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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도보통지의 인물: 김체건과 김광택 이야기

구름위 2013. 4. 5.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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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을 따라 일본에 가다

'무예도보통지' 왜검조를 보면, 숙종 때 사신을 따라 일본에 들어가서 검보를 얻어서 그 왜검술을 배워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점은 사도세자의 유고 문집인 '능허관만고(凌虛關漫稿)'의 「무예육기연성십팔반설(藝譜六技演成十八般說)」조에도 군문인(軍門人) 김체건이 일본에서 8종의 검법을 배워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승정원일기' 영조 10년 9월 29일자 기록을 보면, “왜검의 법은 일찍이 통신사행 때 별도로 장교(將校)를 보내어 다른 나라(일본)에서 배운 것이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김체건이 사신을 따라 일본에 가서 검법을 배워온 것은 사실로 보인다.

숙종 당시 사행은 숙종 8년(1682)과 숙종 37년(1711)․숙종 45년(1719) 세 차례에 걸쳐 있었다. 숙종 37년(1711)․숙종 45년(1719) 이 두 시기에 김체건이 일본 사행에 동행을 하지 않았을 것임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영조 10년(1738) 10월 8일의 기록을 통해 살필 수 있다. 훈련대장 장붕익(張鵬翼, 1674~1735)이 영조에게 ‘왜검은 선조(先朝) 무오(戊午)년에 김치근(金致謹)이라고 불리우는 자를 보내어 왜국에서 배워오게 한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조 10년 이전의 무오년은 숙종 4년(1678)이다. 이 해에 김치근이라는 이가 왜검을 일본에서 배워왔다는 것이다. 숙종대에 왜검을 배우기 위해 갔던 이는 '무예도보통지' 등의 기록을 통해 김체건이 확실하기 때문에 김치근이라는 인명은 김체건의 이름을 명확히 알지 못한 장붕익의 오해, 또는 당시 임금과 장붕익의 말을 옮긴 사관의 실수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숙종 4년에는 통신사행이 없었다. 따라서 가장 가까운 숙종 8년의 사실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이고, 이 때 김체건이 사행에 동행한 것으로 짐작된다. 숙종 8년의 사행은 5월부터 11월까지였는데,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가 장군직을 물려받자 축하사절로 파견한 것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연행을 담고 있는 역관 김지남(金指南, 1654~1718)의 '동사일록(東槎日錄)'에는 통신사 일행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지만, 김체건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체건의 직위가 낮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가 맡은 임무를 드러낼 수 없었고 또 본명을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당시 사행에는 무인으로는 선전관(宣傳官) 양익명(梁益命)과 마상재인 오순백(吳順伯)․형시정(邢時廷) 등이 동행하였다. 오순백은 앞서 언급한 숙종 8년 통신사행의 기록을 담은 '동사일록'과 홍우재(洪禹載)의 '동사록(東槎錄)'을 보아도 5월 15일 통신사행이 경북 예천에 머물렀을 때, 사또가 그로 하여금 검무를 추게 했다. 그의 검무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북새통을 이루었고,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보는 자마다 그의 기이한 재주를 칭찬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오순백이 마상재 뿐 아니라, 검무에도 매우 빼어났음을 말하는데, 오순백과 관련한 기록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다. 가능성이 매우 적기는 하지만, 혹 오순백이 김체건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본다.

 통신사 행렬 부분

김체건이 사행을 따라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까지 가면서 검보를 얻어 기법을 익혔는지 아니면, 혼자 사행에서 떨어져 나와 일본 각지를 돌며 왜검을 익혔는지는 명확치 않다. 그가 왜관에서 머슴살이를 몇 년 동안 해서 일본어에도 능숙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후자의 추정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가 배운 기법에 대해서는 '무예도보통지'에는 토유류(土由流)․운광류(運光流)․천유류(千柳流)․유피류(柳彼流)의 4류가 있다. 이들 유에 관해서 토유(土由)를 토전(土田)으로 보면서 발음이 같은 호전(戶田)류로, 운광은 운홍류(雲弘流)로 비정하는 학자도 있다. 그런데 '능허관만고'에는 왜검이 토유류부터 유피류까지 8류 였다고 하고 있으며, '무예도보통지'에는 이 4류도 중간에 실전되어 운광류 만이 행해지고 있다고 하고 있다. 즉, 무예도보통지가 편찬되는 시기에는 김체건이 전한 많은 기법이 유실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추론은 무예도보통지에 기재된 왜검법의 세 명칭을 통해서도 추정해 볼 수 있다.

