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고구려 군대의 편성체제-

구름위 2012. 12. 25.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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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대 동아시아의 공.수성 병기

 

 

- 공성(攻城) 무기 -

 

 

 포차()

쇠뇌를 개량한 것으로 크기가 크고 성밖에서 성벽을 부수거나

성안을 공격할 때 사용(서양의 투석기와 비슷함)

 

 

충차(衝車)(성문부수는 장치)

적진이나 성(城)을 공격할 때 쓰던 수레의 하나.

앞, 뒤, 옆, 위가 온통 쇠로 덮여 있어 성문을 부수는데 이용된다

 

 

 

성문이나 성벽 파괴에 동원된 포차(좌)와 충차(우)

머리카락처럼 보이는 줄을 잡아당겨 돌을 날리는 포차가 발달했는데

포차 1대당 작게는 50명 많게는 250명이 동원됐다.

 

 

 소차 (巢車, 이동식 망루)

내부에 사람을 태운 다음 도르래를 이용해 망루를 올리고

성(城) 내부의 사정을 염탐하기 위한 공성무기
이렇게 하면 공성하는 측에서는

성의 취약점이 어디인지 파악할 수 있다.

 

 

 공성용 사다리(雲梯)

마차에 나무판자로 칸막이를 만들고 그 뒤에 우마(牛馬)나 병사가 성벽앞까지 끌어다

위에 올라가 성벽을 공격하거나 사다리를 결쳐 성으로 진격할 수 있게 만든 장치 

 

 

 

 

- 수성(守城) 무기 - 

 

포노(砲弩)

쇠뇌를 개량한 것으로 성위에서 돌을 던진는 무기

 

 

 마 름 쇠

성으로 접근하는 기병이나 보병을 막기 위한 것으로

뾰족한 쇠침이 위로 향하게 만들어 성벽앞으로 뿌림

 

 

 

 

2. 고구려의 군대의 편성

 

 

일단 고구려의 군사 편제는 보병과 기병 양성 혼합체제로 되어있습니다.

 

일단 기병(兵)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고구려 군사행렬을 그린 '안악 3호분 대행렬도' 같은 고분 벽화와 그 시대에 서술했던 여러 기록을 고증해보면

보통 기병은 전체 병종 중 1/4을 차지했으며주로 적진의 진형을 깨뜨리는데 주 목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기병은 경무장기병, 그리고 중장갑기병으로 세분화됩니다.

 

 

 

경무장기병(裝騎兵)은 빠른 기동성이라는 기병 특유의 장점을 살려

상대편 군대의 후,측면을 기습 혹은 상대편 기병과 직접 전투를 벌이거나,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기마 궁수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또 전투에서 승리했을때 패주하는 적의 잔당들을 추격하여 일소하는 것도 이 기병들의 주 역할이지요

이 경무장 기병이 기병의 주력을 이루고 있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경기병의 역할은 나라나 문명권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

봉건시대의 유럽의 경우 경기병은 주로 정찰과 기습에만 사용했던 반면

중세 몽골의 경우는 기병종의 주력을 이루며 치고 빠지는 식의 전술로 적의 기.보병을 직접 상대하였습니다.

고구려도 아마 후자에 속할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특수 임무를 띄는 기마 병종()으로 마갑(馬甲)을 씌우고 기수의 전신에 찰갑(甲)을 무장시켜

적의 화살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중장갑기병(重裝甲騎兵)이 있습니다.

이 기병은 강력한 무장과 돌격력으로 상대편 보병의 진형을 깨트리는 충파(沖破)를 주 임무로 담당하고 있습니다.

말과 기수 전신을 철갑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충돌시 상대편 보병이 입는 타격은 상당하며 주로 장창을 들고

적 진형으로 직진 혹은 측면을 돌파합니다.

이런 기병은 당시 고대 전쟁의 일례를 보면 소수 정예로 운용하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중장갑기병은 전신을 마갑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경기병에 비해

기동성과 지구력이 떨어지며 군사 편제에서 이러한 기병의 수를 늘리게 되면

기동력이 뛰어난 경기병의 기습과 원거리 공격에 약점이 노출됩니다.

 

이인철 군사 제33호(국방군사연구소 발행)

<4~5세기 고구려의 남진경영과 중장기병, 1996年>의 논문 자료를 보면

이 고구려의 중장갑기병은 전체 기병의 30~40%를 차지하고 전체 군사 중 10% 정도로 추정한다고 하네요.

참고로 이런 중장갑기병을 마갑을 씌운다고 해서 개마기병(馬騎兵)이라고도 부릅니다.

 

 고구려의 주력부대는 ‘개마무사(鎧馬武士)’로 구성되어 있었다. ‘개마(鎧馬)’란 기병이 타는 말에 갑옷을 입힌 것을 말하며 개마에 탄 중무장한 기병을 ‘개마무사’라고 불렀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개마무사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못하지만, 함경도에 있는 개마고원이 고구려의 개마무사들이 말 달리던 곳이라는 점에서 유래한 지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개마무사라는 단어는 과거에 우리 민족에게 매우 익숙한 단어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말과 기사 모두를 강철로 된 갑옷으로 무장했는데, 이 개마무사가 5.4미터가 넘는 창을 어깨와 겨드랑이에 밀착시키고 말과 기사의 갑옷과 체중에 달려오는 탄력까지 모두 합하여 적에게 부딪치면 보병으로 구성된 적군의 대형은 무너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최강의 공격력과 장갑을 자랑하는 개마무사의 주 임무는 적진돌파와 대형 파괴다. 개마무사는 현대로 치면 탱크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말조차 강철로 된 장비로 무장시켰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사실 기병이 아무리 용맹하더라도 말이 부상당한다면 전투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으므로 말의 안전은 기병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런데 고구려 기병의 경우에는 말까지 갑옷으로 무장시켰는데, 고구려와 동 시대에 말과 사람을 위한 갑옷을 강철로 만든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를 위해서는 개마를 만들 수 있는 철기문명의 수준과 아울러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고구려의 기본 전력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기본 전력이 타국에 비해 앞섰기 때문이다. 우리 한민족의 무기인 활, 화살 등 기본 장비가 중국보다 월등했다. 특히 안장 밑에 다는 발받침인 등자를 사용하여 화살을 전후좌우로 발사할 수 있는 파르티안 기사법을 구사했다. 또한 이들 기본 전력을 보다 극대화시킨 개마무사도 활용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인 무용총에서 말을 타고 동물들을 사냥하는 무사들의 활은 각궁으로 만궁 중에서도 예맥각궁(복각궁)과 형태가 매우 흡사하며 같은 시대에 중국이 사용하던 활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만궁을 누가 처음으로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지만 한국인의 조상인 예맥인으로 추정된다. 고대 중국인들이 예맥(濊貊)인을 부르는 호칭인 동이(東夷)의 ‘이(夷)’자는 ‘큰 대(大)’자에 ‘활 궁(弓)’자를 연결한 것으로 ‘사람이 활을 쏘는 모습’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각궁은 물소의 뿔로 만든다. 열대에 사는 동물인 물소는 과거에도 고구려 등 기마민족이 있는 북방지역에서는 살지 않으므로 물소 뿔은 결국 지금의 태국이나 베트남, 중국 남부에서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학자들은 이 사실을 들어 과거에도 우리 선조들이 이들 지역과 활발한 무역을 했음이 틀림없다고 설명한다.

고구려의 활은 기병용과 보병용이 다소 다르다. 기병용은 보통 80센티미터(다 폈을 때의 길이이므로 실제로 사용할 때의 길이는 60센티미터), 보병용은 120~127센티미터 정도이다. 위력은 사수의 힘에 따라 큰 차이가 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는 갑옷도 뚫는다. 어떤 장수는 화살 한 발로 사람과 말과 안장을 함께 꿰뚫었다는 기록도 있다. 물론 고구려에서 만궁만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고구려와 친연성을 갖고 있는 흉노(훈족)의 활동 무대에서 만궁과는 다른 한식궁도 발견된다. 한식궁은 뼈나 뿔로 만든 활고자를 부착한 한나라 고유의 중형 활이다

 

 

 

 

 ▲ 한국의 각궁(15세기), 한국의 전통 활은 그 휘는 정도가 만궁 중에서 가장 심하며 활줄을 풀었을 때 거의 완전한 원을 이룬다. ⓒ

 

 

 

고대의 탱크, 개마무사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그림은 말을 질주시키면서 뒤로 몸을 틀어 각궁을 귀에까지 바싹 당기어 명적으로 짐승을 겨눈 무인의 활 쏘는 모습이다. 이런 자세는 경주에서 발견된 수렵문전(狩獵紋塼)에도 보이는데 이를 파르티안 기사법이라고 한다. 파르티안 기사법은 북방기마민족의 전형적인 고급기마술이다.

원래 파르티안 기사법이 개발된 것은 말 타고 활을 쏠 때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앞으로 활을 쏘려면 말의 머리 때문에 방해를 받고 시야에 사각지대가 생긴다. 그러므로 말을 타고 사격할 때는 목표를 측면에서 뒤로 가도록 하고 쏘는 것이 시야도 넓고 효율적이다.

