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의 3차 출동에서는 두 차례의 해전만이 벌어졌지만 임진왜란의 일대 전환점을 마련한 매우 큰 해전이 벌어졌던 시기이다. 바로 이번 3차 출동에서 우리가 잘 아는 임난 3대첩 중의 하나인 한산도 대첩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 수군은 전쟁 발발이후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육군이 연전 연승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조선 수군과의 크고 작은 8번의 해전에서 대, 소 전함 114척과 수군 1만 6천여 명이 몰살하는 대참패를 당했다. 전쟁의 속전속결을 원칙으로 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뜻하지 않게 수군이 연패했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격노하여 조선으로 건너간 수군 장수들에게 총집결하여 조선 수군을 공격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개전 초기부터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아 육지에서 활동하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이 명령을 받고 바로 부산으로 내려갔으며 그 외 일본 수군의 쿠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등 내노라하는 수군장수들 역시 휘하 병력을 총동원하였다.
당시 일본군의 전략은 육지의 고바야카와 군과 동시에 수륙협공하여 전라도지역을 일시에 점령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에 맞선 조선군은 육지에서는 전라도 감사 이광을 중심으로하여 웅치와 이치에서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해상에서는 3도 수군이 일본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3차 출전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던 중 일본수군이 남해안 연안과 도서지방에서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전라우수영과 경상우수영에 연락을 하였다.
7월 4일 전라우수영 함대가 도착하자 5일 하루동안 작전협의와 연합훈련을 실시한 후 6일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여수를 출항하여 노량진에서 경상우수영의 원균 함대와 합류하였다. 3도 연합수군의 규모는 전라좌수군이 24척, 전라우수군이 25척, 그리고 원균이 이끄는 경상우수군이 7척으로 합계 56척이었고, 이 때 거북선은 2척이 참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전까지 원균함대는 판옥선 3척에 불과했으나, 2차 출동이후 버려지거나 파손된 판옥선을 수리하여 3차 출동에서는 7척으로 늘었다.
3도의 함대로 연합함대를 구성한 조선수군은 진주 창선도에서 숙영을 한 후 다음날인 7일 오후 고성 땅 당포로 이동하였는데, 현지 백성 김천손이 달려와 견내량에 적함 70여 척이 있다고 알려 왔다. 이 적함의 정체는 일본수군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로 그는 요시타카, 요시아키 등과 연합함대를 구성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무시한 채 단독으로 출전하여 견내량까지 진출해 있었던 것이다.
7월 8일 적이 출몰한다는 견내량에 이르러 보니 76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라는 일본수군의 대함대가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다.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반도 사이에 있는 긴 수로로서 길이는 약 4Km에 달하며 넓은 곳이라야 600m를 넘지않는 좁은 해협이다. 조선수군의 판옥선이 활동하기에는 수로의 지형이 너무 협착하고 또 암초가 많아서 조선함대가 싸우기에는 불리한 지형이었다.
일본군의 척후선 몇 척이 조선연합함대를 정찰하다 발각되어 도주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 앞바다의 넓은 곳까지 유인한 후, 한꺼번에 격멸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 어영담을 척후로 내세운 후 적함대를 공격하여 유인하라는 명을 내렸다. 곧 판옥선 5척이 척후선을 뒤쫓아 견내량으로 들어갔다.
조선연합함대는 전 함대를 좀 더 전진시켜 통영반도와 거제도 사이의 넓은 바다에 전개시켰다. 잠시 후 견내량 입구 근처에서 적을 유인하는데 성공했다는 신기전이 솟아 올랐다. 일본전함들은 미끼에 걸려 들어 어영담의 전함을 뒤쫓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해왔다.
적함들이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깊숙이 들어오자 기함에서 일향포성이 온 바다를 울리고 청룡기가 세 개씩 올라 간 후 나팔과 북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지금까지 후퇴를 거듭하던 조선수군함대는 일제히 뱃머리를 돌리고 학의 날개형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전투대형을 짜기 시작했으며, 전쟁의 승패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대규모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시간 육지에서는 전주성을 향해 공격해 오던 일본군 제6번대를 맞아 웅치와 이치에서 조선관군과 의병군이 결사적인 항전을 벌이고 있었다.
