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7년전쟁 - 3장(1592.04.20~1592.07.08, 선조의 명나라 망명의 뜻전달(6월13일),명황제 신종-망명은 꿈도꾸지마라, 전라도를 노리는 일본)

구름위 2013. 5. 1. 10:51

선조가 개성에서 평양으로 피난길에 오를 무렵인 4월 20일 경, 전라감사 이광은 관할지역에서 군사 8천여 명을 징발하여 근왕을 위해 북상하다가 선조가 이미 개성을 떠나 평양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공주에서 회군을 하고 말았다.

 

이광이 군사를 돌려 돌아오자 전라도 백성들 사이에 이광이 적과 싸우지도 않고 돌아왔다며 비난의 소리가 높아졌다. 태인 출신 조방장 백광언은 칼을 빼들고 이광에게 항의하기도 하였다. 이광은 겁먹고 사죄한 뒤 다시 싸우러 가기로 결정하였다.

 

이광이 다시 각 군현에 동원령을 내려 전라도 일대에서 4만 여 명의 대군이 전주로 집결하였다. 이광이 평양의 피난 조정에 보고를 했고, 평양 조정은 충청도 순찰사 윤석각, 경상도 순찰사 김수에게 각각 군사를 이끌고 충청도 온양에서 전라도 군사와 합류하여 서울을 탈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광은 전라방어사 곽영과 함께 징발된 군사 4만여 명을 2개 군으로 편성하였다. 일로군(一路軍)은 주장에 이광, 선봉장으로 전 부사 이지시, 중위장에는 나주 목사 이경복을 임명하고 총병력 2만으로 구성되었고 다른 한 군은 곽영을 주장으로 선봉장 전 부사 백광언이 중위장에는 광주 목사 권율이 임명되었고, 총병력은 2만 명으로 구성되었다.

 

곽영군은 전주 - 여산 - 공주 - 온양으로 진격하게 하였고, 이광 자신은 전주 - 용안 - 임천을 지나 온양에서 합류하기로 하고 출발하였다.

 

한편 경상감사 김수도 병력 100여 명을 이끌고 전주에 도착하여 이광 군과 합류하였으며, 충청감사 윤선각도 충청 병사 신익, 방어사 유옥, 조방장 이세호와 함께 도내에서 8천여 명을 모집하여 온양에 집결시켰다. 이로써 전라, 충청, 경상 이른바 하삼도(下三道) 군사가 총집결하여 총 병력이 5만 명 규모가 되었다. 일부에서는 이들이 실제로 이들의 총 병력은 2만여 명 밖에 되지 않는다며 병력을 과장하여 평양 조정에 보고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들은 충청, 전라, 경상 3도에서 징발된 군사들을 ‘남도 근왕군’으로 칭하고 한성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남도 근왕군은 5월 24일 온양을 출발하여 6월 3일에 수원성에 무혈 입성하였다.

 

6월 4일 아침, 충청도 군사는 수원으로 나가 서울로 가기로 하고, 전라도 군사는 용인으로 나가 북상키로 하여 각각 출발하였다. 전라도는 아직 전화가 미치지 않은 지역이라서 그런지 모집된 군사의 숫자도 많았거니와 각종 물자도 풍부하여 무기, 식량, 구막, 피복 등 군수품을 실은 수레들이 50리에 뻗쳐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실제 군사들은 말만 군사들이지 갑작스럽게 끌어 모은 백성들로 그 무렵 대부분의 조선군들이 그러하듯 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들이었다. 더구나 각 도 지방군을 지휘하는 순찰사들이 모두 문관들이었고, 각 군현 군사 지휘관들 또한 문관 수령이 많았다.

