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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전쟁 (War of 1812)

구름위 2013. 1. 8.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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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미영 전쟁이란 1812년 미국과 영국간에 북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미국에서는 'War of 1812', 영국에서는 'American War of 1812 to 1815'라고 불린다.

이 전쟁은 3년간에 걸쳐 양국간에 졸전을 벌이다, 별다른 소득 없이 싱겁게 종결되었다.



- 전쟁 발생 원인 -

첫째.

미국의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의 두번째 임기가 시작되던 1805년, 유럽 대륙에서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났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했지만 영국의 해상 봉쇄 때문에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나폴레옹은 미국이 영국을 상대로 무역하는 것에는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지만, 영국은 우세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모든 항구를 봉쇄하고 중립국 선박들은 우선 영국의 항구에 들러 관세를 내도록 강요했다.

또한 영국 해군은 해상 봉쇄의 일환으로 종종 미 상선을 무단 검색하였는데, 이것이 양국간의 정치적인 충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혹독한 대우를 받던 영국 해군의 수병들이 종종 탈영하고는 했는데, 이들은 종종 미국 선박에 피신하였다.  이때 영국군은 미국 선박을 수색하여 탈영병들을 데려가는 것을 자기들의 권리로 간주했다.

심지어는 미국인 선원들을 강제로 징병하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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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선원을 강제 징병하는 영국군]


미국은 이런 영국에 크게 반발하여 1807년의 수출입 금지법과 1809년의 통상금지법으로 맞섰다.

무역 금지 조처에 대한 국내 상공인들의 반발로 1810년 교역 제한이 철폐되었으나 봉쇄를 철회하지 않는 경쟁국(영국)에 대해서는 통상금지를 재개한다고 규정했다.


둘째.

미국은 건국 이래 서쪽으로 영토를 넓히면서 발전해나갔다. 그러나 자신들의 땅을 빼앗긴 피해자 - 인디언들의 저항도 격렬했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인디언의 배후에 캐나다의 영국인들이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고, 인디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영국과 전쟁 할 수 밖에 없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영국 정부는 인디언 영토에 불법으로 진출한 백인들을 조사하기 위하여 쇼니족(Shawnee) 족장인 테쿰세(Tecumseh)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격려했다. 

마침내 테쿰세가 백인을 공격하여 티피커누 전투(1811. 11. 7)가 벌어지자 서부정착민들은 영국을 캐나다에서 몰아내고 국경수비를 강화해야 한다고 탄원하기에 이르렀다.


미의회의 강경파들은 캐나다를 침공하자는 주장을 열렬히 지지했다. 이들은 영토를 넓히려는 야망으로 플로리다를 연방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셋째. 영국이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여념이 없는 틈을 타서 캐나다를 정복하려는 영토 야심이 미국 지도부에 있었다.


넷째. 세번째와 동일한 이유로 미국의 지도자들은 전쟁이 쉽게 끝나리라 낙관하고 있었다.


[James Madison]

이런 여러 요인으로 인해서, 1812년 6월 18일 미국 제 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제임스 메디슨은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문에 서명했다.

내부적인 논쟁을 몇년이나 격렬하게 벌인후 시작된 전쟁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양쪽 모두 제대로된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에 깊숙히 빠져들어 육군의 주력은 스페인에서 전쟁중이었고, 해군은 나폴레옹의 해상 봉쇄에 맞서 전투중이었다.


[캐나다 주둔 왕립 포병 연대 하사]

1812년 6월 캐나다 주둔 영국군은 공식적으로 6,034명이었으며, 민병대가 지원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육군 및 식민지 담당 장관은 헨리 바서스트 백작이었다.


[George Prevost]

개전시부터 2년간 영국은 아메리카 대륙에 군대를 보강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북아메리카 식민지 사령관인 죠지 프레보스트(George Prevost) 중장은 방어적인 전략을 취했다.