적함들이 고스란히 날개 안으로 들어오자 양쪽 날개가 좁혀지면서 일본수군의 전함들은 퇴로가 차단되어 밀집대형의 상태로 포위망에 갇혔다. 연합수군의 기함에서의 공격을 신호로 전함대의 전함이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날 전투에서 전라좌수영은 일본수군의 충각대선 3척 격침시키고 3척을 포획하였으며, 대선 3척 격침, 6척 포획, 소선 2척 총 17척의 전과를 올렸으며, 전라좌우 수군에서는 대선 20척, 중선 17척, 소선 5척을 격침시키는 등 총 42척과 일본군 8,980명 등 총 적함 59척이 격파 혹은 나포되었으며, 일본군 장수 마나베 사마노조, 와키자카 사요에, 와타나베 시치에몬 등이 전사하였고, 총사령관 와카자카 야스하루만이 겨우 살아남아 한산도의 무인도로 숨어 들었다. 결국 조선과 일본의 수군이 사활을 걸고 부딪친 한산도 대결은 일본의 대참패로 마감되었다.
이 날 육지에서도 비록 웅치의 방어선은 뚫렸으나, 이치에서는 일본군을 격퇴시켰고, 의병군이 금산의 일본군 사령부를 공격하여 일본군의 전라도 진입을 끝내는 좌절시킬 수 있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육지와 해상에서 공동으로 전라도지역을 공격하려는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감으로써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인 전라도 점령에 실패하였고, 일본군의 기본전략인 수륙병진책도 큰 타격을 받았다.
한산도에서 대승을 거둔 조선연합수군은 그날 밤을 견내량 입구 바다에서 보내고 9일 가덕도로 진출하였는데, 여기서 일본수군 40여 척이 안골포에 있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 일본군은 당초 야스하루와 같이 연합함대를 구성하기로 한 요시타카와 요시아키의 함대였다. 이들은 7일 부산을 출항하여 8일 가덕도에서 하루를 보내면서 한산도에서 야스하루의 함대가 전멸했다는 보고를 받고는 감히 구원하러 가지 못하고 오히려 안골포로 이동했던 것이었다.
10일 새벽 전라우수영 함대를 가덕도 주변에 배치하여 혹시 부산방면에서 올지도 모를 적의 구원함대를 경계하고 있다가 만약에 전투가 커지면 소수의 복병선만 남겨두고 전투에 가담하도록 지시를 하고 안골포공격은 전라좌수군만으로 진행하였다. 안골포에 이르러보니 적선 42척(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이 정박하고 있는데 포구의 지세가 좁고 얕아서 많은 배가 전투하기가 매우 불편하였는데 일본수군은 판옥선과 같은 대형함들이 들어오기 어려운 곳에 정박시켜 놓고, 모두 육지로 올리가서 대항하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을 넓은 바다로 유인하려 애를 썼으나 그들은 이미 한산도에서 그들의 주력이 전멸당한 것을 알고 있는 터라 정면으로 싸우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작전을 바꾸어 긴 사정거리를 이용하여 유효사거리까지 접근하여 함포를 총동원하여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파상공격으로 전환하였다. 전함대가 서로 교대하여 종일토록 공격하여 적선 20척을 격침시켰지만 날이 저물어 철수하였다.
넓은 바다에서 숙영한 다음 11일 새벽에 다시 공격해 들어갔으나 일본군들은 밤을 틈타 모두 도망가고 없었다. 그 뒤 함대를 가덕도 이동 다시 부산 가까운 몰운대까지 대규모 적전 함대 시위를 벌였다. 모두 합쳐 100여 척의 전함대를 기함을 중심으로 진용을 갖추어 북과 나팔을 불며 항진하며 일제히 함포를 발사하는 등 무력을 과시했다.
이날 오후 늦게 무력시위를 마치고 가덕도로 철수한 뒤 자정이 되어 한산도로 이동하여 12일 하루를 쉬고 13일 각각 수영으로 개선했다.
이번 3차 출동에서의 전과는 적함 총79척이며, 아군손실은 전함 손실 없이 전사자 19명, 부상 119명이었다. 이 한산도 대첩은 단순히 승패를 개념을 떠나서도 전체적인 전황을 바꾸어 놓을만큼 조선과 일본 양측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주력으로 내세운 수군 대결에서마저 참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선수군과 바다에서 싸우지 말라는 ‘해전금지령’ 을 내렸다.
60세의 나이로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은 담양, 태인을 거쳐 북상하면서 병력을 모았다. 그는 6월 11일에는 전주에 진출하였는데, 여기에서 남원에 있던 의병을 흡수하여 모두 7천 명으로 병력이 불어났다.
6월 22일 고경명은 휘하 병력을 거느리고 전주를 출발하여 한성을 향해 북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여산에 도착하였을 때 일본군이 전라도로 침입해 들어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전라도를 침입하는 일본군을 먼저 무찌른 다음에 북상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고경명은 6월 27일에 여산을 떠나 은진을 거쳐 7월 1일에 연산에 도착하여 충청 의병장인 조헌에게 글을 보내 금산에서 합류하자고 제안하였다.
