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대기근 홀로도모르Голодомор(Holodomor)
사람들의 집단 죽음
그래프는 1929년에서 33년까지의 지역별 인구감소율 표.
가축이 그레먀치 로크(Gremyachu Log)에서 매일 밤 도살되었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기 무섭게 약한 양의 외마디 울음소리, 돼지가 죽을 때 내는 가느다란 소리, 그리고 송아지의 음매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콜호스에 참가한 농민들도, 개인농들도 모두 가축을 살해하였다. 종우(種牛)는 물론이고 황소, 양, 돼지, 심지어 암소까지도 도살되었다. 그레먀치의 뿔있는 가축은 이틀 밤 사이에 반으로 줄어들었다. 개들은 내장을 끌고 마을로 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땅광과 헛간은 고깃덩어리로 가득 찼다. 협동조합들은 18개월 동안이나 창고에 쳐박혀 있던 약 200뿌드의 소금을 이틀만에 팔아치웠다. '죽여라, 그것은 더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죽여라, 그들은 어쨌든 그것을 고깃덩어리로 생각할 것이다' '죽여라, 콜호스에서 당신은 고기를 얻지 못할 것이다'라는 별별 음험한 소문들이 떠돌았다. 그리고 그들은 가축을 죽였다. 그들은 더이상 먹을 수 없을 때까지 먹어댔다. 젊은이고 늙은이고 모두 배앓이를 하였다. 저녁식사 때가 되면 삶고 구운 고깃덩어리로 상다리가 휘어질 지경이었다. 저녁식사 때가 되면 모든 사람들이 입가에 기름칠을 하고, 마치 장례식 전날 밤처럼 딸국질을 해댔다. 모든 사람들이 마치 먹는 것에 취해버린 듯, 올빼미처럼 눈만 끔뻑거렸다. M. 숄로호프, 뒤엎어진 땅. (M. Sholokhov, The Soil Upturned, 영어본, Moscow 1934), 152면) |
이 대재앙으로 인해 1931-33년 사이 소련에서 식량 부족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는 최소 500만명에서 역시 같은 사유로 양이 전멸한 카자흐스탄의 수치를 더하면 700만의 희생자중 절반이 넘는 400만명이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 최소 이 지역 인구의 1/5이 기근으로 사망한 셈이다. 심지어 소련 공식 통계에서도 우크라이나 대기근 동안 사망자 숫자가 평년의 3배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500만을 넘어간다는 객관적인 기록은 없다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현 우크라이나의 정치 구도와도 관련이 있어서 반러파가 집권하던 시기에는 소련의 인종 청소 시도라고 법적으로 명시되었다가 친러파가 집권한 뒤에는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이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등 해마다 공식 입장이 달라지고 있다.
-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혁명 이후 독립되어 재합병될 때까지 볼셰비키와 크게 갈등했다. 일단 국가 자체가 제1차 세계대전 말기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의해 독일 제2제국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적백내전 당시에는 백군의 주요 군벌의 기지가 되었고, 합병 자체도 소련군의 침공으로 인해 서류상으로는 자발적으로 합병되었다.
애초에 동일한 러시아민족을 벨로루시의 백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의 소러시아인, 러시아의 대러시아인으로 나누게 만든 것도 러시아의 탄압등의 병크가 작렬하여 양국의 국민이 스스로를 그냥 러시아인으로 생각하지 않게 한 결과로, 이는 나중에 소련의 해체시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하게 만드는 주 원인으로 작용한다.
물론 단순한 민족 전쟁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 아나키스트 성향의 농민군 역시 존재했기에 단순한 민족갈등이나 과거 이 문서에서 있었던 일제강점기와의 단순 대입은 무리한 감은 있다.
- 집산화 정책에 대한 반항정도가 가장 심한 곳도 우크라이나였다. 후에 스탈린이 독소전쟁보다 농민과의 전쟁이 더 무서웠다란 표현을 하게 할 정도의 반항을 했으며, 그 방법도 집산화로 뺏길 자기의 재산을 미리 파손하는 것이었다. 당장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육류와 낙농, 채소같은 농산물의 생산이 급감하여 1960년대에 흐루쇼프가 아직도 계란생산량이 대기근 이전보다 못합니다.란 소리를 하게 할 정도였다.
- 대기근 때문에 원래 수탈량의 1/3만 걷었다고 하는데...수탈량 산정 자체가 과도하게 높았다. 뒤늦게 1/3으로 줄여도 현지 주민들에게 먹을 식량이 없어지는 셈. 게다가 소련의 경우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식량으로 소련군의 식량의 대부분을 감당했기 때문에 다른 곳과 달리 철저하게 수탈할 수 밖에 없었다. 권력자치고 누구든 군대를 굶기려고 하지 않는다지만,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침략군을 먹여살리는 셈이니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참혹한 실상
- 이 당시에 식인 행위가 널리 퍼졌다는 문서 자료 및 사진 자료까지 있다. 이 당시 소련에서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것은 야만인의 행위다.'라는 포스터까지 제작해서 곳곳에 붙였고, 우크라이나 곳곳에서 아이들이나 연고자 없는 이방인을 몰래 죽여서 사람고기시장이 열렸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사람고기 파는 시장을 찍은 사진까지 있었는데, 이거 찍은 외국인 사진작가들은 자신도 그런 꼴이 될까봐 조마조마했었다고 한다.
