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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 : 폐허에서 일어선 날개 ◇ Act 5. 승호리 상공의 머스탱 (Korean Bridge Busters) | |
This document was updated at 2003. 8. 18 단독 작전권 해체될뻔한 위기를 벗어나 다시 날아오르게된 한국공군은 마치 웅크리고 기회를 기다리던 표범이 먹이를 노리고 튀어오르듯이 빠른속도로 눈부시게 발전해 나갔다. 당시 한국공군에게는 전투기를 조종할 조종사의 양성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따라서 1950년 12월 20일에는 조종사 양성을 위해 부대의 주력을 제주도로 이동시켜 피나는 훈련을 거듭했다. 이무렵 전황은 또다시 다급해지고 있었다. 거의 통일이 되는가 싶었던 1950년 겨울에 기습적으로 시작된 중국군의 인해전술로 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UN군이 속절없이 패퇴하면서 현재의 휴전선 지역에서 양측이 서로 밀고 밀리는 식으로 전선이 교착되어 버린 것이다.
이로인해 한국공군은 한국육군의 항공지원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전선에 투입되어야 했고, 1951년 4월에 조종사 10명을 새로 일본에 파견하여 미군으로부터 F-51D의 비행훈련을 다시 받은 후 이들 기체를 추가로 인수받아 황급히 돌아왔다. 그러나 아직 기체의 운용 및 전체 부대운용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로 인해서 모든 작전권은 미공군에게 있었으며 한국공군은 미공군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전선으로 출격해야 했다. 하지만 독자적인 작전권을 갈망하던 한국공군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제주도에서 부대 주력을 사천으로 이동시켜 조종사 훈련을 계속하였으며 이에 더불어 F-51D의 야전 운용에 필요한 항공관제, 기체의 야전 정비능력을 피나는 훈련과 노력으로 발전시켜나갔다. 그리고 1951년 8월 1일 이제는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한 한국공군 사령부의 요청에 따라 미공군 군사고문단이 부대를 방문하여 부대 전체의 역량에 대해서 철저한 점검을 받았는데, 이때 미군사고문단은 한국공군이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할 능력이 있다는 평가를 내린 것이다. 다급한 전황속에 와해될 위기에서 10명의 조종사들이 몰고온 머스탱으로 간신히 미공군의 한 귀퉁이에서 명맥만 유지되던 한국공군은 불과 1년의 짧은 시간만에 독자적인 작전권을 가진 독립 공군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무렵의 상황에 대해서 장지량 전 공군참모 총장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 1951년 제주도에서 사천 비행장으로 이동한 후 우리는 모든 조종사들부터 정비원들까지 하나가되어 밤을 새워가며 정말 피나는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미 군사고문단으로부터 ORI를 받게 되었는데 얼마후 한국공군에게 단독 작전을 수행할 권한을 주겠다는 내용의 전문을 받게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적인 순간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동안 미공군에게서 구두로만 전달받던 작전 명령을 이제는 Republic Of Korea Air Force가 선명하게 인쇄된 공식 문서로서 받게된 것입니다." 단독 작전권을 부여받자 한국공군은 신속하게 전투지역으로 이동할 준비를 시작했다. 1951년 8월 5일 사천기지에 서 조종사 훈련을 계속하고 있던 제1 전투비행단은 전투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F-51D의 조종훈련을 받고있던 조종사들중 전투에 투입할 기량이 있다고 평가되는 조종사들과 훈련부대에서 차출이 가능한 F-51D 전투기들을 중심으로 바우트원 대대 출신의 베테랑 김영환 대령의 지휘하에 제10 전투비행전대를 편성했다. 이무렵 한국공군에는 작전가능한 F-51D가 10기 내외였다. [ 일본에 파견된 한국공군 조종사가 F-51D를 인수받는 장면, 주익에는 한국까지 비행하기 위하여 T-33용의 외부 연료탱크가 설치되어 있다. (사진제공: 달러맨님) ] 제10 전투비행전대는 본격적인 전투에 투입되기 이전에 8월 19일부터 지리산 지구에서 활개를 치던 북한군의 패잔병들이 중심이된 무장공비들을 토벌하는 작전에 투입되어 지상공격에 대한 경험을 쌓게된다. 이것은 당시 공비토벌을 전담하던 한국 경찰부대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의사소통이 원활한 한국공군이 적격이라는 미공군 사령부의 판단에 따른 것으로 이 작전을 통해서 제10 전투비행전대의 조종사들은 공지합동작전의 기초를 확립할 수 있었다.