한편 고바야카와가 지휘하는 일본군 제7번대는 7월 8일 전주로 진출하려다가 이치에서 권율 군에게 크게 패하고 그날 밤에 금산으로 철수한 상태였다. 고바야카와는 연산 쪽에 조선군이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수성 태세를 갖추었다.
고경명의 의병군은 7월 8일에 연산을 출발하여 이치와 금산 사이에 있는 진산에 도착하여 전라도 방어사 곽영과 그 휘하의 영암 군수 김성현이 거느린 관군과 합류하였다. 관 · 의병 연합군을 편성한 조선군은 9일에 하오에 금산에 도착하였고, 곧바로 금산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고바야카와 군은 성 위에서 조총 사격으로 조선군의 접근을 저지하려고 할 뿐 적극적인 대항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전날 이치전투에서 병력 손실이 많아 미처 전열을 재정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고경명은 30여 명으로 돌격조를 편성하여 성 밑에 접근시켜 성문을 파괴하는 한편, 민가를 불태워 연기를 내게 하여 일본군의 시야를 가리게 하였다. 또 진천뢰를 쏘아서 성 안의 창고와 건물을 불태웠다. 이렇게 종일토록 접전을 벌였으나 끝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날이 저물었다.
고경명은 포위를 풀지 않고 경계를 강화하여 적의 야간 기습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이 야음을 틈타 복병을 배치하려고 나왔다가 의병의 경계망에 발각되어 수명의 사상자를 버리고 성 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밤사이 방어사 곽영이 고경명을 찾아와 공성의 어려움을 내세우며 철수하기를 청하였으나, 고경명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고경명은 금산성 서문을 공격목표로 삼고 의병의 주력을 서문 공격에 투입하였다. 그 때 고바야카와는 조선군의 관군이 허약한 것을 알고 동문으로 출성하여 관군을 먼저 공격하였다. 일본군의 선제 공격을 받은 관군은 차례로 무너지기 시작했고, 방어사 곽영마저 사력을 다해 싸우기를 포기하고 후퇴해 버렸다.
‘관군이 무너졌다’는 사실이 의병 진영에 전해지자, 의병군도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일본군은 의병들이 당황한 틈을 타서 공격을 가해왔다. 의병의 진영이 무너지자 휘하 막료들이 억지로 고경명을 탈출시키려고 하였다. 먼저 탈출했던 유팽로가 고경명이 아직 진 중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다시 돌아오자, 고경명은 “나는 이곳을 떠날 수가 없으니 그대는 먼저 이 곳을 벗어나는 것이 좋겠소” 라고 하며 유팽로에게 퇴각을 권했으나, 유팽로 역시 후퇴 할 뜻을 버리고 고경명을 호위하였다.
이어서 일본군이 벌떼처럼 공격해 오니 유팽로와 안영 등이 고경명을 호위하며 싸웠으나 세 사람 이후 지휘부 모두가 전사하였다.
고경명의 차남인 인후 역시 선두에 서서 용감히 싸우다가, 의병군이 무너지자 부하들을 수습하여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족으로 전사하였다. 고경명의 큰아들 종후는 아버지와 동생의 전사를 알지 못한 채 휘하 의병들을 수습하여 안전지대로 후퇴하였으나, 곧 이어 비보를 듣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 전사자 시체 속에서 부자를 찾아내 가까운 산사로 시신을 옮겼다.
고종후는 이후 남은 의병군을 수습하여 전국을 누비며 싸웠고, 다음해 제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하여 순국하니 3부자가 모두 의병으로 순국하였다.
● 명나라 참전
선조가 의주에서 잇달아 사신을 파견하여 명에 원병을 요청했는데, 명에서는 요동 부총병 조승훈으로 하여금 먼저 조선에 건너가 사태를 수습하도록 하였다. 요동 부총병 조승훈은 3천여 병력을 인솔하고 7월 초순에 압록강을 건너와 조선 도원수 김명원 휘하의 3천명 조선군과 합류하여 평양 북방 순안군에 집결하였다. 조선에서는 연도에 군량을 준비하고 대령강과 청천강에 부교를 설치하여 명군을 지원하였다.
이 무렵 조선군의 척후장으로 평양 부근에 나가 있던 순안 군수 황원으로부터 ‘일본군이 모두 한성 쪽으로 철수하였으며 평양성에는 소수의 병력만 남아 있다’ 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 보고를 들은 조승훈은 평양성 탈환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고 평양성 공격을 개시하였다.
