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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사나이 李厚洛 이야기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다. |
李厚洛 전 정보부장이 오늘 85세로 他界하였다. 박정희 정권下에서 대통령 비서실장, 주일대사, 중앙정보부장으로 근무하면서 10여년 간 權力의 핵심에 있었던 그는 김대중 납치 등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무덤까지 그 비밀을 가져갔다. 1924년 경남 울산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울산농고를 졸업한 뒤 일본 육군 항공기 정비학교의 2년제 하사관 과정에 들어갔다. 그는 2학년 때 해방을 맞았기 때문에 임관되지는 않았다. 1946년 國軍이 창설될 때 李씨는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수개월의 短期교육 뒤 곧 소위로 임관됐다. 이때 익힌 영여실력도 그의 중요한 자산이 된다. 그의 군번은 79번으로서 나이가 일곱 살이나 많은 고 朴正熙대통령(육사2기) 보다도 앞이었다. 미 군정청이 운영한 이 학교의 입교조건은 일제시대 일본육사, 만주군관학교를 나왔든지 장교급에 상응하는 경력을 가진 자라고 정해져 있었는데 李씨가 어떻게 입교할 수 있었는지는 수수께끼다. 李씨가 본격적으로 [정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6·25때였다. 1951년 그는 대구에 있던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으로 임명됐다. 그때 정보국장은 김종평(金宗平)준장(전 서울신문 감사)이었다. 金씨에 따르면 李厚洛차장은 주로 HID업무, 즉 적정(敵情)탐지의 임무를 총괄했었다고 한다. {그때도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다}는 게 金씨의 기억이다. 李씨는 51∼52년 사이 미국의 병참학교 고등반에 유학, 최초의 미국 경험을 하게 된다. 52년 여름에 귀국하자마자 그는 육군병참감으로 천거됐다. 그때 육군참모총장은 이종찬(李鍾贊)중장. 당시 총장 비서실장이었던 안광호(安光鎬)씨(전 이태리 대사·무역진흥공사 사장. 예비역준장)에 따르면 李厚洛씨가 병참감으로 발령이 나기 직전 자신이 李총장에게 건의하여 인사기안내용이 뒤바뀌어 병참감에 이호(李澔)준장(전 내무장관·대한적십자사 총재)이 임명됐다고 한다. 서열상 李厚洛씨가 도저히 병참감이 될 수 없었는데도 그런 기안이 올라 와 安실장이 부당함을 진언했었고, 그 뒤로 李씨와의 사이가 나빠졌다고 한다. 李씨가 병참감이 된 것은 2년 뒤였고, 그가 병참감에서 미국대사관 무관으로 옮겨 2년간의 미국생활을 체험한 뒤 귀국한 것은 1959년이었다. 일선부대 지휘관 경력이 전혀 없었던 李厚洛준장은 귀국 뒤 보직을 받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였다. 그렇게 평가가 좋은 편은 아니었던지, 선뜻 그를 데려가려는 선배가 없었다. 李준장은 日軍이나 만주군 인맥에도 끼지 않았고 그렇다고 독자적인 인맥도 형성하지 못했다. 전투병과도 아니라 군의 주류에선 벗어나 있었다. 李준장이 그때 가장 따랐던 이는 유재흥(劉載興)중장(전 국방장관)이었다. 劉중장은 李준장의 보직문제를, 당시 국방장관 김정렬(金貞烈)씨(전 국방장관·공군참모총장)에게 부탁했다. 金장관은 劉장군의 일본육사 선배일 뿐 아니라 양쪽 집안끼리도 아주 가까왔다. 미 CIA가 정보계에 데뷔시켜 金貞烈장관의 전임인 김용우(金用雨)국방장관 시절 한미 두 나라 국방장관 사이에 비밀협정이 맺어졌다. 양국 정보기관이 수집한 정보를 교환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한국 쪽에서 바라던 바였다. 李承晩정부는 해외정보, 특히 공산권 정보에 어두워 고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정보기관은 육해공군에 설치된 방첩대(CIC)등이 전부였다. 이들 부대는 방첩 및 대(對)북한 관계 정보수집만 했고 해외에는 조직을 갖고 있지 못했다. 1959년 어느 날 미국CIA의 중요간부 한 사람이 金貞烈장관을 방문했다. 