토유류: 기(起)-장검재진(藏劍再進)-장검삼진(藏劍三進)
운광류: 기(起)-천리(千利)-속행(速行)-산시우(山時雨)-수구심(水鳩心)-유사(柳絲)-종(終)
천유류: 기(起)-초도수(初度手)-장검재진(藏劍再進)-장검삼진(藏劍三進)-종(終)
유피류: 기(起)-종(終)

운광류에는 천리․속행․산시우․수구심․유사 등 중국에서 유래된 검법과는 다른 일본에서 유래된 세로 보이는 세명이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반면 나머지 3류 중에는 유피류에 초도수라는 세명 만이 전하고 있어, 세명 혹은 기법이 유실되었음을 말해준다.

숙종 8년의 일본 사행은 이해 11월 16일에 임금에게 돌아와 그 결과를 보고하였는데, 김체건도 이 시기 즈음에 돌아왔을 것으로 보인다. 정식 사행과는 별개의 임무를 띠고 갔으므로 사행단과 별도로 일찌감치 귀국했을 수도 있다.

숙종 8년 11월에는 김석주(金錫冑)가 청에 사은사(謝恩使)로 가게 되었는데, 이보다 한달 앞서 그를 동래에 내려보내 왜인의 검술을 배웠고 금위영(禁衛營)으로 소속을 옮긴 자를 데려가 저쪽(청)의 기예를 배우게 하자고 청하여 숙종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내기도 하였다. 김석주가 언급한 인물이 김체건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김체건은 일본에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금위영으로 소속이 옮겨졌고 숙종 8년 11월의 사은사를 따라 청에 가서 그 곳의 무예를 습득해 왔을 가능성도 살필 수 있다.

'무예도보통지' 「병기총서(兵技總叙)」조를 보면, 숙종 16년(1690) 11월에 내원(內院)에서 훈련도감에 속한 왜검수의 기법을 시험하였다고 하는데, 김체건으로부터 왜검을 익힌 훈련도감의 왜검수들을 시험한 것으로 봐도 무방해 보인다. 이후 김체건의 행적은 숙종 23년(1697)에 나타난다. 별무사(別武士)로 재직하던 그는 정월에 운부(雲浮)․장길산(張吉山)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 이영창(李榮昌) 및 그의 아우 이영만(李榮萬)과 종 중길(仲吉) 그리고 처 선옥(仙玉) 등을 뒤쫓아서 체포하기도 했다. 숙종 25년(1699) 6월에는 종4품 무관직인 두모포(豆毛浦) 만호(萬戶)를 지냈으며, 숙종 37년(1711) 10월에는 별무사에 재직했다.

김체건에게는 1710년 이전에 태어난 아들 김광택이 있는데, 「김광택전」에 따르면, 광택이 7․8세였을 때까지는 김체건이 살아 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김체건은 1717년, 1718년 이후에야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광택전」에는 “김광택은 서울 사람이고 아버지는 체건으로, 광택 또한 능히 그 부친의 기이한 술법을 전해 받았으니……”라는 서술이 있어, 김체건에게 김광택이라는 아들이 있었으며, 그도 아버지의 검술을 이어받아 뛰어난 검객이 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김광택에 관해서는 '승정원일기'를 통해, 몇 가지 사실을 좀 더 알 수 있다. 영조 33년(1757)에 영조가 김체건의 아들 광택을 불러 본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래는 전문이다.