- 당시의 식인 사례를 보면 자기 자녀를 잡아먹을 수가 없어서(위의 포스터 내용과 상충하는 것 같지만 실은 아니다. 자기 자녀를 잡아먹으면 체포되는 게 무서운 거다.) 자기 집 아이를 살았든 죽었든[5] 옆집에 넘겨 먹게 하고, 그 옆집 아이를 받아다 먹기도 했다고 한다. 이 경우, 특히 산 아이가 아니라 실제로 죽은 아이를 주고받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현지 치안 당국조차 그냥 넘어가 주었을 정도였다. 이처럼 산 아이를 죽은 아이라고 속여 서로 바꾸어 먹은 가족들이 총살당한 사례가 당시 적발되어 처형된 식인 범죄자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닌 말로 굶주린 사람들이 멀쩡한 사람을 잡아먹기란 쉽지 않으니, 일단 만만한 것들을 잡아먹어서 기운을 차려야 하는 것이다.
- 1978~1990년까지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55명 아이들과 여자를 죽이고 강간, 심지어 시체를 먹기까지 한 연쇄살인마 안드레이 치카틸로는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 형이 사람들에게 잡아먹힌 걸 본 뒤로 복수심을 가져 무작위로 사람을 죽였다고 진술한 바 있다. 다만 이것의 진실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당시 워낙에 흔했던 일이라서.(결국 치카틸로는 1994년 처형당했다.)
- 곡식을 주웠다는 이유로 총살되었다는 이야기[6]도 있고,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어린이들이 기차에 매달려 탈출을 시도하지만 대부분 체포되어 돌려보내지거나 고아원행 - > 영양실조로 사망 테크를 밟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 사람들은 어떻게든 탈출을 시도했다. 루마니아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드니스테르(Dniester) 강을 건너 루마니아로 월경을 시도했는데, 많은 사람이 소련 국경 경비대에게 발각되어 도하 중 사망했다고 한다. 강을 건넌 사람들은 루마니아에 수용되었다.
- 랜드 오브 데드가 우크라이나에서 상영금지 되었는데, 좀비들이 사람을 먹는게 이 고통스러운 시절을 기억하게 만든다는 이유에서였다.[7]
[2] 이는 1960년대 후반까지 계란을 하나씩 짚을 이용해서 정성들여 묶은 것이 큰 선물이 되었던 대한민국의 과거만 봐도 충분하다.
[[4] 유족들은 이를 소련의 공작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진상은 지금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5] 산 아이를 죽여서 먹으면 살인죄가 되지만, 기아로 죽은 아이의 시체를 먹는 것은 식인은 될지언정 살인은 아니라는 논리였다.
[6] 이삭줍기(Gleaning)는 본래 농부들이 수확을 마친 밭이나, 상업적으로 이득이 없는 밭에서 떨어진 곡식의 낱알을 줍는 행위였는데, 문제는 소련에서는 이게 불법이었다. 작은이삭 법(Law of Spikelets)에 따라 최소 10년의 복역이나 강제 노동, 심하면 사형까지 내릴 수 있었다.
[7] 물론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PTSD는 자신이 겪은 것과 동일한 상황을 목격했을 때도 나타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우크라이나 대기근 : 우크라이나에서 스탈린의 농장 집단화 정책 기간 중인 1931~1932년 사이에 일어난 대 기근사태로서, 추정집계되는 사망자 만해도 최소 5백에서 ~최대 1천만 사이로 알려진 역사상 최악의 기근 사태이다.
원인 및 과정
1) 당시 소비에트 연방 국가 수반이였던 스탈린은 산업화의 자본 공급을 계획
2) 농산물 수출로 자본 공급을 하려고함
3) 농장 집단화 정책을 계획
4) 농장 집단화 정책이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커다란 반발을 불러일으킴
5) 반발로 필요한 자본을 충당하지 못함
6) 스탈린이 책임을 부농인 쿨라크들에게 전가
7) 이들이 생산한 곡물을 내놓지 않고 있다며 부농들의 농장 습격, 곡물 약탈
8) 농민들이 농장 집단화 정책에 대한 반발로 가축을 도살
9) 소들의 부족으로 농사지을 면적 급격히 줌.
10) 우크라이나 대기근 발생.
결과
-우크라이나 지방의 평균수명이 남자 7.3세 여자 10.8세라는 낮은 수치 기록
-대기근 사태로 간접적인 인구손실 (ex: 대기근 사태가 없었더라면 늘어날수도 있었던 인구가 대폭 감소되어 두고두고 우크라이나 지역의 심각한 인구정체, 즉 이후 몇 년간 출생 율이 다른년도에 비해 격감하는데 이는 결국은 오늘날까지 우크라이나의 심각한 인구정체로 이어지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됨)
-우크라이나 민족문화 붕괴 ( 당시 피해를 입은 농촌사람들은 대부분 순수한 우크라이나 인들로서 우크라이나 민족문화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둥이었다.)
우크라이나기근과 아일랜드 기근의 차이점
- 자연발생적인 원인과 정치적인 원인 차이
(아일랜드 기근은 감자 마름병이라는 자연적인 원인으로 발생했다면 우크라이나 기근은 고의적인 정치적·행정상의 결정으로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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