그 간부는 한국에 CIA지부를 설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 지부를 미 8군이나 미 대사관 같은 다른 미국기관과는 독립된 조직으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CIA요원들에게는 외교관에 대한 것과 꼭 같은 치외법권이 보장돼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미군이나 대사관을 아주 가볍게 보는 태도였다. 그때 李承晩대통령은 미국 정보기관을 대단히 싫어했다. 1952년 발췌 개헌 파동 때 미군정보기관이 李承晩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해 한국군을 동원하는 쿠데타 모의를 한 적이 있다는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는 한때 한국에서 활동하는 미국 정보기관원들의 철수를 미국측에 요구한 적도 있었다. 이것을 알고 있었던 金장관은 CIA서울 지부가 독립기관으로 주재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그 대신 미국 대사관 안에 적당한 자리를 얻어 활동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비쳤다. 이렇게 해서 미국 대사관의 고위간부 한 사람이 새로 부임하게 됐는데 그의 이름은 웨인 넬슨이었다. 미남인 넬슨은 물론 CIA 한국 지부장이었다. 넬슨은 부임하자마자 金장관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한미 국방장관끼리 맺어진 정보 교환 협정을 이행하려면 CIA의 상대역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군 정보기관은 여러 갈래로 되어 있으므로 통합조정기구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金장관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3군에서 요원들을 뽑아 국방부 장관 직속 부대를 만들었다. 金장관이 그 부대장으로 임명한 사람은 다름 아닌 李厚洛준장이었다. 부대 명칭은 중앙정보부. 대외적인 가명으로서 李준장은 [79부대]라 부르도록 했다. 자신의 군번을 딴 것이었다. 자신이 영원히 부대장을 할 것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이름을 붙인 점에서 李씨의 강한 [욕망]을 읽을 수 있겠다. 이 [중앙정보부]란 이름은 5·16뒤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李厚洛씨가 이 부대의 책임자로 된것은 CIA의 추천이 있어서가 아니라 타이밍이 맞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정보국 차장, 무관 경력에다가 영어를 잘하고 미국 사정에 밝다는 점에서 李준장의 임명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는 얘기다. 미국CIA와 관계를 트게 된 발단은 우연이었을지 모르지만 일단 깊은 관계가 된 뒤에는 양쪽이 아주 굳게 깍지를 끼게 된다. 이 부대에는 미국 CIA요원도 몇 명이 파견 나와서 초창기 업무를 도왔다. 李承晩 특명, 라오스 밀행 창설 당시 79부대의 인원은 20여 명이었다. 각 정보부대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정리하는 일과 CIA에서 넘겨주는 해외정보를 분류하는 일이 주된 업무였다. CIA에서 건네주는 정보를 1주일만 모으면 캐비넷에 가득 찰 정도였다. 李준장은 CIA정보 가운데 중요한 것은 간추려 매일 국방장관에게 보고했고, 장관은 그 가운데서 더 중요한 것을 추려서 경무대에 보고했다. 國政 통수권자에게 정보보고가 체계적으로 되기 시작한 효시였다. CIA서울 지부와의 접촉창구로서 李厚洛준장이 그들의 마음에 쏙 들게끔 활동했으리라는 것은 그 뒤의 관계로 미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초대 지부장 넬슨은 지부창립 직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고용한 한국인 운전사는 결핵을 앓고 있었는데, 넬슨의 어린 아들이 운전사로부터 결핵에 전염돼 폐를 앓는 바람에 한국에 싫증을 느끼고 넬슨이 본국근무를 요망했다고 한다. 