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28년형 톰슨 기관단총. 알카트라즈 박물관 소장품
제1차 세계대전을 상징하는 참호전은 필연적으로 백병전을 불러왔다. 대개 백병전이라면 총알이 떨어져서 벌이는 최후의 격전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당시에는 성격이 조금 달랐다. 가장 큰 이유는 보병들이 휴대했던 소총이 볼트액션식이어서였다. 이 방식은 다음 사격을 위해 노리쇠를 일일이 당겨야했는데 참호 내에서 벌어지는 근접전에서는 이런 시간조차도 없었다. 따라서 총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총을 창이나 몽둥이로 사용하는 일이 수시로 반복되고는 하였다.
결국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근접전에서 신속히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새로운 무기가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고 그 결과 기관단총이 등장하였다. 기관단총을 가진 부대와 그렇지 않은 부대와의 근접전 결과는 뻔하였다. 전쟁 후반기에 참전한 미국도 기관단총을 필요로 하였지만 그전에 전쟁이 종결되었다. 미국은 총에 관해서는 탁월한 기술력을 가진 대표적인 나라지만 생각만큼 새로운 형태의 총을 만들기는 그리 만만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미국 병기국에서 근무하였던 존 톰슨(존 톰프슨, John T. Thompson) 예비역 준장은 전쟁 이전부터 기관단총의 필요성을 느끼던 인물이었다. 그는 전선의 상황을 접하고 1917년부터 기관단총 제작에 들어갔는데 종전 후인 1919년에서야 겨우 완성을 볼 수 있었다. 이 총은 비록 때를 놓쳐 뒤늦게 등장하였지만 다음 전쟁에서 미군 병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기관단총으로 명성을 얻었다. 바로 톰슨 기관단총(톰프슨 기관단총, Thompson Submachine Gun 이하 톰슨)이다.
새롭게 개척한 역사
최초가 무엇이냐에 대해 설왕설래가 많지만 기능상으로 처음 구현된 기관단총이 이탈리아의 빌라-페로사(Villar-Perosa), 최초로 실전에 투입된 기관단총이 독일 MP18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여기에 더해 기관단총(SMG-SubMachine Gun)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것이 바로 톰슨인데, 그만큼 톰슨은 기관단총 역사와 관련하여 결코 떼어놓을 수 없다. 그리고 이처럼 초기에 탄생하였음에도 20세기 중·후반까지 애용된 걸작이기도 하다.
톰슨도 여타 기관단총처럼 권총탄을 사용하였는데 연사력을 중시한 휴대용 무기다 보니 기술적으로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다. 현재도 사용 중인 콜트(Colt)사의 M1911 권총용 45ACP탄(11.43×23mm)을 이용하였는데 존 톰슨은 이 총탄의 개발에도 관여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유효사거리가 100~150m에 불과하였고 50m가 넘으면 명중을 장담하기 힘들었다. 한마디로 얼굴을 알아 볼 수 있는 상대에게나 사용할 수 있었던 무기였다.
기관단총은 작동 원리상 기관총과 같았는데 존 톰슨은 당시 기관총의 고질적 문제인 엄청난 무게를 줄이는데 고심하였다. 당시 자동화기들은 크게 리코일, 가스작동, 블로우백(Blowback) 방식을 사용하였는데 그는 구조가 간단한 블로우백이 소형 자동화기에 적합하다고 결론짓고 그중에서도 당시 새롭게 등장한 블리쉬 락(Blish Lock) 기술을 접목한 블로우백 방식을 최초로 사용하였다.
한마디로 실전에서의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설계된 새로운 형태의 총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슨은 탄창을 제외하고도 무게가 5kg 가까이나 되었다. 여담으로 톰슨의 고질적인 단점 중 하나가 기관단총답지 않은 무거운 무게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톰슨과 더불어 전선을 누빈 독일의 MP40 기관단총이나 소련의 PPSh-41(따발총)이 4kg 이하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톰슨의 무게가 상대적으로 많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 ▲ (좌)한 손에 톰슨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은행강도 존 딜린저. ‘공공의 적’으로 지정된 유명한 범죄자이다.