이후 한국공군은 기종개편에 돌입한 남아프리카 공화국 공군으로부터 F-51D를 추가로 인수할수 있었으며 이로서 기존의 2배에 가까운 총 18기의 머스탱을 운용하게 되었다. 단독작전권이 부여된지 한달 보름만인 1951년 9월 17일 드디어 사천기지의 제10 전투비행단은 강릉비행장을 모기지로해서 한국육군이 사투를 벌이고 있었던 강원도 지역을 중심으로한 동부전선으로 이동하는 것이 결정된다. [ 강릉비행장으로 이동한 한국공군 제10 전투비행전대의 머스탱들이 주기해 있다. ] 우선 지상병력과 정비요원들이 차량을 통해서 강릉으로 먼저 이동하였으며 강릉비행장의 활주로가 정비된 후에 김영환 대령이 지휘하는 F-51D 10기의 제10 전투비행전대가 사천을 이륙하여 강릉 비행장에 안착하게 되는데 이날이 1951년 10월 1일이었다. 한국공군의 첫 작전기지가 된 강릉주민들은 전쟁속의 여러운 와중에도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이들을 맞이했다. 그리고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생각한 김영환 대령은 한국공군의 첫 단독출격일을 10월 11일로 결정했다. 이 순간에 대해서 장지량 전참모총장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 우리는 첫 단독작전을 수행하기 전날이던 1951년 10월 10일 모두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강릉기지의 천막속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워가며 작전을 구상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드디어 대망의 한국공군 단독출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기지 주변에는 수많은 강릉 주민들이 몰려와 태극기를 흔들며 반겨 주었습니다." 승호리 철교 1952년 1월, 한반도 전체를 휘감은 겨울바람은 전쟁에 지친 양측의 병사들을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이무렵 공산군은 전선으로 전쟁물자를 운송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이것은 주요 교량과 철로등이 미공군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차단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뼈속까지 사무치는 추위속에서 제대로된 보급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전선의 병사들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공산군은 얼마 남지 않은 보급로를 유지하고자 필사적이었다. 이들은 주민들을 동원해서 밤을 새워가며 폭격으로 망가진 교량이나 철로, 도로를 복구하고 전선으로 보급물자를 실어 날랐다. 이무렵 중국으로부터 수송된 전쟁물자는 평양을 중심으로 집적되었으며 여기서 다시 중서부 전선으로 보급되고 있었다. 대동강지역에는 서부전선에서 필요한 전쟁물자를 실어 나르는데 필수적인 교량이 10여개가 있었다. 하지만 미공군이 이들 교량을 가만 놔둘리 없어서 대동강의 교량은 집중폭격을 받아 하나 하나 끊겨 나갔다. 하지만 이런 폭탄의 비속에서도 꾿꾿하게 버티고 있던 철교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유명한 승호리 철교였다. 대동강의 지류인 남강에 위치하고 있던 승호리 철교는 평양으로부터 10km정도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공산군이 사력을 당해 방어하고자 했던 주요 보급로였다. 대동강의 교량을 모조리 파괴해서 공산군의 보급선을 차단하려던 미공군은 이 승호리 철교에 발목이 잡힌 상태였다. 사실 승호리 철교는 대동강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물로 인식되어 미공군의 공습에 의해 일찌감치 파괴되었지만 공산군은 미공군이 다른 교량을 파괴하는 동안 본래의 철교에서 200m 하류쪽에 새롭게 철교를 가설하였으며 철교 주위에 많은 대공포화를 배치했다. 새롭게 가설된 철교는 기총소사나 로켓탄의 공격에 견딜 수 있도록 모래 푸대가 많이 동원되어 여기저기 쌓여 있었으며 주위의 산악 지형으로 인해서 공격기가 저공을 고속으로 진입하기가 매우 곤란했다. 