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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대기근 홀로도모르Голодомор(Holodomor)

구름위 2013. 3. 27.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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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대기근 홀로도모르Голодомор(Holodomor)

 

 사람들의 집단 죽음

 

 

 

 


그래프는 1929년에서 33년까지의 지역별 인구감소율 표.

1932년~1933년에 소련 치하에 있던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대기근이다. 당시 스탈린집산화 정책에 맞물리는 까닭에 정치적으로 계획된 대기근이라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비슷한 병크로서 마오쩌둥대약진운동을 꼽을 수 있겠으며 피해규모로는 저쪽이 월등하다. 하지만 정책상 실수가 명백했던 대약진운동과 달리 이쪽은 계획된 탄압으로 볼 소지가 너무나 많고, 실제로 학계. 특히 우크라이나에서는 학살 쪽에 확실히 무게를 두는 분위기이다.

우크라이나 어로는 홀로도모르(Голодомор)라고 부르며, 의미는 '기아로 인한 살인'(Killing by hunger)이다.

소련의 스탈린은 NEP 정책으로 느슨해진 식량 생산으로 도시 노동자들의 불만이 증가하자, 사회주의적 집산화 정책을 통해 통제를 극대화하고 계획적이고 효율적으로 식량을 생산하려 했다. 하지만 자기들이 일군 농사가 자기들 손이 아니라 집단농장으로 넘어가게 되니 자영농들이 당연한 수순으로 반발했고, 따라서 집산화 자체도 느렸을 뿐만 아니라 곡물의 생산량도 당국의 기대보다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었다.

특히 우크라이나는 토지가 비옥하고 넓어 전통적으로 자영농의 전통이 강했는데, 집산화 정책과 함께 곡물 생산량의 대부분을 제공하던 쿨락들을 때려잡기 시작하자 생산력이 바닥까지 내려갔다. 이렇게 집산화 정책이 농민들의 반발로 인해 재앙적인 효과를 초래하게 되자 스탈린은 어쩔 수 없이 곡물 수탈 계획을 대대적으로 축소하고자 했는데, 집산화로 워낙에 농업 생산력이 망가져버린 까닭에 우크라니아의 경우 수탈량을 원 계획에서 3분의 1까지 줄였는데도 최악의 국면을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목축업 문제 역시 심각했다. 가축을 기르는 체제가 갑자스레 집단화 되자, 농업지식이 전무했던 공산당원들은 온갖 문제에 부딪쳤다. 거기에 사료도 부족했고(사람 먹을게 없는데 가축 먹을건 있겠나;;) 날씨마저 돕지 않았다. 그리고 또 원시적인 농업에서 밭을 갈던 말 등이 기아로 쓰러지면서 다시 파종 등 농업에 차질을 빚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우크라이나와 함께 기근이 참혹했던 돈 강 유역에서 자란 러시아 작가 숄로호프는 그 군상을 이렇게 묘사한다. 말 그대로 # "남 줄 바엔 잡아먹자"였다. 먹고 죽자!

가축이 그레먀치 로크(Gremyachu Log)에서 매일 밤 도살되었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기 무섭게 약한 양의 외마디 울음소리, 돼지가 죽을 때 내는 가느다란 소리, 그리고 송아지의 음매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콜호스에 참가한 농민들도, 개인농들도 모두 가축을 살해하였다. 종우(種牛)는 물론이고 황소, 양, 돼지, 심지어 암소까지도 도살되었다. 그레먀치의 뿔있는 가축은 이틀 밤 사이에 반으로 줄어들었다. 개들은 내장을 끌고 마을로 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땅광과 헛간은 고깃덩어리로 가득 찼다. 협동조합들은 18개월 동안이나 창고에 쳐박혀 있던 약 200뿌드의 소금을 이틀만에 팔아치웠다. '죽여라, 그것은 더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죽여라, 그들은 어쨌든 그것을 고깃덩어리로 생각할 것이다' '죽여라, 콜호스에서 당신은 고기를 얻지 못할 것이다'라는 별별 음험한 소문들이 떠돌았다. 그리고 그들은 가축을 죽였다. 그들은 더이상 먹을 수 없을 때까지 먹어댔다. 젊은이고 늙은이고 모두 배앓이를 하였다. 저녁식사 때가 되면 삶고 구운 고깃덩어리로 상다리가 휘어질 지경이었다. 저녁식사 때가 되면 모든 사람들이 입가에 기름칠을 하고, 마치 장례식 전날 밤처럼 딸국질을 해댔다. 모든 사람들이 마치 먹는 것에 취해버린 듯, 올빼미처럼 눈만 끔뻑거렸다.

