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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1)-(2) ─ 이성량과 누르하치~ 팔기의 창설

구름위 2012. 12. 6.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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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이르기를,


“이여송은 훌륭한 장수인가?”

하니, 윤두수가 답하기를 이러하였다.

“비록 이여송의 사람됨은 잘 알지 못하지만, 그의 아버지 이성량(李成梁)은 명장(名將)입니다.”
 조선왕조실록 ─ 선조 33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12월 23일(기유) 3번째기사


 


 이여송(李如松)은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한 인물입니다. 바로 임진왜란 당시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왔던 명나라의 장군으로, 심지어 거상이나 임진록같은 게임에도 등장해서 아주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선조는 이여송이 온다는 말을 듣고 걱정하기를,


“그 사람은 단지 호(胡)를 방어할 줄만 알고 왜적과 싸우는 것은 익히지 않았다. 이 적을 북로(北虜) 보듯이 한다면 잘못이다.” 


 과연 선조의 식견대로 되어, 큰 도움을 준 명나라 남병에 비해 이여송의 중심이 되는 북병은 오히려 온갖 해악만을 끼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성량은 그러한 이여송의 아버지로, 요동의 실질적인 제왕으로 군림하던 인물. 자(字)는 여계(如契)이며 호(號)는 인성(引城)이고, 철령(鐵嶺) 사람으로 그 선조는 다름 아닌 조선 출신 이영(李英)입니다. 즉 선비족 출신, 돌궐족 출신 하듯이 말한다면 이성량은 다름아닌 조선족 출신이 됩니다. 그는 영용하고 강인하여, 장수의 자질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성량은 선조가 조선에서 넘어온 후, 계속 철령위의 첨사(僉事)를 세습하였는데, 위(衛)의 장관이 지휘사, 그 밑 차관이 지휘동지, 첨사가 그 밑의 직급이라고 한다면 하잘 것 없다고는 못해도 대단히 높다고도 말할 바 없는, 그런 자리입니다. 그리고 세습이라고 하지만, 상황을 보면 아버지의 직책을 이어받으려면 북경으로 가서 수속을 밞고 돈도 들었던 모양으로 보이며, 이성량의 대에 이르자 집안도 가난해져서 세습하여 직책에 오를 자금조차 없었습니다. 이에 이성량은 무려 40세가 될때까지 아무런 자리도 차지 하지 못했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순안어사(巡按御史)가 그의 기량을 보고 인정하여 북경으로 데리고 왔고, 간신히 자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공을 인정받아 요동 험산(險山)의 참장(參將)이 되었고, 1567년 토만(土蠻)이 영평(永平)을 침공하자 자원하여 나서 공을 세워 부총병이 되었고, 요양으로 이동했습니다. 이후 1570년 총병 왕치도(王治道)가 전사하자, 그 대신 도독첨사대리가 되었습니다.


 40세까지 아무런 재주도 발휘하지 못했던 이성량은, 한번 관직에 오르자 끊임없이 성과를 내고 승진하여 이미 이 시기에는 사단장에 해당하는 직위에 올랐습니다. 당시 명나라 동북변에 한부(漢部), 태평부(泰平部), 타안부(朶顔部) 등 온갖 부족들이 난립하며 지난 10여년 동안 명나라의 많은 장수들이 사망했는데, 이성량이 군비를 갖추고 장교들을 선발하여 4만 군대를 갖추자 그 위용이 천지를 진동시켜 명군은 다시 싸울 의욕을 내게 되었습니다.


 다음해 5월, 토만은 대거 침공하여 명군이 막아내지 못하자, 이성량은 적의 본거지를 공격하여 수장들을 죽이고 500여명이 넘는 적군을 섬멸했습니다. 그 후에도 토만의 공격을 계속해서 막아내었고, 타안부가 4천기로 공격해오자 이 역시 저지해 내었습니다.


 이때 건주여진의 왕고가 명나라 군관 배승조(裵承祖)를 살해하자, 이성량은 나서서 왕고의 공격을 물리치고 무려 천여명이 넘는 적을 일거에 섬멸했습니다. 1575년에는 심지어 2만명이 넘는 적군이 쳐들어오는데, 화기를 이용해서 단박에 적을 깨부수기도 합니다.