 

《징비록》에는 근왕군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진군하는 모습이 흡사 양 떼들이 이동하는 것 같았고 봄 놀이 하듯 했다’

 

이렇게 되자 무관 출신인 백광언은 불안해졌다. 백광언은 이광에게 부대를 10여 개 소부대로 나누어 만일 한두 부대가 패전해도 전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자고 건의했으나 묵살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문소산 일대에 부산과 서울까지의 주 보급로를 경비하기 위해 작은 보루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구축하고 있었다. 용인 지역은 일본군 수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휘하 군사 1천 6백 명 가운데 6백여 명을 각 초소에 배치해 두고 있었고, 주력 1천 명은 서울에 있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일본에서 대표적인 수군 장수였지만, 이렇듯 내륙 깊숙한 곳까지 군사를 이끌고 와 있었다. 원균이 경상도 일원에서 ‘용감’하게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다면 과연 와키자카같은 수군 장수가 서울까지 올라가 있었을까?

 

남도 근왕군은 용인성 남쪽 10리쯤에 이르러 북두문산에 있는 일본군의 작은 진지를 발견하였다.

 

중위장 권율이 지형상 적의 방어에 유리하고, 조선군의 공격이 불리하니 우회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이광은 공격할 것을 명령하여 선봉장 백광언이 군사를 이끌고 돌격해 들어가 적병 10여 명을 죽이고, 이날 밤 다시 야습을 강행하여 10여 명의 적을 더 죽이고 방책을 불태웠다. 그러나 상당수의 일본군은 문소산으로 대피하여 한성에 있는 주력부대에 증원을 요청하였다.

 

5일 아침, 용인성 북쪽 문소산에 일본군의 진지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백광언과 이지시 등 두 선봉장으로 하여금 공격하게 하였다. 조선군이 접근하자 문소산의 일본군은 조총을 쏘면서 조선군의 접근을 방해하였다. 조총으로 인해 진지로의 접근이 여의치 않자 조선군은 문소산을 포위하여 일본군이 진지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렇게 한나절을 대치하고 있는 동안 조선군은 숲 속에서 휴식을 취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 때, 와카자카 야스하루는 경비 진지가 조선군 대군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급보를 받고 휘하 주력부대를 이끌고 급히 달려와 이날 점심 때쯤 이미 용인에 도착하여 조선군의 동측방 방향에서 공격을 가해왔다. 이때까지 십수 명 단위의 진지 경비병만을 상대하다가 1천여 명이 넘는 일본군의 반격을 받은 조선군 선봉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버렸다. 이 때 문소산의 일본군 진지에서도 조선군을 협공하기 위해 출격해 나왔다.

 

선봉장 백광언, 이지시 등이 진두에서 전투를 독려하면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나 전세를 회복시키지 못한 채 모두 전사하였다. 선봉에 섰던 전라도 고부 군사 이광인, 함열 현감 정연 등의 선봉부대 역시 궤멸되며 모두 전사하였다.

 

이광은 주력을 광교산에 물려 진을 치고 선봉부대 패잔병을 수습했으며 수원으로 향했던 충청도 군사도 달려와 합류하였다.

 

6일 아침, 전군이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일본군이 기습을 해왔다. 어제 문소산의 패배로 전의를 상실한 조선군들은 앞을 다투어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패주하는 조선군을 10리 쯤 추격하다가 돌아가 조선군이 버리고 달아난 물자들을 한곳에 모아 놓고 불태워 버렸다. 단 한번의 전투로 5만 병력이 개미떼처럼 흩어져 버리자 이광은 전주로, 윤선각은 공주로 김수는 경상우도로 각각 패잔병을 이끌고 돌아갔다.

 

개령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4번대 지휘관 모리 테루모토는 1592년 5월 19일에 부장인 무라카미로 하여금 현풍 서쪽 낙동강변 무계를 점령하여 보루(堡壘)을 쌓은 뒤 부근 일대를 경계하는 동시에 낙동강 연안에 도선장(渡船場)을 확보하고,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일본군 수송선단을 엄호하게 하였다.

 

당시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면은 거창으로 진을 옮기면서 전 첨사 손인갑으로 하여금 의병장 정인홍과 합세하여 이 일본군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정인홍은 손인갑을 부장으로 삼고 그로 하여금 독립 작전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의병군은 일본군의 수송선단을 방해하기 위해서는 무계에 있는 보루를 먼저 제거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공격을 계획하였다.