M. 숄로호프, 뒤엎어진 땅. (M. Sholokhov, The Soil Upturned, 영어본, Moscow 1934), 152면)


이 대재앙으로 인해 1931-33년 사이 소련에서 식량 부족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는 최소 500만명에서 역시 같은 사유로 이 전멸한 카자흐스탄의 수치를 더하면 700만의 희생자중 절반이 넘는 400만명이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 최소 이 지역 인구의 1/5이 기근으로 사망한 셈이다. 심지어 소련 공식 통계에서도 우크라이나 대기근 동안 사망자 숫자가 평년의 3배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500만을 넘어간다는 객관적인 기록은 없다고.

한편 우크라이나 법원에서는 이 대기근이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학살 범죄라고 규정되고 있는 처지.# 다만 이것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인종 청소였는지 아니면 스탈린의 정책 실패로 인한 혹은 농민들을 손봐주기 위해 인위적으로 유도된 대기근이었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현 우크라이나의 정치 구도와도 관련이 있어서 반러파가 집권하던 시기에는 소련의 인종 청소 시도라고 법적으로 명시되었다가 친러파가 집권한 뒤에는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이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등 해마다 공식 입장이 달라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스탈린에 의도에 가까웠다라는 측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혁명 이후 독립되어 재합병될 때까지 볼셰비키와 크게 갈등했다. 일단 국가 자체가 제1차 세계대전 말기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의해 독일 제2제국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적백내전 당시에는 백군의 주요 군벌의 기지가 되었고, 합병 자체도 소련군의 침공으로 인해 서류상으로는 자발적으로 합병되었다.
    애초에 동일한 러시아민족을 벨로루시의 백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의 소러시아인, 러시아의 대러시아인으로 나누게 만든 것도 러시아의 탄압등의 병크가 작렬하여 양국의 국민이 스스로를 그냥 러시아인으로 생각하지 않게 한 결과로, 이는 나중에 소련의 해체시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하게 만드는 주 원인으로 작용한다.

    물론 단순한 민족 전쟁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 아나키스트 성향의 농민군 역시 존재했기에 단순한 민족갈등이나 과거 이 문서에서 있었던 일제강점기와의 단순 대입은 무리한 감은 있다.
  • 집산화 정책에 대한 반항정도가 가장 심한 곳도 우크라이나였다. 후에 스탈린이 독소전쟁보다 농민과의 전쟁이 더 무서웠다란 표현을 하게 할 정도의 반항을 했으며, 그 방법도 집산화로 뺏길 자기의 재산을 미리 파손하는 것이었다. 당장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육류와 낙농, 채소같은 농산물의 생산이 급감하여 1960년대에 흐루쇼프아직도 계란생산량이 대기근 이전보다 못합니다.란 소리를 하게 할 정도였다.
  • 대기근 때문에 원래 수탈량의 1/3만 걷었다고 하는데...수탈량 산정 자체가 과도하게 높았다. 뒤늦게 1/3으로 줄여도 현지 주민들에게 먹을 식량이 없어지는 셈. 게다가 소련의 경우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식량으로 소련군의 식량의 대부분을 감당했기 때문에 다른 곳과 달리 철저하게 수탈할 수 밖에 없었다. 권력자치고 누구든 군대를 굶기려고 하지 않는다지만,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침략군을 먹여살리는 셈이니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충 정리하면, 한쪽은 타 지역에도 차별없이 적용되었으며, 일부는 경감했다는 것이고, 반대편은 우리만 찝어서 더 가혹하게 했다라는 것이 양측 주장의 차이다.

여하간 대기근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자체에 대한 차별은 심각했기에, 독소전쟁이 터진 뒤 독일군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하자 다른 지역들과 달리 주민들이 '우리의 해방자'라고 외치며 꽃다발을 들고 나와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진풍경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뒤에는...OTL. 이 때문인지 독일군이 소련 주민들을 사람으로 대하고 인종주의적인 편견을 조금만 자제했어도 우크라이나 등 수많은 구소련 위성국가 국민들이 줄줄이 독일편이 되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독일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많은 소련인들이 스탈린이 더 싫다며 독일편에 가담했으니 그렇지 않았다면 더 많았을 것이다.).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의 인종주의 편견이 자신들 스스로를 망친 셈이다.