신체 구조상으로도 앞으로 쏘기보다 뒤로 돌아 쏘는 경우가 사격 자세도 안정적이어서 명중률도 높다. 아무튼 이 기술 덕분에 기사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360도 중 어느 방향으로든 화살을 날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파르티안 기사법은 일반적으로 등자라는 획기적인 마구(馬具, 말갖춤)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등자란 장시간 말을 탔을 때 생기는 다리의 피로감을 예방하기 위해 발을 받쳐 주는 가죽 밴드나 발주머니를 의미한다. 기수는 안장에 단단하게 앉아 등자에 다리를 고정시킴으로써 달리는 중에도 상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등자의 발명은 오랫동안 유목민들로 하여금 기마술에 있어 정주민의 기마대를 능가케 하는 데 공헌했으며, 일반적으로 등자는 흉노(훈족)가 발명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중국의 한(漢)대 부조에는 등자가 보이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당시까지 중국의 기병이 돌격할 때 등자 없이 말을 탔다고 볼 수 있다. 말 타는 기술이 수준급이라면 모를까 막상 적과 층돌하면 기사는 그 반동을 감당하지 못하고 말 등에서 떨어지기 일쑤였다. 말에서 떨어진 기사는 상대에게 격멸되기 십상으로 초창기 중국의 기병이 고구려처럼 위력적이지 못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고분벽화에 보이는 고구려의 말은 결코 크지 않다. 『삼국지』에도 ‘말들의 키가 작아 산을 오르는 데 능하다’고 적혀 있다. 한편 부여에서는 ‘명마가 난다’고 했다. 고구려 시조인 고주몽이 어렸을 때 부여왕의 ‘말을 기르고 있었다’고 『삼국사기』는 쓰고 있다.

온달장군의 아내인 평강공주는 시장에서 상인의 말을 사지 말고 나라에 속한 말로 병이 들어 혹은 비루먹어 버리는 말을 사가지고 길러 곧 이것을 되바꾸라고 일렀다. 공주가 말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말사육의 실제적인 기술도 갖고 있었다는 것은 고구려인 대다수가 말을 일상 생활화했음을 암시해 준다.

고구려의 자랑 개마무사

한국의 역사가 항상 외적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고구려의 태조왕과 동천왕은 중국을 수시로 선공하여 기선을 제압했고 차대왕은 중국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할 정도였다. 고구려가 이와 같이 중국을 공격하고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국어대사전』에는 전쟁을 ‘무력으로 국가 간에 싸우는 일’이라고 간단하게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 간의 전쟁은 이와 같은 간략한 설명으로 정의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게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전쟁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은 없다.

비교적 단순한 전쟁이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므로 전쟁 자체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된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벌인 수많은 전투에서 성공한 이유를 이해하려면 당시에 고구려가 운용한 전쟁의 기본적인 요소부터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전력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앞에서 설명한 기본 전력을 바탕으로 다른 국가가 구성할 수 없는 강력한 부대를 운용했기 때문이다. 바로 유명한 중장기병 개마무사이다. 사실상 고구려가 중국을 마음대로 활보할 수 있었던 것은 개마무사의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장기병이란 말과 사람 모두 갑옷으로 중무장한 것을 말한다. 갑옷은 찰갑(札甲, 미늘갑옷)으로 가죽 편에 철판을 댄 미늘을 가죽끈으로 이어 붙였다. 투구, 목가리개, 손목과 발목까지 내려 덮은 갑옷을 입으면 노출되는 부위는 얼굴과 손뿐이다. 발에도 강철 스파이크가 달린 신발을 신는다. 말에게도 얼굴에는 철판으로 만든 안면갑을 씌우고 말 갑옷은 거의 발목까지 내려온다.

 

개마무사의 주무기는 창이다. 이 창은 보병의 창보다 길고 무겁다. 기병용 창을 삭(?)이라 하는데 중국식 삭은 보통 4미터 정도인데 반하여 고구려군은 평균길이 5.4미터에 무게는 6~9킬로그램 정도 된다.

개마무사는 현대로 치면 탱크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최강의 공격력과 장갑을 자랑하는 개마무사의 주 임무는 적진돌파와 대형 파괴다. 고구려의 개마무사가 5.4미터가 넘는 창을 어깨와 겨드랑이에 밀착시키고 말과 기사의 갑옷과 체중에 달려오는 탄력까지 모두 합하여 적에게 부딪히면 보병으로 구성된 적군의 대형은 무너지게 마련이다(물론 모든 창이 이처럼 길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

이와 같이 개마무사가 밀집대형 혹은 쐐기꼴(∧) 대형으로 긴 창을 앞으로 내밀고 돌격하여 적진을 허물면 대기하고 있던 보병 등이 신속하게 투입되어 전세를 장악하면 승패는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전쟁은 항상 상대가 있기 마련이다. 고구려가 개마무사 등 중장경기병을 활용하여 전투를 이겼다면 상대방은 곧바로 패전한 이유를 분석하여 이에 대적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 마련이다.

효율적인 군편제 운용

개마무사의 약점은 말 갑옷의 무게가 최소한 40킬로그램, 장병의 몸무게(약 60킬로그램)와 갑옷 무게를 합쳐서 80킬로그램, 기타 장비를 포함하면 적어도 130킬로그램 이상의 무게를 말이 감당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른 말들에 비해 항상 두 명 이상의 장정이 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병력이 소규모일 때는 재빠른 전진도 가능하지만 대규모 부대가 격돌할 때의 중장기병은 밀집대형을 이루며 매우 둔하게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경우 보병이 오히려 기마병에게 효율적으로 대항할 수 있다.

전쟁의 기본이 ‘보병’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보병이란 한 사람에게 무기 하나씩 들려주는 정도로 기본적인 전투력을 갖추는 병과이다. 더구나 보병은 경제적인 차원에서 일단 ‘값이 싸다’는 것이 정설이므로 인적자원만 공급된다면 많은 숫자를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단원은 임용한 박사의 글을 많이 참조했다.

그러나 보병의 약점은 보병 개개인의 경우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다. 역으로 말한다면 일정한 숫자를 확보하지 못하면 보병은 별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병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전제 아래 대열을 유지하면서 움직인다.

 

보병이 대열을 지어 뭉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인간은 자신을 죽이려고 준비하는 적군이 몰려오거나 적에게 다가갈 때 누구나 죽음의 공포를 느낀다. 공포에 휩싸인 병사들이 제대로 싸울 리 없으므로 지휘관은 이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모든 힘을 경주한다.

병사들이 공포를 떨쳐버리고 자발적으로 전투에 임하도록 하는 것이 ‘사기’다. 그런데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건 생명체로서 본능이기 때문에 아무리 정신교육을 잘 시킨다 해도 쉽사리 떨쳐버릴 수 있는 성질은 아니다. 그러므로 보병을 운용할 때 개인 활동을 금지하고 대열을 짓도록 하여 장병들이 심리적인 안정을 갖도록 유도한다.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같이 싸워줄 전우가 있다면 용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보병이 대형을 유지한다는 것도 제식훈련처럼 약간 떨어져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장병들의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바짝 붙인다는 것을 뜻한다. 이른바 ‘밀집대형’을 이루어 대열 전체가 하나의 기계와 같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밀집대형이 전투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는 고대 그리스군이 숫적으로 압도적인 페르시아와의 전투 결과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리스는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유명한 삼각밀집대형을 창안했다.

그리스(마케도니아)는 일개 중대를 160명으로 편성하여 한 줄에 20명씩 여덟 줄을 이루고 행진을 했다. 그들 모두 기다란 창과 방패를 갖고 밀집해서 행진을 했으며 적군을 만나면 삼각형으로 형태를 변형하여 수비 태세에 들어간다. 이를 유명한 ‘삼각형밀집방형진’이라고 부른다. 전면에 있는 군인이 부상당하면 바로 그 자리를 뒤에 있던 장병이 채우도록 하여 대형 전체는 항상 삼각형으로 유지되었다.

‘환타생’이라고 불린 이 삼각형밀집방형진은 고대 전투 사상 양측의 병력이 직접 충돌하는 평지의 보병전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대형이다.

그러므로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침략했을 때 그리스인들의 이 같은 진형을 정공법으로는 격파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직접 전투를 피하고 포위한 후 화살을 쏘거나 갈증과 허기로 지쳐 쓰러지게 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그러나 이런 밀집대형도 로마군단의 변형 작전에 의해 격파되었다.

로마군은 그리스 대형에 맞서기 위해 먼저 어린 병사들로 구성된 투창병을 내세웠다. 로마군이 사용하던 투창은 끝이 무겁기 때문에 그리스 진형의 앞 대열에서 장창을 사용하더라도 떨어뜨릴 수 없었다.

 

투창병들이 방진의 앞 대열과 중간 대열을 흐트러뜨리는 사이, 키가 작은 로마 군병들이 작은 단검을 들고 방진 밑으로 침입하여 공격한다. 이 때문에 대열이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하면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로마의 주력군이 돌진하여 방진을 무너뜨렸다.

로마군은 하나의 통일체가 아니라 소대형과 백인대 등의 작은 부대로 구성된 집합체로 이들의 역할과 간격을 적절히 배치해 마케도니아의 밀집대형을 무너뜨렸다. 로마군의 승리는 아무리 견고한 방진이라도 침착하게 맞선다면 이를 뚫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상황에 따라 변형 작전을 구사하였고 후대에는 귀갑형(거북형)이라는 유명한 밀집대형을 발명한다.

그러나 이들 귀갑형도 100전 100승을 한 것은 아니다. 로마가 운용하는 밀집대형의 위력을 잘 아는 국가는 로마군의 대형을 먼저 허물어뜨리거나 허물어지기 직전의 상태가 되도록 유도하는 작전을 수립했다. 즉 아군이 적의 대형을 뚫고 들어가 적의 후면이나 측면을 먼저 포위하는 방식을 구사했다.