 

6월 5일 새벽 김면, 정인홍, 손인갑은 의병 3백 명을 이끌고 보루에 야습을 감행하였다. 먼저 정찰병을 먼저 보내어 적정을 탐색하여, 일본군의 경계가 소홀하고 적이 모두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한 다음, 은밀히 보루를 포위한 후 손인갑이 정예병 50여 명을 인솔하여 보루 안으로 잠입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순찰장교가 이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러, 일본군이 몰려나와 백병전이 벌어졌다. 조선의병군은 자다 깨어 무장도 갖추지 않고 뛰어 나오던 일본군 30여 명을 일순간에 사살한 다음 일본군 막사에 불을 지르자, 일본군은 놀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일본군의 부장 무라카미는 진두에 서서 전열을 정비하려 하였으나, 조선군이 쏜 화살 10여 발을 맞고 부상을 당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본군의 진화작업으로 불길이 멎고, 날이 밝아 오면서 일본군의 조총이 위력을 발휘하자, 조선의병군은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날 전투에서 조선군은 일본군 100여 명을 사살하고 일본군 장수에게 중상을 입히는 전과를 올렸다.

 

뒷날의 일이지만, 그 후 무계 보루는 7월 중에 의병장 김준민이 다시 기습하여 초소와 취사장, 창고 등을 불지르고 빠져 나오는 등 의병들의 거듭된 기습에 견디지 못한 일본군에 의해 9월 11일에 불태워졌고, 일본군은 성주성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역시 뒷날의 일이지만, 그 뒤 손인갑은 6월 어느 날 낙동강 황강 합류점 아래쪽의 마진 나루에서 적 수송선단을 기습하다가 전사하였다. 손안갑은 의병을 2진으로 나누어 강가 숲속에 매복해 두었다가 적 수송선단이 1진 앞을 지나자 일제히 활을 쏘아 뱃머리에서 선단을 지휘하던 적장부터 쓰러뜨려 물 속에 빠뜨렸다. 적이 조총으로 응사했으나 숲 속에 교교하게 숨어 있는 의병을 맞추지는 못하였다.

 

2진이 활을 쏘는 동안 1진이 아래로 내려가 매복하고 1진이 싸우는 사이 2진이 다시 내려가는 식으로 배 안의 적병을 계속해서 공격하였다. 적병이 배 안에 엎드린 채 대항도 못하는 가운데 적선 1척이 여울에 걸려 멈추는 것을 본 손인갑이 말을 타고 칼을 뽑아 강에 뛰어들었다가 그만 빠져 죽고 말았다. 적선이 빠져 나간 뒤 시체를 건져냈으며, 그 뒤 손인갑의 의병군은 김준민 의병군에 배속되어 무계 보루 2차 공격에 가담했다.

 

임진강 방어에 실패한 김명원과 한응인은 어떻게 해서 27일 평양으로 왔으나, 조정에서는 패전에 대한 문책을 하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임진강 방어선의 붕괴는 곧 평양성이 최전선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 조정은 점점 사태가 심각해진다는 것을 알았는지, 최후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조정을 둘로 나누기로 결정했다. 즉 분조(分朝)를 만들어서 어느 한쪽이라도 살아남아서 왕권을 이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분조는 선조의 둘째 아들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예로 세자 책봉은 오랜시간을 들여 성대하게 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광해군만은 전시라는 경우에 맞춰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선조는 세자 책봉을 하는 동시에 명의 조정에 계속해서 구원군을 청하는 사신을 보내었다.

 

6월 6일 일본군이 황주까지 진출하였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평양과는 불과 이틀 거리였다. 이 날 선조는 왕비와 우의정 유홍 등 일부 대신을 함흥으로 보냈다.

 

이틀 뒤인 8일 일본군이 대동강 남안에 출현했고, 처음으로 명나라 요동진장 임세록이 평양에 왔다.

 

명 조정은 계속되는 조선 사신의 요청과 일본군의 쾌속 진격에 이상함을 느끼고, 혹시 조선과 일본이 짜고 명나라를 침략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임세록에게 평양의 선조가 진짜 임금이고, 현재의 조선 사정을 파악하라는 임무를 내려 파견하였던 것이었다. 임세록은 대동강에 나가 일본군을 확인한 후 의심을 풀고 귀국하였다.