1814년 25,000명 이상의 대규모 증원을 받은 프레보스트 중장은 뉴욕을 공격했지만 침공은 실패했다. 또한 남부의 루지애나에 대한 침공도 뉴올리언즈에서의 격전 끝에 반격을 당했다.

 

한편 미국은 너무 낙관 무드에 빠져 있었다. 메디슨 대통령은 미국이 쉽게 캐나다를 정복할 것으로 보고, 이후 외교적인 교섭으로 전쟁을 끝낼수 있다고 예상하였다.

그러나 미국 내부적으로도 남부와 서부가 전쟁에 찬성하는 데에 반하여, 뉴욕과 뉴잉글랜드를 비롯한 북동부 주들은 영국과의 교역에 지장을 받기 때문에 전쟁에 반대했다.


1812년 미국 육군의 병력은 12,000명 정도였다. 의회는 육군 병력을 35,000명까지 확장하도록 승인했지만, 급여가 적었기 때문에 지원자가 없어 추가 병력 확충은 더뎠다.

민병대는 정규군을 보조해야 했지만, 소속된 주의 경계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고 규율도 좋지 못했다.


[미국 뉴욕주 민병대]

또한 미국은 전쟁 비용을 조달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전쟁 직전 미국은 국립 은행을 없앴고, 북동부의 민간은행들은 전쟁에 반대하고 있었다.


미국의 준비 부족과 육군 장관 윌리엄 유스티스의 지도력 부족으로 전황은 비참해졌고, 결국 유스티스가 경질되기에 이른다.

후임자인 존 암스트롱은 1813년에 몬트리올을 점령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보급 체계의 파탄과 지휘 능력이 부족한 장교들과 훈련이 부족한 병사에 의해서 실패했다.

그러나 미국의 해적선들은 대서양을 휩쓸고 다니면서, 1812년부터 1813년까지 무려 영국 선박을 500척이나 나포했다.


1814년까지 미국 육군의 사기와 지휘력은 크게 개선되었지만, 이번에는 수도인 워싱턴이 영국의 역습에 의해 점령당하여 불태워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암스트롱은 일자리에서 쫓겨났다.

전쟁 기간중 세번째로 취임한 육군 장관 제임스 몬로가 자신의 새로운 전략을 시도하기도 전에 종전 조약이 체결된다.



전쟁은 주로 3개의 전선에서 치뤄졌다.

- 오대호 지방 및 캐나다 전선 -

인디아나주의 주지사로 인디언 땅을 빼앗는데 열심이었던 미국의 윌리엄 헨리 해리슨 장군은 전쟁 발발 다음해인 1813년 켄터키주로부터 민병대, 의용군 및 정규군의 부대를 이끌고 캐나다로 진군했다.

9월 12일 올리버 해자드 페리 제독이 이리호에서 영국 함대를 섬멸하였다. 

해리슨은 디트로이트를 탈환하고 캐나다로 진격하였다. 쫓기는 영국군과 영국과 동맹한 인디언들을 템즈 전투(Battle of Thames)에서 크게 패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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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의 영토를 강탈하기 위해 Harrison이 제안한 Fort Wayne 조약을 거부하는 Tecumse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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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 미해군 Constitution호가 영국 해군 HMS Guerriere간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장면]

Constitution호는 1797년에 진수한 목조 범선으로 배수량 2,200t에 50문 이상의 포를 장비하였다. 미영전쟁에서 영국 군함 게리에르호(號)와 쟈바호를 격파하였고, 1931년에 복원되어 미국 내 90여 항구를 방문하였다.

1934년 이후 보스턴항(港)에 계류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어, Old Ironsides라는 애칭으로 불리우며 오늘날까지 미국 해군의 함적(艦籍)에 현역함정으로 남아 있다.


영국 해군이 유럽에 집중하고 있을때는 나름대로 미국 해군도 잘 싸웠으나, 유럽 대륙에서 나폴레옹 전쟁이 영국의 우세로 기울어지면서, 영국은 해군력을 미국으로 돌릴 여력이 생겼다.