 

 

 

개마무사의 취약점을 보완하라

 

 
대열을 만들 때의 또 다른 장점은 대열에 묶여 있는 병사들이 개인행동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대열 중에 있는 병사가 도망가려면 주변 전우들의 행동과 반대로 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대열에서 한두 명이 이탈한다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곧바로 명령불복종이나 탈영자 등으로 낙인 찍혀 현장에서 곧바로 처형되기 일쑤다. 탈영자가 생길 경우 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지휘관들이 본보기로 처단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보병의 중요성은 보병 개개인은 전투력과 기동력에서 기병보다 떨어지지만 산악지형에 취약한 기병과는 달리 어떤 지형에서든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보병은 기병과 달리 무장과 무기의 종류가 다양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보병의 역할이 세분화되고 전문화됨에 따라 일반적으로 경보병과 중장보병으로 분류한다.

경보병대의 주력은 도끼를 맨 도부수이다. 도끼는 내려치는 힘이 매우 강해 투구를 쪼개고 갑옷을 찢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갑옷은 창과 화살같이 찌르는 힘에는 강하지만 베거나 도끼와 같은 강한 충격을 동반한 공격에는 취약하다.

반면에 중장보병은 기병과 같이 갑옷을 입고 창과 길쭉한 방패를 들었다. 이들은 최정예군으로 경보병처럼 밀집대형을 이루며 보병대열의 최전방에 배치되는 것이 기본이다. 특히 이들이 사용하는 갈고리 창은 기병을 말에서 떨어뜨리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고 임용한 박사는 적었다.

보병이 중장기병에 맞설 수 있는 것은 기병은 말이라는 동물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말은 장애물을 싫어하고 겁이 많은 동물이다. 그러므로 말은 아무리 기수가 명령을 해도 자신을 겨누고 있는 창날이나 장애물 앞으로 무모하게 돌격하지 않는다. 또한 말은 일반적으로 자신에 의해 인명이 살상될 경우 전진하지 않으려고 한다.

영화 「간디」에서 인도의 무저항 시민들이 영국의 기병이 돌격하자 말들은 절대로 사람을 밟고 넘어가지 않는다며 대형을 흐트러뜨리지 말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 것도 말의 특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강력한 개마무사들이 돌진하면서 적진을 돌파하려 해도 수비군이 밀집중장병대로 구성되어 개마무사의 공격에 대항한다면 기병의 특성상 오히려 개마무사가 역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앞에 설명한 동천왕의 무적 개마무사가 관구검의 군대에 패배한 예로서도 알 수 있다. 관구검의 군대를 계속하여 격파한 동천왕은 승세를 굳히기 위해 철기군 5천명만 데리고 쫓아가다가 위군의 역습을 당해 대패했는데 원래 대오를 잃고 마구잡이로 도망치는 군대를 섬멸하는 것은 기병의 몫이지만 기병이 단독으로 보병진지에 정면 돌격한다면 역습을 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중국군이 철수하면서도 밀집방형진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즉 관구검군은 무질서하게 평야를 향해 도망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작전을 펼치기 위한 장소로 퇴각하는 중이었다고 볼 수 있다.

승승장구하며 위나라 군을 쫓고 있던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밀집대형의 장창 앞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관구검군의 밀집대열이 똘똘 뭉쳐 전진하기 시작하자 고구려 기병들은 장창에 쓰러지기 시작했고 이 틈을 타서 위군의 기병들이 공격하자 고구려군은 삽시간에 와해된 것이다.

고대 전투에서 보병이 기병을 격파하는 경우가 자주 생기는 이유이다. 더구나 지형에 따라서는 기병의 활약이 크게 제한되므로 오히려 보병이 전투를 주도하기도 한다.

고구려는 막강한 동천왕의 개마무사가 패배한 것을 거울삼아 개마무사의 약점을 경기병이라는 또 다른 기병을 투입하여 보완했다.


<경비병의 활약>

보병과 중장기병의 약점을 보완해주는 경기병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은 고대 전투에서 현대의 고사포를 발사하는 역할의 궁수가 큰 변수가 되기 때문이다.

궁수는 보병과 기병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보병과 기병은 양 군이 접근하기 전까지는 적에게 아무런 타격도 가하지 못한다. 반면에 궁수는 적에게 접근하지 않고도 화살을 발사하여 공격할 수 있다. 즉 궁수는 보병과 기병만으로 구성된 적의 부대를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궁수는 공격 때 아군을 엄호하고 수비 때는 돌격해 오는 적군을 공격하는 임무를 갖는다. 고구려군이 원거리에 있을 때는 진형의 전열에 서거나 또는 중장보병의 엄호를 받으면서 사격하고 고구려군이 접근하면 2선으로 후퇴하면서 사격한다. 영화에서 보병이나 기병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거의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자주 보이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군사강국이었던 가야가 고구려에게 패배한 요인이다.

아직까지 가야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상태이지만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 연맹국가로 500년 이상 존속했고 한때 한반도 남부의 패권을 노리던 군사강국이라는 점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학자들은 신라와 가야가 존속했던 초기, 해당 지역에서의 영향력은 신라보다 가야가 더 컸다고 인식한다. 이와 같이 가야가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철 생산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이것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키웠기 때문이다.

가야는 병력의 대부분을 우수한 철제무기와 보호구(갑주, 투구)로 무장시켰다. 뿐만 아니라 가야는 기마부대에 철갑을 공급해 중기병을 양성했다고 김성남 박사는 적었다.

그러나 가야의 중기병은 고구려와 차이가 있다. 고구려는 말까지 갑옷을 입힌 개마병사인 반면 가야는 그 당시 동아시아의 일반적인 갑옷 형태인 찰갑이 아니라 판갑을 착용했다.

찰갑은 피갑 즉 가죽 위에 쇠를 덧씌운 것이고 판갑은 큰 철판을 앞뒤로 이어 몸을 둘러싸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판갑을 착용한 부대를 단순히 중기병이라 하고 찰갑을 사용한 부대를 중갑기병이라고 한다.

찰갑은 창검에 대한 방어력이 다소 떨어지지만 쇳덩이들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착용하고도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반면에 판갑은 무기에 대한 방어력은 뛰어나지만 기동력에는 제한이 있다.

가야의 주력군은 기마병이었으며 왜(倭)군을 용병으로 이용했다. 『삼국사기』에 왜가 신라를 공격했다는 기사가 나오는 이유이다.

전투가 벌어지면 장갑보병들이 앞에 서고 기마병들이 그 뒤를 이었으며 용병인 왜군과 궁병들이 뒤를 따랐다. 그러므로 가야와 왜의 연합군은 경무장의 궁병과 창병, 중무장 보병과 중기병이 혼합된 탄탄한 전력을 갖고 있었다.

여러 해를 거쳐 신라를 공격하던 가야는 마침내 399년 왜와 함께 신라를 공격했다. 가야의 동맹인 왜는 울산광역시 남구에 있는 태화강구에 상륙하여 막강한 가야의 중기병과 함께 신라군을 거의 멸망의 단계까지 몰아갔다.

이때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5만의 정예병을 급파했다. 고구려의 남쪽 전진기지인 남평양(현재의 평양)에서 경주지방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530킬로미터인데 고구려군이 경주지방에 도착했을 때 왜군은 신라를 약탈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고구려군은 곧바로 이들을 격파하여 왜군은 극소수만이 살아남아 도망칠 수 있었고 가야군은 왜의 패잔병을 수습하여 급히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고구려군과 가야의 중기병이 격돌했다.

그런데 가야는 고구려의 기본 전력을 간과하고 동천왕이 실패한 전철을 되풀이했다. 그들은 고구려군을 발견하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수천 명의 중기병으로 돌격하게 했다.

그런데 그들의 앞에 나선 것은 고구려의 역전의 명사 개마무사가 아니라 맥궁으로 무장한 고구려 궁사들이었다. 가야의 중기병들은 고구려의 화살들이 판갑옷을 관통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가야군들이 고구려가 자랑하는 활의 위력을 무시한 것은 곧바로 치명상이 되었다. 가야의 중기병들은 하나둘씩 쓰러졌고 결국 무방비 상태가 되자 개마무사들이 뛰쳐나와 가야군들을 공격했다. 이 전투의 결과 가야군은 중기병과 보병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병력을 잃었다고 김성남 박사는 설명했다. 이 전투를 남해안대전이라고 부른다.

이 전투를 통해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금관가야는 하향곡선을 그리며 현 부산지역에 해당하는 영토를 신라에게 빼앗긴다. 이 지역은 상업을 위주로 성장한 금관가야의 무역 중심지이기도 하다.

멸망 직전의 신라는 광개토대왕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하고 영남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결국 후일에 삼국을 통일하는 강력한 국가로 발전한다.

 

 

 

개마무사는 승리의 보증수표

 

가야는 고구려 활의 위력을 몰라서 패배했지만 중국은 활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기병의 약점은 앞에서 설명했지만 밀집대형을 이루면서 천천히 진격해야 한다는 점이다. 중국은 이러한 기병의 약점을 파악하고 밀집한 궁수들로 하여금 무차별로 화살을 발사토록 했다. 간단하게 말해 기병들은 반드시 집중 공격을 당할 것을 예상하고 궁수들이 발사하는 집중 화망을 뚫고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개마무사가 태어난 것도 기병의 약점 때문이다. 기병은 사람보다 훨씬 체구가 큰 말을 동반해야 하므로 화살의 집중 화망을 뚫을 때 말이 사람보다 화살을 더 많이 받게 된다. 군마의 부상은 기병에 치명상을 주므로 고구려가 개마로 말의 외부를 감싸도록 해 부상을 방지토록 한 것이다.