 

선조는 6월 10일 결국 평양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몽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몽진소식이 평양성 안에 알려지자 평양성의 백성들이 몰려와 어가의 앞을 막아 출발할 수 없었다. 선조는 거짓조서를 내려 백성들을 안심시킨 다음 11일에 다시 출발하려 하였다. 이번에도 백성들이 몰려와 앞을 가로막았지만, 이번에는 선조도 물러설 수 없었던지 가로막은 백성 세 명의 목을 베어 군민들을 해산시켰다.

평양성은 좌의정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평안도 순찰사 이원익과 유성룡 등이 남아 군사 3천여 명으로 수비를 하게 되었다. 평안 감사 송언신이 대동문 성루를, 평안 병사 이윤덕이 부벽루 위쪽 강변을, 자산 군수 윤유후가 장경문을 지켰다.

 

한편 임진강을 도하한 일본군 제1번대와 3번대가 6월 8일에 대동강 남안에 도착하여 진지를 구축하였다. 조선군은 평양성을 수비하는 동시에 일본군의 대동강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서 도섭이 가능한 왕성탄에 오응정 휘하의 4백여 명을 배치하였다.

 

일본군은 강변 10여 곳에 진을 치고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강이 깊고 넓어 도하를 못하고 대치하고만 있었다. 조총 사격을 가해왔으나 사거리가 미치지 못하였다. 조선군쪽에서는 쾌선(快船)에 활 잘 쏘는 군사들과 현자총통, 그리고 신기전 등을 실어 강의 한가운데까지 나가 일본군 진지에 사격을 가하였다. 요란한 포성을 울리며 현자총통에서 발사된 차대전이 날아가 적진에 꽂히고, 신기전이 불꽃을 뿜으며 강을 건너 일본군 진지에 떨어졌다. 일본군들은 처음 보는 무기에 혼비백산해서 흩어져 달아났다가 다시 돌아와 이들을 주워 보고 신기해 하였다. 그러나 이들 화약무기를 다량으로 집중배치하지 못하고 단발로 쏘아 그다지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대치를 계속하고 있는 동안 명나라 응원군을 맞기 위해 박천까지 갔던 유성룡이 그곳에서 마름쇠 수천 개를 급히 모아 평양성으로 보냈다. 그 무렵 날이 가물어 대동강 물이 갈수록 얕아지고 있어 적이 도보로 강을 건널까 우려하여 보냈던 것이었다. 하지만 힘들게 모은 마름쇠는 실전에서 쓰여지지 못하였다.

 

도강이 여의치 않자 일본군은 공격을 중단하고 며칠동안 성 안의 조선군 동태만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자 도원수 김명원은 적이 전의를 상실한 것으로 판단하고, 6월 14일 영원 군수 고언백, 벽단 첨사 류경령 등으로 하여금 정병 4백여 명을 이끌고 새벽에 강을 건너 적을 기습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용맹한 임욱경 등이 앞장 서서 기습적인 도하 공격을 감행하여 일본장수 나카무라 등을 사살하고 군마 300여 마리를 탈취하는 등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전과확대를 위해 날이 밝았는데도 불구하고 후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곧이어 후방에 있던 구로다 휘하의 일본군 제3번대 주력부대가 역습을 가해왔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어 조선군은 다급하게 후퇴하면서 왕성탄을 걸어서 도하하여 귀환하여 일본군에게 왕성탄이 도섭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다음날인 14일 저녁에 일본군은 전군을 출동시켜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일본군이 왕성탄으로 도섭해 오자 수비를 하고 있던 조방장 박석명, 수탄장 오응정은 조총부대의 집중적인 엄호 사격을 받으며 공격해 오는 일본군에 대항하지 못하고 평양성 안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일본군이 평양성에 접근해 오자 윤두수는 급히 백성들을 피난시키고 무기들을 풍월루 못 속에 버린 다음 순안으로 빠져 나갔으며, 도원수 김명원 등 모든 장수들도 군사를 이끌고 영변으로 후퇴해 버렸다.