(우)톰슨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FBI 국장 존 에드가 후버. 강력 범죄에 대항하는 경찰에게도 톰슨 기관단총은 좋은 무기였다.
씁쓸하게 얻은 유명세
이렇게 탄생한 최초의 톰슨이 단 40정만 시험 생산된 M1919였다. 처음 군부대에서 시범 사격을 보였을 때 분당 1,500발의 엄청난 발사속도를 자랑하여 모두를 놀라게 하였지만 정작 전쟁을 막 끝낸 군 당국에서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우선 전쟁 막바지에 참전한 미군은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참호전 경험이 짧아 기관단총에 대해 그다지 목말라하지 않았고 거기에다가 납품가가 너무 비쌌다.
아무리 단순화 하였어도 볼트액션 소총에 비해 구조가 복잡하였고 쇠를 일일이 깎아서 만든 제작 공정은 어쩔 수 없이 가격의 상승을 가져와 일선 보병들에게 충분히 공급되기가 곤란할 정도였다. 결국 자칫하면 톰슨은 시대를 잘못 타고나서 흐지부지 사라질 수도 있는 운명이었다. 오토 오디언스(Auto-Ordnance Company)라는 제작사까지 차렸던 존 톰슨은 군납이 좌절되자 민간 판매를 고려하였다.
1921년 M1919를 개량한 M1921을 민간에 판매하였는데 엉뚱하게도 갱들이 톰슨의 가치를 먼저 알아보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마피아 같은 갱들이 구입하여 범죄 행위에 사용하면서 톰슨이 명성을 얻게 된 것이었다. 이전에 갱들은 마치 서부개척 시대처럼 권총이나 산탄총 같은 고전적인 무기를 주로 사용하였다. 바로 이때 엄청난 속도로 난사할 수 있는 톰슨의 등장은 한마디로 혁명이었다.
- ▲ (좌)드럼탄창이 인상적인 1928년형 톰슨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영국군(1940년)
(우)톰슨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처칠 영국 수상(1940년)
군납에서 좌절을 겪다
갱들 간에 싸움이 벌어진다면 대부분 근접전이므로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총탄을 날리는 쪽이 절대 유리하였다. 1927년 알 카포네가 이끄는 갱단이 톰슨을 앞세워 상대 조직을 무참히 제거하면서 유명세가 하늘을 찔렀다. 더불어 갱들은 톰슨을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자체 개량에 나섰는데 대표적인 것이 연사 시 반동을 줄여주기 위해 장착한 컴펜세이터(Compensator)였다.
드럼탄창이 특징적인 M1921은 이후 1920~1930년대 갱들을 상징하는 모습이 되었고 총소리가 타자기 소리와 비슷하다며 시카고 타자기(Chicago Typewriter) 또는 제작자 이름을 따서 토미건(Tommy Gun)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후 톰슨하면 제일 먼저 갱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대부’같은 영화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당연 소품이 되기도 하였다.
당연히 이런 사실을 개발자 존 톰슨도 알게 되었고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에 몹시 분노하였다고 전한다. 나치를 격퇴하려는 일념에서 AK-47이라는 기념비적 총을 만들어 낸 미하일 칼라시니코프가 정작 테러 단체들이 AK-47을 사용하는 모습에 실망하였던 것과 같았다. 어쨌든 이처럼 민간에도 판매하고 대외 수출에도 나섰지만 가장 커다란 시장인 군 당국에 납품 시도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 ▲ 톰슨 M1A1. 대량 생산에 적합하도록 변경된 형태이다.