게다가 철교의 종방향을 따라서 연이어 배치된 대공포화가 강력한 화망을 구성하고 있었으며 주위의 고지에도 대공포진지가 설치되어 저공으로 진입하는 공격기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교량폭격 임무의 특성상 교량의 횡방향으로 진입해서는 정확하게 명중시키는 것이 곤란했기 때문에 주로 미군의 공격기들이 주로 철교의 종방향으로 진입해서 공격한다는 것을 파악한 배치였다. [ 미공군의 정찰기에 촬영된 승호리 철교, 아래쪽의 기존 교량이 못쓰게 되자 공산군은 위쪽에 새롭게 교량을 건설했다. ] 이러한 요인으로 미공군은 총 500 소티에 해당하는 출격행에도 이 새로운 철교를 파괴하지 못하고 계속 손실만 입고 있었다. 점점 실패횟수가 늘어가자 미군 조종사들은 이지역에서 대공포화에 피탄되어 공산군의 포로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승호리 철교 공격임무에 투입되면 강력한 대공포화의 저항에 기가질려 적극적으로 공격임무에 임하지 못하고 안전고도에서 대강 폭탄을 떨구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저공 공격이 어려워지자 일본에서 출동한 B-29 폭격기들까지 동원되어 연일 폭탄의 비를 뿌려댔지만 교량에 정확하게 명중하는 폭탄이 없어 교량근처에만 폭탄구멍이 수백개 뚫려 있었을뿐 승호리 철교는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계속 작전이 실패하자 미공군 사령부는 전술회의에서 이 교량는 반드시 폭파해야 하는 요주의 목표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렇게 너무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는 자국 조종사들이 연일 희생되고 있어서 작전을 계속 수행하기가 곤란하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자 미공군 작전참모부의 대위 한명이 그러면 이 임무를 독자적으로 작전권을 부여받은 한국공군에게 맡겨보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의견이 나오자마자 회의장은 그건 말도 안된다는 비웃음과 야유로 시끌 시끌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결국 이 임무를 한국공군에 맡겨보는 것으로 최종결정이 났다. 하지만 사실상 미공군의 결정은 한국공군의 기량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은 잠시 쉬고 싶으니 그동안 한국공군이 한번 해보라는 밑져야 본전식의 결정이었다. [ 강릉 기지에서 작전중인 한국공군의 모습을 담은 사진 ] 여하간 어떻게 한국공군에게 이런 임무가 주어졌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는 한국공군이 마의 승호리철교를 어떻게 박살내느냐가 중요한 것이었다. 불과 1년전에 기량미숙 및 역량부족으로 거의 해체될 위기에까지 몰렸던 한국공군에게는 이 승호리철교 공격임무야말로 한국공군의 입지를 확고히 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했다. 동부전선의 한국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아 연일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던 1952년 1월, 미공군으로부터 공식적인 협조 요청이 들어왔다. 그 내용은 평양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승호리 철교를 폭격하라는 것으로서 한국육군의 근접지원만을 수행해오던 제10 전투비행단의 조종사들은 처음으로 적진 깊숙히 위치한 주요 목표물에 대한 본격적인 공습임무를 맡게된 것이다. 승호리 상공의 머스탱 1952년 1월 12일 오전 7시, 차가운 새벽 공기속에서 강릉비행장의 활주로에는 한국공군의 머스탱 5기가 차례로 엔진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이 전폭기들의 주익에는 500파운드 폭탄 2발과 로켓탄이 장착되어 있었는데 이 들이 바로 승호리 철교 공습을 첫 번째로 수행할 한국공군 제10 전투비행전대의 용사들이었다. 전날 한국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기록을 수립한 역전의 맹장 김두만 소령이 승호리 공략작전의 첫 번째 공격편대를 이끌 게 되어 있었다. 드디어 김두만 소령의 기체를 선두로 5기의 머스탱이 강릉기지의 얼어붙은 철판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이들은 대형을 갖추는 즉시 대관령을 넘어 평양쪽으로 날아갔다. 얼마뒤 대동강을 따라서 비행코스를 잡자 저 멀리 반드시 명중시켜야만하는 승호리철교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500파운드 폭탄 2발과 로켓탄 4발을 장착하고 이륙하는 한국공군의 F-51D, 이것이 당시 지상공격을 위한 표준무장이었다. 