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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교역이라고 말한바가 있습니다. 누르하치가 빠른 속도로 발전 할 수 있는 이유도 4개의 관을 이용한 활발한 무역이었고, 해서여진이 몰락하는 이유도 교역의 어려움 측면이 강했습니다. 이 시기쯤 되었다면 교역도 오랬동안 했을테니, 당연히 누르하치도 인삼등의 재고를 계속 보유하고 모피를 대량으로 사 놓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명나라는 교역을 중단시켰습니다. 100만 대군도 아닌 이 단 한번의 명령으로, 누르하치는 위기에 봉착하고 맙니다. 교역이 멈추었다면 사 놓은 인삼이나 모피등은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그리고 한껏 팽창시킨 영역과 백성, 그리고 군대를 먹여살릴 방법 또한 없습니다. 쉽게 생각해서, 현대의 국가에 국제사회가 합세하여 모든 무역 활동을 정지시킨다면, 그 나라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보면 됩니다. 이미 우리 사회는 과거 중동에서 석유 제제 조치를 취하자 그것만으로 전 세계가 발칵 뒤집힌 전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당시, 만주에게 있어 명나라는 전세계나 다름없었습니다. 만주 사회를 유지시키고, 살 수 있는 방법은 명나라에 고개를 숙이는 방법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굴복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머리를 숙이면 당장의 일신은 모면할수 있지만, 결국 영원히 명나라부터 끌려다닐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결정으로 인해 재여놓은 인삼등은 썩어버리고, 모피 등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걸레가 되어버렸겠지만, 누르하치는 다른 방식을 찾아보기로 합니다.
여진족이 이미 농사를 할 수 있는 대로 짓고 있었다는 이야기 또한 했습니다. 누르하치가 원하는건 경제적인 부분에서 자립이었고, 그렇다면 역시 불안정한 교역보다 농업을 육성하는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옛 하다부 남쪽에 있는 시하(柴河)·범하(范河)·삼차얼(三岔兒) 등에서 누르하치는 대규모 개간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업의 성패가 만주 집단의 흥망과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명나라 역시 그러한 사정은 알고 있었습니다. 총병 장승음(張承蔭)은 사람을 보내 이번에 개간 사업을 시작하는 세 곳의 작물을 수확하는것은 이치가 맞지 않는다고 따지며 견제 행위를 벌였습니다. 여기서 물러나면 방법이 없었기에 누르하치는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바닷물은 넘치지 않고, 황제의 마음은 옮기지 않는다. 그렇게 들었다. 지금 명은 이미 예허를 도왔고 또한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벼를 예확(刈穫) 하지도 못하게 한다. 묻노니, 바야흐로 황제의 마음은 이미 옮겨갔는가? 명나라는 물론 대국이다. 하지만 어떤 성에도 1만의 병사를 주둔 시키지는 못할터, 만일 1천의 병사만을 주둔시킨다면 그것은 우리가 포로로 삼기에 아주 적당한 숫자가 아니겠는가?"
어마어마하게 강도가 높은 발언입니다. 이 시기는 1615년이고, 중국의 황제로 말하자면 만력제 43년의 일입니다. 또한 누르하치가 내부 기반을 어느정도 다져놓은 상황입니다. 이 시점의 누르하치가 거대한 대제국 건설에 대한 구상이 있었을까 라고 묻는다면, 아마 회의적인 대답을 하겠지만, 최소한 명나라의 영향력을 벗어나고자 했다면 분명히 그랬습니다. 바로 다음해, 즉 1616년 정월에 그는 '대금(大金)'이라는 국호를 삼고 천명(天命)이라는 연호를 내세웠으며, 흥경(興京)을 수도로 삼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후금(後金)의 탄생입니다.
금. 곧 아이신. 이 말을 듣는 여진인들은 모두 천조제의 70만 대군을 깨부순 아골타와 송나라를 남쪽으로 몰아넣은 금태종의 영광을 떠올리며 피가 끓어오를 것이며, 반대로 중국의 한인들에게는 여러모로 불길한 이름이었습니다. 건국 초기에 여진 동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한다면 금이라는 국호는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습니다.
한참 음침한 항쟁들이 일어나던 명나라의 조정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들려왔고, "남송과 금의 역사를 되폴이할 것인가?" 라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누르하치, 곧 천명제(Emperor Tiānming of Qīng)는 즉위 2년이 되자 칠대한(七大恨)이라는 개전 이유를 내걸고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칠대한의 내용은 예허부를 편애한것, 개간 사업을 한 세 땅을 내놓으라고 협박한것, 천명제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죽은것 등의 이유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왜 우리만을 괴롭히냐, 하는 늬앙스도 있습니다. 태조실록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늘이 대국의 임금을 세움은 곧 천하의 공주(共主)로 삼으려 함이거늘, 어찌 오로지 우리나라에게만 원한을 맺으려 하는가?"