(영조 33년 11월 21일) 영조가 주서(注書: 승정원의 정7품직)에게 명하여 김체건의 아들 광택을 (궁에) 들어오도록 불렀다. 임금이 어영대장으로 하여금 물어 말하기를, “너는 김체건의 아들로 아명이 노미(老味)인가?”라고 하였다. 광택이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너는 지금 어느 곳에 있으며, 하는 일은 무엇인가”라고 말하자, 광택은 “전 어영대장 홍봉한(洪鳳漢)의 집에 머물고 있으며, 하는 일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문관도, 무관도 아닌 것인가? 그렇다면 군교는 할 수 있는가?”라고 말하자, 광택이 “성상의 가르침이 이와 같은데 감히 받들어 행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내가 잠저시에 사패 시노비의 아들이다. 경자(庚子)년 직숙할 때에 이 사내가 들어와 나를 시종하였는데, 그 때 나이가 겨우 십여 세였다. 글에 능해 ‘위선최락(爲善最樂)’ 4 글자를 섰다. 그 후에 살았는지 죽었는지 막연하여 알지 못했는데, 들으니 홍봉한의 집에 있다고 하여 불러 본 것이다. 이 사람이 비록 미천하지만 숙직할 때 본 적이 있는 자로 지금 생각 생각하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 금위영에 교련관이 비어 있으니 이 사람을 차출하는 것이 가한가?”라고 하였다. (구)선복(具善復)이 말하기를 지금 비어 있으므로 하교에 따라서 차출할 수 있습니다. 상이 “오늘 행하라.”라고 말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김광택의 아이 때 이름이 노미였고, 영조가 임금이 되기 전인 연잉군(延礽君) 시절의 경자년 즉, 1720년에 영조를 시종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아이들의 이름을 오래 살라는 뜻으로 천하게 짓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 놈 저 놈’ 할 때의 놈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김광택은 당시에 10여 세 였다고 한 점을 볼 때, 1710년 이전에 태어났던 것으로 보이는데, 재미있는 점은 영조가 김광택이 자신의 사내 종으로 사패로 받은 시노비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일천즉천(一賤卽賤) 즉, 부모 중 한쪽이 천인이면, 자식은 천인이 되는 것이 신분제의 기본이었다.영조가 김체건의 아들이냐고 묻는 것으로 볼 때, 광택의 어머니가 계집 종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패로 받은 시노비의 아들임을 명확히 기록하고 있어, 원래는 공노비였다가 숙종 혹은 경종으로부터 연잉군 시절에 영조가 내려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김체건이 1710년 이전에 영조(당시 연잉군)의 호위를 담당한 적이 있었고 그 때 영조의 계집 종과의 사이에서 김광택이 출생한 것으로 짐작된다. 김광택이 관노였음은 '승정원일기' 영조 23년(1747)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영조 23년 정월 22일) 이이명(李頤命)이 약원(藥院)에 재직할 때, 김체건의 아들 국표(國標)를 불러 나라를 위하여 ‘위국망신(爲國忘身)’ 4자를 쓰게 하고 광택으로 그 이름을 고쳤다. 이 (아이)는 관비 소생으로 나(영조)의 사내 종이다. 와서 이 일을 알렸는데, 내가 국표에게 명하여 이이명이 고친 광택으로 그 이름을 삼게 했다.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이 약원(藥院) 즉, 내의원(內醫院)에 재직하고 있을 때에 김체건의 아들 국표를 불러 광택으로 그 이름을 고쳤다는 기록과 함께 광택이 관비 소생으로 영조의 사내 종임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원래 정식 이름은 국표였는데, 이이명이 개명해주었고, 영조가 이를 허락해 ‘광택’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보면, 김광택은 문장과 서예에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다.’라는 뜻의 ‘위선최락(爲善最樂)’과 ‘국가를 위하여 몸을 잊는다.’는 의미의 ‘위국망신(爲國忘身)’ 등의 글씨를 영조와 이이명이 쓰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광택의 글쓰기 솜씨는 아버지 김체건으로부터 배운 것으로 보인다. 「김광택전」을 보면, “(김광택이) 7․8 세에 (아버지) 체건이 하루는 문을 밀고 빈 관사에 가서 붓을 물에 담궈 관청 위의 현판을 베껴 썼다. 대자(大字)를 배운 까닭에 (글씨가)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예 솜씨는 아버지의 영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버지의 검술을 이어받다

 
광택은 아버지인 김체건이 죽기 전까지 검술을 배웠을 것으로 보인다. 김체건이 터득한 검술은 조선의 검술과왜검술이었다. 중국의 검술까지도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는 3국의 검술에 능통했으며, 검으로는 당대 최고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2국 혹은 3국의 검술을 수련했을 것이다.

