 두 가마에 거래될 정도였고, 병역을 면제 받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이순신 같은 지휘관의 명령인지라 휘하 장수들은 그 명령을 따랐고, 장수들이 따르게 되자 무명의 소졸들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보니 얻은 수급은 많지 않았다.

이에 반해 원균은 종래의 방식대로 수급 모으기에 열심이었다. 원균의 중세기적 전공평가 방식과 이순신의 현대적 평가제도가 서로 충돌하고 있는 단면이기도 하다.

 

‘원균이 접전한 이튿날 협선을 보내어’ 라고 했는바, 당항포 해전 이튿날(6일) 아침 9시경에 달려와 방답 함대가 깨뜨린 배의 왜군들 목을 베었고, 그 길로 당항포와 두호리 쪽으로 다가가서 죽은 시체의 목을 베었다.

 

물에 빠진 시체는 며칠이 지난 후에야 떠오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원균의 협선들은 한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인지 7일에 있었던 율포해전에서는 원균 쪽에서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다만 소비포 권관 이영남 장군만이 공을 세웠는데, 이영남은 이순신과는 먼 인척관계였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왜의 물건 중에 왜의 의복 외에 미곡과 포목 등의 물건은 혹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혹은 군사들을 먹이기도 하였습니다.

 

왜의 군용물품 중에 가장 긴요한 것은 뽑아내어 별지에 적으며 우후 이몽구가 얻은 왜장의 신표인 칠갑에 들어있는 금부채와 방답첨사 이순신이 가져와 바친 왜장의 분군기 여섯 축은 다 감봉하여 올려 보냅니다.

 

접전하던 군졸로 화살과 총알을 맞은 사람 중에 신이 타고 있는 배의 정병 김말산, 우후선의 방포 진무 장언기, 순천 1선사부 사삿집 종 배귀실, 2선 격군 사삿집 종 막대, 보자기 내은석, 보성 1선 사부 관노 기이, 흥양 1선 사부 진무 장희달, 여도 사공 토병 박고산, 격군 박궁산 등이 총탄에 맞아 죽었습니다.

 

흥양 1선 사부 목자 손장수는 육지로 올라간 왜적을 따라가 베려다가 칼에 맞아 죽었고, 순천 1선 사부 보인 박훈, 사도 1선 사부 유귀희, 광양선 격군 보자기 남산수, 흥양선 선장 수군 박백세, 격군 보자기 문세, 훈도 정병 진춘일, 사부 정병 김복수, 내노 고붕세, 낙안통선 사부 조천군, 수군 선진근, 무상 사삿집 종 세손, 발포 1선 사부 수군 박장춘, 토병 장업동, 방포수군 우성복 등은 총탄에 맞았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방답첨사의 종 언룡, 광양선 방포장 서천용, 사부 백내은손, 흥양 1선 사부 정병 배대검, 격군 보자기 말손, 낙안통선 장흥조방 고희성, 능성조방 최란세, 보성 1선 군관 김익수, 사부 오언룡, 무상 보자기 흔손, 사도 1선 군관 진무성, 임홍남, 사부 수군 김억수, 진언량, 신선 허복남, 조방 전광례, 방포장 허원종, 토병 정어금(초고에는 어질금), 여도선 사부 석천개, 유수선, 유석 등은 화살에 맞았으나 중상은 아닙니다.

 

사상자들의 명단을 귀천을 가리지 않고 빠짐없이 기록해서 보고 했는데 한자(漢字) 이름이 없는 천민들에게는 입영 때 이름을 지어준 것 같다.

 

조정의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이름 있는 장수가 전사해도 물질적인 보상은 없었고 대신 품계를 올려주거나 아니면 벼슬을 추증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정은 천민 사상자의 유족에게는 신분상의 우대조치를 내릴 수 있었다. 또 소속 관아에서는 장례비와 유족 위로를 위한 행정적인 혜택을 베풀었는데, 아마도 충무공의 장계가 이같은 조치의 근거자료로 활용된 듯하다.

 

다음은 2차 출동 때 입은 좌수영 함대의 사상자 통계표다. 칼에 의한 희생은 그 후로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손장수 사건으로 더욱 조심시켰기 때문이다.

 

원인

부상

사망

총탄

13

10

23

0

1

1

화살

21

2

24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그들은 탄환을 무릅쓰고 죽을 각오로 나아가 싸우다가 혹은 죽고 혹은 상한 것이므로 죽은 사람의 시체는 각기 그 장수를 시켜 작은 배에 실어서 고향에서 장사지내게 하고, 그 처자는 구휼하는 법대로 시행하도록 하였습니다.

 

또 중상에 이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약품을 나누어주고 충분히 치료케 할 것을 엄하게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장수에게는 한 번의 승전으로 방심하지 말고 군사들을 위로하며 변보를 듣는 대로 나아가되 언제나 한결같이 할 것을 지시한 후 진을 파했습니다.