이 시점까지를 보면 천명제도 명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인정은 하고 있습니다. 다만 어찌하여서 우리만을 그렇게 괴롭히고 다른 부족들은 편애하냐는 식입니다. 홍타이지 이전, 누르하치의 만주는 독립적인 세계관을 만들려고 한다기 보다, 진순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느정도 부모에게 반항하여 자기 하고 싶은 일을 인정받으려 하는' 면모를 보인 것입니다. 부모가 통제를 못한 타입니다.

누르하치에게 항복하는 이영방의 모습
성난 아들의 공격은 두 갈래로 나뉘어졌고, 무순으로 진격해나갔습니다. 무순성의 수장인 유격 이영방(李永芳)은 누르하치의 항복 권고문을 받자마자 곧바로 항복을 해버렸는데, 이후 이영방은 약속이나 한것처럼 천명제의 손녀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며, 총병으로 승진했습니다. 천명제가 거대한 이상주의적 모습을 가진 사람이라기보다는, 바로 눈 앞의 상황을 직시하는 현실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측면을 보면 이는 사전에 무언가 이야기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무순은 여러 상인들이 많았는데, 천명제는 상인 16명을 불러 여비를 주고 칠대한의 문서를 건네주고는 돌려보냈습니다. 주민들은 모두 포로로 삼았는데, 이 시점의 천명제에게 가장 급한 일은 어마어마한 거대 제국 명나라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부족한 만주의 세력을 조금이라도 늘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사람'은 무엇보다 귀중한 자원이었던 것입니다.
일단 천명제는 주민들을 포로로 삼고는, 무순의 성벽은 훗날을 위해 파괴하고 되돌아가고 있었는데, 소식을 들은 총병 장승음은 1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둘러 팔기군을 요격하려고 추격했습니다. 천명제 역시 맞서 싸우기 위해 군대를 돌렸는데, 이 순간 하늘이 그를 돕는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갑자기 커다란 바람이 불면서, 모래먼지가 명나라 군사를 덮쳤고 만주 팔기는 아직 싸울 준비가 안된 명나라 군대를 신속하게 덮쳤습니다. 이 싸움은 그야말로 대승으로 끝나, 총병 장승음을 포함한 명나라 간부 군인들은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엄청난 대승이었습니다.
광녕 순무 이유한(李惟翰) 싸움이 끝나자 천명제에게 사람을 보내 포로 송환 문제를 논의하려고 했지만, 천명제는 이렇게 말하면서 거절했습니다.
"사로잡은 것은 곧 나의 백성들이다. 어찌 송환할 수 있겠는가?"
역시 인적 자원이 가장 급한 만주이기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실상 그들에게는 토지보다도 사람들이 더 필요했습니다. 이 시기 천명제는 마을 주민은 데려오고, 점령했던 땅은 그냥 내버려 둔채 되돌아오는 약탈식의 싸움을 많이 벌였습니다. 이 시기에 만주에 귀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는데, 그 '귀부'라는 것은 실상은 납치되어 잡혀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열명의 한인을 사로잡기보다 한 명의 조선인을 사로잡아라. 열 명의 조선인을 사로잡기보다 한 명의 몽골인을 사로잡아라.' 라는 말이 있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 시기 가장 필요한것은 생산력이면서 동시에 군사 전력이 될 수 있는, 험한 일을 많이한 강건한 사내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을테니 나왔을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순 함락은 명나라 조정에 충격을 주기엔 충분했습니다. 위험성이 있는 가능성에서 실질적인 위협으로 대상이 변모한 것입니다. 이에 명나라 조정도 큰 마음을 먹었고, 결정 자체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적이 더 기세를 타기전에 대군을 동원하여 완전히 짓밞아 버리자는 것으로, 상황을 생각하면 오히려 시기적절한 판단이었습니다.
1619년, 임진왜란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병부시랑 양호(楊鎬)가 요동 경략에 임명되었고, 사로총지휘로 심양에 주둔하였습니다. 사로총지휘. 명군은 네가지 길을 이용해 천명제를 공격하려는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사로의 사령관으로 동원된 총병 ─ 요즘으로 치면 사단장급 ─ 과 총병 경험을 가진 인물이 6명이었습니다.