조선에서도 도원수 김명원이 관군과 의병을 합한 3천 병력을 거느리고 명군과 함께 전투에 참가하였다. 조승훈은 각 부대에 조선군 100명씩을 배치해 길을 안내하였다.
7월 17일 아침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에 이르고 보니 성문은 열려 있었고, 일본군은 보이지 않았다. 명군이 선두에 서서 보통문을 통과하여 대동문으로 진출할 동안에도 일본군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이쯤되면 복병을 의심하고도 남을 상황이지만 명군의 선봉장을 맡은 사유는 일본군이 명나라 군사에게 겁을 먹고 이미 도망하였다고 큰소리를 치며 내성(內城)을 빨리 점령하고자 군사들을 독려했다. 평양성 안은 길도 좁은데다 얼마전 내린 비로 땅도 질퍽거려 곧 기병과 보병이 뒤엉켜 대형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선봉을 맡은 부장이 사태파악을 못하면 대장인 조승훈이라도 정신을 차렸어야 하는 일이건만 조승훈 역시 일본군 주력이 평양성을 빠져나간 것으로 속단하여, 경계를 게을리한 채 행군 종대로 중심가로 들어갔다. 대장들이 이러하니 수하 장졸들의 목숨만 경각에 달린 것이 아니겠는가. 평양성으로 입성하자마자 좌우로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의 조총에 모조리 도륙이 되는 것은 예견된 일이다.
원래 평양성에는 일본군 제1번대와 3번대가 있었는데 그 중 구로다의 제3번대가 황해도로 이동하고, 제1번대 고니시 군은 평양에 그대로 남아 지키고 있었는데, 구로다군이 이동하는 것을 보고 척후장 황원이 일본군 주력 전체가 이동하는 것으로 잘못 판단하여 보고하였던 것이다. 결국 잘못된 염탐으로 인해 애꿎은 병사들만 줄초상을 치룬 것이다.
고니시 군은 명군이 평양성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성이 텅 빈 것처럼 위장하여 주요 지점에 병력을 매복시켜 놓고 있었는데, 조승훈이 이를 모르고 성 안으로 깊숙이 진입하다가 기습을 당하였다.
평양성 안 곳곳에서 명군과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는데 명군의 선봉이었던 사유가 선두에서 분전했으나 조총의 집중사격을 받고 즉사했으며 그 외 천총, 장국충 등 부장 등이 모두 떼죽음을 당했다. 대장 조승훈만이 부상을 입은 채 겨우 평양성을 탈출하여 18일 아침에 수십 기만을 수습하여 요동으로 철수하였다.
조선군은 성을 포위하고 있다가 명군이 퇴각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들도 더는 방법이 없어 병력을 수습하여 철수했다. 조승훈은 요동으로 도망친 다음 패한 것이 부끄러웠던지 ‘조선군이 일본군에 투항하여 졌다’ 고 허위보고를 명나라 황제에게 하는 바람에 조선은 이를 해명하는 사신을 보내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처럼 임난 당시 조선으로 파병된 명나라 군대의 수준은 명색만 군대이지 거의 오합지졸이나 다름이 없었으며 연합은 커녕 도리어 조선군 발목만 잡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보다 백성에게 끼치는 해악은 명군이 더했다고 하니 이를 어찌 구원군으로 볼 수가 있겠는가. 자고로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오로지 자국군 뿐으로 외세에 힘을 빌리는 순간 이미 자주권은 상실하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자국 이외에는 모두 오랑캐라 업신여기며 일본군을 만만하게 보고 있던 명나라는 조승훈이 한 방에 나가 떨어지자 그제서야 사태를 직감하고 천진, 여순 등 국경의 주요 도시의 수비를 강화하고 군사를 추가로 모집하여 동정군(東征軍: 조선출병군) 준비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일본군은 임진강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 두 길로 나누어 한쪽은 평안도로, 한쪽은 함경도로 진격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선조가 북행하면서 함경도 쪽으로 방향을 바꿀지도 모르기 때문에 양쪽에서 몰아서 잡으려는 생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1번대 고니시와 제2번대 가토가 서로 자기가 평안도로 가기를 원해 극동 지역에서 이런 일을 결정할 때면 즐겨 사용하는 제비 뽑기로 결정하기로 하고, 제비를 뽑았는데 결국 가토가 져서 고니시가 평안도로 가고 카토의 제2번대는 강원도를 거쳐 함경도로 진격하게 되었다.