 

일본군은 15일 텅빈 평양성에 입성하였다. 이 때 일본군 제1번대의 주장인 고니시는 평양성에서 조선군이 미처 폐기하지 못한 채 버려둔 양곡 10만 석을 발견하고 무릎을 치고 기뻐하였다고 한다.

 

한편, 평양을 떠난 선조는 12일 안주성을 지나 13일 영변에 도착했는데, 여기에서 처음으로 명나라로의 망명 의사를 밝혔다.

 

15일 선조는 분조의 세자 일행과 헤어져 각자 다른 길로 가기로 했는데, 떠나기 앞서 종묘와 사직에 하직하며 통곡을 했다고 한다. 영변을 떠난 선조 일행은 16일 정주에 도착하여 이 곳에서 대사헌 이덕형을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청원사로 보내면서 망명의 뜻을 밝혔다.

 

18일 곽주를 거쳐 18일 용천에 도착했다. 이 때 평양에서 쫓아 온 윤두수가 선조의 말고삐를 잡고 선조에게 ‘필부의 경솔한 행동’이라는 극언을 하면서 명나라 망명을 말렸다.

 

한편, 선조의 망명 요청을 들은 명나라 조정도 발칵 뒤집혔다. 아무리 전쟁에 패했다고는 하나 일국의 왕이 망명해 온다는 것은 외교적으로 큰 문제였던 것이다. 당시 명나라는 몽골족의 반란 진압에 정신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구원병 요청에도 선뜻 구원병을 파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마저 망명해 온다면, 일본군에게 침입 명문을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명나라로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명황제 신종은 급히 칙령을 내려 구원병을 보내줄 테니 망명은 꿈도 꾸지 말라고 달랬다. 또한 신종의 칙령을 전달한 요동 부총병 양소훈은 ‘국왕이 나라를 버린다면 군민이 싸울 뜻을 잃을 것이니, 강을 건너올 생각을 마시오’라며 선조를 꾸짖기까지 했다. 그러는 한편 명나라는 다른 대책도 세워 선조가 끝까지 망명해 오겠다고 고집한다면, 수행 인원을 백 명으로 제한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제서야 선조는 망명을 단념하고 의주로 가서 그곳에 피난 조정을 설치했다.

 

피난 조정이 의주에 설치되기 4일전인 6월 18일 요동 부총병 조승훈(중국에서는 꽤 용맹한 장군이었다고 한다)이 이끄는 명군 1천여 명의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 곽산에 도착했다. 요동에 건너간 이덕형이 요동의 순무 학걸에게 여섯 차례 글을 보내고 그의 집 마당에 하루동안 엎드려 울며 구원병 급파를 요청한 결과였다. 이덕형의 간청에 학걸은 명 조정의 승낙을 얻기 전에 그의 휘하 군사 가운데 5천 명을 임시로 파견키로 하고 선발대로 천 명을 먼저 출발시켰던 것이다.

 

그 후 사은사 신점이 북경에서 당시 명나라 조정의 실권을 가지고 있던 병부상서 석성을 움직여 이를 추인케 했다. 이후 조승훈의 부대는 후속부대가 올 때까지 의주에서 선조의 피난 조정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 전라도를 노리는 일본

 

경상도 일원을 전광석화처럼 석권한 일본군은 이어서 전라도 진출을 모색하였다. 경상도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전라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세 길이 있었다.

 

하나는 산청→함양을 지나 지리산을 우회하여 팔랑치와 여원치를 지나 소백산을 넘어 남원을 거친 다음 전라 감영이 있는 전주로 북상하거나 광주 나주로 남하하는 길.

 

두 번째는 산청, 거창에서 안의를 지나 육십령을 통해 소백산맥을 넘어 장수, 장계로 들어가 진안을 지나 웅치로 다시 노령산맥을 넘어 전주로 들어가는 길.