두송(杜松)과 왕선(王宣), 마림(馬林)과 유정(劉綎) 등이 참가했습니다. 두송은 산해관 총병이며, 왕선은 보정 총병이고, 마림은 개원 총병이며, 유정은 요양 총병입니다. 유정은 임진왜란 참여 경력도 있습니다. 이성량의 아들이자 이여송의 동생인 이여백(李如栢)은 퇴역해 있었는데 다시 현장에 복귀했습니다. 요동 사정을 잘 알고 있을것이라는 판단으로 보이는데, 준비도 제법 철저했습니다. 조선의 지원군도 파견되어 유격 교일기(喬一琦)가 이를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만주가 망하기를 가장 바라고 있는 예허 여진부도 1만 5천명을 지원했습니다.
당시 양호가 천명제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이 당시 명나라의 군대는 무려 47만. 물론 이는 천명제를 겁주기 위한 것으로 실제 병력은 10만~16만 가량입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만주를 짓밞고 위험 가능성을 내포한 천명제를 물리치기에는 적절한 숫자였습니다. 만약 그대로 싸움이 벌어졌다면 천명제가 고대 이집트의 어떤 왕이 말한것처럼, 스스로 신이 되어 적군을 물리치거나 하지 않는한 무슨 재주를 가졌다고 해도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한산도 대첩, 칸나이 전투. 전술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전투들이 있는 반면에, 그 전개과정 자체가 그다지 후대가 전술적으로 보고 배울것은 없는, 말도 안되는 기적으로 가득찬 전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다수 이런 전투가 후대에 모범으로 쓰기 힘든것은, 아군이 잘하기를 떠나 우선 적군이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질러 먼저 틈을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광무제의 곤양전투가 적절한 예일 것입니다. 사실 어떤 전쟁과 전투든 어느정도는 그런면이 있기는 하겠지만 말압니다.
과거 프랑스의 축구 전설이자, 현재 유럽축구연맹 회장인 미셸 플라티니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축구는 실수의 스포츠다. 모두 완벽하면 스코어는 0 : 0 이다."
실로 그렇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명군에서 시작되었을 그 이상 현상은 무엇인가. 첫 시작의 단추를 잘못 끼운것은 산해관 총병인 두송입니다. 본래 명군의 계획대로라면 사로의 군대는 3월 1일에 집결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두송이 공을 세우고 싶은 욕심에 먼저 군대를 움직였습니다. 두송은 평소에 자신의 몸에 생긴 칼자국을 자랑하고 다녔고, 공적을 위해서라면 부하들의 고생등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즉 용맹함 밖에 모르는 장수라는 말인데, 뛰어난 사령관의 부장으로 일선에서 칼을 휘두르는 일이라면 몰라도 한 군을 이끄는 지휘관으로서는 아무래도 좋지가 않은 인물상입니다.
그렇게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군대를 재촉해서 혼하(渾河)를 건넜습니다. 워낙 물살이 센 강을 말을 타고 급하게 건너는 일이라, 이 과정에서도 이미 여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강을 건넌 후에 두송은 사르후(薩爾滸)에 2만의 병사를 머물게 하고, 자신은 계번성(界藩城)으로 1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떠났습니다. 천명제가 계번에 성을 쌓고 있다는 소식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단독행위를 했는데, 또 그 단독행위를 한 부대를 다시 둘로 나누는 것입니다.
명군이 들은 정보대로라면, 계번성은 1만 5천명의 인부가 작업을 하고 있는데, 지키는 장병은 고작 호위 400여명 뿐이었습니다. 한번 들어닥치기만 하면 승리는 기정사실로, 두송이 공을 탐내고 일을 무리하게 벌인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찰로 인한 정보는 천명제 역시 계속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천명제의 두 귀로 두송의 진로, 그리고 군대가 잘게 나눠지는 현상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기회. 천명제는 즉시 아들 홍타이지에게 팔기중 2기를 내주어 계번성을 구하게 했고, 실질적인 주력이 될 6기의 4만 5천 병사는 스스로 이끌고 2만 병사가 사령관도 없이 어물어물하는 사르후의 군대를 급습하려고 했습니다.
운이 따라주기 시작하자 이는 끝도없이 한꺼번에 몰려왔습니다. 사르후에 남은 2만 병사는 계번성으로 간 병력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대기군입니다. 총사령관도 자리를 비운데다 대기군이라는 생각탓에 방심을 하고 있던 형편이었고, 게다가 저녁이 되자 모랫바람이 그쪽으로 불어닥쳤습니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어 2만의 명군은 횃불을 밝혔고, 덕분에 후금군 4만 5천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불길이 있는곳으로 들이닥치는 셈이 되었지만, 반면에 2만의 명군은 보이지도 않는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군대와 격전을 벌어야 했습니다.