더구나 아무리 많은 궁수를 동원하더라도 활의 공격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개마무사의 장점이다. 개마의 효용성은 궁수가 쏜 화살이 갑옷을 뚫고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유효 살상거리는 약 50미터이고 절대 살상거리는 30미터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일단 화살의 유효 살상 거리 안에서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의 화망을 뚫기만 하면 궁수들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중국의 궁수들이 개마무사들에게 집중해 화살로 공격하더라도 한두 번밖에 화살을 발사할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다. 더구나 기병은 5미터나 되는 창을 갖고 있으므로 궁수나 보병과의 간격이 20~30미터 거리로 좁혀지면 기병의 포위망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 개마무사가 화살을 피하는 순간 이미 궁수에게 다가와 창으로 공격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가야는 고구려의 위력을 간과해 패망했지만 중국의 경우 고구려와 수많은 전투를 치렀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즉 궁수의 역할에 한도가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또 다른 방비책을 준비하곤 했다. 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장면이지만 화살망을 뚫고 중장기병이 공격해 오면 20~30미터 정도의 저지선에 각종 장애물을 설치해 함정에 빠지도록 한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영국의 중장갑기병이 돌진하자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 순간에 기다란 목창을 들어 중장갑기병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도 중장갑기병의 약점을 철저하게 분석해 대비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중장기병의 경우 장갑력은 강하지만 보병에 비해 대형이 쉽게 허물어진다는 약점이 있으므로 진격이 저지되면 곧바로 대기하고 있던 보병이나 준비된 기병들이 역으로 공격에 나선다. 중장기병이 육박전에 휘말리게 되면 오히려 패배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개마무사에 대한 중국의 대비책을 무산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경기병 제도를 도입했다. 경기병은 대체로 중무장하지 않고 말의 기동력과 활솜씨로 중장기병의 돌격을 엄호하고 적진을 초토화하는 임무를 갖는다.

물론 이들이 연합하더라도 보병 밀집 대형의 중앙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측면 또는 약한 부분을 공격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경기병대는 주로 맥궁으로 무장한 후 적군의 궁수와 보병을 상대로 활을 발사해 적진을 혼란에 빠지도록 하는 임무를 갖는다. 맥궁의 사정거리가 중국 활보다 긴 것은 물론 파르티안 기사법으로 무장했으므로 어느 장소에서건 재빠르게 화살을 발사하고 빠지는 데 적격이다.

전투력이 강한 군대라 할지라도 경기병대가 공격해오면 이들과 대항하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다 체력을 소모해야 하므로 대형이 흐트러지기 십상이다.

만약 적진이 완강해 대형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경기병대는 무리하게 충돌하지 않는다. 이럴 때 고의적으로 후퇴하는 위장술을 겸용하기도 하며 상황에 따라 집요하게 계속적으로 공격해 한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다. 가랑비에 옷이 젖고 집요한 매에 당해 낼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수비군의 전투력이 떨어지면서 약점을 보이면 준비된 개마무사가 출동해 승부를 결정짓는다. 훈족(흉노)이 막강한 로마군을 비롯한 게르만 족을 격파한 비법은 바로 기동력을 기반으로 공격과 후퇴를 번갈아 가면서 승리할 때까지 고삐를 늦추지 않는 데 있었다.

중장기병대와 경기병대는 상호 보완하면서 함께 출동해야만 전투 효과가 배가되므로 군의 체계에 따라 중장기병과 경기병대 숫자를 조정했다.

고구려보다 후대이기는 하지만 금나라는 아예 기병대 자체를 20명의 중장기병과 30명의 활로 무장한 경기병으로 섞어 편제했다. 고구려에 대한 자료는 없지만 이와 유사한 형태를 운용했을 것으로 임용한 박사는 추정했다.

중장기병대는 다른 병종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으로 선발된다. 말과 갑옷이 매우 비싼 장비였고 기마술은 상당히 전문적이고 오랜 훈련을 요구하기 때문에 지배층이 아니면 중장기병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군마는 소처럼 여물을 먹이지 않고 반드시 생초나 곡물을 먹여야 한다. 더구나 기마술을 익히려면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러므로 중장기병은 전쟁에 나갈 때에도 종자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개마무사의 장점은 철이지만 철의 약점은 녹이 잘 쓰므로 갑옷을 매일 닦아주고 기름 치고 조여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당연히 중장기병대는 보병에 비해 숫자가 매우 적을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보병과 기병의 비율은 3 대 1 정도이며 또한 중장기병을 전체 기병의 40퍼센트(금나라를 계상) 정도로 설정한다면 전체 병력의 10퍼센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여하튼 고구려는 기병과 보병을 유효적절하게 활용했다. 고구려가 연전연승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무모하게 개마무사 등 최정예 부대들을 운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고구려가 당대의 패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력부대를 개마무사로 무장할 만큼 최첨단 군수품으로 무장했고 적절한 작전을 구사하는 유능한 지휘관이 있었으며 당연한 일이지만 장병들의 전투력 즉 사기가 높았다는 것을 뜻한다. 개마무사가 승리의 보증수표였음은 의미한다.

<개마무사는 철기 생산이 확보돼야>

전쟁의 역학구조상 상대방이 우수한 장비를 갖고 있다면 그 장비를 재빨리 모방하거나 보다 개선해 다음 전쟁에 활용하는 것이 상식인데 중국은 개마무사가 무적이라는 것을 알고도 개마무사를 주력군으로 육성하지 않았다.

물론 중국 역사를 통틀어 기마병을 전혀 도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한 기병은 북방기마민족들이 중국을 점령했을 때 또는 중국의 용병으로 이민족들을 활용했을 때 활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이 개마무사의 위용을 잘 알고 있음에도 개마무사를 채택하지 않은 이유로 학자들에 따라 중국 특유의 전술에 기인한다는 설명도 있지만 보다 근원적인 요인으로는 중국의 제철 능력의 한계 때문으로 인식한다.

쉽게 이야기해 보면 고구려는 개마무사로 무장할 수 있는 철 생산 능력이 있었던 데 반해 중국에서는 철 생산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철의 종류를 구분할 때는 탄소 함유량을 기준으로 한다. 탄소 함량에 따라 주철(선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1.7~4.5%), 강철(탄소 함량 0.035~1.7%), 함유량이 적은 연철(시우쇠, 단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0.035% 이하)로 나뉘는데 용도에 따라 적절한 것을 택한다. 이 중에서 강철이 가장 늦게 발견됐다.

성질이 다른 철을 만드는 기본 제련 방식은 유사하다. 과거에 철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는 두 가지로 바로 철광석과 숯이다.

산화철은 700~800도의 낮은 온도에서 환원되므로 철은 액체 상태로 되지 않고 절반쯤 녹다 만 상태에서 굳는다. 이렇게 얻은 연철(괴련철)을 단조하면 철기를 만들 수 있다. 제련로의 온도를 높이는 방법이 간단한 것은 아니므로 대부분의 고대국가에서는 이러한 공정을 거쳐 철기를 제작했다.

고대 사극에서 자주 보이는 것은 좋은 칼을 만들기 위해 용광로에서 나온 철을 불에 달구고 두드리기를 반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쇠를 두드리면 단단해지는 것은 쇠의 금속 성질 때문이다. 쇳덩이를 현미경으로 자세히 확대해서 보면 네모, 육각형, 오각형 등 모양만 다양한 게 아니라 크기도 제각각이다. 당연히 이런 조직들이 온도에 따라 조금씩 다른 특성을 나타내게 된다.

두드리는 동안 괴련철 속의 규소 등 이물질이 압출되고 조직이 치밀해진다. 그리고 이물질 중 배출되지 않는 것도 조직 안에 고루 분산되므로 조직이 균일화되고 전체적 강도가 높아지게 된다. 또한 가열된 괴련철을 숯에 넣으면 숯의 탄소가 철에 흡수돼 자연스레 철의 표면은 적당한 탄소를 함유한 괴련강(塊鍊鋼 : wrought iron)이 되며 이를 침탄법이라고 한다.

우리 선조들은 쇠의 날과 등의 두께를 달리하면 쇠의 성질을 인공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쇠의 색깔이 황혼 빛에 이르는 순간을 포착해, 안쪽 날부터 시작해 등 부분까지 순간적으로 물에 담그는 것을 반복했다. 날 부분은 갑작스레 담금질하면 갈라질 수 있기 때문에 손끝에서 나오는 숙련된 기술이 필수적이었다. 이런 과정을 수백 번에 걸쳐 반복하면서, 날 부분은 강하게 만들고 가운데와 등 부분은 약하지만 유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칼은 칼의 표면 부분만 탄소가 함유된 강철이고 그 안쪽은 여전히 연철이므로 칼을 사용함에 따라서 표면의 강철은 부서지게 되고 칼이 강한 충격을 받으면 쉽사리 휘게 된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점은 칼 한 자루를 만드는 데 드는 시간과 인력이 너무도 과다하다는 점이다.

