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용병
(중세의)군대에서 유별나게 우수한 조직을 갖춘것은 '용병'이었다. 용병은 당시의 민간인들에게는 파괴와 무질서의 상징이었다. 용병은 백년전쟁 기간동안 프랑스인들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 아마 이런 것은 스페인, 독일, 그리고 특히 상업 국가가 지배하는 영역등, 용병들이 쓸고 지나간 곳이면 어디는 마찬 가지였을 것이다.
최초의 용병집단은 13세기 중엽 이탈리아에 등장했다. 초기의 용병은 상업적 이윤을 추구하는 용병 대장이 군사력은 없지만 군대를 유지할 만한 재정은 충분한 각각의 도시들과 계약을 맺고 그 계약금으로 도시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초기의 용병은 이렇게 비교적 '평화로운'임무를 맡으며 시작했지만 13세기 말엽에 가면 고용주의 대외 전쟁을 수행하는 쪽으로 발전하게 된다. 용병들은 자신들과 똑같은 용병(플레밍인, 스페인인, 프랑스인, 독일인, 그리고 극소수의 영국인등 잡다한 집단들..)집단(Routiers)과 전쟁을 벌였다. 1300년경이 되면 용병들은 이탈리아에서 군사적인 면 뿐만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런 용병이 고용주로 부터 봉급을 지급받고 임무를 맡는 형태는 백년전쟁시기의 영국군이나 프랑스군에게도 퍼지게 되었다.
이런 용병들은 전문적인 전사들로 돈을 위해 싸우고 돈 때문에 싸움을 중단했다. 용병들은 완전한 직업군인으로서 전문가 들이었다. 전쟁은 그들의 삶 그 자체였다. 특히 용병들은 공성전 보다는 피해를 덜 입는 새벽의 기습을 선호했다. 용병들은 기동성을 중요시 했기 때문에 번거로운 공성 장비들은 전혀 보유하지 않았다. 대신 용병들은 훈련을 강화했고 이것이 용병과 일반 군대와의 차이를 만들었다. 이들은 이탈리아의 선배 용병들 처럼 충성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백색 용병단(White Company)의 대장인 존 호크우드(John Hawkwood)는 플로렌스와 전쟁을 하다가 다시 플로렌스에 고용되어 싸웠다. 이들에게 '편'을 바꾸는건 별 문제가 아니었다. 이들이 중시하는 것은 '돈'이었다.
용병들의 최대의 적은 '평화'였다. 영국과 프랑스가 1360년 브레타뉴(Bretigny)협정으로 전쟁을 중단하고 1364년에는 나바르가 노르만디 의 권익을 놓고 프랑스 왕가에 대한 도전을 그만두자 용병들은 일자리가 없어졌다. 30년뒤 문제가 다시 발생했다. 용병들은 남아도는 자신들의 힘을 성스러운 십자군 전쟁에 쏟아 넣었는데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의 참패로 (대 재앙으로)끝나고 말았다. 한동안 일자리가 없어진 용병들은 다시 신성 로마제국이나 스위스의 도시들로 고용주를 바꿨다. 평화로 인해 용병들은 실업자가 되었다. 정치적으로 불안한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아닌이상 어느 군주들도 평화시에 돈을 먹는 용병들을 유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시기의 어떤 군인 집단도 용병처럼 지도력이 중요한 요소를 가지지 못했다. 자유 계약 용병들은 용병대장들에게 고용, 조직, 전리품 분배, 봉급을 의존했다. 이들은 '비 공식' 전쟁의 형태로 약탈, 강도를 일삼았다. 물론 이 때문에 용병조직을 범죄자로 이루어 졌거나 질 낮은 군인들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 이다. 실제로는 그 반대로 보는게 더 진실에 가깝다. 용병 대장들은 대부분 하급 귀족 출신이었으며 이들은 경제적 원인이나 혹은 맏아들이 아니어서 유산 상속에서 밀려나 용병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용병단의 병사들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힘들다. 하지만 한가지 사실은 확실하다. 영국출신의 용병들이 상당한 규모였다는 사실이다.14세기 중엽에 이르르면 영국 출신의 용병숫자가 크게 늘어나 용병들을 흔히 'Ingles','Les Angliais'로 부르는 경우가 늘어났다. 물론 그때까지도 대다수는 다른 유럽 국가 출신이 많았다. 14세기 말에 Philippe de Mezieres가 지적했듯이 많은수의 용병대장들은 왕이 부르지 않으면 전쟁에 나서지 않는 하급 귀족출신으로 특수한 경우에만 '사업상'무기를 잡았다. 그외의 용병들은 생계 수단으로 용병이 되거나 모험을 즐기는 하급 성직자(!)등 잡다한 구성원으로 이루어 져 있었다. 성직자 출신의 용병중 가장 악명을 떨친것은 '사제' Arnaud de Cervole였다.