 이미 이성량은 영원백(寧遠伯)이라는 직위를 가졌고, 셀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공훈을 끊임없이 올렸습니다. 1584년에는 여러 부족이 연합한, 무려 10만이나 되는 엄청난 군대를 격파해 내는 가공할 위업까지 세우기도 합니다. 


 이렇게 이성량의 동북변에 머문지 22년, 조정에 보낸 대승의 보고만 무려 10여 차례를 넘었고, 그를 따르는 장수들도 모두 높은 보상을 받았으며, 서달과 같은 개국의 시조들을 제외하고선 지난 200여년간 변경에서 이렇게 공을 세운 장수는 척계광(戚繼光)을 제외하면 없다시피 했습니다. 황제는 계속해서 이성량에게 어마어마한 재물들을 포상으로 주었고, 결국 이성량의 집안은 물론 그 하인들까지도 서로 재물을 가지고 있을 정도에 이릅니다.


 그러나 역전의 명장 이성량은, 신분이 높아지자 점점 사치스러워졌고, 승리를 거둘때마다 더욱 교만스러워 했습니다. 그럴만도 한것이, 이 지역에서 군자금, 말의 판매 차익, 소금에 대한 세금, 상금, 세비에 이르기까지 모든것은 이성량의 손아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즉 이성량은 이 지역의 실제적인 지배자이자, 제왕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재물은 곧 국내외를 막론하고 뇌물로 뿌려졌고, 이렇게 되자 이성량의 공이 조작이 되어 보고가 되는 경우도 심심찮게 일어났습니다. 물론 이성량이 대단한 공훈을 세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그 과정에서의 패전 등은 완전히 사라졌고 간혹 나타나는 실패들도 덮어졌습니다. 적군이 쳐들어오는데 막으러 나가지 않는것은 전략의 일환으로 꾸며졌으며, 양민을 죽인 경우에도 적의 수급으로 일이 바뀌어졌고, 항복한 자를 죽인 후에 승전했다고 보고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내부에서 이러한 비리를 보고하려고 하는 경우가 없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성량이 뿌린 막대한 뇌물로 인해, 이러한 움직임들도 모두 사전에 저지가 되었습니다. 이성량이 한번 실각이 된 바가 있었는데, 그러자 부하들이 서로 다투게 되면서 이 지역이 어지러워졌고, 76세가 된 이성량이 다시 복직하자 8년 동안 거의 아무런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이러니 이성량을 기용하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이 지역에선 이성량이 군주이자 황제이며 신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이성량은 여진인 왕고를 물리쳤는데, 왕고의 양아들 아타이(阿臺)는 하다부에서 아버지를 팔아넘겼다고 여기며 하다부와 대립하던 예허부와 손을 잡고 군대를 계속 동원했습니다. 이에 이성량은 하다부를 도아 아타이를 공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누르하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휘말리고 말았습니다.


 교창가(覺昌安)는 누르하치의 할아버지가 되는 사람이고, 교창가의 손녀딸이 다름아닌 아타이의 아내였던 것입니다. 누르하치의 할아버지 교창가와 아버지 탁시는 이 싸움에서 명나라의 편을 들었는데, 이와는 별개로 할아버지는 손녀는 구하기 위해 아타이가 있는 성에 들어섰지만, 아타이가 딸을 내어주지 않아 억류당했고, 탁시 역시 따라 들어갔다가 억류 당했습니다. 그 직후 이성량은 화공을 구사했고, 아타이는 죽었으며 교창가와 탁시 역시 불에 타 죽었습니다.


 이에 관한 다른 이야기로는 손녀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타이에게 항복을 권유하러 들어갔다가 붙들렸고, 교창가는 불에 타 죽었으며, 탁시는 난입해 온 명군이 오인하여 죽여버렸다고 합니다. 1583년의 일이었습니다.


 누르하치의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는 명나라를 위해 싸웠지만 개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를 의식했건 하지 않았건, 이성량은 25세의 장성한 청년, 누르하치에게 큰 빚을 진 셈입니다.


