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 및 유엔군이 점령한 북한지역은 북한 정권의 압제를 벗어났기 때문에 당연히 새로운 통치권력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이라는 지역을 보는 시각차이 때문에 한국과 유엔군을 주도하는 미국정부 간에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우리정부는 북한지역을 당연히 우리 영토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헌법에 따라 북한 지역의 통치권은 대한민국 정부가 즉시 행사해야 한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반면 미국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북한지역이 한국의 관할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정부가 즉시 통치권을 행사하기는 곤란하다는 생각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북한지역을 점령하면서 통치권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즉각적인 통일을 원하는 우리의 생각과 달리 미국은 유엔의 결의에 따라야 한다는 정책을 처음부터 견지하였습니다. 미국이 한반도의 통일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현재의 한국 정부가 북한을 즉시 흡수하는 것은 곤란하고 점진적인 절차에 따라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미국은 일단 군정을 통해 북한 지역을 통치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미국이 수립한 군정계획은 다음과 같이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을 만큼 상당히 구체적이었습니다.
제1단계, 북한지역의 질서회복이 급선무이니 사회적으로 안정될 때까지 미국정부와 유엔군 사령부 통제 하에 군정을 실시한다.
제2단계, 한반도 전역에서 유엔 통제 하에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자유로운 선거를 실시한다.
제3단계, 통일정부 수립 후 외국군이 철군하면서 새로운 정부에 대한 유엔의 통제를 점차 줄여 나간다.
더불어 북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0월 12일에 개최된 유엔총회 임시위원회는 “유엔은 한반도 전역을 합법적으로 통치 할 수 있는 합법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 없다”라고 미국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내용을 가결시켜 한국정부의 북한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부인하였고, 또한 유엔군사령부와 유엔 한국 통일부흥위원단의 주도로 북한지역을 상대로 군정을 시행하도록 미국에 요청하면서 미국에게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북한지역을 방문하여 국군을 격려하는 이승만대통령]
하지만 유엔의 결의가 있던 당일 조병옥(趙炳玉) 내무부장관은 북한지역에 대한 시정방침을 발표하고 즉시 민정관을 파견하여 점령지역을 통치하려 하였을 만큼 유엔의 결의는 처음부터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정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10월 16일 한국정부는 “유엔 임시위원회의 결정은 한반도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보호해 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고 주장하며 유엔의 결의를 따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특히 구체적인 군정기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던 데다가 지난 1945년부터 1948년 사이에 있었던 미군의 군정에 대한 기억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정부의 불신은 대단하였습니다. 곧이어 10월 17일, 한국의 계엄사령관은 이북지역에 적용할 계엄령을 포고하였고, 10월 22일에는 한국정부가 평양시장을 임명하는 등 계속하여 강경한 태도를 표명했습니다.
그러자 미국의 대응도 강력하여 10월 23일, 유엔군사령관은 유엔과 미국정부의 지시에 따라 한국정부에게 북한지역에 파견한 한국정부의 관리를 즉시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10월 24일에는 유엔군사령부에서 우리정부와 관련이 없는 12명의 민간인을 선발하여 평양시 관리위원으로 취임시켰습니다. 이 때문에 점령지역에 우리정부가 파견한 관리와 유엔군사령부가 임명한 행정관이 서로 통치권을 주장하며 대립하게 되었고 북한 주민들은 누구의 말에 따라야하는지 몰라 우왕좌왕하였습니다. 당연히 점령지에 대한 통치권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었고 혼란만 초래하였습니다.
[통일대통령의 꿈은 일장춘몽으로 바뀌었습니다.]
전쟁이 한창 진행 중임에도 양측이 대립이 이렇게 격화되자 유엔군사령관은 지엽적인 문제로 인해 한국정부와 갈등을 야기 시켜서는 곤란하다고 판단하였고, 우리정부도 조병옥 내무부 장관을 통해 “유엔 결의내용의 세부 시행문제는 협상이 가능하다”고 양보의사를 비침으로써 서서히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양측은 북한 지역에 파견된 한국정부 관리들을 소환하되 유엔군사령부가 임명하는 군정요원은 한국정부와 사전에 협의하는 것으로 일단 의견을 모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런 대립과 타협의 과정은 한순간의 꿈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10월 25일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고 전세가 급격히 변화하게 되자 북한지역의 통치 문제는 그것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떡줄 사람은 생각도 없었는데 김칫국부터 마신 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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