결국 흐루쇼프가 집권하기 전인 1950년대 초반까지 우크라이나에는 소련에 저항하는 저항군이 존재했을 정도로 막장상황이 지속되었던 상황이었다. 그나마 흐루쇼프가 집권한후 거의 노골적으로 고향을 우대한 덕분에 반감을 많이 감소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크림반도도 떼어 주고...[1] 브레즈네프도 우크라이나 출신이어서 사태는 그제서야 진정되기 시작했다.

원래 러시아라는 지역 자체가 육류, 낙농, 채소같은 다양한 식생활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고위층에 한정되고, 중산층 이하의 일반인은 밀가루등으로 만든 카샤라는 죽 중에서도 재료가 저렴한 것만 주식으로 삼을 수 밖에 없는 지역이었지만, 이 기근으로 더 심각해졌다. 독소전쟁 당시의 소련군 전투식량을 보면 주 품목이 돌덩이 이나 날감자, 청어머리 같은 것으로 맛도 없고 단단해서 먹기도 고역인 물건이 대다수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는 계란 같은 것은 귀중품이었다.[2]

 참혹한 실상

영국 기자 개리스 존스는 1933년에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다가 대기근의 현장을 접하고 이를 국제사회에 폭로했는데[3], 당시 친 소련 성향의 기자들이 많아 이들의 방해로 단 한 줄도 실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끈질긴 노력 끝에 뉴욕 이브닝 포스트에 기사를 올리긴 했지만 곧바로 반박기사가 나왔고(역시 친소 성향의 기자 월터 듀런티였다.) 이후 소련 입국금지 처분을 받은 건 물론 소련의 공작으로 의심되는 감시까지 받다가 1935년 내몽골에서 살해된다.[4]

소련을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인 '차일드 44(Child 44)'의 도입부에 당시 상황을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소설의 본문에 따르면 '개미나 곤충알이 있을까 싶어 흙덩이를 깨무는' 수준이었고 '나무껍질을 씹다가 잇몸이 튀어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역시 소설의 본문에 따르면 한 문장으로 요약 가능하다. 어른들은 아이들처럼 줄어들어버렸고,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늙어버렸다.

1937년 이 지방을 다녀온 미국사진작가가 말하길, 아프리카동남아시아 식민지에서 아이들이 갈비뼈가 드러난 모습으로 을 뜯어먹는 걸 여럿 보았지만 백인 아이들이 똑같은 꼴로 풀을 뜯어먹는 걸 우크라이나에서 처음 봤다고 하였다.

 


우크라이나 키예프에는 기근으로 죽은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비와 추모비 지하의 기념관이 있다. 또한 추모비 앞에는 이삭을 소중히 잡고 있는 맨발의 앙상한 소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이곳에 매해 우크라이나 장관들이 와서 곡물을 뿌리면서 굶주림으로 죽어간 넋들을 기린다고 한다. 2010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러시아 대통령 메드베데프가 이 동상 앞에서 희생자를 추모하는 행사를 하였다.