 여진족을 너무 잘게 분산시켜도 좋지 않고, 너무 한데 힘을 모으게 해도 좋지 않다. 가장 좋은것은 적절한 동맹을 하나 만들어 평정하게 하고, 적당히 뒤에서 컨트롤을 시키면서 조종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성량은 그걸 해낼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이성량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바로 이 누르하치였던 것입니다.


 다른 후보들도 이습니다. 우선 해서여진의 하다부. 하지만 여기는 내분이 일어나서 서로 지리멸렬 해졌습니다. 다음으로 예허부. 하지만 몽골계 여진인 예허부는 명나라에 대한 악감정이 너무 심했고, 하다부와는 서로 지겨울 정도로 싸움을 벌이던 지라 도저히 정세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표적은 건주여진으로 바뀌었습니다.


 누르하치는 이성량의 조건에 아주 잘 맞는 청년입니다. 어리고, 똑똑하고, 할아버지나 아버지나 명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었습니다. 이성량은 누르하치에게 그들의 죽음에 대한 사과의 보상으로 30통의 칙서와 30필의 말을 주었습니다.


 청나라 태조의 첫 번째 군자금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목숨 값이었습니다.


 다시 이성량은 본인의 주선으로 누르하치가 명나라의 좌도독, 용호장군의 칭호를 받을 수 있게 해주었고, 800냥이라는 세폐도 주었습니다. 




 이러한 전폭적인 지원 아래, 누르하치는 차근차근 여러 준비를 마쳤습니다. 첫번째로는 건주여진의 통합으로, 만력 11년에 시작된 전쟁은 만력 17년(1589년)이 되서 끝나,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해서여진과 겨루게 된 것입니다.


 앞서 여진에게 있어 교역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때 누르하치는 무순, 청하, 관전, 애양 등 네 곳의 관에서 명나라와 활발하게 통상을 하여 내실을 키웠습니다. 교역을 하는데 문제가 되는건 안전성이고, 이제 통합이 된 건주여진은 매우 안전했음으로 상품 유통은 아주 원활했습니다. 만력 19년 경에는 압록강로도 손에 넣어 조선과의 교역길 까지 열게 됩니다.


 반면에, 해서 여진은 예허부와 하다부의 오랜 대립으로 혼란스러웠고, 교역료는 폐쇄나 다름없이 되어버렸습니다. 진주, 모피, 인삼 등의 교역품이 건주를 경유하게 되면서 각지의 상인들이 건주에 몰려들었고, 해서여진 4부는 금세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해서여진 중 가장 강력한 예허부가 앞장을 서서 나왔습니다. 예허부는 사자를 보내 누르하치에게 영토 할양을 요구했고, 이는 사실상 시비나 다를 바 없었지만 누르하치는 화를 내며 거절했습니다.


 "나는 곧 만주이며, 너는 곧 후룬이다. 너의 나라가 크다 해도, 내 어찌 취하겠는가? 내 나라가 넒다 하여도, 너 어찌 나누어 가질 수 있겠는가?"


 만주라는 단어의 어원에 관에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어찌되었건 누르하치는 이 당시부터 자신과, 자신의 세력을 일컫어 '만주'라고 하며 개별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즉 이 당시 누르하치에게 만주란 건주 5부족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허부와는 같은 나라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거절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여진족이 새로이 만주족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누르하치가 무언가 이상하다는것은 모든 사람들이 알법했고, 공포심을 느낀 해서여진족은 변경의 각 집단에도 호소하여 누르하치가 말한 '만주'라는 괴물을 쳐부수려고 했습니다. 어느 순간 그들이 가지던 모든 이권 ─ 교역에 관한 부분도 저 만주라는 괴물이 집어 삼키고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모두의 이해관계가 절충된 끝에, 1593년 해서 4부족에 석백족(锡伯族)등이 포함된 9부의 연합군이 편성이 되었습니다. 그 숫자는 3만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이 '만주'라는 정체불명의 괴물은 상상보다도 더욱 공포스러운 적이었습니다. 누르하치는 9부의 연합군을 격파했고, 연합군에 가담했던 장백산의 주사리부(주셔리)와 눌은부(너연) 너머로 원정, 그 지역마저 모두 합병해 버린 것입니다.