 

 

개마무사,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니다

 

침탄법으로 철을 만들 수 있지만 청동처럼 철을 주물로 부어 칼의 형태를 만들고 마무리 단조를 통하면 칼의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다. 이를 선철(주철, cast iron)이라고 한다. 그런데 철을 녹이기 위해서는 순철의 경우 1천535도 이상이 돼야 하는데 고대에 1천500도 이상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 장인들은 용융점을 낮추는 방법을 고안했는데 그 비결은 철에 탄소가 함유될수록 녹는점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이때의 연로로 질이 좋은 숯을 사용한다.

제련로 안의 온도가 올라가면 CO 가스가 형성된다. 제련로 안의 온도가 700~800도에 이르면 CO 가스에 의해 철산화물이 Fe2O3 → Fe3O4 → FeO → Fe 순으로 환원되며 환원된 철은 탄소와 접촉하여 Fe3C로 된다.

한편 제철로 안의 온도가 1천50-1천100도에 이르면 광석 중에 포함돼 있던 맥석 성분이 석회와 작용하여 광제가 1천200도 이상의 온도에서는 액체 상태의 선철과 분리된다. 따라서 제철로 안에서는 쇳물과 용융된 광재가 생기는데 광제는 쇳물보다 비중이 작으므로 쇳물 위로 뜰 때 이를 분리하여 쇳물을 뽑아낼 수 있는데 이때의 선철은 약 3~4퍼센트의 탄소가 함유돼 있다.

선철(주철)은 보통 백색주철과 회색주철로 나뉘는데, 백색주철은 탄소가 탄화물 형태로 결합돼 흰색을 띠므로 백색주철(철탄소합금계 가운데서 용융점이 1천130도로 가장 낮은데도 주조성이 좋으며 강도가 높고 내마모성이 좋다)이라고 부르며 회색주철은 탄소가 흑연형태로 포함되면서 겉면에 퍼져 회색빛을 띠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쇳물을 그대로 주형에 부어 칼을 만들면 외형은 나무랄 데 없는 칼이지만 나무 등을 세게 치면 곧바로 깨져버린다. 날을 세우려고 망치로 두드려도 깨져버리고 숫돌로 갈아도 워낙 경도가 높아 제대로 날이 서지 않는다.

관건은 주철에서 탄소를 적당히 제거하는 것으로 비밀은 주철을 고열에서 일정시간 가열해 주는 것이다. 주철 표면의 탄소가 산소와 결합하여 제거된다. 또한 철은 온도 변화에 따라서 탄소함유율이 낮은 페라이트상과 탄소 함유율이 높은 오스테나이트상을 오가므로 이 과정에서 철 내부의 탄소가 유리돼 한 곳으로 뭉쳐 흑연덩어리를 형성해 철 자체의 탄소량이 감소한다. 이렇게 가열가공을 거쳐 탄소량을 2.3~3.4퍼센트로 만든 전성주철(展性鑄鐵) 혹은 가단주철(可鍛鑄鐵)은 연성이 있어 어느 정도의 단조작업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방법의 문제는 재가열 과정에서 철이 산화되는 것은 물론 탄소량의 감소가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철 내부의 흑연괴로 인한 경도 약화로 농기구 등을 만드는 데는 문제가 없으나 무기에 사용할 수 있는 정도의 고강도의 철 즉 강철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장인들은 고강도의 철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소위 선철에서 손쉽게 탄소를 제거하는 방법인데 가장 먼저 개발된 방법은 초강법(炒鋼法)이다. 초강법은 녹은 상태의 주철에 고운 흙이나 산화철 가루 등 탈탄제(脫炭劑)를 넣고 저어서 주철의 탄소가 철광석 가루와 결합하여 제거되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탄소가 제거되면 철의 용융점이 높아져서 곧 굳게 되므로 잘 저어주고 센 불로 계속 가열하여야 한다. 이 경우 약 2퍼센트의 탄소를 함유하는 비교적 고품질의 강철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의 문제점은 탄소 함유량을 정확히 조절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의 방법은 관강법(灌鋼法)이다. 주철과 순철(연철)을 함께 섞어 열을 가하면 탄소함유율이 높은 주철이 1천200도 내외에서 먼저 용해된다. 순철은 주변의 주철로부터 탄소를 흡수하면서 용융점이 낮아져 1천300-1천400도에서 녹아 주철과 섞이게 된다. 이렇게 되면 탄소량이 과다한 주철은 탄소를 잃고 탄소량이 부족한 순철은 탄소를 얻게 돼 적절한 탄소량을 가진 강철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강법은 초강법에 비하여 탄소량의 조절이 보다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고고학사에 의하면 기원전 25세기경 수메르에서 철기를 만들었으며 강철은 아르메니아 지역의 히타이트족이 기원전 2천 년경에 개발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강철을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것이 아니라 연철의 표면을 침탄법으로 열처리하여 강철로 변화시킨, 질이 낮은 것이다. 이 기술은 히타이트족이 계속 주조법을 독점하다가 그들이 멸망하자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철이 생산된 지 거의 10세기가 지난 기원전 12-10세기가 돼서야 이란, 팔레스티나, 메소포타미아 및 지중해 동부 지역에서 강철이 제련된 것도 그 때문이다.

한편 중국에서의 철기 사용은 기원전 1100년경으로 올라가지만 기원전 7세기인 춘추전국시대에 비로소 주철의 주조가 가능했다. 이는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서야 중국에서 진정한 철기시대가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이때의 제강법은 단철을 여러 번 불에 넣어 단련함으로써 강철을 얻었으므로 백련강(百鍊鋼) 천련강(千鍊鋼)이란 명칭만으로도 그 제조의 어려움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단조에 의해 생산되는 철제무기는 매우 고가여서 극히 일부에서만 사용됐으므로 정작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통일제국 성립 후까지도 여전히 청동제 무기만을 사용했다. 청동을 사용하는 진나라가 철기를 사용하는 열국들을 격파한 것은 고대사의 미스터리 중에 하나이다.

초강법(炒鋼法)이나 주철탈탄강법(鑄鐵脫炭鋼法)을 사용한 강철은 한나라 초기인 기원전 1세기경에 비로소 나타나며 이후 더 이상의 제철기술 발전이 미미하여 문화혁명기까지도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제철이 이루어진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문화가 진전됐다는 학설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의 철기는 중국보다 당연히 늦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철기시대가 언제 시작됐느냐는 문제는 대체로 두 가지 설로 나뉜다. 그 하나는 중국 전국시대(기원전 475-221년)에 ‘명도전(明刀錢)’과 함께 유민들이 한반도로 유입되면서 철기문화가 들어왔다는 설이며, 다른 하나는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할 때 한나라의 금속문화가 도입됐다는 견해이다.

그런데 중국 전국시대의 유적지 가운데 철기가 출토된 지방은 20여 군데에 이르고 있는데 대부분의 지방이 고조선 영역이다. 이것은 이들 유물이 중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살고 있던 고조선인들에 의해 개발됐다고 믿는 것이 자연스러운 추론이다. 즉 중국과 완전히 다른 청동기술을 발전시킨 고조선에서 철기도 독자적으로 발전됐다는 뜻이다. 특히 고조선은 그 당시 세계 어느 나라도 갖지 못한 첨단 기술인 강철을 주조하는 기술까지 갖고 있었다.

평양의 강동군 송석리 1호 석관 무덤에서 나온 직경 15센티미터, 두께 0.5센티미터의 쇠로 된 둥근 거울은 앞면이 매끈하고 뒷면에 1개의 꼭지가 붙어 있는데 절대 연도가 무려 3104±17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탄소 함량이 낮은 강철은 용광로에서 선철과 산화제를 작용시켜 얻는데 이 쇠거울의 화학 조성은 탄소가 0.06%, 규소 0.18%, 유황이 0.01%인 저탄소강이었다.

더구나 탄소가 적은 저탄소강임에도 불구하고 굳기가 연철보다 강하고 유황도 매우 적은 양이다. 일반적으로 탄소 함유량이 1.0% 미만인 저탄소강은 온도가 적어도 1천500도 이상 되는 용광로에서 직접 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쇠거울은 연철이나 선철을 두드려 만든 것이 아니고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쇳물로 주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양시 강동군 항목리에서 출토된 쇠줄칼은 연대가 다소 내려가는 기원전 7세기경의 탄소 공구강인데 겉면에 격자 문양이 나 있어 줄칼 형태를 모두 갖추고 있다. 재질은 탄소가 약 1.0%, 규소 0.15%, 유황이 0.0007%였으며 줄칼에 단접부가 없고 높은 온도에서만 형성되는 조직을 갖고 있다. 이 쇠줄칼도 쇠를 완전히 용융한 상태에서만 얻을 수 있으므로 중국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강철다운 강철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고조선 지역에서 발견되는 강철의 비율을 볼 때 고조선 장인들이 제련로 안의 온도를 적어도 1천400도 정도 유지한 상태에서 철을 14-16시간 정도 녹여냄으로써 질 좋은 강철을 생산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고조선 장인들이 이와 같은 철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제련로의 완벽한 설계, 연료와 탄소 공급원으로서의 숯의 사용, 효율적인 송풍관 등 덕분이다.

고조선 영역의 철 생산지는 매우 광범위하다. 대표적인 것은 은율 일대 노천 철광상으로 철제 망치와 징이 출토됐다. 또한 『고광록』에는 요하 하류 지역(요동)인 안산과 철령(쌍성), 개주(개평), 요양, 승덕, 심양 등지에서 주로 자철광과 적철광을 채취하여 철을 생산했다고 적혀 있다.