쏘아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후금군에게 있어 이 싸움은 너무나도 싱거웠습니다. 어둠 속에서 불꽃이 있는 쪽으로 그냥 화살을 쏘기만 하면 그만이었고, 갑자기 달려나가 격파를 하면 끝나는 일이었습니다. 명군은 총포를 쏘아 이에 대응했지만, 급습을 당해 정신이 없는 판에 보이지도 않는 어둠속에 사격을 하는 일은 절망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총포는 모두 버드나무에 맞았다.
명군은 상상 할 수 있는 최악의 악조건에서 너무나도 안타까운 싸움을 벌였고, 결국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마침 계번성으로 향하던 두송은 매복군을 만나 한참 고전을 하던 중에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순식간에 전장병에게 패전 소식이 들려와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천명제는 기회를 놓칠세라 승리한 6기를 빠르게 움직여 두송의 1만 군대를 포위했습니다.
횡시(橫屍)가 산야를 덮었다. 피는 흘러 도랑을 이루었다. 기치(旗幟), 기계(器械), 그리고 죽은 사졸들이 혼하를 덮으며, 마치 물이 없는 듯했다.
1만 명군은 문자 그대로 전멸했습니다. 사령관 두송도 활에 맞아 죽었습니다. 처참한 패배였습니다.

두송의 군대는 이렇게 끔찍하게 전멸을 당했는데, 이러한 이변은 본래 두송이 무리하게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없었을 일입니다. 이는 여러가지 면에서 이치가 천명제를 돕고 있음을 나타내는 사건이었습니다.
한번 이변이 생기자 온갖 문제가 후금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가 되었습니다. 두송이 전멸당할 무렵, 마림의 군대는 상간하다(尚間崖)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으니, 다른 장수 반종안이 마림을 겁쟁이로 여기고 애시당초 부터 싫어하여 제대로된 협조가 이루어질 리가 만무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또한 후금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가 되었습니다.
천명제의 차남 다이샨(代善)이 먼저 300명을 이끌고 출발했습니다. 시기는 3월 2일이었고, 이쯤 되어서 마림도 두송의 참패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림은 신중하게 전날 밤의 숙영지로 군을 이동시킨뒤 참호를 파냈고, 대포를 배치하고 외곽에 밀집 대형의 기병을 세워 철저한 방비에 나섰습니다. 다이샨은 천명제에게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당시 명나라 장수 반종안은 매우 가까운 위치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천명제는 공염수, 이희필이라는 장수들이 이끄는 2천 부대를 1천 부대로 격파한 참이었습니다. 적군이 참호를 파고 화기로 수비를 하기에 아예 병사 절반을 말에서 내려 적진을 돌파시킨뒤에 뒤에 기병으로 진군하는 방법을 썻습니다. 그때 다이샨의 지원 요청에 왔기에 서둘러 마림이 있는곳으로 떠났습니다.
천명제는 도착하고나서 세심하게 지리를 살폈습니다. 그리고 근처 산을 장악, 위에서 내려치는 형태로 싸우기로 하였는데 마림 역시 보통 내기가 아니라 그 술수를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래서 즉시 산으로 군대를 보내 치열하게 혈전이 벌어졌습니다.
본래 천명제는 말에서 병력을 내려 똑같이 화기를 무력화시킬 생각이었는데, 명군이 움직임이 상상 이상으로 재빨라서 다이샨은 그대로 돌격을 감행해 전투는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혼전으로 변모했습니다. 도저히 상황을 알 수 없는 싸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후금에 유리하게 전개가 되었습니다. 후금의 6기가 계속해서 싸움터로 달려와 바로 혈전에 참가하면서 적의 증원군이 늘어난 반면에, 마림 근처에 있는 반종안은 구경만 할 뿐 도통 구해주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입니다.
만일 이때 후금군의 기세를 꺾었다면 싸움은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결국 중과부적을 실감하며 마림은 간신히 몸을 빼 도주했고, 명군은 대패했습니다. 반종안 역시 두송과 마찬가지로 용기만을 내세우는 장수라서 이런 문제가 생긴것입니다. 싸움에서 승리한 후 천명제는 반종안의 군대에 싸움을 걸었고, 본래 계획대로 일부 부대를 말에서 내려 투입하는 전략으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천명제가 끝까지 승리하기 위해서는 속도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천명제는 바로 다시 군사들을 전열시켰는데 또다시 먹잇감이 포착이 되었습니다. 다음 목표는 유정의 동로군이었습니다.