일반적으로 용병단은 약탈과 각종 위법행위등으로 일반 민중들에게는 악명을 떨쳤다. 이탈리아에서는 'Inglese italianato e un diavolo incarnato', 이탈리아의 영국 용병은 악마의 화신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용병들은 기사도적인 행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농촌지역의 약탈이나 기습은 용병의 최고의 무기였고 도시나 성을 점령한뒤에는 자신들의 기지로 사용하기 보다는 돌려주는 대가로 돈을 뜯어냈다. 그래도 용병들은 개인이건 용병단이건간에 왕가에 고용되는 것을 선호했다. 예를 들면 14세기에 Arnaud de Cervole는 왕가에 고용되는것을 반복했고 1363년에는 사실상 궁정의 일원이 되어 그의 아들은 부르군디 공작을 대부로 삼을 정도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용병대장 Amiel de baux역시 프랑스 왕실의 장군으로서 1371년 아퀴탱(Aquitaine)을 점령했다. 영국의 경우에도 휴 칼블리(Hugh Calveley)는 스페인에 고용되었다가 다시 1367년에는 흑태자(Black Prince)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는 다시 John of Gaunt에 고용되었고 마지막으로는 리차드 2세에게 고용되어 프랑스에서 싸웠다. 로버트 놀레스(Sir Robert Knolles)역시 자신의 왕을 위해 싸우기도 하고 용병대장으로서 싸우기도 했다. 프랑스도 같은 방식으로 용병을 써 먹었는데 1360년 스페인 카스티야와의 전쟁에서 프랑스군은 거의 대부분 용병들로 구성되었다.
15세기에 들어와서 이들 자유계약 용병들은 전쟁에서 중요한 존재로 부상하였다. 헨리 5세와 그의 아들은 용병대장들을 병력을 긁어모은데 이용했다. 이들은 포병같은 전문인력보다는 단순 전투 병력을 모으는데 효과적이었다. Francois de Surienne는 헨리 6세의 휘하에서 이런 능력을 발휘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15세기 중엽까지 프랑스군대에서 용병이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420년에서 30년까지 샤를 7세의 군대는 스코틀랜드인이 대규모로 복무했고 영국과의 전쟁에서는 제노아용병들이 대규모로 고용되었다. 또한 왕들은 14세기 처럼 용병대장들에게 크게 의존했다. Poton de Xaintrailles는 헨리 7세에게 고용되기 전에 유능한 용병대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Antoine de Chabannes는 역시 왕에게 고용되기전에 1,000명이나 되는 기병을 거느린 용병대장이었다. 이탈리아의 호크우드처럼 많은수의 용병대장들은 왕가에 고용되기 전에는 그 왕가를 상대로 싸우는 일이 다반사 였다. 이들 용병대장은 15세기 중엽이 되면 왕가의 요직을 차지하거나 전쟁에서 엄청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Etienne de vignolles는 부르군디의 적들로 부터 La Hire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그는 1430년 Chateau-Gaillard를 점령했으며 31년에는 용병대장 Ambroise de Lore가 노르만디의 캉을 점령하고 많은 포로와 함께 물러갔다. 이런 유명한 용병단들은 일반인들에게 낭만적으로 비춰진 뛰어난 전공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많은 용병대장들이 본명보다는 별명으로 불리웠다. Jacques d'Espailly는 Forte-Epice라는 별명으로 불리웠고 La Hire는 18세기에는 포커 카드의 하트에 쓰여졌다. 이런 용병대장들은 후대까지 자신의 명성을 떨쳤다.