좌측 주익에만 그려진 국적마크를 잘 보여주는 사진이다. (출처: 한국공군 E-mail news letter) ] 그러나 머스탱들이 상공에 다다르기도전에 벌써 붉은 섬광을 휘날리며 대공포화가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으며 철교근처에 이르러서는 마치 거미줄과 같이 대공포화망이 얽혀 있었다. 하지만 한국공군 조종사들은 전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공격을 시작했다. 김두만 소령의 공격개시 명령과 함께 F-51D 전폭기들이 굉음을 울리며 대공포화사이로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센 대공포화 때문에 철교를 제대로 조준경에 넣기가 어려웠으며 5기의 머스탱들이 차례로 강하하여 폭탄을 떨어뜨렸지만 폭탄은 모두 교각을 명중시키지 못하고 빗나가 모래먼지만 피워올리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화가난 김두만 소령이 다시 로켓탄 공격을 명령했는데 로켓탄은 비교적 정확하게 날아가 교각에 명중되었지만 폭발력이 약해서 교량의 구조물만 찌그뜨렸을 뿐이었다. 결국 1편대는 작전에 실패하고 귀로에 올라야 했다. 같은날 오후 2시 윤응렬 소령이 지휘하는 3기편대의 공격부대 2파가 다시 승호리철교를 덥쳤지만 또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들은 강릉기지로 돌아온후 얼굴이 모두들 굳어 있었다. 비록 아군기의 손실은 없었지만 반드시 성공해야하는 목표를 놓치고 돌아왔다는 자책감에 조종사들은 모두 말을 잊고 있었다.
이날밤 작전회의에 모인 김두만 소령휘하의 조종사들은 이날의 실패원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그들이 교육받은 미공군의 공격방식 - 8000피트에서 강하하기 시작하여 3000피트에서 폭탄을 투하한후 이탈하라는 - 이 대공포화가 밀집된 승호리 철교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고도를 내려 작전하기로 했다. 즉 4000피트 고도로 철교에 진입한 후 급강하를 시작하고 고도를 1500피트까지 내려서 폭탄을 투하하기로 한 것이다. 사실 이 전술은 너무나 위험한 것으로 대공포화에 걸릴 위험이 너무나 높고 설사 폭격을 성공시키더라도 고도가 너무낮아 자칫하다간 폭탄을 떨어뜨린 기체나 연이어 진입하는 아군기가 폭발에 휘말릴 위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한국공군 조종사들에게 이 승호리철교만은 그대로 폭탄을 안고 자폭하는 한이 있더라도 꼭 파괴해야 하는 목표물이었다. 그리고 사흘뒤인 1952년 1월 15일, 또 다시 공격작전이 결행되었다. 이날 작전가능한 기체는 총 6기로서 지난번보다도 2기가 적었다. 이날은 윤응렬 대위가 1파 공격대를 3기를 이끌었고 옥만호 대위가 2파를 이끌 게 되어 있었다. 이들은 손을 흔들며 환송하는 강릉기지 부대원들을 뒤로하고 차례로 날아올라 전선 상공을 넘어 북으로 향했다. 6기의 머스탱이 적진 상공에 진입한지 40여분이 지나자 또다시 대동강물에 비치는 햇빛사이로 승호리철교가 보였으며 역시나 또다시 격렬한 대공포화가 이들을 맞이했다. "좋아, 산돼지들아 이번에야말로 저 다리를 박살내 버리자! 전원 돌격하라!" 윤응렬 대위의 공격개시 명령과 함께 4000피트로 진입하던 머스탱 6기는 차례로 굉음을 울리며 급강하에 들어갔다. 이들이 마치 산돼지처럼 저돌적으로 돌입해 들어가자 조종석을 스치는 대공포탄의 불덩어리도 이들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1500피트까지 강하하자 조준경에 가득 들어찬 교각이 조종사들의 눈에 들어왔다. 이순간 점점 진동이 심해지는 조종간을 꽉 잡고 있던 윤응렬 소령이 폭탄 스위치를 눌렀고 폭탄은 교각을 향해 일직선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숨돌릴 사이도 없이 연이어 돌입한 아군의 머스탱들이 계속 폭탄과 로켓탄을 교각에 명중시켰다. 공격을 마친 1편대가 선회하면서 대공포 진지를 향해 기총소사를 시작하자 연이어 옥만호 대위가 지휘하는 2편대도 철교를 향해 일직선으로 돌입했으며 이들도 대공포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초저공으로 폭탄을 투하했다. [ 한국공군기들의 저공공격으로 드디어 격파되는 승호리 철교 (공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재) ] 연이어 폭탄이 폭발하고 붉은 섬광과 수많은 파편이 대동강물을 뒤덮었으며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피어올랐다. 