넬슨의 후임으로 2대 지부장에 취임한 데 실버씨는 폴란드에서 활동하다가 서울에 왔다. 그는 슬라브족 출신이란 소문도 있었다. 실버씨는 李厚洛준장의 장래 후견인이 될 인물이었다. 실버씨는 부임할 때부터 정치공작 전문가란 악명을 갖고 왔다. 자유당 정부에선 그를 경계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실버씨는 한국에서 4·19, 5·16을 만났고, 그 뒤 월남에 현지책임자로 갔다. 79부대장 李厚洛씨가 재임 중에 한 일 가운데 아직 알려지지 않은 비화는 [라오스 미션]이다. 당시 라오스에선 파테트라오 군을 중심으로 한 공산계열이 우익 왕당파인 푸미 노사반의 정부군과 대결하고 있을 때였다. 李承晩대통령은 라오스가 적화되면 고딘디엠의 월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가 공산화 될 것이라고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金국방장관을 불러 {라오스의 공산화 방지를 위해 우리가 도와 줄 일이 없을까}하고 의논한 끝에 李厚洛준장을 라오스로 밀파하기로 했다. 당시 주 월남 대사 최덕신(崔德新)의 주선으로 李준장은 라오스로 가서 노사반 장군을 만나고 돌아왔다. 평양밀행(密行)이 李씨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화려한 무대였다면 라오스 밀행은 그에게 도약의 발판이 됐다. 서울로 돌아온 李厚洛준장을 데리고 金장관은 경무대로 들어가 李承晩대통령을 만났다. 李준장이 직접 보고를 하도록 했다. 그는 {노, 노, 노사반 장군이…}식으로 말을 더듬거렸고 얼굴이 벌개지기도 했으나 어쨌든 이것이 李厚洛씨와 李대통령의 첫 만남이 됐다. 李준장은 노사반 장군이 한국군의 파견을 희망하고 있더라고 전했다. 이 보고에 따라 백선엽(白善燁)합참의장의 산하에 라오스 파병을 연구하는 실무반이 조직됐다. 그러나 미국측의 반대로 이 계획은 계획으로 끝나버렸다. 라오스 미션을 계기로 하여 李厚洛준장은 매주 두번씩 열리던 국무회의에 참석, 15분간씩 국제정세를 브리핑하게 됐다. 이 브리핑은 허정(許政)과도정부 시대를 거쳐 민주당 정권 때까지 계속됐다. CIA 추천으로 정보실장 취임 4·19 때 데 실버가 지휘하는 미국CIA 서울지부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소문이 한때 무성했다. 4·19직전 CIA요원 1백50명이 오산을 거쳐 서울로 숨어 들어왔다느니, CIA가 학생들에게 돈을 뿌리며 시위를 충동질했다느니 하는 루머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이 된 셈이지만 데 실버가 李대통령의 하야를 권고한 미국의 매카나기 대사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믿는 이들은 많다. 4·19뒤 민주당 정권 때 李厚洛의 후견인 노릇을 톡톡히 한 것도 데 실버였다. 4·19를 계기로 한국의 정보기관은 큰 타격을 받았다. 경찰서의 사찰과 직원들은 부정선거 앞잡이라 하여 공민권이 제한돼 공직에서 추방됐고 군 정보기관 요원들도 자유당 권력층과 가깝다하여 눈총을 받고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민주당은 일단 정권을 잡자 와해 직전인 정보기관의 기능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1950년대에는 張勉총리의 비서실장을 지냈고, 당시엔 조폐공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張총리의 측근 참모 역할을 하고 있었던 선우종원(鮮于宗源)씨(전 국회사무총장)는 이렇게 증언한다. {데 실버가 張총리한테 총리 직속의 중앙정보기관을 만들도록 건의를 했습니다. 요원의 훈련, 조직 및 운영예산지원 등 여러가지 도움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을 달았습니다. 李厚洛씨를 그 기관장으로 임명해야 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張총리는 언짢게 생각하는 듯 했습니다. 李厚洛이를 위해 정보기관을 만드느냐고 말입니다. 총리께서는 나를 보고 李厚洛씨가 어떤 사람인지 좀 알아보라고 했어요. 알아보았죠. 