17세기 용병전쟁의 성격
15세기 말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상비군은 국가에 고용된 용병이었다. 하지만 어느 국가든지 평상시에 대규모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비용이 많이 드는 일 이었다. 이 때문에 17세기에도 여전히 전쟁시 “사업 목적”으로 만들어진 용병대를 고용 하는 일은 흔한 일 이었다. 물론 이들은 중세의 용병과는 달리 전문 장교단에 의해서 제대로 통솔 되기는 했다. 독일 30년 전쟁 기간동안 활약한 용병 사업가가 대략 1,500여명 정도이니 그 규모를 충분히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용병이 되는 병사들은 모험심이 왕성한 청년층(농촌 출신의)이었다. 용병의 계약은 보통 월급의 일부를 계약금 형태로 먼저 지급하는 형태로 이루어 졌다. 17세기 초반의 스페인 에서는 보통 10일치 급료를 계약금으로 지불했다. 용병들은 급료 및 장비를 장교들에게 의존했다. 보통은 각 연대의 연대장이 부대의 급료 및 장비 보급을 책임 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용병 지휘관들에게 자금 조달 능력은 전술만큼이나 중요하게 평가 되었다. 용병 대장들은 병사의 숫자만큼 정부로부터 돈을 지급 받았는데 이 점은 큰 맹점이었다. 용병 대장들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전사한 병사들도 명단에 넣어서 정부들로부터 돈을 받아내는 일이 흔했다. 간혹 있는 중앙 정부의 검열때는 옆 부대에서 병사를 빌려와서 사열에 참가하는 일도 흔했다. 이 때문에 용병은 정부의 원성 대상이었다. 1616년에 베네치아 의회의 한 의원은 이렇게 외쳤다.
“우리 나라 군대는 어떻게 전투할 땐 줄어들고 월급을 줄 땐 늘어난단 말인가!”
루이 14세의 유능한 장군인 보방(Vauvan)은 정부가 직접 징집과정을 감독하면 연간 1200백만 리브르의 예산을 절약할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정부가 이런 일을 감독하기에는 17세기 유럽의 행정 조직은 너무나 약했다. 유럽에서 가장 발달한 행정 제도를 갖춘 프랑스 조차도 1762년 부터야 정부가 직접 징집 과정을 감독했다.
용병의 전성 시대는 역시 30년 전쟁 초 ? 중반으로 1620- -1630년 사이였다. 이 시기에 많은 용병단장이 한 밑천을 잡기 위해서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신성로마 제국에 고용된 보헤미아의 귀족 발렌슈타인이었다. 발렌슈타인은 162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계약을 체결한뒤 암살 당할 때 까지 신성로마 제국측에 서서 신교도 군대와 싸웠다. 용병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받아 들였기 때문에 1944년에 바바리아 왕국의 한 보병 연대는 병력구성이 무려 16개 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외국인 병사는 매우 선호 되었는데 왜냐하면 유사시 자국민의 봉기를 진압하는데도 유용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은 포루투갈의 반란때 폴란드 왕에게 요청해서 코사크 기병 10,000명을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 이외에도 스페인은 아일랜드에서도 용병을 고용해서 반란 봉기에 투입했다.
용병은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돈을 받기 위해서 별 희한한 행동을 했다. 스웨덴 군 소속의 한 독일 용병 부대장은 1635년에 급료가 연체되자 스웨덴 수상을 인질로 잡고 스웨덴 정부에 월급 지급을 요구했다. 계속해서 월급이 연체되자 이들은 스웨덴으로 쳐들어 가겠다고 협박을 하기도 했다. 1941년 5월에는 역시 같은 부대가 월급 연체에 항의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이때 스웨덴 정부는 밀린 월급을 모두 지급 함으로서 이들의 반란을 무마할 수 있었다.