 새롭게 깃발을 내건 만주의 기세는 꺼질 줄을 몰랐습니다. 이 시기, 누르하치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592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말한 야망으로 인하여, 20만의 일본군이 조선을 침공,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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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2년 음력 4월 13일, 세상을 뒤덮을 듯한 함대가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습니다. 이 순간을 시작으로 발발한 임진왜란은 그 7년간 수많은 고통, 아픔, 슬픔, 눈물과, 온갖 이야깃거리, 감동, 전설을 역사에 남겼습니다. 그 수많은 순간들을 대략적으로라도 이야기 하기 시작하게 되면, 가히 끝을 볼 수가 없을 것이기에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하고 넘어가고, 이 전쟁으로 인한 북방의 정세에만 영향을 주목하면,


 누르하치는 엄청난 기회를 손아귀에 쥐었습니다.


 이 미래의 청태조에게 또다른 희소식은, 1591년 11월, 어사 장학명(張鶴鳴)의 주청으로 요동의 황제, 이성량이 해임되었던 것입니다. 이성량이 열심히 뇌물을 먹인 유력자들이 조정을 떠난 탓에 아군이 일시적으로 없어졌던것이 원인이었는데, 영원백이라는 작위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으나 다른 후임자들이 차례로 요동에 파견되었습니다. 


 물론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해도 이성량의 엄청난 영향력은 요동에 분명히 남아 있었고, 후임자들은 그 영향력때문에 제대로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이성량이 문제가 많은 사람이지만, 능력 하나 만큼은 천하의 명장이라 할만 합니다. 이성량이라는 큰 기둥을 뽑은 요동은 10년동안 군사 책임자가 8번이나 교체되는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성량은 한참 후인 1601년에 노령의 나이로 다시 복귀합니다.


 지금의 누르하치에게 있어서, 이성량은 너무나 버거운 상대입니다. 그는 요동에서 신이나 다름없었고, 이성량이 마음만 먹으면 누르하치를 개미 잡아 죽이듯 찍어 누르는것은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성량이 어찌되었건 실무에서 잠시 손을 때는 모양새가 되었고, 저 멀리 남방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함으로서 명나라의 시선은 완전히 그쪽에 고정되었습니다. 


 조선의 정곤수(鄭崑壽)가 1592년 12월 8일 명나라의 북경에 다녀온 후에 선조 임금에게 보고한 바에 의하면, 당시 북경은 발칵 뒤집어져서 원군 파병 문제에 대해 격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허홍강(許弘剛)은 "요동에서 막기만 하면 그만이다." 라고 하였고, 이는 비용적인 문제가 큽니다. 반면에 장동(張東)은 허홍강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그르다고 하였고, 조선의 정곤수는 장동을 만나보기도 했습니다. 

Toyotomi hideyoshi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과 이로 인해 벌어진 일은 당시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상상 밖의 일이었습니다. 누르하치는 히데요시의 결정 때문에 정말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때마침 이성량도 개입 못할 그런 상황에서, 누르하치는 9부 연합등을 물리치고 세력을 크게 확장시킬 절호의 찬스를 얻은 것입니다.


 이성량의 후임으로 온 사람들은 저마다 모두 일이 손에 안맞아 허둥대며 현지 사정 파악을 제대로 하는것도 힘들었고, 계속 교체가 되었습니다. 누르하치는 이 기회에 자신의 세력, 즉 '만주'의 힘을 크게 늘리면서 해서4부를 지속적으로 압박했습니다. 히데요시가 야망을 버리지 않고 정유재란을 일으킬 당시에 해서 4부는 울며겨자먹기로 강대해져가는 만주와 화약을 맺었고, 전쟁이 끝나던 1599년에는 기어코 하다부가 만주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이 당시 누르하치는 무엇보다 명나라와 우호관계였습니다. 이성량이 밀어준 인물이 그입니다. 해서 4부를 굴복시켜도 명나라에 대한 반항이 아니게 되니, 저지할만한 세력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즈음, 하다부를 예허부가 충돌질했고, 하다부의 공격을 만주가 격파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명나라와 만주의 대립이 시작되었습니다.