  • 이 당시에 식인 행위가 널리 퍼졌다는 문서 자료 및 사진 자료까지 있다. 이 당시 소련에서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것은 야만인의 행위다.'라는 포스터까지 제작해서 곳곳에 붙였고, 우크라이나 곳곳에서 아이들이나 연고자 없는 이방인을 몰래 죽여서 사람고기시장이 열렸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사람고기 파는 시장을 찍은 사진까지 있었는데, 이거 찍은 외국인 사진작가들은 자신도 그런 꼴이 될까봐 조마조마했었다고 한다.
  • 당시의 식인 사례를 보면 자기 자녀를 잡아먹을 수가 없어서(위의 포스터 내용과 상충하는 것 같지만 실은 아니다. 자기 자녀를 잡아먹으면 체포되는 게 무서운 거다.) 자기 집 아이를 살았든 죽었든[5] 옆집에 넘겨 먹게 하고, 그 옆집 아이를 받아다 먹기도 했다고 한다. 이 경우, 특히 산 아이가 아니라 실제로 죽은 아이를 주고받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현지 치안 당국조차 그냥 넘어가 주었을 정도였다. 이처럼 산 아이를 죽은 아이라고 속여 서로 바꾸어 먹은 가족들이 총살당한 사례가 당시 적발되어 처형된 식인 범죄자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닌 말로 굶주린 사람들이 멀쩡한 사람을 잡아먹기란 쉽지 않으니, 일단 만만한 것들을 잡아먹어서 기운을 차려야 하는 것이다.
  • 1978~1990년까지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55명 아이들과 여자를 죽이고 강간, 심지어 시체를 먹기까지 한 연쇄살인마 안드레이 치카틸로는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 형이 사람들에게 잡아먹힌 걸 본 뒤로 복수심을 가져 무작위로 사람을 죽였다고 진술한 바 있다. 다만 이것의 진실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당시 워낙에 흔했던 일이라서.(결국 치카틸로는 1994년 처형당했다.)
  • 곡식을 주웠다는 이유로 총살되었다는 이야기[6]도 있고,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어린이들이 기차에 매달려 탈출을 시도하지만 대부분 체포되어 돌려보내지거나 고아원행 - > 영양실조로 사망 테크를 밟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 사람들은 어떻게든 탈출을 시도했다. 루마니아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드니스테르(Dniester) 강을 건너 루마니아로 월경을 시도했는데, 많은 사람이 소련 국경 경비대에게 발각되어 도하 중 사망했다고 한다. 강을 건넌 사람들은 루마니아에 수용되었다.
  • 랜드 오브 데드가 우크라이나에서 상영금지 되었는데, 좀비들이 사람을 먹는게 이 고통스러운 시절을 기억하게 만든다는 이유에서였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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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탈린조지아(그루지아) 출신이지만, 누구보다 고향에 탄압을 가한 인간이었던걸 생각하면 참...
[2] 이는 1960년대 후반까지 계란을 하나씩 짚을 이용해서 정성들여 묶은 것이 큰 선물이 되었던 대한민국의 과거만 봐도 충분하다.
[[4] 유족들은 이를 소련의 공작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진상은 지금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5] 산 아이를 죽여서 먹으면 살인죄가 되지만, 기아로 죽은 아이의 시체를 먹는 것은 식인은 될지언정 살인은 아니라는 논리였다.
[6] 이삭줍기(Gleaning)는 본래 농부들이 수확을 마친 밭이나, 상업적으로 이득이 없는 밭에서 떨어진 곡식의 낱알을 줍는 행위였는데, 문제는 소련에서는 이게 불법이었다. 작은이삭 법(Law of Spikelets)에 따라 최소 10년의 복역이나 강제 노동, 심하면 사형까지 내릴 수 있었다.
[7] 물론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PTSD는 자신이 겪은 것과 동일한 상황을 목격했을 때도 나타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우크라이나 대기근 : 우크라이나에서 스탈린의 농장 집단화 정책 기간 중인 1931~1932년 사이에 일어난 대 기근사태로서, 추정집계되는 사망자 만해도 최소 5백에서 ~최대 1천만 사이로 알려진 역사상 최악의 기근 사태이다.

 

 

 

 

원인 및 과정

1) 당시 소비에트 연방 국가 수반이였던 스탈린은 산업화의 자본 공급을 계획

2) 농산물 수출로 자본 공급을 하려고함

3) 농장 집단화 정책을 계획

4) 농장 집단화 정책이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커다란 반발을 불러일으킴

5) 반발로 필요한 자본을 충당하지 못함

6) 스탈린이 책임을 부농인 쿨라크들에게 전가

7) 이들이 생산한 곡물을 내놓지 않고 있다며 부농들의 농장 습격, 곡물 약탈

8) 농민들이 농장 집단화 정책에 대한 반발로 가축을 도살

9) 소들의 부족으로 농사지을 면적 급격히 줌.

10) 우크라이나 대기근 발생.

 

 

 

 

결과

-우크라이나 지방의 평균수명이 남자 7.3세 여자 10.8세라는 낮은 수치 기록

-대기근 사태로 간접적인 인구손실 (ex: 대기근 사태가 없었더라면 늘어날수도 있었던 인구가 대폭 감소되어 두고두고 우크라이나 지역의 심각한 인구정체, 즉 이후 몇 년간 출생 율이 다른년도에 비해 격감하는데 이는 결국은 오늘날까지 우크라이나의 심각한 인구정체로 이어지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됨)

-우크라이나 민족문화 붕괴 ( 당시 피해를 입은 농촌사람들은 대부분 순수한 우크라이나 인들로서 우크라이나 민족문화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둥이었다.)

 

 

 

 

 

우크라이나기근과 아일랜드 기근의 차이점

- 자연발생적인 원인과 정치적인 원인 차이

(아일랜드 기근은 감자 마름병이라는 자연적인 원인으로 발생했다면 우크라이나 기근은 고의적인 정치적·행정상의 결정으로 발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