진화 그리고 기회
1923년에 새로운 45구경 레밍턴-톰슨 총탄을 사용하여 화력과 사거리를 늘리고 멜빵, 대검을 장착할 수 있도록 개량된 모델을 육군에 제안하였지만 이번에도 소총을 선호하던 보수적인 군부의 결정으로 제식화기가 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명품은 어디 가도 빛이 나듯이 드디어 1928년에 개량된 M1928모델 일부 물량이 1930년 미 해군과 해병대가 정식으로 채용하면서 본격적인 신화가 시작되었다.
원래부터 무거운 것이 단점이었던 톰슨은 M1928부터 오히려 무게가 더 늘었는데 그 이유는 발사 속도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연사가 기관단총의 생명력이기는 하지만 약간 속도를 줄였다하더라도 실전에서 크게 문제가 없는 반면 정확도와 조작성이 향상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노리쇠 뭉치의 왕복거리를 늘이거나 무게를 무겁게 하는 방법이 있는데 톰슨은 무게를 늘이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미국의 중립은 파기 되었고 참전이 개시되었다. 그런데 톰슨은 미국의 참전 이전에 영국, 중국 등에 제공을 목적으로 이미 대량 생산되고 있던 중이었다. 이처럼 명성을 얻고 있었던 톰슨을 미군이 대량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였다. 이때 부여 받은 정식 군용 제식부호가 M1이었는데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이 모델부터 작동방식이 단순 블로우백 방식으로 바뀌었다.
더불어 일반 탄창만 사용할 수 있는 등의 일부 개량이 이루어졌는데 그 이유는 대량 생산과 제작비 절감을 위해서였다. 한마디로 전쟁에 사용되기 위한 가장 적합한 형태로의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1943년부터 개량형인 M1A1이 사용되었는데 교전 중 사진에 찍힌 대부분의 톰슨이 바로 이것이다. M1A1 모델은 톰슨의 최종 형이었고 이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도 사용되었다.
- ▲ (좌)1945년 오키나와 전투 당시 톰슨 기관단총을 사용하는 미 해병대원
(우)톰슨 기관단총의 광고 전단. ‘범죄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총’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시대상을 대변한 기관단총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슨은 주력 화기가 아니었다. 제2차 대전 당시 미군의 표준화기는 M1 개런드였고 이와 더불어 M1 카빈이 보조 화기로 사용되었다. 아무리 연사력이 좋다고 하여도 사거리가 짧고 파괴력이 약한 기관단총의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톰슨은 근접전에 특화된 무기로만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소대장이나 분대장 같은 일선 지휘관이나 정찰대 같이 경무장이 필요한 사병들이 주로 사용하였다.
오토 오디언스에서 제작되던 톰슨은 전쟁이 발발하며 공급 물량이 딸리자 콜트를 비롯한 여러 회사에서 라이선스 생산되었다. 이들 제작사를 통하여 총 170만정이 생산되었는데 미군의 주력 화기였던 M1 개런드 소총이 약 625만정, 제2차 대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기관단총인 독일의 MP40의 생산량이 약 100만정 생산되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결코 적지 않은 수량임을 알 수 있다.
미군 외에도 여러 연합군에 공여되었는데 이때 소련이나 중국에 흘러들어간 일부 물량을 한국전쟁 당시에 공산군이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야간 전투 시에 같은 총소리로 말미암아 피아식별에서 문제가 생기자 미군은 톰슨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M3 그리스건(M3, "Grease Gun")을 사용하게 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제2차 대전 말기에 등장한 M3 그리스건은 생산비나 제작 시간 등에서 톰슨보다 유리하여 점진적으로 대체되던 중이었다.
톰슨은 처음부터 전선의 경험과 필요에 의해 탄생하였고 거대한 전쟁터에서 병사들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맹활약하였던 미국의 대표적인 무기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암울한 기운이 엄습하던 1920년대 미국의 이면사를 상징하는 흉기이기도 했다. 전선에서는 적과 싸우기 위해서 반면 도시에서는 대치하고 있던 경찰과 갱들이 함께 사용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였다. 어처구니없던 시대의 자화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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