그에 대한 평판은 좋다는 쪽과 나쁘다는 쪽으로 딱 갈라져 있더군요. 참모총장을 지낸 어떤 분은 아주 좋지 않게 말하더군요. 저는 여러 얘기를 종합한 끝에 李厚洛씨를 쓰지 않는 게 좋겠다고 총리께 보고를 드렸죠. 그러나 데 실버가 얼마나 강력하게 권고를 했던지 李厚洛씨가 책임자로 임명되더군요. 당시 정부예산이 동이 나 김영선(金永善)재무장관이 케네디 대통령을 찾아가 2천만 달러를 급히 얻어와야 할 때였으니 미국측 요구를 거절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1961년 초에 발족한 것이 총리 직속의 중앙정보위원회였다. 李厚洛씨는 소장으로 예편한 뒤, 위원회 산하의 중앙정보연구실장으로 취임했다. 기관의 이름이나 조직은 79부대를 그대로 옮겨놓은 모양이었다. 이 위원회는 여러 국가정보기관의 업무를 통괄하는 기능을 위임받았다. 자유당 때 미국이 CIA를 본뜬 정보기관을 설치하도록 李承晩대통령에게 요청했을 때, 李대통령은 그 제의를 받아 주는 척 하면서 국방부 산하에 설치함으로써 기능을 격하시켰었다. 미국 CIA는 이것이 못내 불만이었다. 상대국의 정보기관이 강력해야 그 기관을 통한 영향력 행사도 쉬울 것이다. 그래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격상된 중앙정보기관을 만들게 된 것이었다. 李厚洛실장은 차관대우였다. 그러나 이 기관은 제대로 활동을 해보기도 전에 5·16을 맞고 말았다. CIA 간청으로 李씨 석방 지난 78년 미국 하원의 국제관계 소위원회로 [한미관계 조사보고서]를 펴냈다. 소위원회는 20명의 조사관을 동원, 11개국에서 관련자들과 연 1천5백63회의 인터뷰를 하는 등 약2천쪽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를 종합하여 이 보고서를 만들었다. 朴東宣사건 직후에 나온 보고서이므로 한미 관계의 부정적인 면들이 주로 다루어졌다. 비밀자료들도 많이 소개되어 있다. 이 보고서 23쪽엔 이런 대목이 있다. […(5·16뒤) 중앙정보부는 李厚洛소장이 만든 중앙정보위원회를 흡수했다. 金鍾泌 전 중정부장의 보좌관을 지낸 바 있는 모씨는 조사관과의 인터뷰에서 중앙정보위원회가 미국 CIA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5·16이 나자 李厚洛은 부패혐의로 체포됐다. 체포의 진짜 이유는 그가 미국 측과 너무 가깝다는 점이었다. 몇 달 뒤 군사정권과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李厚洛을 석방했다. 이 보좌관에 따르면 CIA가 李씨의 석방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李厚洛씨의 석방에 기여를 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CIA 한국 지부장 데 실바였다. 실바는 李씨가 구속돼 있을 동안 그의 가족까지도 여러 모로 보살펴 주었고, 金鍾泌 정보부장을 자주 찾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CIA측에선 金정보부장에게 李씨의 이름은 대지 않고 정보 기관의 운영에 꼭 중요한 한 인물이 갇혀 있다는 식으로 말을 둘러대어 암시를 여러 번 주었다고 한다. 金부장이 스스로 李씨를 풀어 주고, 李씨로부터 중앙 정보위원회 등 정보기관의 조직과 운영에 대한 자문을 받도록 CIA가 원격조종을 했다는 것이 李씨 측근에서 나온 이야기다. 金鍾泌 부장과 가까운 쪽에선 데 실바가 李씨를 거명하면서 여러 번 석방을 간청했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과 가까운 金貞烈씨도 朴正熙장군을 찾아가 李씨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전달, 석방과 중용을 부탁했다고 한다. 어쨌든 미국 CIA는 李承晩정권 때는 李厚洛씨가 정보기관장으로 데뷔하도록 했고, 張勉정권 때는 그를 격상시켰으며, 5·16 뒤엔 李씨를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구출해 주었다. 5·16 쿠데타에서 李厚洛씨가 어떤 행동을 했는가 하는 문제는 추측의 영역에 속한다. 그 추측은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태도에서 힌트를 얻을 수밖에 없다. 