고조선 지역에서 생산된 강철이 주목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서아시아에서도 강철이 생산되기는 했지만 저급품이었다. 그런데 고조선에서 생산된 강철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확보하지 못한 고온의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질 좋은 것으로 그 연대도 무려 기원전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이 고조선이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는 근거이다.

한민족이 건설한 2번째 국가로 추정되는 부여의 경우도 철기 생산에 있어서는 선진국이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부여의 군사들이 투구ㆍ활ㆍ화살ㆍ칼ㆍ창을 병기로 삼고 집집마다 갑옷과 휴대 가능한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거의 다 철로 만든 것이다.

부여 영역에는 오늘날의 길림성, 흑룡강성,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 일대 등 철 생산지가 많다. 무산군 범의구석 유적에서도 연철제품이 발굴됐고 이들은 기원전 7-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곧바로 다음 단계인 선철 생산 단계로 이어진다.

강철은 기원전 2-1세기에 제련됐는데 무산군에서 발견된 강철 도끼는 탄소가 1.55퍼센트, 규소가 0.10퍼센트, 망간이 0.12퍼센트, 연이 0.07퍼센트, 유황이 0.08퍼센트였다. 이 도끼는 탄소의 함유량이 1퍼센트 이상인 매우 단단한 극경강으로 부여 사람들이 제품의 용도에 맞게 철을 자유자재로 다루었음을 보여준다.

고조선과 부여의 제철 기술이 고구려로 전승돼 각종 장비를 질 좋은 철로 만들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론이다. 2001년과 2004년 아차산 제4고구려보루에서 출토된 철기를 대상으로 최종택, 박장식 교수가 금속학적 미세조직을 분석한 결과 연철을 대상으로 한 침탄제강법과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관강법(灌鋼法)으로 강철을 만든 흔적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고구려에서 고대 철기기술의 양대 산맥으로 볼 수 있는 두 가지 제강법은 물론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제강법을 사용하여 각 제품에 알맞은 철기를 제작했음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고구려 독자의 철강 기법으로 여러 가지 철기를 만들었다는 뜻이며, 고구려의 철기문명 수준이 매우 뛰어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동천왕이 철기병 즉 개마무사 5천 명을 동원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그들을 무장시키기 위한 철의 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개마무사 1인당 말 갑옷 최소한 40킬로그램, 장병의 갑옷 무게 20킬로그램, 기타 장비를 포함하여 10킬로그램을 휴대한다고 해도 최소한 70킬로그램의 철이 소요된다. 이를 5천 명에 적용한다고 단순하게 계산하더라도 350톤의 철이 필요하며 예비량을 가정한다면 최소한 500여 톤이 필요하다.

현대의 제철 기술로는 500여 톤이 그다지 크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약 1800년 전에 이 정도로 많은 양의 철을 생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앞선 철기문명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고구려의 저력은 중국보다 앞선 철기문명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고려할 때 최근 인기 있는 TV 역사드라마에서 부여가 강철을 만들 수 있는 초강법을 터득하지 못하고 절절 매고 있을 때, 중국의 한나라는 철기군을 운용하고 있는 모습은 실제의 역사와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알지 못하고 막연하게 우리 민족은 중국 한(漢)족에 비해 문명의 수준이 뒤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매우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BC 7세기 철기유물 강원 홍천서 출토(2007년 10월 21일 연합뉴스)

 

 

개마무사는 고구려의 발명품

 

사상 최강의 고구려를 이끈 개마무사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느냐에 의문이 있는 모양이다. 어느 발명이나 마찬가지로 개마무사가 고구려에서 갑자기 탄생했다고는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 속의 중장기병>

일부 학자들은 중장기병의 뿌리를 기원전 7~6세기경의 아시리아로 추정한다. 아시리아 기병의 말에 천이 씌워진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에도 중장기병을 보유했던 것으로 설명된다. 그리스의 역사가 크세노폰(Xenophon)은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의 근위기병들의 경우 말에도 보호장비가 있었다고 적었다. 그에 의하면 말 머리에는 청동제 금속판이 씌워져 있고 말 가슴에도 청동제 아프론(Apron)이 씌워져 있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중장기병의 기원을 그리스에서 찾는다. 영어에서 중장기병을 의미하는 ‘cataphracts'라는 말도 고대 그리스어 ’Cataphractii'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신재호는 중장기병의 기원을 그리스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리스의 중장기병은 알렉산더 대왕 시절 마케도니아의 중기병(Companion)을 제외하면 그렇게 강력한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의 주력은 환타생을 구성한 중장보병(Hoplite)이었다.

그러므로 많은 학자들이 중장기병의 기원을 강력한 기마민족이었던 스키타이로 간주한다. 이들은 기원전 3~2세기부터 현 동유럽 지역에서 공포의 기마민족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러므로 이들과 인접해있던 아르메니아, 파르티아, 페르시아 등이 중장기병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스키타이를 이은 사르마타이도 중장기병을 보유했다.

로마도 중장기병이 있었지만 이들은 로마인이 주축이 된 병종은 아니었고 사르마타이를 비롯한 식민지 병사 혹은 용병들로 구성됐다. 최초로 사르마타이 기병이 로마군에 포함된 시기는 기원 65년 무렵이며 기원 365년 콘스탄티누스 2세도 중장기병을 보유했다고 한다.

개마무사에 대한 유물이 많지 않다는 것은 개마무사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그리스의 유적인 유프라테스 언덕(Eupharates)에서 개마가 출토됐는데 이 유적은 기원전 4세기경에 건설되고 기원후 256년에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된 곳이다. 그러므로 개마의 하한선은 기원후 3세기로 볼 수 있는데 이 마갑은 전형적인 철갑 형태이며 안면부, 목, 몸통의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고 몸통 부분은 말 전체를 감싸는 것이 아니라 안장의 앞부분 절반만 감싸고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 고구려의 개마무사와 같이 말 몸통 전체를 철갑으로 두른 정통 중장기병이라 보기는 어렵다.

유럽에서 정통 중장기병이 일찍이 태어나지 못한 이유는 다음 두 가지이다.

우선 당대에 고구려와 같은 중장기병으로 무장하려면 많은 비용이 든다는 점이다. 존 워리 박사는 그리스의 중장보병(Hoplite)이 갑옷 한 벌을 사는 데 드는 비용이 현대로 치면 자가용 1대 가격이 되며 중장기병의 경우 최소한 보병보다 2~4배의 비용이 든다고 추정했다. 그러므로 그리스의 중장기병(Cataphrcatii)은 주로 귀족들로 구성된 전형적인 엘리트 병종으로 추정한다. 페르시아의 경우 대제국이므로 중장기병으로 무장할 저력은 충분하나 보병과 궁수들을 선호했으므로 중장기병을 크게 육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에서 중장기병이 육성되지 않은 보다 큰 이유는 개마무사를 철갑으로 무장하기 위해 이들 철갑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유럽의 제철 기술은 동양에 비해 매우 낙후했다. 그들은 오랫 동안 히타이트에서 발명된 저온환원법에 의한 괴련철(iron bloom) 제조 방법으로 철을 만들었으며 완전히 철을 녹여 강철을 생산하는 방식의 제철은 14~15세기 무렵 유럽 독일지역에서 처음 시작됐다. 유명한 중세시대의 기사들은 모두 이들 기법으로 만들었다.

반면에 고구려의 경우 고조선부터 철기에 관한 기술이 독자적으로 전수됐고 또 만주에서 질 좋은 철광석이 생산됐으므로 철제 기술은 당대 세계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고구려의 국력은 차대왕 때 이미 중국을 공격할 저력이 있다고 호언할 정도이므로 고구려의 주력부대를 당대의 첨단무기인 개마무사로 무장했다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독창적인 고구려의 개마무사>

고구려에서 개마무사가 언제 출현했고 독창적인 발명품인지 또는 다른 곳으로부터 전래받은 것인지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인철 박사는 동천왕의 철기병을 근거로 적어도 서기 3세기 중반부터 고구려에 출현했다고 적으면서 개마무사는 전연으로부터 동수(안악3호분 벽화의 주인공으로도 추정됐음)와 같은 인물이 망명해옴에 따라 전연으로부터 무기는 물론 제작기술이 전래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투에서도 패배한 것을 볼 때 안악3호분 벽화에 보이는 개마무사는 의전용일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이 박사는 고구려에서의 진정한 개마무사 출현은 광개토대왕대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이 박사의 주장 중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고구려가 개마무사로 무장한 이유 중에 하나로 당시 중국에서 발달한 쇠뇌를 들고 있다. 중국에서는 후한말~삼국시대까지 쇠뇌의 보급이 대폭 확대됐는데 이는 기병들에게 큰 위협이 됐다는 것이다. 즉 쇠뇌에 제압되지 않기 위해 개마무사로 무장했다는 것인데 이는 일본의 조전경일(?田耕一)이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고구려가 백제에 패배한 이유가 고구려의 무장 수준 특히 쇠뇌조차 만들지 못했다는 설명이므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고구려보다 앞선 고조선에서 쇠뇌로 무장했음을 볼 때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한편 여호규 박사는 중장기병의 기원을 북중국에서 찾았다. 그는 중국의 개마무사가 후한 말경(위, 촉, 오의 『삼국지』 시대)에 나타난다고 적었다. 서기 200년 조조와 원소가 대결한 관도전투 당시 원소군은 개마 300필, 조조군에는 10필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의 개마는 상급자의 신분과시용이거나 호위부대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4세기 이후부터 중국에서 개마무사가 대대적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여 박사는 3세기 중엽에 동천왕이 5천 명의 개마를 보유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며 고구려의 개마무사 기원을 4세기 초에 선비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선비의 단부가 서기 312년에 개마 5천 필을 보유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구려와 함께 전연의 극성을 포위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동수를 비롯해 북중국, 선비계열 왕조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망명객들이 고구려에 중장기병을 전한 장본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이인철과 여호규 박사 모두 고구려의 중장기병의 기원을 북중국 내지 선비족 국가들에서 찾고 있다. 그 근거로 고구려의 개마무사와 중국의 개마무사가 거의 동일하므로 이들이 각 나라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했다기보다는 중국에서 고구려로 전래됐다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반면에 네티즌 ‘대막리지’는 고구려의 개마무사가 중국에서 전래됐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고 적었다. 중국에서의 개마무사 출현이 대략 서기 3세기 초이고 고구려의 경우도 동천왕대가 3세기 중엽이므로 선후관계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서기 4세기 초에 선비족이 최소한 5천명의 개마무사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이보다 약간 앞서 동천왕 시절에 고구려가 5천명의 개마무사를 보유했다는 가정이 무리하지 않다고 적었다.

