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제국일본 육군 20사단의 궤적

구름위 2012. 12. 25.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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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육군 20사단은 조선군의 주력 2개 사단 중의 하나로 서울 용산 삼각지(현 주한 미군 용산기지)에 주둔했던 사단이다.

이 사단은 1915년 12월 24일에 창설이 결정되었으나 실제 편성에 착수한 것은 1918년이며 이 후 편성 완료까지 3년이 걸렸다.

창설 당시 보병 4개 연대, 기병, 포병, 공병 연대로 구성되었는데, 4개 보병 연대중 한 개는 평양(77연대), 한 개는 대구(80연대)에 주둔했다. (78, 79연대는 용산주둔)

1931년 9월, 유조구사건(만주사변)이 일어 나자 당시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쥬로(林銑十郞)대장의 독단 명령에 따라 사단은 혼성 39여단을 편성, 만주로 이동, 금주 공략에 참전한 후 이듬 해 4월에 원 주둔지로 귀환했다.

1937년 7월 노구교 사건(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대본영은 20사단에 동원령을 하달, 화북 전선에 투입됐다( 이 때 한국인 김석원 소좌는 78연대 대대장으로 출전, 용명(?)을 떨쳤다).

20사단은 북지 방면군(사령관; 데라우찌 히사이찌대장) 제1군(사령관 가즈끼 기요시 중장)소속이 되어 낭자관, 태원 전투에 투입됐다.

1939년 동원 해제된 20사단은 조선으로 귀환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인 1942년 말, 20사단에도 다시 동원령이 떨어졌다.
목적지는 뉴기니아 섬.

1943년 1월, 웨와크에 상륙한 20사단 주력은 비행장 건설, 도로 건설에 투입되다가 호주군이 상륙하자 핀슈하펜 지역 방어에 투입되어 악전 고투하다 마당으로 퇴각했다.
퇴각시 수 많은 낙오자가 나왔다.

그러나 또 다시 명령에 의해 정글을 헤치고 아이다페로 이동중 또 수 많은 병력이 목숨을 잃었다. 사단장 가다기리 시게루(片桐茂)중장도 전사했다(1944년 4월말).
천신만고 끝에 웨와크에 도착하니 연합군은 홀란디아, 아이다페에이미 상륙, 20사단은 퇴로를 차단당했다.

18군 사령관 아다찌 하다조(安達二十三) 중장은 연합군과의 결전을 명령했다.
20사단은 기아와 피로에 허덕이며 아다페 공격에 사력을 다했으나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았다.

1945년 7월, 아다찌 중장은 20사단에게 '옥쇄' 명령을 내렸으나 그 직 후 일본천황은 항복 조서를 내렸다.

패전시 20사단의 잔존병력은 785명이었다(뉴기니아 상륙당시 병력은 25572명).
최후의 사단장은 나따이 소따로(中井曾太郞) 중장.

**한국인 출신 이종찬 소좌도 생존자의 하나로 살아 남았다(후에 신생 한국 육군 참모총장이
됨). 귀국 때 굶주림, 말라리아로 인해 머리가 완전 백발이 되어 있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