 

전사자 유족에 대한 보상이 법대로 처리되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 8도의 전체 행정력이 마비되고 있을 무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이 맡고 있던 후방 고을들에 대한 군령은 이렇게 질서가 잡혀 있었다. 이순신은 해전에 임해서는 철저한 분석과 계획으로 백전백승의 전과를 올렸고, 귀항한 후에는 일사불란한 사후 군령관리를 보여주었다.

 

이순신은 전력 극대화의 요체가 후방의 지원에 기인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거기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고 최우선적으로 후방 군령에 노력했다.

 

이순신은 후방 고을과 수군조직 안에서 하부 말단 조직의 자체 군령을 존중했으며, 조직의 활성화를 위해 늘 고심했다. 해전이 끝나면 그 전공을 본영과 기지별로 균형있게 배분해서 논공행상을 바르게 했는데, 단순히 사기만 높인 것이 아니라 후방과 단위 조직의 군령을 활성화시켰다.

 

※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
중위장 권준, 전부장 이순신, 중부장 어영담, 후부장 배흥립, 좌부장 신호, 우부장 김득광, 좌척후장 정운, 우척후장 김완, 거북선 돌격장 급제 이기남, 신의 군관 이언량, 좌별도장 이몽구, 우별도장 김인영, 한후장 신의 군관이자 전 권관 가안책과 대졸 군관봉사 변존서, 나대용, 전봉사 송희립, 이설, 신영해, 급제 김효성, 배응록, 정로위 이봉수 등 분연히 몸을 돌아보지 않고 끝까지 힘써 싸운 이들과 여러 관원과 군사들로 앞을 다투어 적진으로 돌격한 사람들은 공로에 따라 표창하는 일에 대하여 만약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서 마련하려면 왕복하는 동안에 시일도 오래 걸릴 뿐 아니라 행재소가 멀고 길이 막혀 사람이 통행치 못하는데, 억센 도적을 아직 물리치지 못한 채 상 줄 때를 넘길 수는 없으니 군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하여 1, 2, 3등으로 등급을 나누어 별지에 기록하옵니다.

 

처음 약속할 때 비록 적의 머리는 베지 못해도 죽음으로써 싸우는 자에게 으뜸 공로자로 치겠노라고 하였으므로, 힘껏 싸운 여러 사람들을 신이 친히 참작하여 1등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목 베기 기준이 아닌 종합평가 방식의 모습인데 오늘날 우리 국군의 ‘1등무공훈장’, ‘2등무공훈장’ 과 닮았다.

 

한편, 상주전투에서 패한 이일(李溢)은 그후 임진강 중류에 방어진을 구축했지만 5월 19일 경 임진강 방어진도 무너지고 말았다. 바로 그무렵 이일은 강 하류로부터 《옥포파왜병장》에 기록된 소·중형 병선들의 활약상을 전해듣고 ‘아차!’ 하고 깨달았다. 그리고는 평양 행재소에 화약무기로 무장한 전투선단을 갖출 것을 장계했는데, 이일의 장계가 행재소에 도착한 것은 1592년 6월 7일이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7일 ※
순변사 이일이 치계하였다.

 

평양은 성(城)과 해자가 낮고 얕으므로 반드시 특별히 더 방비하여야만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니, 활 쏘는 참호를 많이 설치하여 성을 공격하는 왜적을 방어하고 평안·황해의 전선들을 모아 수구에 배치하여 총통을 많이 싣고서 수공을 막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임진강을 돌파한 고니시와 구로다군 3만이 대동강에 도착한 것도 6월 7일이다. 4천군으로 평양성을 지키고 있던 조정은 혼비백산하고 있었으므로 이일의 장계는 채택되지 못했다.

 

이순신이 《당포파왜병장》의 장계를 올린 것은 1592년 6월 14일, 장계가 용천(의주 남쪽) 행재소에 도착한 것은 6월 21일이다. 장계는 해로와 육로를 번갈아가면서 주야로 달려갔으며, 지나는 고을들에 또다시 의병 봉기를 자극시켰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21일 ※
5월 29일 이순신과 원균이 재차 노량에서 회합하여 적선 1척을 만나 불살라버렸는데 조금 후에 보니 바닷가 한 산에 왜적 1백여 명이 ‘장사진’ 을 치고 있고 그 아래에는 전선 12척이 벼랑을 따라 죽 정박하고 있었다. 때마침 일찍 들어온 조수가 벌써 빠져나가 바닷물이 얕아져서 큰 배는 나아갈 수 없었다. 순신이 “우리가 거짓 퇴각하면 왜적들이 반드시 배를 타고 우리를 추격할 것이니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큰 군함으로 합동하여 공격하면 승전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고서 배를 돌렸다. 1리를 가기도 전에 왜적들이 과연 배를 타고서 추격해 왔다. 아군은 거북선으로 돌진하여 먼저 크고 작은 총통들을 쏘아대어 왜적의 배를 모조리 불살라버리니 나머지 왜적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발을 구르며 울부짖었다. 한창 전투할 적에 철환이 순신의 왼쪽 어깨를 명중하였다.

 

비변사에서 요약 보고한 것을 훗날 사관이 실록에 옮긴 것 같다.