 

세 번째는 추풍령으로 소백산맥을 넘은 후 충청도 영동에서 무주→장수→진안→전주로 향하거나 금산으로 들어가 진산을 거쳐 이치로 노령산맥을 넘어 전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전라도 점령의 임무는 일본군 제7번대 고바야카와 타카가게가 맡고 있었다. 고바야가와는 당시 60세의 노장으로 실제적인 지휘는 안고쿠지 에케에이(安國寺惠瓊)라는 승장이 하고 있었다. 일본군 제7번대는 1만 5천여 명의 병력으로 부산에 상륙한 뒤 주력은 경상도 성주 · 선산 · 금산 일대에 주둔하면서 별군을 나누어 창원에 주둔하고 있다가 에케이의 지휘로 소백산맥을 넘어 남원과 진안으로의 진격을 모색하다가 의령에서 곽재우의 의병군에게 일격을 당한 뒤 진로가 차단되었다. 그 뒤 육십령을 넘어 진안으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거창 우척현에서 다시 김면 의병군에게 격퇴당하여 진로가 차단되었다.

 

고바야카와는 두 번에 걸친 실패로 결국 이미 확보하고 있던 추풍령으로 소백산맥을 넘어 충청도 영동을 돌아 무주 - 금산으로 들어가는 길을 택하였다.

 

6월 23일 금산을 점령한 후 사령부를 차린 타카가게는 군을 둘로 나누어 본대는 조공으로 진산을 거쳐 이치를 넘어 북쪽에서 전주성을 공격하도록 하고, 별군을 주공으로 안고쿠지로 하여금 용담 - 진안을 거쳐 웅치를 거쳐 양쪽에서 전주성을 공격하도록 작전 계획을 세웠다.

 

전라감사 이광은 용인전투에서 패퇴한 뒤 전주에 돌아와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의 전라도 침공 기도를 입수하게 되었다. 이광은 즉시 조방장 이유의를 남원 팔량치에, 이계정을 육십령에 배치해 일본군의 전진을 경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순식간에 일본군이 무주에 나타났고, 금산이 점령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사들 사이에 혼란이 일어나 두 곳의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다. 군사들 사이에는 아직 용인전투 패전의 충격이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혼란은 빠른 시간내에 수습되었고, 전라도를 지키기 위해 차츰 군사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광주 목사 권율이 1,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전주성으로 입성하였고, 화순 동북 현감 황진이 편장 위대기, 공시억과 함께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합류하였다. 또한 해남 군수 변응정, 나주 판관 이복남, 김제 군수 정담, 전주 의병장 황박 등이 각자 군사를 이끌고 합류하면서 수성의 기운이 높아갔다. 특히 황진, 정담은 신입, 이일 휘하에서 여진족 니탕개 토벌에도 참전한 역정의 무장들이었다. 이리하여 7월 초에는 일본군의 진입 예상로로 확실시되는 웅치와 이치 두 관문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웅치에 방어선을 구축한 방어군은 김제 군수 정담 휘하의 박정영 군 300명, 박석정군 100명, 황박 의병군 200명과 그 수를 알 수 없는 나주 판관 이복남, 해남 군사 변응정 등이었다. 또한 진안의 선비 김수, 김정 형제 등 사천 김씨 일가가 참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제 군수 정담은 웅치 정상에 제3선을, 나주 판관 이복남은 산 중턱에 제2선을 의병장 황박의 의병군은 산 아래 제1선을 구축하였다. 조선군은 목책을 세우는 등 수많은 장애물을 설치한 다음 적의 예상 기동로 좌우에 매복하여 일본군의 접근을 기다렸다.

 

7월 7일 안고쿠지 군이 드디어 웅치를 넘기 위해 접근해 왔다. 제1선의 황박 부대가 제2선의 이복남 부대의 지원을 받으며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다음 날인 8일 일본군은 전력을 투입한 총공격을 가해왔다. 파도처럼 밀어붙이는 일본군에 의해 마침내 제1선의 황박 부대가 무너지며, 황박군은 제2선으로 후퇴하였고, 이복남 부대와 함께 일본군과 치열한 난전을 벌였다. 정담이 백마를 타고 진두 지휘를 하던 적장을 활로 쏘아 맞추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저돌적으로 밀어 붙였고, 마침내 제2선도 무너질 위험에 처했다. 제2저지선이 위협을 받자 정담의 부장 한 사람이 그에게 후퇴를 권했으나 그는 “차라리 적 한 명을 죽이고 죽을지언정, 1보를 물러서 살 수는 없다” 며 단호히 거절하였다.