용병 대장들의 수입은 매우 짭잘했다. 일부 용병들은 수입을 벌어서 은퇴하는 대신 전쟁 사업에 재 투자 하기도 했는데 스웨덴에 고용되었던 스코틀랜트 출신의 용병 알렉산더 레슬리(Alexander Leslie)는 스웨덴 정부로부터 받은 돈으로 대포 2문과 머스켓 2천정을 구입해서 자기 부대에 장비시켰다. 용병에 대한 비용이 너무나 많이 들어서 전쟁이 끝나고도 다 지급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독일의 뉘른베르크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이 도시는 1648년에 전쟁이 끝났을 때도 월급을 지급하지 못해서 1654년 까지 용병단에게 점령 당했다. 용병단은 1654년에 월급을 모두 지급 받은뒤에야 도시에서 물러갔다.
17 - 18세기 프랑스의 군사력과 국가 재정 문제
17세기 초반, 새로이 스페인에 경쟁하는 강대국으로 등장한 프랑스는 그 위상에 걸맞게(?) 많은 대외 전쟁에 개입 하게 되었다. 1634년 10월에 프랑스 육군은 12만 4,500명 이었다. 이것이 1636년에는 18만명으로 증가했고 30년 전쟁 기간동안 평균 15만명을 유지했다. 1672년에서 1679년사이의 네덜란드 전쟁때는 25만명까지 증가했고 1689년에서 1697년의 9년전쟁때는 34만까지 증가했다. 이러다가 7년전쟁이 벌어진 1756년에는 무려 54만명의 병력이 동원 되었는데 당시 프랑스의 인구가 2,500만 명이었으니 거의 2%의 인구가 동원된 셈 이었다. 이것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견제하기 위한 프랑스의 외교 정책상 잦은 군사 충돌을 피할수 없었기 때문인데 이처럼 프랑스의 능력 밖의 일을 추구 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국가 재정은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는 대략 세출의 50% 미만을 군사비로 쓰고 있었다. 1600년에 프랑스의 세출은 2천만 리브르였는데 이중에서 약 900만이 군사비였다. 하지만 30년 전쟁에 개입하면서 세출은 1634년에 1억 2천만 리브르로 급증하고 군사비는 4천만을 넘어섰다. 30년 전쟁 기간동안 군사비 지출이 많은 경우에는 4천8백만을 넘었고 적은 경우에도 3천 9백만 리브르가 전비로 지출되었다. 루이 14세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는 전비가 꾸준히 늘어 났는데 1711년에 2억 6천 4백만 리브르가 국가 예산으로 사용되었고 이중 60%가 육군이 까먹은 비용이었다.
이 많은 군사비 지출은 정부의 세입으로 메꾸기 힘든 것 이었기 때문에 민간 자본으로부터 융자를 받아서 메꿨다. 이 때문에 정부의 채무가 꾸준히 증가해서 1634년에 7백만 이던 것이 1645년에는 1억 2천만 리브르로 뛰었다. 과대 망상증 환자 루이 14세가 왕위에 올라 전쟁을 더 열심히 치루기 시작한 이후에는 20억이라는 기록적인 액수(1715년에)를 기록했고 연간 이자만 1억이 넘었다. 이때에 프랑스의 연간 세입은 1억 8천 정도였다고 한다.
루이 14세때 개혁을 실시한 콜베르의 노력은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때문에 혁명이 일어날 때 까지 프랑스의 형편없는 재정 상태는 조금도 개선되지 못했다.
그리고 사족이지만 프랑스 혁명의 시발점인 삼부회라는 것을 세계사에서 배웠을 겁니다.
삼부회가 열린 이유도 사실 이 막대한 빚에 대해서 귀족에게 세금을 부과하려고 하자 귀족들이 이를 내지 않고자 반발하여 열리게 되고, 결국 귀족이 세금을 내지 않고 안그래도 높은 세금을 더 올리는 방향으로 흐르게 되죠. 프랑스 혁명의 시발점에는 여러 문제점이 있었지만 이러한 문제도 얽혀 있답니다.
여기에 르네상스 시기의 전쟁시 포병 운용에 관한 글을 덧붙입니다.