쿠데타가 나자마자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은 張勉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 한국군 수뇌부가 빨리 질서를 회복할 것을 촉구했다. 이어서 미국대사관 마샬 그린 대사대리도 같은 취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런 신속한 반응은 미국 국무성의 허가를 받지 않고 나왔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미국무성은 나중에 이 성명들을 추인했다). CIA에 反朴正熙 정보 알려? 서울 주재 미국 당국의 즉각적인 반응은 쿠데타 주모자들의 과거 경력에 대한 미국 정부 당국(필자 주:아마도 CIA)의 보고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미 하원 국제 문제 소위원회 보고서는 지적하고 있다. [… 이들 보고에 따르면, 朴正熙장군은 1940년대 중반 육군 장교 시절에 공산주의와 관련되었다. 48년의 여수 반란 사건 때는 정말로 공산주의자였다는 증거도 있었다. 그는 이 혐의로 해서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 그는 약 3백 명에 달하는 공산당 첩자들을 밝혀내는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에 징역 10년형으로 감형됐다. 여기에는 정일권(丁一權) 등 다른 인물들의 도움이 컸다. 金鍾泌은 대학교 재학 때 좌익학생 운동에 관련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5·16 당시) 미국 대사관에서 문화담당 보좌관이었던 그레고리 헨더슨에 따르면 쿠데타 참여자들은 영어를 잘 못했기 때문에 미군과의 접촉에는 제한이 많았다고 한다. 장면(張勉)정부는 미국 대사관 내의 주요 간부들―참사관, 정치 담당 영사, 그리고 헨더슨―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미국 CIA가 5·16을 지원했다는 일부 주장에 대해 조사했으나 근거가 없음이 밝혀졌다. CIA도 미국대사관과 같이 쿠데타에 반대하고 있었다] 5·16 주체 세력에선 李厚洛씨가 주체세력의 사상적 배경 등에 대한 정보를 CIA에 알려 주어 미국 당국이 즉각 적으로 쿠데타에 반대하도록 했다는 의심을 가졌고, 그 때문에 그를 체포했다고 한다. 朴正熙장군에 대한 상세한 자료는 미 정보기관이 그 이전에 이미 손에 넣고 있었고 5·16직전에는 張勉정부를 통해 朴소장을 예편시키도록 압력을 넣은 적도 있기 때문에 李씨의 정보만이 그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다만 李씨와 미국CIA서울지부의 친밀한 관계로 미뤄 쿠데타에 관한 정보가 CIA쪽으로 상당히 흘러들어 갔으리란 추측은 너무나 당연하다. 두 나라 국방장관 협정이 정보교환을 약속하고 있었고 중앙정보위원회의 조직목적이 CIA와의 정보교류였으니까. 容共 쿠데타 아니다 미국 측에선 쿠데타 주모자들의 사상적 배경 때문에 쿠데타가 성공한 뒤에도 상당 기간 신경을 곤두세웠다. 다른 한국군 부대를 동원하여 쿠데타 군을 진압하려는 매그루더의 계획이 尹潽善 당시 대통령의 거부로 좌절된 직후 미국 대사관은 미 국무성에 보낸 전문에서 {張勉정부의 운명에 대한 한국민들의 냉담과 무관심 때문에 우리의 행동범위는 제한을 받고 있다}고 했다. 쿠데타가 기정사실로 되자 미국은 그들의 이해관계를 보호하려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으려 했다. 6월 중순 그린 대사대리는 국무성으로 보낸 전문에서 {군사정부 지도자들과의 면담 결과, 그들이 군사통치를 상당히 오랫동안 펼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6월 하순 미국 대사관측은 군사정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처가 취해진다면 미국 정부는 우호적으로 협력할 것이며 동결한 2천8백만 달러의 원조자금도 풀겠다고 제의했다. A, 민주적 정치질서를 회복시키겠다는 정부의 보장 B, 공무원의 수를 4만 명쯤 줄이고 봉급을 올릴 것 C, 부정 부패의 발본색원 D, 군사 정부가 약속한 농촌 고리채 정리와 기타 경제 조치의 실천 군사 정부는 쿠데타 직후 약 40명의 장성들을 체포, 또는 연금했다. 