 

장계에는 ‘장사결진’ 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실록에는 ‘장사진’ 으로 되어 있는바 잘못 기록된 것이다. 거북선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없는 것은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21일 ※
2일에 당포에 도착하니 적선 20척이 강 연안에 죽 정박하였는데 그 중에 큰 배 한 척은 위에 층루를 설치하고 밖에서는 붉은 비단 휘장을 드리워 놓고서 적장이 금관에 비단옷을 입고 손에 금부채를 가지고서 모든 왜적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중위장 권준이 배를 돌려서 노를 재촉하여 바로 그 밑으로 돌진하여 그 배를 쳐부수고 적장을 쳐다보고 활을 쏘니 시위를 놓자마자 적장이 거꾸러졌다.

 

4일에 당포 앞바다로 나아가자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와 회합하니 여러 장수들이 기운이 증가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

 

5일에 외양으로 나가다가 적선이 고성 당항포 앞바다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듣고 순신이 배 3척을 먼저 보내어 형세를 정탐하도록 하였는데, 겨우 바다 어귀를 나가자마자 바로 포를 쏘아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모든 군사들이 일시에 노를 재촉하여 앞뒤를 고기꿰미처럼 연결하여 나아가 소소강에 이르니 적선 26척이 강 연안에 죽 벌여 있었다. 그 중에 큰 배 한 척은 위에 3층 판각을 설치하고 뒤에는 검은 비단 휘장을 드리우고 앞에는 푸른 일산을 세워놓았으며 휘장 안에는 여러 왜적들이 죽 나열하여 시립하고 있었다. 모든 군사들이 처음 한 번 교전하고 거짓 패한 척하여 퇴각하니 층각을 세운 큰배가 돛을 달고 먼저 나왔다.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 불을 질러 적선 1백여 척을 소각해 버리고 왜적의 머리 2백 10여 급을 베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적은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었다.

 

6일에 잔여 왜적을 외양에서 추격하여 또 한 척을 불살라버렸으며 9일에 모든 군사가 전투를 중지하고 본진으로 돌아왔다.

 

전체적으로도 부실한 요약인데, 이는 제대로 요약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록의 기록은 이와 같지만 2차 출동의 결과 남해안에서는 왜군들의 두 번째 침공이 좌절되었고, 조정에서도 수군의 승전 이치를 부분적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으며, 그 무렵까지 ‘조선과 왜가 야합하여 명을 치려고 한다’ 는 명나라의 의구심이 해소되기 시작했으며, 행재소에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었고, 8도의 의병봉기를 활성화시키는 등 실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선조는 6월 21일 용천에서 《당포파왜병장》을 받았고, 6월 23일에는 드디어 의주에 도착했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23일 ※
6월 22일 상(上)이 용천을 떠나 의주에 도착하여 목사의 아사에 좌정하였다. 목사 황진 등이 관인 및 관아의 여종 두어 명을 직접 거느리고 임금의 수라를 장만하였으며 호종한 관원들은 성안의 빈집에 분산 거처하였다. 꼴과 땔나무가 계속 조달되지 아니하여 비록 행재소라고는 하지만 적막하기가 빈 성과 같았다.

 

의주의 백성들은 이미 피난을 떠난 후라 의주성은 빈 성이었다. 의주 관아의 여종이 수라를 준비했는데 선조는 그것도 맛있게 먹었겠고, 비빈들과 대신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땔감이 없어서 생쌀을 씹었으며, 꼴이 없어 말들도 굶었다.

 

다음의 시는 선조가 6월 23일 의주에 도착해서 쓴 것으로 당시의 참담했던 심정과 그의 이중적인 음흉함을 잘 알 수 있다.

 

나라는 갈팡질팡 어지러운데 뉘라서 나라 건질 충신이 될꼬.
큰 계책 위해 도성 떠났으나 회복은 그대들에게 달려 있다.
변경에 뜬 달 보고 통곡하고 압록강 바람에 마음 아파하네.
신하들아! 오늘 이후에도 여전히 동인 서인 갈라져 싸우려느냐!

 

몽진을 떠난 것에 대한 변명과 누군가 나서 나라를 구해주기를 바라는 선조의 간사함이 잘 드러나 있다. 자신의 권좌유지를 위해 동인과 서인의 당파싸움을 교묘히 조장해놓고 이제와서 붕당정치가 나라를 혼란케 했다는 책임전가를 하고 있다. 참으로 어이없는 임금이다.

 

※ 《선조실록》 1592년 6월 26일 ※
6월 26일. 상이 대신들에게 하문하기를 “이곳으로 온 것은 오로지 요동으로 가기 위해서였는데, 이미 요동으로 갈 수 없다면 항해하는 어떻겠는가? 은밀히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간다면 수로를 따라서 갈 것이고, 충청 · 전라도로 가서 정박하면 역시 군사들을 모집하여 부흥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죽어도 명나라에 가서 죽겠다!” 던 선조 임금이었다. 온 조정이 온갖 이유를 들어 명나라 파천의 불가함을 주장했지만 결코 고집을 꺾지 않았던 임금이다. 그러나 선조는 《당포파왜병장》을 받은 지 5일 만에 남으로 간다는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