다행히 우군기의 손실은 없었으며 모두들 무사히 상공으로 날아올라 승호리철교의 상태를 점검했다. 이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른 검은 연기를 헤치고 철교 상공에 다시 이르렀을 때 철교 중앙 부분의 교각 2개가 완전히 박살난 상태로 주저앉아 있는 장면이 시야에 들어왔다. 조종사들은 무선을 통해 들려오는 편대장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드디어 우리가 해낸 것 같다. 장하다 산돼지들! 이제 기지로 돌아가자"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승호리철교는 이렇게 파괴되었다. 결국 한국공군의 산돼지들이 스스로의 힘만으로 해낸 것이다. 강릉기지의 활주로에 6기의 머스탱들이 모두 안착하자 조종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조종석밖으로 뛰어나왔다. 모두들 마치 소나기라도 맞은 것처럼 땀에 젖어 있었지만 얼굴에는 희색이 만연해 있었다. 이들로부터 작전 경과를 보고받은 김신대령은 감격에 벅차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신대령은 환호성을 울리며 기쁨에 젖어있는 조종사들을 독려하여 오후에 다시한번 승호리철교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이날 오후 3파 공격대가 승호리철교를 완전히 끝장내기 위해 상공에 다시 진입했을 때는 공산군의 방어부대가 마치 완전히 기력을 상실하기라도 한 것처럼 제대로 대공포화를 쏘아올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결국 3파 공격대의 폭격에 의해 승호리 철교는 완전히 박살이 났다.
모든 공격이 끝난후 미군 정찰기가 촬영한 사진에는 기막힌 장면이 들어있었다. 승호리 철교의 교각 5군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으며 온전한 구조물은 하나도 없었다. 철도는 엿가락처럼 휘어 있었고 교량은 복구불능의 상태에 빠진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주위의 대공포화 진지들도 큰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작전이 성공한 열흘뒤인 1952년 1월 25일 미공군 단장회의에 초대된 김신대령은 자신있게 한국공군의 작전경과를 보고했으며 환등기에 의해 정찰사진이 영사되자, 미공군 장교들이 여기저기서 탄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많은 장교들이 몰려와 김신 대령에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정신없이 축하인사를 받은 김신대령이 기지로 돌아가기위해 회의장을 나왔을 때 한 미공군 대위가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그는 김신대령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바로 한국공군에게 이 작전을 맡겨보자고 했던 사람입니다. 모두들 말도안된다고 반대했지만 저는 한국공군이 반드시 해낼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성공을 거두리라고는 사실 저도 자신이 없었지요. 덕분에 저는 동료들과 내기에서 이겨 20달러를 땄답니다. 정말 축하드리고 오늘 제가 술을 한잔 사겠습니다." 김신대령은 미 미군장교와 헤어진후 기지로 돌아와 이 사연을 부하들에게 이야기 해주었으며 모두들 이제 한국공군의 위상이 UN군 내에서도 높아졌다는 것에 기뻐했다. 이 작전의 성공은 미공군내에서도 널리 알려졌으며 미군이 발행하는 신문에도 작전의 성공에 대해서 크게 게재되었다. 이무렵 이 소모적인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본토의 반전여론 때문에 곤란해 하던 미 행정부는 즉각 언론보도를 통해서 한국공군이 이렇게 열심히 싸워서 큰 성과를 올렸다는 것을 알리도록 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자유세계 연합군들의 전쟁이라는 명분을 강조했다고 한다.
승호리철교 폭파작전의 성공은 오로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초저공 작전을 마다하지 않았던 조종사들의 투혼과 신념이 이루어낸 성과였으며 한국공군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사건으로 한국공군의 전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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