일부 역사가들의 평가이긴 하지만 르네상스 시기의 전쟁은 왕과 귀족들의 '놀이'에 불과했다는 표현이 있다. 사실 나폴레옹의 등장 이전의 근대 유럽의 전쟁은 그다지 치열하지도 않았으며 전쟁에 진다고 해서 나라가 망하는 것도 아니니 각 국의 왕들은 사활을 걸고 필사적으로 전쟁에 매달리지는 않았다. 물론 각 국의 중요한 이해 관계가 걸려서 전쟁이 일어 나니 만큼 전쟁 참가자들은 일정 수준의 '성의'를 보이기는 했다. 하여튼 르네상스 시기의 전쟁이 왕과 귀족들의 '놀이'라고 친다면 이것은 엄청나게 사치스런 놀이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15-16세기의 전쟁은 소수인 '기사'의 비중이 크던 이전의 전쟁 보다 대규모 보병과 '포병'의 역할이 두드러진 전쟁이었다. 특히 15-16세기에는 드디어 대포가 기존의 '장난감(?)' 수준의 위력에서 벗어나 무기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는 단계에 접어 들었고 이때문에 전쟁에서 수요가 높아 졌다. 이미 쇠락해 가던 봉건 영주들도 나름대로 1-2 문 정도의 대포를 사 들였고 국왕의 경우에는 그 규모가 더 컸다. 이 때문에 대포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전쟁에 들어가는 비용이 중세 전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아래의 표는 16세기 초반에 대포를 사는데 들어가는 비용이다.
※ 16세기 초반 대포 1문을 구매하는데 필요한 비용의 '평균치' - 단위 : 두카도(ducat, 스페인의 옛 화폐단위)
대포의 종류 대포만 살 경우 포가(Carriage)를 포함한 비용
120파운드 캐논 1,269 1,310
100파운드 컬버린 포 1,027 1,069
50파운드 컬버린 포 781 812
50파운드 캐논 472 501
20파운드 컬버린 포 314 334
20파운드 캐논 177 294
12 파운드 세이커 175 190
6 파운드 팔콘 151 160
3 파운드 팔코넷 90 97
참고로 설명하면 1 두카도(ducat) 는 보병 병사 한명의 석달치 봉급이었고 화승총 한정의 가격이었다.(언제 어디서나 사람값이 똥값이다... 이래서 전쟁은 나쁘다!)
그러나 어디 대포값만 들어가는가? 대포를 쓰려면 화약이 있어야 한다. 대충 전투가 벌어지면 60 파운드 캐논은 하루의 전투에 대략 3,200 파운드 정도의 화약을 소모했다. 그리고 50 파운드 컬버린은 1,500 파운드 정도를 사용했다. 사정이 이러니 100파운드 짜리 캐논을 수십문씩 운용하는 왕의 군대가 하루에 소모하는 화약의 양은 어느 정도 였겠는가?
화약만으로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대포를 옮길때는 말이나 소가 필요하다. 뭐 사람이 끌어도 되기야 하겠지만 이러다가는 포병들이 기운이 빠져 전투가 벌어지면 포탄도 장전 못하는 일이 벌어질테니 예외로 치자.
17세기 초에 스페인 육군의 포병 운용 방식을 보자. 스페인 육군은 캐논 1 문을 견인하는데 말 21 마리를 사용했다. 일단 포 한문에 포탄과 화약, 기타 장비를 실은 마차 한대가 딸리게 된다. 물론 부대의 기동성을 위해서 짐을 줄인다면 이것 보다 더 적은 숫자의 말을 써도 상관 없겠지만 실제로 포병을 운용하다 보면 그렇게 하는것이 힘들었다.
대포는 전쟁 기술의 발전에 큰 변화를 가져온 획기적인 무기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사람의 부담을 더 크게 만든 물건이었다. 요즘이야 상상을 초월하는 복잡한 무기 체계가 득시글 거리니 대포 정도는 명함도 못 내밀지만 르네상스 시기의 군주들은 이놈의 대포가 잡아 먹는 비용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이 글 역시 제 친구의 번역글입니다. 현재 제가 회원으로 있는 모임의 마스터를 하고 있죠. 그 곳 게시판에 올려진 글입니다.
이 녀석은 원서를 직접 구입하죠.
따라서 위의 수치는 상당한 신빙성이 있습니다.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요즘 소설의 전쟁에서 너무 많은 수의 병력이 나온다는 겁니다. 아마도 정확한 병력 동원수치와 부대운용비용의 정확한 수치를 본 적이 없어서 그러는 것 같습니다.