상당수는 친미적인 사람들이었다. 미국 측은 이들의 석방에 노력했고 그들을 미 국방성의 경비부담으로 미국에 유학 보냈다고 미국측 자료는 밝히고 있다. 7월초 사뮤엘 버거 신임 미국대사가 서울에 왔다. 그가 부여받은 사명 중의 하나는 군사정부 지도자의 방미초청이었다. 버거 대사는 7월15일 미 국무장관에게 군사정부 지도자의 용공성 여부에 대한 보고를 했다. 그 全文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이번 군사혁명이 공산주의자에 의해 조종되거나, 그들의 영향을 받았는가의 여부에 대한 첫 평가를 완료했다. 그 결론의 요약은 다음과 같다. 2, 여러 가지 상황증거들은 압도적으로, 이번 혁명의 주류가 애국적이고 민족주의적이며, 반공적임을 시사하고 있다. 개인적인 영달을 위해 이 혁명에 참여한 기회주의자들도 있긴 하지만 쿠데타에 참여한 세력의 주된 동기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믿어진다. A, 군과 3부(府)와 한국인의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성행하고 있는 부정부패에 대한 혐오감 B, 정부의 무능력과 정책의 무계획성, 그에 따른 경기 침체, 국민들의 정신적인 방황과 불만 C, 공산주의자들의 상황 이용 4, 공산주의자들이 군사혁명 지도자들이나 민간인 보좌관들 속에 침투해 있고, 중요 직위를 차지하고 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일부 지도자들이 공산주의와 관련됐던 전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런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朴正熙 장군은 그런 그룹에 속해 있지 않음이 명백하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하고 전향한 사람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희생물 제1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중장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군사정부안에 있는 몇몇 인물이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비난은 신중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런 혐의는 상황증거에 반영을 둔 것이거나 개인적인 편견, 또는 감정에 기인한 듯하다. 5, 쿠데타가 능률적으로 추진됐고 정권을 탈취하는 요령에 대한 확고한 지식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자의 음모가 개재됐다고 유추해서는 안 된다. 구르셀 장군은 터키에서, 아유브칸은 파키스탄에서 똑같은 거사를 했고, 이번 혁명지도자들도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바 크다. 완벽한 쿠데타 거사를 가능케 한 것은 미국이 한국군에게 그 동안 가르쳐온 군사훈련, 즉 조직·군수·정보에 대한 교육 덕분으로 볼 수도 있다. 6, 소련, 북한, 중공이 이번 혁명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온 것도 이 혁명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조종된 것이 아니라는 보강증거가 된다. 공산주의자들이 무한한 위장전술의 능력을 가기고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 혁명에서 드러난 반공적인 증거가 이처럼 많은 것을 볼 때, 공산주의자의 조종에 의한 혁명으로 해석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에 앞서 5·16직후 매그루더 사령관을 맨 먼저 만나 朴正熙 장군의 전력을 변호해 준 것은 당시 공직에서 물러나 쉬고 있던 金貞烈씨였다. 朴장군은 일본육사 선배인 金씨를 형님이라 부르며 가깝게 지낸 편이었다. 朴장군이 여순반란 사건 뒤 숙군 때 체포됐을 때도 金貞烈씨는 채병덕, 丁一權씨 등 일·만군 수뇌 인사들과 함께 朴씨의 구명운동을 벌였었다. 金씨는 미군으로부터는 [마이크 킴]이란 애칭으로 불리며 신뢰를 받고 있었다. 