이리하여 전쟁의 후반부에 미국 해군은 할 일이 없어졌고, 별다른 전투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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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워싱턴]

1814년 영국 해군은 미 동해안 메릴랜드에 상륙하여 수도 워싱턴으로 진격하고, 건방진 미국인들에게 교훈을 남겨주기 위하여 미 대통령 관저를 불태워 버렸다.

전쟁이 끝난후 관저를 수리할때 불탄 자국을 숨기기 위해서 새하얀 페인트를 칠한 것에서 백악관이라는 이름이 유래된다.


이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가 메릴랜드의 맥 헨리-요새(Fort McHenry)에서 벌어진다. 요새가 위치한 곳은 미국 해적선들의 근거지였다.

함포 사격과 25시간에 걸치는 격전이 끝난 후에도, 요새에는 여전히 성조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이것을 바라보던 프랜시스 스콧 키라는 변호사는 눈물을 흘리며 성조기를 찬양하는 시를 읋었고, 이 시에 멜로디가 붙어 오늘날 미국의 국가인 'Star Spangled Banner'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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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격받는 Fort McHenry]



- 남부 전선 -

남부 전선은 크리크족인디언들과 전쟁이 벌어지고, 그 전쟁이 마무리될 무렵 멕시코만 연안으로부터의 영국군에 의한 침공이 이루어진다.


[Andrew Jackson]

1814년 3월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은 테네시주 민병대와 체로키족 전사 및 미육군 정규군을 인솔하여 크리크족 추장 메나와에 이끄는 인디언 부대와 싸웠다.


3월 26일 잭슨과 존 카피 장군은 호스슈 벤드 전투에서 크리크족을 격파하고, 1,800명의 인디언을 살해했다. 잭슨은 살아 남은 크리크족을 추적해 항복을 받아내었다.

영국군은 9월 뉴욕주와 메릴랜드주의 공세에서 별다른 진척을 보지 못했으므로,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10,000명 이상의 병력을 멕시코만에 파견했다.

잭슨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1814년 연말부터 영국군의 침공에 대비했다.



- 암 조약 -

서로간에 결정타를 날리지 못한채 전쟁이 장기화되자, 미국과 영국 양측에서 정치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나오기 시작했다.

1814년 12월 26일 벨기에에서 암에서 조약이 체결되어 전쟁은 종결되었다.

당시 대륙간의 연락은 배로 수주일 이상이 걸렸기 때문에, 조약이 체결된 후에도 전투가 벌어져 앤드류 잭슨이 인솔하는 민병대가 뉴올리언즈에서 영국군을 격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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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attle of New Orleans]

이 승리로 앤드류 잭슨은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후일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영국군은 뉴올리언즈의 점령은 포기했지만, 앨라배마의 모빌에 공격의 화살을 돌렸다.

마지막 전투는 1815년 2월 11일 치뤄졌고, 1,000명의 영국군이 370명의 미군 수비대를 항복시켰다.


- 전쟁의 결과 -

암 조약에 따라 양국이 점령한 지역은 모두 원상복구되었다.

미국은 세인트로렌스만에서의 어업권을 획득하였고, 약탈된 재화는 반환되었다.

영국은 자국군에 종군했던 노예들을 돌려 보내는 대신 현금을 지불했다.

전쟁중 영국의 공산품 수입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미국내에 많은 산업과 공업이 일어났고 이후 미국 경제의 자립에 영향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이 전쟁은 경제적인 독립을 완수시켰다는 의미로 '제2차 독립전쟁'이라고 불리고 있다.


건국 초기 미국의 정치권은 북동부 뉴잉글랜드 지역을 지지 기반으로 한 연방파(Federalists)와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을 중심으로 남부를 지지 기반으로한 공화파가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친영적인 성향을 보여 매국노로 몰린 연방파는 몰락하였고, 공화파 내부에서 잭슨을 지지하는 민주파와 이에 반대하는 휘그파가 대립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의 양당 체제가 윤곽을 드러내 오늘날까지 내려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