 명나라의 사자는 누르하치를 힐문하기 위해 만주에 왔습니다. 슬슬 이쪽에서도, 누르하치가 너무 강대해져가는것에 대해선 경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르하치도 할말은 있었는데, 때마침 어려운 하다부를 예허부가 공격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서로 하다부를 공격한건 마찬가지니 저쪽을 힐문하라고 요청했지만, 명나라는 만주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어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허부에 조금 더 힘을 실어주었고, 자주 하던 방식대로 서로 싸워서 기를 꺾게 하려고 했습니다.


몽골 출신인 예허부가 명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사태가 이 지경인데 그러한것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고, 명나라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이 즈음 하다부는 계속된 패배와 식량 부족으로 몹시 곤궁해져있어, 명나라에 도움을 구했지만 이미 예허부를 파트너로 선정한 명은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다부는 결국 누르하치에 만주에게 항복하고 말았으니, 일의 전말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제 명나라와 만주는 서로 다른 길을 가야 합니다.


 본래대로라면 이성량이 고삐를 쥐고 누르하치라는 맹수를 적절히 조율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번성했고, 특별한 기록은 없지만 누르하치가 이성량에게 잘 보이려 여러가지 행동을 취했을것이라 상상하는것은 그다지 무리라고 볼 수도 없는 일입니다. 또한 22년간 재임하며 이성량은 상당히 나타해졌고, 중간에 파면까지 당했으며 복귀했을때는 나이가 많았습니다. 


 누르하치는 기세를 타고 거침없이 성장세를 달렸습니다. 하다부에 이어 후이파부가 1607년에 멸망했고,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난 이 시점에 누르하치는 해서 4부 가운데 2부를 병합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6년 뒤인 1613년에 우라부가 멸망했습니다. 단순히 부 하나를 멸망시키는데 그런 시간이 든것이 아니라, 그러는 사이에도 만주는 내부적 역량이 차곡차곡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남은것은 오직 예허부 뿐. 예허부는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명나라는 유격 마시남(馬時楠) 주대기(周大較) 등에게 1천명을 주어 보내는등 공개적으로 누르하치의 반대편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명나라와 싸우기엔 시기상조여서, 이때 누르하치는 일곱 개의 성 등을 함락시키고 일단 물러났습니다. 다른 이유들도 있었는데 1616년 정월, 누르하치가 드디어 가한, 즉 칸(Khan)의 자리에 오른것입니다.


 


 칸의 자리에 오르고, 명나라와 적대하게 된 누르하치. 만주라는 새로운 조직의 수장에 올라 더욱 확장해 나가야할 그에게는 여러가지 문제가 놓여 있었습니다. 우선, 한 다리 건너면 알고 있는 공동체 개념에서 벗어나 더 큰 조직을 꾸리는 일입니다.


 여진인들이 유목보다 오히려 사냥이나 교역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말은 했습니다. 사냥은 또한 일종의 군사훈련이나 다를바 없었고, 훗날의 강희제 등도 사냥을 군사훈련과 연결시키는 행보를 자주 보였습니다. 여진인들은 이렇게 보면 끊임없이 군사훈련을 하고 무기를 잘 다루는 존재들입니다. 이런 그들을 규율에 잘 복종시켜서, 단결시키면 일찍이 말한 '여진이 1만이 되면 천하가 이를 감당 할 수 없다.' 는 말이 빈말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여진말 중에 니루(niru)라는 것이 있고, 이는 본래 커다란 화살을 이르는 말입니다. 수렵 집단인 만큼 수렵에 참가하려면 정해져 있는 인원수가 있었고, 이 10명 정도의 집단을 지휘하는 사람을 니루에젠이라고 불렀습니다. 에젠은 주인이라는 말인데, 사냥시에 여러가지 독재적인 권한이 있었습니다. 만일 사냥시에 누군가가 함부로 움직이거나 해서 사냥감이 도망간다면 큰 타격입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누르하치는 수렵 단위였던 이 방식을 전투 단위로 바꾸었습니다. 300명을 1니루로 하였고, 다시 5개의 니루를 1잘란(甲喇), 5개의 잘란을 1구산(固山)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구산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기(旗) 입니다. 즉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1잘란 ─ 1500명
 1구산 ─ 7500명