「김광택전」을 보면,
‘검무[舞劍]는 신의 경지에 들어섰는데, 만지낙화세(滿地落花勢)를 하면, 몸이 감추어져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광택 또한 능히 그 아버지의 기이한 술법을 전해 받았으니 또한 다르다 하겠는가?’ 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광택도 아버지의 검술을 이어받아 고수의 반열에 올라섰음을 알려준다. 온 땅에 꽃잎이 떨어지는 듯한 ‘만지낙화세’를 하면 몸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해질 정도였다. 물론 이 만지낙화세의 주체가 김체건인지 광택인지는 조금 불분명하다. 물론 주체가 김체건이라 하더라도 아버지의 검술 솜씨를 김광택이 그대로 물려받았을 것이고, 그도 같은 경지에 올라섰을 것으로 보인다. 만지낙화세를 김광택도 했으리라 봐도 큰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만지낙화세’는 무예도보통지의 본국검․제독검․예도․쌍수도․쌍검과 왜검 항목에서는 보이지 않는 세명이어서 김체건 혹은 김광택에 의해 새롭게 창출된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점은 ?무예도보통지? 왜검조에 김체건이 검법을 행하는 사이에 새로운 뜻이 나와 교전지세(交戰之勢)를 이루므로 「교전보(交戰譜)」라 하였다는 서술을 통해서 확인된다. 김체건에 의해 창의적으로 새롭게 덧붙인 부분이 있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김광택의 무예솜씨가 뛰어났음은 그의 생사를 모르다가 만난 영조가 그를 영조 33년(1757)에 그가 하는 일이 없다고 하자, 금위영의 교련관으로 제수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교련관은 장교 중에서 선발하며 군대를 교련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사법(射法)․진법(陳法)․강서(講書)에서 수석한 자를 뽑았다. 그만큼 능력이 요구되는 자리였던 것이다. 그런 자리에 김광택을 앉힌다는 것은 김체건의 아들이라는 점 외에 그의 무예솜씨가 뛰어났기에 가능한 것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연암집의 김신선전
김광택에 대해 영조는 그의 생존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도 김체건도 사망하고 영조가 임금에 즉위하는 과정에서 김광택과의 연락이 끊긴 듯한데, 이 시기에 김광택은 신선술을 배운 것으로 보인다.

광택은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다. 김신선을 따라, 자(字)를 ‘무가자(無可者)’라고 하고는 각식(却食)과 경신(輕身)의 술법을 배웠다. 서울에서 풍악(금강산)까지 400리를 가는데 김신선은 짚신 한 켤레로 3번을 왕복해도 신이 닳지 않았다. 광택 또한 짚신 한 켤레로 두 번을 오고가도 닳지 않았다. 태식(胎息)에 능하며 겨울철에도 옷 하나로 지냈다. 나이 80에도 얼굴이 어린아이 같았으며, 죽는 날에 사람들은 시해(尸解)한 것으로 여겼다(「김광택전」).

김광택은 김신선을 따랐다고 하는데, 김신선은 박지원(朴趾源)의 연암집(燕巖集)에 보이는 김홍기(金弘基)로 본다.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는 ‘김홍기(金洪器)’로 되어 있기도 하다.