패전 소식을 전해들은 양호는 크게 놀라 이여백과 유정등에게 진군의 중지를 명령했습니다. 이여백은 천천히 진군 중이었던지라 명령을 받고 퇴각을 했지만 문제는 유정입니다. 이미 유정은 적진 깊숙이 들어왔던지라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유정은 지금의 기준으로 따지면 70kg가 넘는 120근의 칼을 자유자재로 써서 유대도(劉大刀)라고 불리웠다는, 좀 상식 밖의 인물입니다.
유정은 가로막는 적군도 물리치며 순조롭게 진군을 하고 있었고, 허투알라(赫圖阿拉)에 이르려는 참이었습니다. 이 군대를 다이샨이 급습했고, 홍타이지와 팔기 중 정황기의 군대가 협공을 했습니다. 삼면의 돌격은 막을 방법이 없었고, 결국 유정은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다이샨은 군대를 움직여 곧바로 조선 군대와 맞붙었습니다. 이 전투의 양상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설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건주견문록, 즉 이민환의 책중일록의 기록이 다릅니다.
먼저 실록의 기록에 따르자면 청군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나타났고, 도독 이하 장수들은 화약포 위에서 자살했습니다. 좌영의 우리 장수 김응하(金應河)는 수천군사를 이끌고 승세를 타고 오는 적군에 화포를 날려 큰 성과를 거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서북풍이 불어 화포가 무용지물이 되었고, 철기병들은 그 틈을 타 급습해 좌영을 완전히 괴멸시켰습니다. 김응하는 활을 쏘며 격렬하게 싸우다가 창을 여러대 맞고 장렬하게 사망합니다.
원수 강홍립(姜弘立)은 높은곳으로 올라가 진을 쳤지만 포위가 이틀동안 계속되어 병사들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이에 김흥서(金應瑞)가 후금 군대의 진영으로 가 항복을 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합니다.
책중일록의 기록은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자, 강홍립은 즉시 군대를 준비시켰습니다. 그런데 명나라군대가 민가를 태운 연기가 여기까지 몰려왔고, 연기와 먼지 속에서 적 기병이 갑작스레 튀어나와 양익을 이루면서 아군을 공격했고, 조선군은 간신히 열을 맞추어 달려드는 적군을 향해 총포를 쏘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번 또 쏘려고 장전을 하기도 전에 청나라군대의 기병은 벌써 진지 안으로 달려들고 있었습니다. 조선군은 그야말로 궤멸을 당합니다.
이로서 전투는 완전히 종결이 되었습니다. 양호는 처형을 당했고, 이연백은 자살했습니다.
사르후 전투는 천명제에게 있어서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전투의 양상을 살펴보면, 실제로 숫자가 많은것은 명군인데 반하여 거의 대부분의 접전지역에서 숫자의 우위는 오히려 후금군이 가지고 있었고, 팔기군은 끊임없이 이동하고 움직이며 기동력으로 이 우위를 굳혔습니다. 반면에 명군은 장수들의 돌충행동, 서로간의 불화 등으로 군사적 우위를 제대로 살리지 모하고 패전해버린 것입니다.
또한 이 전투에서는 몇번이나 흙먼지를 동반한 폭풍이 수차례 명나라 군대의 군영에 휘몰아쳤습니다. 바야흐로 하늘마저도 천명제의 편을 들었던 것입니다. 행운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바이지만, 이는 그를 살리는 사람에게만 제대로 주어집니다. 만일 두송이 나서서 계번성을 무사히 깨부수었다면 오히려 그는 적극적인 승리를 거두어낸 인물이 되었겠지만, 패배를 당하여 명군 대패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통지(盛京通志)라는 책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500명으로 명나라의 40만 병을 깼다."
그리고 위원(魏源)의 성무기(聖武記)는 이를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성무기는 성경통지보다야 훨씬 유명한 책으로, 이게 널리 읽힌 덕분에 500명이 40만을 이겼다는 괴이한 이야기가 퍼졌지만 실제로는 누르하치는 병력은 적었을 지언정 모든 접전지역에서 숫자의 우위를 이용해 승리했습니다. 천명제가 뛰어나기도 했지만 명군이 병력을 너무 잘게 나눈것도 원인이었습니다.
어찌되었건, 승리자는 천명제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그리고 그의 후금입니다. 이 싸움으로 요동에 이는 풍운은, 이제 겉잡을 수 없는 노도와 같은 불꽃으로 번져나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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