 누르하치가 가한에 즉위할 당시 만주의 니루는 총 400개였고, 이는 대략 12만 정도가 됩니다. 그리고 여러 기를 두어 이를 색으로 나누어 구분했습니다. 사냥을 할때도 깃발을 사용했는데, 최초의 팔기인 4기(즉 이 시점에선 팔기라는 명칭이 아닌)는 황색, 남색, 홍색, 백색을 상징으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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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황기(鑲黃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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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백기(鑲白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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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홍기(鑲紅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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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남기(鑲藍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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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황기(正黃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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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백기(正白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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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기(正紅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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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기(正藍旗)



 자세히 보면, 테두리가 있는 깃발과 없는 깃발이 있습니다. 기존에 있던 남, 황, 백, 홍색 중에 홍기를 제외하곤 홍색으로 두르고, 홍색엔 하얀 테를 둘렀습니다. 누르하치는 이런 깃발을 사용해 만주족을 군사체제 국가로 만들었고, 이 팔기는 각각이 군단인 동시에 백성들의 소속집단이 되었습니다. 즉 만주족이란 예외없이 누구든 이 팔기의 일원으로 속해있다는 것입니다. 한족 사람들이 절강성 출신, 복건성 출신 등으로 구분한다면 만주족은 정황기 사람인가, 양람기 사람인가 하는 식으로 서로를 구분했습니다. 만주족을 일컫어 기인(旗人)이라고 하는건 이때문입니다.


 누르하치가 이런 체제를 선택한것은 만주족들이 개별적으로 전사이기도 하고, 또한 워낙 숫자가 적은지라 만주족 전체를 군사집단화 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기도 했습니다. 팔기에 대해서는 팔기통지(八旗通志)라는 기록이 있는데, 근세부터 근현대까지 존재했던 거대제국 청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라는 점에 비하면 의외로 기원이나 여러가지 면에서 기록이 부실하고 명확하지 않은 부분들이 존재합니다.


 팔기통지에 따르면 누르하치 즉위 직전에 있던 400여 기루 중에 만주와 몽골의 기루는 308개, 몽골의 니루가 76개, 한군의 니루가 16개였습니다. 이는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인데, 만주족과 몽골의 혼성 니루가 있고, 몽골인의 니루가 무려 76개나 되며, 한족 니루 또한 16개나 되는 숫자로 보면 5천명 가까이가 됩니다. 숫자가 적은 만주족 공동체에서 이는 매우 많은 숫자로, 이 정권은 여러가지로 기기묘묘 했습니다.


 누르하치의 정권이 이러했고, 누르하치 본인도 만주어, 한어, 몽골어등을 구사하던 국제적인 색깔을 보였습니다. 다만 이 시기에는 만주어는 있어도 그 글자는 없었습니다. 물론 금나라 시절 만들어진 여진 문자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당시의 문자란 결국 동아시아 문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한자를 지나치게 의식해서 결국 이와 비슷해졌고, 만주족이 사용하는 여진말은 터키나 한국과 같은 우랄알타이계니 고립어인 한자와는 아예 성립할때부터 불편한 많이 많습니다. 거기다 금나라 문자 역시 금나라의 한화(漢化) 등으로 별로 쓰이지가 않아서 사용하기에 불편했습니다. 당장 금나라 문학들은 대부분 한자로 쓰여졌습니다.


 이러한 금나라 말을 공식문서로 쓰고는 있었지만, 애시당초에 그것은 만주족 내에서도 극소수나 쓸 수 있고, 또 쓴 사람이나 읽을 수 있는 문자이니 애시당초 쓸만한게 못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주로 사용되는건 몽골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착안한 누르하치는 몽골문을 기반으로 해서 만주어를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문자의 작성을 명령했습니다.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누르하치가 처음 이 쪽에 손을 댄것은 1599년 쯔음이니, 즉위하기 한참 전에도 이 문제를 고민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누르하치가 무언가 더 큰 어딘가를 보고 있는 느낌은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가지 일에 분주하던 누르하치는, 갑자기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됩니다. 명나라의 움직임은 분명 주목하고 있을테지만, 명은 군사 한명 파견하지 않고 누르하치에게 절대적인 타격을 가했습니다.


 교역 정지 명령. 하늘과 땅을 뒤덮는 100만 대군도, 가공할 화포도 아닌 단지 이 한장의 명령서로 인해, 누르하치는 엄청난 위기에 몰리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