그런데 선비와 중국이 개마무사로 무장했다고 해서 이들로부터 고구려가 개마무사를 도입했다는 것은 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사실상 고구려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민족은 선비(鮮卑)이다.

선비는 남만주 및 시라무렌(Siramuren) 유역에서 목축, 수렵 및 조방농업(粗放農耕)을 하던 목주부농(牧主副農)의 몽골계 유목민족이다. 선비는 흉노에게 격파된 동호에서 오환과 분리된 후 북중국을 통일해 최초의 왕조를 건설한 북방기마민족이다.

선비가 건립한 왕조는 전연(前燕), 후연(後燕), 남연(南燕), 남량(南凉),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등이며 선비의 문화는 당대(唐代)까지 존재했으므로 중국역사상 끼친 영향이 매우 크며 이들이 할거하던 시대를 중국은 오호16국(五胡16國)이라고 한다. 특히 동호가 예맥조선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선비에 의해 세워진 이들 국가들은 한민족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선비가 한민족과 특별한 유연관계에 있는 것은 고구려 유리왕 11년(기원전 9년)에 고구려가 선비를 격파하고 속국으로 만드는 등 고구려의 활동과 큰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참고적으로 북한 측은 고구려의 건국시기를 삼국사기보다 240년 앞선 기원전 277년으로 인정하며 유리왕 11년을 기원전 249년으로 추정한다).

고구려가 선비를 통합한 지역은 류하(휘발하 지류) 일대로 비정한다. 모본왕2년(49) 고구려군은 후한제국이 대흉노 소극정책에 따라 북쪽 방어선을 하북, 산서, 협서선으로 후퇴시킨 것을 틈타 후한 영역 깊숙한 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공격하는 등 적극적인 공세를 취한다. 이에 당황한 후한의 광무제는 요동태수 채동으로 하여금 고구려군에게 철수의 대가로 상당한 물질적 급부를 제공하는 동시에 고구려가 부용 세력화해 지배하고 있던 선비족 일부를 책동해 고구려로부터 이탈케 하는 데 성공한다.

중국의 이런 조치에 고구려가 가만히 있을 리 만무이다.

박경철 교수는 태조대왕 3년(55)에 더 이상 선비족이 이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축요서십성(築遼西十城)’이라는 군사적 대응 조치를 취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동 왕 69년(121)에는 기지건, 단석괴(基至?, 檀石槐)의 선비세력과 합세해 한제국의 요동거점을 공격해 고구려의 군사행동의 폭을 확대시켰다.

이 당시 단석괴(檀石槐)는 북흉노의 일부를 흡수하고 고원의 여러 세력을 합쳐 동쪽은 만주에서 서쪽은 준가르까지 이르는 대판도의 선비를 구축해 통치 영역을 세 부(중, 동, 서)로 나누고 각부에 대인(大人)을 두고 다스리는 등 위세가 높았지만 고구려의 세력권 하에 있었기 때문에 공동 작전으로 요동을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단석괴가 사망하자 선비제국은 단숨에 와해되고 유라시아의 초원지대는 지도자 없이 일시 분산했다가 다시 결합하는 등 혼란된 시기로 들어간다. 한편 중국의 중원에서는 후한이 붕괴하고 소위 삼국(위, 초, 오)시대가 시작돼 중화 재편을 위한 다툼이 벌어진다.

이 당시 삼분된 중국을 공격할 수 있는 동북방의 세력은 둘이 있었는데 첫째는 거란의 원조(遠祖)로 불리기도 하는 가비능(軻比能)이 오환과 연합한 구 선비세력이고 둘째는 고구려이다.

당시 오, 위, 촉으로 분리된 중국은 한 치도 알 수 없는 전쟁의 와중에 있었는데 오나라와 위나라가 두 개의 동북방 세력을 다루는 방법은 매우 달랐다. 위나라와 오나라는 오환과 선비세력은 철저히 분쇄하는 반면 고구려와는 화친을 맺고자 했는데 고구려가 오환과 선비의 후견인 같은 역할을 하는 강대국이므로 적으로 만드는 것보다 우군으로 묶어두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음이 분명하다고 지배선 교수는 적었다.

이것이 앞에 설명한 오나라 손권의 동천왕에 대한 환대에도 불구하고 손권을 배제하고 조조와 연합하게 되는 배경이다.

 

 

고구려보다 1천년 늦은 서양의 개마무사

 

아시아 동북방에서 최강의 전력을 보유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대에는 더욱 활발한 정복 정책을 추진해 선비의 후예인 거란을 정벌하는 등 서부지역에 대대적인 공격을 단행해 당시 중원의 최강세력인 북위(北魏) 제국에 필적할 수 있는 우월적 지위를 확보한다.


<개마무사는 강력한 전력의 방편>

거란은 가비능을 원조로 하는 선비의 분파로서 원래 시라무렌(Siramuren) 유역과 라오-사무렌(Lao-Samuren) 유역인 요해(遼海) 지방에 거주하면서 수렵, 어로 및 말 사육에 종사하던 유목민족으로 훗날 ‘요(遼)’를 세운다

고구려의 지배집단은 전쟁을 자신들의 주체적인 생존조건으로 인식하고 군사역량을 제고시키는 데 주력해 ‘전사국가(戰士國家)’화 했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세력에 대한 군사적 팽창정책을 관철하면서 내부적인 통합으로 정치, 사회적인 중앙집권화정책을 견지해 나갔다. 이런 내외의 정비를 통해 후대에 들어서 ‘전제적군사국가(despotic military state)’에서 탈피해 동북아시아 일대에 독자적인 생존권(lebensraum)을 확보한 하나의 제국(empire)을 성립시킬 수 있었다고 박경철 교수는 주장했다.

박경철 교수는 고구려가 선비 등 흉노(여기에서 흉노는 동서 및 남북으로 나뉘기 전의 흉노를 의미한다)에서 파생된 유목국들을 자신이 의도하는 작전에 수시로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와 피정복민과의 관계가 부용관계였기 때문으로 추정했다. 부용(附庸)은 원래 소국(小國) 그 자체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대국(大國)에 복속돼 있는 상황을 나타내기도 한다.

로마제국이 당시 해방노예가 그들의 옛 주인인 자유민을 보호자(patronus)로 삼는 대신 노역 및 군역에 봉사하는 부용민(clientes) 제도를 제국의 피정복지 통치방식으로 채용했는데 고구려와 선비를 포함한 피정복 이민족과의 관계도 이런 보호ㆍ종속관계라는 것이다.

고구려는 말갈, 선비, 거란, 지두우 같은 다른 종족에 대해서는 그들 본래의 공동체적 질서와 생산양식, 즉 그들 고유의 생존영역을 비호 보장해주는 대가로 그들로부터 조부(租賦) 특히 노동력과 군 병력을 확보했다. 김광진 박사는 이를 ‘공납적 수취관계(貢納的收取關係)’에 기반한 ‘속민제도(屬民制度)’ 또는 ‘이종노예제(異種奴隸制)’로 파악할 수 있다고 적었다.

앞에서 개마무사로 무장하려면 경제력과 개마를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고구려의 부용세력인 선비가 개마무사로 무장했다는 것은 오히려 고구려가 이들에게 개마를 공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학자들에 따라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오환돌기를 장갑기병으로 보는데 이들 역시 선비의 세력이라면 고구려의 부용세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추정한다.

그러므로 중국이 개마무사를 채택한 것은 개마무사를 도입한 고구려의 부용세력이 한나라군으로 넘어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와 같은 추정의 근거로는 한나라군에 중장기병으로 반드시 무장하고 있어야 할 등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등자는 개마무사가 중무장을 한 후 진격할 때 안정적으로 말을 타기 위해 필요한 마구이다. 기마민족이 정주민의 기마대를 능가할 수 있었던 것은 등자의 발명이다. 이를 보면 MBC-TV의 드라마 「주몽」에서 한나라군이 개마무사를 동원하는데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등자가 없는 상태에서 개마무사를 활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정황은 개마무사는 북방기마민족에 의해 등자가 개발된 후에 고구려와 같은 철기 제작기술이 앞선 국가에서 발명됐다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설명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개마무사는 기병을 중시하는 정주국가에서 선택할 수 있는 병종이라는데 의문이 생긴다. 고구려는 개마무사가 무한대로 활동하는 평야에서의 전투보다는 산성전투의 이점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거점 중심의 전투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특히 순수한 기마민족인 경우 중기병은 보유하지만 개마무사를 보유한 경우는 흔하지 않다.

