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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 팔려온 아프리카 흑인 노예

구름위 2013. 3. 25. 15:53

 

 

 

많은 아프리카 주민들이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으로 끌려간 사실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만 아시아 각지에도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들어왔다는 사실은 거의 주목받지 못하는 것 같다. 중동, 페르시아, 인도뿐 아니라 중국에까지 일찍부터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이 사용되고 있었다.

중국에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어느 만큼 많이 들어왔는지 통계 수치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4세기부터 18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유입된 것은 분명하다. 이들은 아프리카 동부 지역과 중동 지역으로부터 해상 무역로를 통해 직접 중국으로 들어오기도 했고, 동남아시아 지역을 한 번 거쳐서 들어오기도 했다. 예컨대 1382년에 자바는 아프리카 출신의 “남녀 흑인 노예 101명”을 명나라 황실에 조공으로 보낸 적이 있다. 광저우(廣州)의 부자들이 “먹물처럼 까만 피부에 입술은 빨갛고 곱슬머리”를 한 흑인 노예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데 이들은 엄청나게 무거운 짐도 쉽게 다룬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해상 교역이 이루어지는 중국 일부 지역에서는 흑인 노예들이 제법 많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랍상인을 통해, 나중에는 유럽인을 통해 유입된 노예들은 권위 과시용으로도 쓰였고, 성적 착취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아시아로 흘러온 포르투갈 사람들의 노예 소유욕은 굉장했다. 중국에서는 조공으로 바쳤다는 기록도 있다.

중국에 비해 인도에는 훨씬 많은 흑인 노예들이 들어왔다. 과거에 인도의 이슬람계 아프리카인들을 합시(habshi)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대개 아랍 상인에 의해 노예로 끌려온 사람들로 추정된다. ‘합시’라는 말이 원래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에서 유래했다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 중 다수가 에티오피아 출신이었지만, 나중에는 합시라는 말은 더 넓은 의미로 모든 흑인들을 지칭하게 되었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에는 합시들이 “인도 전역에 존재”하며, 이들 대다수가 군인이 되지만 그들 가운데 일부는 지방 태수나 유력한 환관이 되어서 큰 권력을 잡기도 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다른 역사 기록들도 비슷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아프리카인들은 대개 군인 노예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고아와 실론에서는 이들이 군사력의 대종을 차지할 정도였다. 그 외에도 아프리카인들은 여러 다양한 하급 직종의 일들을 맡아서 하였다. 그런데 이 중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군사나 행정 분야에서 크게 성공하여 신분 상승을 한 경우가 없지 않았다.

아시아 방면 노예무역을 주도한 사람들은 아랍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일찍이 서기 300년경에 이미 중국 광저우에 교역 거점을 마련할 정도로 아시아 해상 세계 전체에 걸쳐 활발하게 국제무역을 수행했는데, 이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아프리카인 노예들을 아시아 각 지역으로 판매했던 것이다. 이들은 아프리카 내륙 지역의 반투족과 거래를 하면서 인도의 구슬과 직물을 주고 대신 황금, 상아와 함께 노예를 구매했다.

15세기 이후 유럽인들이 인도양에 진입해 들어온 이후에도 이 지역의 노예무역이 중단되지는 않았다. 유럽인들은 기존 상인들을 축출하거나 노예화해 버리고 그들 자신이 반투족과 거래하였다. 곧 유럽인들은 이전의 노예무역을 그대로 물려받아서 자신들이 수행했던 것이다. 유럽인들이 남긴 기록들을 보면 아시아 각지에서 아프리카인 노예들의 실상이 어땠는지 자세히 알 수 있다.

피에트로 델라 바예(Pietro della Valle)라는 사람이 인도의 고아(Goa)에 대해 쓴 기록이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이 도시에서는 상품거래가 이루어지는 중앙 광장에서 노예가 매매되었는데 노예 판매자는 노예들의 능력, 기술, 힘, 건강 등을 과시하고, 구매자들은 여러 질문을 던지면서 노예들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 노예들 역시 주인이 바뀌는 이 시점에서 최선을 다해서 구매자의 욕구를 부추기려고 하였다. “여자 노예 가운데 가장 마음에 끌리는 노예들은 모잠비크의 카피르들(Cafres de Mocambique)을 비롯한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이었다. 아주 짙은 피부색과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지닌 이들을 기니의 흑인여자들(negressses of guinea)이라고 불렀다.” 이런 기록을 보면 많은 아프리카 출신 여성들이 성적 욕구의 대상으로 전락했던 것으로 보인다.

포르투갈의 하급 귀족(fidalgo)들은 수많은 노예들을 소유하고서 온갖 잡다한 일들을 시켰다. 그들은 양산 받쳐주는 노예들을 동반하고 다녔고, 여성들은 가마를 탈 때 비단옷을 입은 흑인 노예 4명을 가마꾼으로 썼다. 마드라스의 포르투갈인들은 “밤이나 낮이나 십여 명의 여자 노예들이 온몸을 마사지하고 주무르지 않으면 쉴 수 없었다.” 흑인 노예들을 많이 부린다는 것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는 일이 된 것이다.

아시아의 포르투갈인들 사회에 수없이 많은 흑인 노예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여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아에 있는 산타 모니카 수녀원에서는 이곳에 배치된 120명의 노예들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불평했다. 장인(匠人)들도 15~20명의 여자 노예들을 소유하고, 재판관과 법률가들은 85명의 여자 노예들을 거느리고 살며, 어떤 부유한 귀부인은 심지어 300명 이상의 노예들을 거느리기도 했다! 이처럼 많은 노예들을 고용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아프리카에서 끊임없이 흑인 노예들이 유입되어서 노예 가격이 매우 저렴했기 때문이다.

이상의 사실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각지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사용되었으며, 포르투갈인들이 들어온 다음에도 이 현상은 계속되었다. 둘째, 아프리카인들은 때로는 권위의 과시 용도로 쓰이기도 하고 때로는 성적 착취(‘amorous duties’)를 당하기도 하였으나 가장 일반적인 지위는 ‘군인’과 ‘하인’이었다.

이런 특징들을 가진 아시아의 노예무역과 비교해 보면 거꾸로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에 노예를 공급하는 대서양 노예무역의 특징이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플랜테이션은 쉽게 말해서 대규모로 노예들을 고용하여 집단 강제 노역을 시키는 체제이다. 아시아 지역에 들어온 흑인 노예들도 ‘강제 집단 노동자’로 사용된 사례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19세기에 이란에서 면화나 아편 제조용 양귀비를 재배하는 노예제 농장들이 있었다―이는 비교적 후대의 일이며 예외적인 사례에 속한다. 이에 비해 ‘유럽’인들이 주도하여 ‘아프리카’ 인들을 대규모로 노예로 끌고 가서 ‘아메리카’에서 플랜테이션을 운영한 것은 문자 그대로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발전한 현상이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발전은 역설적으로 노예제의 강화·확대로 귀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