김홍기는 하루에 수백 리를 돌아다녀도 신발은 새 것 같았으며, 더워도 땀 흘리지 않고, 추워도 떨지 않았고 밥은 몇 숟갈만 먹고도 며칠을 지탱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기름(油)․장(醬)․물고기(漁)․고기(肉) 등은 먹지 않았으며, 야밤중에 일어나 앉아 뼈마디를 움직였다고 청장관전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두 기록을 같이 보면, 신선으로 불리는 김홍기는 하루에 수백 리를 갈 정도의 빠르게 걸으면서도 신발이 하나도 헤어지지 않는 경신법, 음식을 가려먹고 적게 먹는 음식을 섭취하는 각식, 호홉법인 태식, 뼈마디를 움직이는 도인법에 능통했던 것으로 보이며, 김광택도 그로부터 이러한 신선술을 배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광택전」의 저자 유본학은 “우리나라에 검은 옷을 입는 무리가 많지만, 도가(道家) 무리가 적다. 그 중에 수련으로 이름을 얻은 자는 오직 김 신선 한 명으로 세상에서 모두 그를 말하고 있는데, 오히려 광택이 있는 것은 알지 못했다”라고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가 신선술에 심취해 있던 시기는 영조가 즉위하는 1724년부터 영조가 그에게 교련관을 제수하는 1757년까지의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그는 검술 수련과 함께 신선술을 수련하며 백두산을 오가기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선술을 배운 김광택은 나이가 80이 되어서도 얼굴이 어린 아이 같았다고 하는데, 그가 80정도까지는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김광택은 1710년 이전에 태어나 1790년 이후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그가 죽자 시해한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시해는 육신을 버리고 혼백만이 빠져나가 신선이 되는 것을 말한다.

「김광택전」에 그의 관직은 종3품의 첨사(僉使)까지 이르렀다고 하는데, 승정원일기 영조 43년(1767)에 고금도첨사(古今島僉使)인 김광택을 찾을 수 있다. 교련관의 무리[流]는 모두 만호(萬戶)․첨사를 얻어 수령(守令)이 되고 있다는 우서(迂書)의 기록과 부합한다. 이외에 위도첨사(蝟島僉使)나 경복궁위장(景福宮衛將) 등의 관직에 있던 김광택 등이 찾아지기는 하지만, 동명이인들로 김체건의 아들 김광택으로 보기는 어렵다.

유본학은 김체건과 김광택 부자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하고 있다.
체건은 능히 검기를 얻어 충성으로 나라에 봉사하였다. 만약 그 재주를 사용하였다면, 곧바로 변방을 안위케 하여 공을 세웠을 것이다. 광택 또한 능히 그 부친의 기이한 술법을 전해 받았으니 또한 다르다 하겠는가! 또한 이는 검선의 무리[劍仙之類]가 아니겠는가! 오히려 판관 상득용이 기이한 선비를 좋아하여, 광택과 더불어 서로 알고 지내며 일찍이 그 일을 (나에게) 이야기하니, 그런 까닭에 그것을 기록하였다. 무릇 위항인(委巷人) 들은 기이한 재주가 있고 남다른 데가 있어도, 자취가 없어져 전하는 것이 없으니 또한 얼마나 한스러운지가! 어찌 체건과 광택뿐이겠는가? 거듭 애석하고 안타깝다!(「김광택전」)

김체건과 김광택을 검선의 무리라고 하면서 크게 쓰이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들을 포함한 위항인들이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지녔더라도 자취가 남아있지 않은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위항은 ‘좁고 지저분한 거리’로 사대부와 상민 사이의 중간계층, 넓은 의미의 중인이 사는 지역을 말한다. 능력있는 중인들이 세상에 쓰이지 못한 현실을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김광택전」에는 판관(判官) 상득용(尙得容)이 김광택과 교류를 한 사실과 그가 김광택에 관한 일을 유본학에게 말해서 「김광택전」이 서술되었다고 한다. 상득용은 태어난 해와 죽은 해가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는 영의정 상진(尙震)의 후손이며, 동기(東耆)의 아들로 수문장(守門將), 화량진첨사(花梁鎭僉使) 등을 역임하였다. 승정원일기의 고종 19년(1882)조를 보면, 고(故) 판관 상득용에게 좌승지를 추증하라고 하는 기록이 있음을 볼 때, 판관직도 역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광택의 검술 혹은 선도술의 제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무예도보통지 편찬에 관여한 백동수(白東修)가 김광택의 제자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김광택과 교류를 한 상득용이 무과출신임을 고려할 때 그가 혹 김광택으로부터 검술과 선도술을 배웠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또한 명확치 않으므로 조심스러울 필요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