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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신식부대 `별기군

구름위 2013. 3. 31. 08:50

여러분들은 최초로 창설된 신식군대를 아시나요? 그건 바로 조선 후기에 두었던 신식군대 '별기군'인데요.

별기군은 1881년에 오군영으로부터 신체가 강건한 80명의 지원자를 특선하여 이들을 무위영에 소속케 하고, 그 이름을 별기군이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최초의 신식부대는 과연 어떠했을까요?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별기군

 

 

별기군의 개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이래 제국주의 세력의 침투는 이전보다 심해졌습니다.

조선 정부는 이에 대비하기 위해 부국강병책을 모색하면서 신문명과 근대적인 기술을 받아들이는 개화정치를 지향하였는데요.

 

이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일본에는 신사유람단, 청나라에는 영선사를 파견하여 문물제도의 시찰과 근대적 기술학을 배워오도록 하였습니다. 또 신문화 수입의 태세를 갖추기 위해, 청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습니다.

 

 

별기군은 어떻게 만들어 졌나?

▲ 별기군의 모습

 

강병책의 일환인 군사기예에 대한 문제는 교사를 초빙하여 신식 군사연습을 실시하도록 계획하였습니다.

일본은 조선 정부의 이와 같은 계획을 사전에 탐지하고 각종 소총을 기증하였는데요. 동시에 1881년 4월 군무사경리당상 민겸호와 예조판서 홍우창에게 군사 훈련을 위한 교사 문제를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공사 하나부사를 통해 이른바 '천호리모도레이조종사련융서'라는 것을 보냈습니다. 호리모도는 일본 육군병학교 출신으로 소위로 임명되었으며, 병사 훈련에 능력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민경호는 이러한 일본의 요청을 4월 23일 고종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고종은 일본 측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병사의 선발과 조련을 책임질 장령을 선발하되, 문(文), 음(蔭), 무(武)를 가리지 말고 선발하라고 하였는데요.

 

이에 군무사에서는 별군관 윤웅렬을 중심으로 오군문으로부터 신체가 강건한 지원자 80여 명을 특별히 선발하여 무위영에 소석시켰습니다. 이를 별기대 또는 별기군이라 하였습니다. 또 일본인 교관에 의해 훈련된다 하여 왜벌기 라고도 하였죠.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식 군대입니다.

 

 

별기군과 임오군란


 

 

▲ 최초의 신식부대였던 '별기군'

 

당시 별기군의 총책임자인 교련소당상에는 외척 가운데 소장 거물인 민영익을 임명하였으며, 정령관에 한성근, 좌부령관에 윤웅렬, 우부령관에 김노완, 참령관에 우범선을 임명하였습니다.

 

군사훈련에 대한 직접적 책임은 호리도모가 담당하게 하였고, 통역은 어학생 다케다가 맡았으며, 때로는 일본공사관 순사들도 동원하여 보조로 삼았습니다.

 

별기군의 훈련은 그 해 5월 9일부터 서대문 밖 모화관을 가교장으로 하여 실시하다가, 뒤에는 하도감 자리를 옮겨 본격화하였는데요. 또한 별기군은 급료와 피복 등 모든 것들을 구식 군대보다 더 대우받았기 때문에 구식 군대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을 만큼 별기군에 대한 정부의 관심은 상당했습니다.

 

별기군의 훈련을 시작한지 두 달 만인 7월에 호리모도는 성과가 대단하고 자랑하며 병학교 설립을 주장하기도 했는데요.

8월에는 고종이 춘당대에 나가 별기군 교련을 감열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별기군은 1882년 6월 일어난 임오군란 때에 구식 군대의 습격을 받아 하도감의 교련장에서 희생자가 나왔고 이때 교관인 호리모도와 일본인들이 함께 살해되었습니다.

 

 

별기군을 창설하여 새로운 군사 개혁을 하려했던 정부의 목표는 임오군란으로 인해 결국 무산되어 버렸습니다. 아마도 시대적 분위기 미숙으로 인해 군사 개혁이 제대로 자리잡히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은데요. 만약 별기군이 단명되지 않고 계속해서 존재했었다면 아마도 지금의 역사와는 다른 역사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