 

제2선마저 무너진 조선군은 정상에서 합류하여 정담의 지휘 하에 하루종일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해가 기울자 일본군은 마침내 공격을 중지하고 병력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이때, 조선군은 화살이 떨어져 큰 소리로 화살 보급을 요청하였다. 이 소리를 들은 일본군은 철수를 취소하고 다시 총공격을 가하였다. 화살마저 떨어진 상황에서 조선군은 일본군과 처절한 백병전으로 맞서 싸웠으나, 주장 정담, 종사관 이봉, 비장 강운과 박형길 등이 혼전 중에 전사하였다. 피아간의 시체가 골짜기를 메웠다. 전세가 기울어지자 변응정이 전투 중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고, 이복남은 직속 군사 중 생존자를 지휘하여 안덕원으로 물러났다.

 

다음날 일본군이 전주 근방에 이르자 이광은 “적이 오면 밖에서 공격하겠다” 며 군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나 남은 관리들과 백성도 도망치려 하였으나, 전주 사람으로 전적(典籍: 성균관 정6품)을 지낸 이정란이 성으로 들어가 백성들을 수습하여 성을 굳게 지켰다.

 

한편 도망갔던 전라감사 이광도 성 밖에서 백성들에게 병사 복장을 입혀 허장성세로 일본군을 속이며, 낮에는 깃발을 수없이 꽂고, 밤이면 온 산에 횃불을 만들어 일본군을 위협하였다.

 

8일 저녁 일본군의 정찰대가 성 근처까지 와서 형세를 살피다가 돌아갔다. 일본군은 이미 웅치에서 많은 병력을 손실하였고, 조공이었던 본대마저 이치에서 격퇴당하자 감히 싸우지 못한 채 금산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적장 안고쿠지는 후퇴하는 길에 웅치 전투에서 전사한 조선군의 시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들어 묻고 ‘조선국 충신, 의사의 간담을 조상하노라(弔朝鮮國忠肝義膽)’ 라고 쓴 나무 팻말을 세워 용감히 싸우다 순국한 조선군의 넋을 위로하였다.

 

한편 이치로 진격했던 일본군의 또 다른 조공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자.

 

남도 근왕군으로 용인전투에서 패하고 전주에 후퇴해 있던 권율은 7월 초에 남원 수성장으로 임명되어 남원을 지키고 있었다. 권율은 일본군이 웅치를 거쳐 전주로 진입하려 한다는 보고를 받고, 정담 군을 지원하기 위해 전주로 이동하던 도중 금산의 일본군이 이치 쪽으로 진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동복현감 황진과 함께 이치로 달려가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권율은 나무를 베어 목책을 세우고 적의 예상 접근로에 각종 장애물을 설치하는 한편, 돌과 화살 등을 최대한 확보해 두고 적의 접근을 기다렸다.

 

7월 7일 고바야카와 군은 일부 병력을 금산에 남겨두고 주력을 진산으로 이동시켜 8일 아침 이치의 권율 군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장애물 지대를 통과한 다음, 부대를 2개 조로 나누어 교대로 목책을 파괴하려고 하였다. 조선군은 화살과 돌로써 일본군의 접근을 막아내고 있었다. 편장 위대기와 공시억이 결사대를 이끌고 적의 측면을 기습하기도 하였다.

 

특히 동북 현감 황진의 활약이 눈부셨다. 황진은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사가지고 온 일본도 두 자루를 휘두르며 일본군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일본군의 조총과 조선군의 화살이 치열하고 오고가던 도중 지휘를 하고 있던 황진이 적탄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이 틈을 타서 일본군이 목책 일부를 부수고 진내로 돌입했다.

 

이에 권율이 곧 예비대를 투합하여 역습을 가함으로써 돌파구를 봉쇄하고 진내에 진입한 일본군을 격멸했다. 고바야카와는 공격이 성공하지 못하자 오후 4시 경 공격을 중지하고 철수하여 그날 밤에 금산성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