중세 유럽 군대의 계급
중세 군대는 좀 혼란 스러운 편 입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계급은 존재 하죠.
일단 계급은 크게 Banneret, Knight, Sergernt, Squire로 나뉩니다. Sergernt와 Squire는 통틀어서 Man-at-Arms라고 칭하죠. 이들외에 궁수가 있는데 이건 계급이 없습니다. 그냥 궁수 입니다.
국왕이나 영주의 바로 밑에는 '부관'정도로 번역 될 수 있는 Lieutenant가 있습니다. Lieutenant라는 녀석은 부대 지휘관 입니다. 장군 밑에서 기병, 보병을 통솔하죠. 봉건 군대에는 장군인 영주 밑에 Lieutenant가 두명 정도 있습니다. 한명은 기병을 지휘하고 한명은 보병을 지휘하죠.
Banneret은 Mat-at-Arms로 분류되는 계층중에서 가장 높은 계급입니다. 정식명칭은 Knight-Banneret입니다. 말 그대로 이들은 기사중 높은 계급으로 하급 장교 정도 됩니다. 기사(Knight)들을 지휘합니다. 당연히 일반 기사보다 높은 계급입니다. Banneret과 기사의 비율은 영주의 군대 마다 다릅니다. 거의 10대 1에서 1:1에 가까운 비율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 계급은 1640년경에 가면 모든 유럽에서 사라 집니다.
Knight는 다들 아시다 시피 기사입니다. 중세시대에는 왕도 기사고 영주도 기사였죠.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기사는 군인 계급으로서 기사입니다. 이들 하급 기사들은 그렇게 높은 계층은 아니었습니다. Knight의 어원인 중세 영어의 cniht 는 그저 단순히 무기를 든 노르만 전사를 가르키는 말 이었죠. 12세기에 국왕의 기사들은 하루에 1 실링의 봉급을 받았습니다. 쇠사슬 갑옷 haubeck의 가격이 1 파운드 였으니까 한번 계산해 보시실..(1파운드가 20실링이라는 건 다 아시죠?)
Sergernt는 하사가 아닙니다.. Sergernt는 serviens 라고 불렸습니다. 이들은 12세기 중엽에 등장했는데 계급으로는 기사의 바로 아래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대개 기병이었지만 종종 갑옷이 없는 경우가 있었고 가끔 말이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처음 등장한 것은 프랑스, 현재의 벨기에 지역, 시실리섬과 남부 이탈리아였습니다. 봉급은 기병인 서전트가 보병인 서전트 보다 많았습니다.(당연한가?)
Squire는 서전트의 아래 계급입니다. 중세 영어로는 scutifer 라고 합니다. 봉급은 서전트와 비슷하게 받았습니다. 13세기에 접어들면 스콰이어, 혹은 에스콰이어(esquire)는 서전트와 큰 구분이 없게 됩니다.
그 다음은 궁수(Archer)입니다. 이 놈들은 그냥 뭉떵그려 모두 궁수 입니다. 계급? 그런거 없습니다. 이들은 직업 군인이 아니고 전쟁이 나면 동원한 보조병 성격이 매우 짙었죠. 그래서 백년전쟁 당시의 영국 군대를 보면 궁수가 Man-at-Arms보다 두배가 많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평균적인 중세 군대의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요? 간단히 말해서 5,000이상의 병력이 동원되는 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일 이었습니다. 영국왕 헨리 2세가 1171년 아일랜드를 침공할때 그의 군대는 기사 500명과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는 궁수였습니다. 1335년에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를 침공했을때 기사를 포함한 Man-at-Arms가 3,200명이었는데 이건 당시로서는 엄청난 숫자 였습니다. 백년전쟁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투중 하나였던 아쟁쿠르(Agincourt)에서 영국군의 Man-at-Arms는 불과 2,600명 이었습니다.
필립 4세의 휘하에 있었던 Ponthieu의 영주가 거느린 군대의 구성은 당시의 보통 영주들이 거느린 가장 평균적인 규모의 군대 일 겁니다. Ponthieu의 영주의 군대는 기사 5명, 스콰이어 20명, 종군 신부 한명, 하인 61명, 하녀 한명, 그리고 말 84마리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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