6월 17일 함경도 안변부를 떠난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 관리들이 모두 도망가고 텅 비어 있는 읍성을 거저 먹다시피 진격을 계속하다가 철령 일대에서 남병사 이흔에게 소규모 저항을 받았으나 가볍게 물리치고 함흥에 도착하였다. 진격해 오는 일본군을 막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을 갔던 함경도 관찰사 유영립은 산속으로 도망갔다가 그곳 백성들의 밀고로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그런 그를 위해 목숨을 바쳐 도와준 사람이 있어 일본군의 진영을 탈출하여 피난조정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
한편 일본군에게 한성이 함락되고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고 있는 동안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은 조정 신료 일부를 거느리고 함경도에 피난 와 있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곳에서 두 왕자가 회령방면으로 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부장인 나베시마로 하여금 함흥 이남 지역을, 사가로 하여금 북청 지역을, 구키로 하여금 단천 지역을 장악하게 한 다음, 자신이 직접 본대를 이끌고 조선의 두 왕자를 붙잡기 위해 북진을 계속하였다.
일본군의 추격을 받은 왕자 일행은 마천령을 넘어 북상하면서, 당시 경성에 본영을 두고 있던 북병사 한극함에게 명령을 내려 일본군의 북진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한극함은 철령 이북의 군사를 수습하여 마천령을 선점하고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으나 미처 마천령에 도착하기 전인 7월 18일에 가토군의 선봉대가 이미 마천령을 넘어와 버렸다. 이에 한극함은 할 수 없이 해정창에서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18일 저녁, 일본군 선발대가 해정창에 이르렀을 때, 한극함 군은 평탄한 지세를 이용하여 기병으로 기습 공격을 하였고, 일본군은 곧 창고 안으로 들어가 곡식 포대를 쌓아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조총사격으로 응사하였다. 일본군의 집중적인 조총 사격을 받으면서도 무식하게 공격을 시도하다가 회령 부사 원희가 전사하는 등 병력 손실이 커지자, 한극함은 군사를 철수시켜 봉수치에서 밤을 새우면서 전열을 정비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그날 밤에 본대와 합류하여 조선군이 숙영을 하고 있던 봉수치를 포위해 버렸다. 다음 날 새벽 한극함은 이런 것을 모른 채 재공격을 개시하려고 할 때, 일본군이 먼저 선수를 치고 공격해 왔다. 기습 공격을 받은 한극함 군은 일시에 무너졌고 병력의 태반을 상실한 한극함은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여 두만강 쪽으로 달아났다. 이렇게 함경도 방어선마저 붕괴됨으로써 더 이상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할 수 없게 되었다.
한극함은 두만강 너머까지 도망갔다가 경흥으로 들어갔으나 그곳 백성들에게 붙잡혀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다시 양주에서 탈출하여 피난 조정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적과 내통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선조가 내린 사약 한 사발 들이키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처럼 당시 두 명의 정부 관리가 적의 손이 아닌 조선 백성들에게 잡혀 일본군에게 넘겨졌음을 알 수 있다. 민심이 선조를 떠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물론 다른 지역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겠지만, 특히 함경도 지역은 임난 기간 중에 다른 지역보다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함경도 지역은 조선초부터 조정의 차별대우를 받아 조정에 대한 반감이 높은 지역으로 유명하다. 북방 오랑캐의 잦은 노략질과 수탈에 지쳐있던 함경도 백성들은 조선조정이 자신들을 등한시 한다는 불만이 많았는데 그런 상황에서 피난 온 임화군과 순화군 마저 상황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여전히 함경도민을 핍박하거나 무시하고 하인들을 시켜 민가를 노략질하는 등 패악을 서슴치 않았으니 어찌 관에 소속된 이들에게 고운 시선을 보내겠는가. 결국 두 왕자는 국경인(國景仁)의 손에 사로잡혀 가토에게 넘겨졌다.
국경인은 토관진무(土官鎭撫: 평안도와 함경도에 따로 두었던 무관직)였는데 난리가 일어나자 무리를 모아 난을 일으켜 스스로 대장이라 칭하고 기병 500명을 모은 후, 두 왕자가 머물고 있던 객사를 포위하여 두 왕자와 부인, 시녀들 등의 종복을 모조리 잡아 가둔 후 가토 기요마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항복을 청하니 가토는 국경인을 판형을 삼아 북병사 일을 맡겼다.
그 외 지방의 아전들도 적이 주는 벼슬을 받고 거의 적에게 붙어 협조했으며, 종들은 향도가 되어 일본군의 길을 안내하여 일본군은 칼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국경 지대를 접수할 수 있었다. 조선이란 나라가 얼마나 부패하고 또 무능한 정부였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