초원을 바탕으로 하는 기마민족의 경우 정주국가에 비해 항상 수적으로 열세에 있기 때문에 정면대결보다는 히트앤드런(Hit and Run)식 전투를 선호했다. 그런 면에서 개마무사가 기마민족의 전투 속성을 감안하면 적합한 무장 체계가 아니라는 지적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특히 기마민족은 장거리 이동이 주무기이므로 개마는 신속한 기동력을 떨어뜨리는 단점도 있다.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의 아틸라나 칭기즈칸이 중장기병보다는 경기병을 선호한 이유이다.

그러나 활과 산성 전투를 중시하는 고구려에서 개마무사를 보유했다는 사실이 하등 이상할 것은 없다. 고구려가 산성 전투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오히려 개마무사가 전투력을 향상시키는 핵심이 될 수 있다. 적군이 성을 점령하기 위해 진공해 오더라도 곧바로 성을 공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대부분 성을 포위한 상태에서 공격 장비들을 점검한 후 각종 장비와 인원을 동원해 공격에 임한다. 중국의 경우 고구려의 수성작전을 잘 알고 있으므로 최첨단 공성용 공격 장비를 휴대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공격군이 진을 완전히 만들기 전 또는 약점이 보일 때 성문 주변에서의 제한적인 기습작전이나 추격전에서 중장기병은 커다란 이점을 보일 수 있다. 내호아의 수군이 평양성을 공격했을 때 개마무사가 활약한 것도 이와 같은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적어도 중국과는 달리 북방기마민족의 전투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독자적으로 개마무사를 채택했다는 것도 결코 무리한 일은 아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중국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제일 먼저 질 좋은 철광석이 많이 생산되는 무순의 신성(고이산성)을 부단히 점령하려고 한 이유이다.

필자는 신성을 찾아보기 위해 현장을 방문했다.

원래 성은 산등성이를 따라 총 길이 4킬로미터에 이르며 성 안에 채소를 심을 수 있는 넓은 분지가 있어 고로봉식 산성의 특징을 엿볼 수 있고 중앙분지 안의 큰 초석을 중심으로 주거지 흔적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산성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요나라 전탑이 정상에 세워져 있고 고이산공원으로 개발됐기 때문이다.

관광지 개발에 따라 지형이 완전히 변형돼 있어 조그마한 산성의 흔적이라도 찾고자 했으나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현지 중국인 안내원을 통해 수소문을 했지만 중국인들조차 산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같은 장소를 뱅뱅 돌면서 한나절에 걸쳐 일일이 수소문한 결과 저녁 무렵에 과거 산성의 입구라는 지점을 찾을 수 있었다. 신성의 입구는 찾는 도중 여러 번 지나쳤던 곳인데 과거에 혈투가 벌어졌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10여 미터의 토성 흔적만 남아 있었다. 전에는 입구임을 알려주는 석비가 있었다는 말에 주위를 세밀히 살펴 어렵게 찾아낸 석비는 풀 속 흙구덩이에 쓰러진 채로 방치돼 있어 아쉬움을 더해주었다.


<동양보다 낙후된 서양의 철 생산 기술>

동양에서 고구려가 개마무사를 처음으로 개발했다고 하면 말의 몸통 전체를 둘러싼 정통 개마가 서양에서는 언제 등장했는지 주목된다. 일반적으로 서양에서 개마는 동천왕보다도 거의 1천년 후인 십자군 전쟁 때부터 나타난다고 추정한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십자군 시대의 기병이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체인 메일을 걸치고 있으며 투구는 노르만헬멧을 사용했다가 나중엔 헬름이라는 양동이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은 투구를 사용했다. 말을 탈 때는 창을, 말에서 내려서 싸울 때는 70~80센티미터 길이의 검을 사용했다.

말까지 중무장시킨 십자군의 유럽 기병은 아랍인들이 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무장을 자랑했다. 아랍군의 활은 십자군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못했다.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도 우수한 기병 덕분이었다.

유럽의 개마무사가 동양과 조우한 것은 1221년 페르시아의 우르겐지에서 몽고족과 전투를 벌였을 때인데 이때를 서양에서 개마무사가 나타난 시초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유럽의 개마무사는 몽골 기병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몽골은 유럽 기병의 약점을 파고들어 러시아는 7일, 헝가리는 5일 만에 정복했다. 독일에서 온 3만 명 가량의 튜튼 기사단도 전멸시켰다.

아랍인들도 십자군의 영향을 받아 개마무사를 도입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맘루크로 불리는 이슬람 노예기병이다. 이들은 S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검을 사용했는데 사라센군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군대로 십자군 군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력했다. 실제로 이들은 이집트에서 무적을 자랑하던 몽골 기병들을 무찌른 적도 있다.

중세시대에 장갑기병이 태어난 이유는 강력한 쇠뇌가 개발됐기 때문이다.

영화 「쟌다르크」에서도 주력 무기의 하나가 쇠뇌였다. 쇠뇌는 일 분에 3발 정도 발사할 수 있었음에도 강력한 위력으로 활보다 장병과 군마에게 치명상을 주었다. 그러므로 쇠뇌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30킬로그램짜리 갑옷을 입고 말에게도 그에 버금가는 무게의 마갑을 착용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중무장을 한 덕에 충격력은 대단했지만 단점도 매우 많았다. 몸이 너무 무거워져 방향을 신속하게 바꾸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게다가 투구의 무게도 상당해서 앞은 볼 수 있지만 고개 돌려 바로 옆을 보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눈구멍과 숨구멍만 뚫려 있어 시야도 좁았다. 또한 시종이 없다면 갑옷을 입고 벗는 것은 물론이고 말에서 내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전투 도중 낙마할 경우 포로가 되기 십상이었다.

더구나 유럽의 제철 기술이 동양에 비해 매우 낙후했기 때문에 강철다운 강철로 만든 철갑은 14~15세기 무렵 유럽 독일지역에서 처음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도 동양으로부터 전수된 화약무기에 의해 곧바로 사라지고 만다.

 

 

 

 

 

 

보병에 대한 설명입니다.

 

보병은 고구려 군사행렬을 그린 '안악 3호분 대행렬도' 같은 고분 벽화와 그 시대에 서술했던 여러 기록을 고증하면

보통 보병의 비율은 전체 군사 중 3/4을 차지하며 고구려 군사의 주력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고구려 초기에는 기병이 많이 양성되기도 하였습니다.

기병만으로 이루어진 군대도 있었구요.<三國史記 高句麗 本記 王>조에 보면 고구려 기병 5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시대 정황은 3세기 초로 농경과 유목을 함께 한 반농반목민족 북부여와 졸본부여(고구려)가 기병 역시 다수 보유했다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4세기 초(初)가 되면 5호 16국 시대를 맞아 선비,위구르 등 배달 흉노계 유목민의 발달된

기병종이 고구려로 유입되어 경기병, 경무장기병 ,중장갑기병 등으로 세분화, 정예화 되면서 군대의 주력은 자연스럽게

보병이 맡게 됩니다.

 

대략 총 병력의 3/4(75%)을 맡았던 것으로 보이는 주력 병종인 고구려 보병을 세분화 해보면 이렇습니다.

 

 

 

장창보병

3~4m 이상가는 창으로 밀집 대형을 구사해 적군의 기병공격에 대응합니다.

그리고 진형을 짠 상태로 적진에 돌격에 상대 보병과 직접 접전을 벌이기도 합니다.

 

창보병

장창보다는 짧은 창으로 진형을 구사해 적진으로 돌격하여 전을 벌이거나 필요에 따라 갈고리창(이라고도 함)으로 

아군 진형을 돌파하고 내부로 침투한 적 기병의 기수를 떨어뜨립니다.

이 갈고리 창()을 든 보병의 형상은 '안악 3호분 대행렬'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부월수

 창보병끼리의 접전이 붙었을때 진형 사이를 비집고 적 보병과 육탄전을 벌이며 근접거리에서 약한 창보병을 주로 공격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역시 안악행렬도에서 확인 가능

 

 

 

환도수
방패와 찰갑으로 무장하고 환도를 기본무기로 소지했으며 장갑의 무장상태로 보아 부월수보다는 위험도가 높고
거친 육탄전을

벌이기 위한 병종으로 추정됩니다. 아마 창보병끼리의 접전에서 아군의 진형이 흐트러지고 난전의 양상을 띠기 시작할 때

가장 선방 나서서 싸웠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측면 공격에 약한 창보병의 진을 호위하는 임무도 가능

 

 

 

궁노병(弩兵)

활과 노(弩)로 원거리 공격을 하며 기병 상대시 멀리서 돌진해오는 기병을 노로 공격하고 기병이 근접해 오면 장창진형 뒤로 후퇴합니다.

그 외에도 보병 진형에 원거리 공격, 기습 그리고 공.수성(攻.守城)에도 필수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병종입니다.

 

이 외에도 고구려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여러 병법과 병종, 군사 운용술이 있겠지만 당시 고구려 시대를 고증할 자료가 빈약하여

아직은 좀 더 연구가 필요한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