金씨는 5·16 다음날 매그루더를 만났고 朴장군을 반공주의자라고 안심시킨 뒤 金鍾泌씨와의 면담을 주선했었다. 金鍾泌, 李厚洛을 취직시켜 버거 대사의 보고문에서 드러나듯 미국 측은 [일단 안심]은 했기만 경계심은 풀지 않고 있었다. 쿠데타 주체세력이 반공적이란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들이 대체로 반미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민족주의적이었음도 부인할 수 없었다. 金鍾泌정보부장은 공공연히 자유당 시절 미국이 취한 경제원조 정책을 비난했다. 朴正熙 장군은 사석에서 꼭 {미국×들}이라고 부를 만큼 생리적으로 미국을 싫어했다. 더구나 친미적인 張都暎 세력이 제거된 뒤에는 군사정부 안에서 친미적인 지렛대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취할 수 있는 대응책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군사정부 안에서 친미세력을 확보하는 것, 또 하나는 군사정부가 추진하고 있었던 경제개발에 미국자본을 대거 끌어들임으로써 경제적인 지렛대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1961년 가을 대한공론사 이사장으로 있던 李厚洛씨가 원충연(元忠淵) 대령의 후임으로 국가 재건 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임명된 것은 이런 상황 아래서 였다. 당시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사소한 것 같았던 이 인사는 박정희 정권과 한미 관계 및 60∼70년대의 정치 행태에 굉장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李厚洛씨의 발탁과정에 대해서 가장 소상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김봉기(金鳳基)씨(전 대한공론사 이사장·유정희의원)일 것이다. 그는 준장급 문관으로 金貞烈 국방장관의 특별보좌관을 지냈다. 혁명주체들 및 李厚洛씨와는 오랜 친분을 갖고 있었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61년6월초로 기억하는데 미도파 건너편 희 다방에서 우연히 金鍾泌 정보부장과 만났어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면서 李厚洛씨의 석방을 부탁했지요. 金부장은 며칠 있다가 李씨가 나올 꺼라고 해요. 그리고는, 지금 대한공론사 이사장 자리가 비어 있는데 기자 경력이 있는 당신이 좀 맡아주어야겠다면서 언제까지 나의 이력서를 가지고 오라고 합디다. 그때 대한공론사는 정부투자 기업체로서 코리언 리퍼블릭이란 영자신문을 내고 있었죠. 약속한 날에 지금 국제호텔 자리에 있던 정글 바로 이력서를 가지고 나갔죠. 金부장은 안 보이고 한 구석에 누군가 머리를 푹 숙이고 있는데 李厚洛씨에요. 아주 풀이 죽은 표정이에요. 반갑게 인사를 했지요. 얼마 안 있어 정보부 서울 분실장 李병희씨가 들어왔어요. 조금 있으니 金鍾泌씨가 나타났죠. 두 사람이 나뿐 아니라 李씨와도 만날 약속을 한 것 같았어요. 저는 풀이 죽은 李씨를 보자 순간적으로 생각이 바뀌더군요. 그래서 金부장과 따로 앉은 자리에서 대한공론사 이사장은 미국인들과 친면이 깊은 李씨가 적임자라고 그를 추천했어요. 金부장은 李厚洛씨에게는 [월간 다이제스트]란 잡지를 하나 만들어 맡길 계획이라고 해요. 저는 이런 시대에서는 월간지가 될 일이 아니니 내 생각 하지 말고 李厚洛씨에게 대한공론사를 맡기라고 했죠.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중요한데 신문사 사장이란 직책을 가지면 李씨가 활동하기도 좋을 것 같다고 했지요. 이렇게 해서 李厚洛씨가 며칠 뒤 대한공론사 이사장 겸 코리언 리퍼블릭의 사장이 되고 저는 코리언 리퍼블릭의 주필 겸 부사장이 됐습니다} 언론사 사장이 된 李씨는 정부 홍보만 하면 코리언 리퍼블릭을 신문답게 만들어 한국 거주 외국인들이나 미국 대사관측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군사정부를 비판도 하고 객관보도에도 힘써 신문의 면모를 일신했다고 한다. 그렇게 되니 이 신문을 이용, 외국인들에게 군사정부의 입장을 설득시키는 데도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대한 공론사의 운영은 金鍾泌부장이 차량, 예산 등 여러 면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사장과 부사장 월급은 정보부로부터 지급받아 예산부족을 카버하기도 했다. 李厚洛씨가 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발탁된 데는 이러한 실적이 상당히 기여했으리란 게 중론이다. 그 자가 美 CIA라면서? 李厚洛씨는 어려운 조건 아래에서 최고회의에 들어갔다. 주체세력도 아니었고, 오히려 反혁명으로 몰린 사람이었다. 反美무드가 강한 최고회의에서 그와 같은 친미주의자는 처신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李厚洛씨는 순식간에 자신의 위치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었다. 朴正熙 의장을 홀딱 빠지게 했기 때문이다. 대변인이란 자리는 최고실력자의 신임정도에 따라 그 비중이 가늠된다. 당시 최고회의 출입기자들에 따르면 부임직후엔 새까만 군 후배가 되는 주체세력 장교들에게 깎듯이 님자를 붙이던 李厚洛씨는 얼마 안가서 선배대접을 받기 시작하더니 곧 제자리를 찾더란 것이다. 그 비결은 朴의장의 신임이었고 이 신임 덕분에 옛날의 군 선후배 관계를 되찾았다는 얘기다. 李厚洛씨가 자리를 굳히는 데 미국측도 크게 도와주었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李씨의 한 측근은 이렇게 말했다. {한미 관계에서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李厚洛씨가 나서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李씨는 아침에 최고회의(나중에는 청와대)로 출근하기 전에 미국 대사와 아침식사를 같이 하면서 그런 문제의 해결책을 의논하곤 했다. 朴대통령이 물으면 즉시 그의 입에서 대책이 나올 정도였다. 미국 쪽에선 李씨가 끼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도록 문제를 만들어놓곤 했다. 그렇게 하여 李씨는 미국과 한국의 접촉점에 서게 됐고 그의 비중은 저절로 높아져갔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李厚洛씨를 서로가 필요로 하는 상황이 됐던 것이다} 물론 미국이 李厚洛씨를 최고회의 안에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로 이용했다는 물증은 없다. 적어도 미국 CIA는 그렇게 노골적으로, 촌스럽게 외국정부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CIA의 공작은 미국을 위해 일해달라고 지령이나 부탁을 하는 식이 아니라, 눈치 안 보고 자연스럽게(또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도록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다. 미국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朴대통령의 입장에서도 李厚洛씨와 같은 인물은 대미(對美) 지렛대로서 필요한 존재였다. 朴정권 시절의 모 공보비서관은 朴대통령이 사석에서 우스개처럼 {李厚洛, 그 자가 미 CIA 앞잡이라면서}라고 내뱉는 말을 여러번 들었다고 했다. 그런 朴대통령이 李씨를 12년 동안이나 측근에 둔 것은 이용가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락(李厚洛)씨는 미국과 朴정권의 균형점이기도 했다. 그런 줄타기를 하는 데 李씨는 비상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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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KLO 8240 이범구
글쓴이 : KLO8240 이범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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