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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잊혀진 나라 대한제국 13년의 꿈 (6/6부) - 대한제국 고종황제를 독살한 일제

구름위 2012. 11. 23.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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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나라 대한제국 13년의 꿈 (6/6부)
대한제국 고종황제를 독살한 일제

 


고종 독살설

▲ 독살된 고종황제의 장례행렬 © 편집부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아침 6시에 경운궁(덕수궁)에서 갑자기 뭔가를 마시다가 사망했는데,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가 사인이라는 자연사설이 있는 반면, 그날 아침 한약, 식혜, 또는 커피 등을 마신 뒤 이들 음료에 들어 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다.

고종의 시신을 염했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시신이 사후 1~2일밖에 안되었을 때도 심하게 부풀어져 있었고 이가 이미 다 빠져있는 등 부패가 정상인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이 되었다고 한다.

무관 출신 한진창은 고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한진창은 자신의 누나 한진숙의 시조카 윤치호에게 고종이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19년 초까지만 해도 윤치호는 고종 독살설에 부정적이었다. 그런 사실은 1919년 1월26일자 윤치호 일기에서 볼 수 있다.

“이태왕(고종)이 왕세자 이은(영친왕)과 나시모토 공주(이방자)의 결혼식을 꼭 나흘 앞두고 승하하는 바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고 있다. 정말이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다. 1907년 황제 자리를 빼앗기고, 3년 후 나라마저 빼앗긴 굴욕을 감수한 이태왕이 이제 와서 하찮은 일에 억장이 무너져 자살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더구나 어린 왕세자와 일본 공주의 결혼이야말로 왕실의 입장에서는 경사스러운 일이 아닌가? 이 결혼을 통해 두 왕실 간의 우호관계가 증진될 것이고, 왕세자는 조선의 어떤 여성보다 우아하고 재기 넘치는 신부를 맞이하게 되는 거니까 말이다. 만약 이태왕이 ‘병합’ 이전에 승하했더라면, 조선인들의 무관심 속에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선인들은 복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옷소매를 적셔 가며 이태왕을 위해 폭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그런데 한진창의 증언을 듣고 얼마 뒤 윤치호는 입장을 선회하게 된다. 윤치호는 자신이 한진창에게 들은 내용을 1920년 10월 13일자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윤치호와 한진창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1. 이상적이라 할 만큼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갔다.

2.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3. 민영달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4. 30cm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5. 고종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2명의 궁녀가 의문사했다.


윤치호는 한진창 역시 고종독살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었는데,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내관) 등과 함께 시신의 염을 한 민영달이 한진창에게 이 내용들을 말해주었다고 했다. 고종황제가 독살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이는 김규식의 편지서신과 함께 3·1 만세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 고종황제 독살 상황도 © 편집부


고종황제에 대한 외국인들의 평가

고종 황제를 직접 만나본 외국인들은 대체로 고종의 해박한 지식과 과감한 정치 감각에 호의를 보였다.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는 “고종이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수동적으로 대처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극심한 정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는 고종이 명성황후 일가에게 끌려 다녔다는 그간의 평가와는 대조를 이룬다.

스워터트는 미국인 데니(O. Denny)]가 남긴 평가, 즉 “고종은 위대한 국가의 지배자다운 강건, 낙관 및 인내를 보였다.”라는 평가를 지지하면서, 해링턴 연구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데니는 본래 이홍장이 자신의 조선 속방화 정책을 조력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조선 정부에 추천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고종의 고문이 된 데니는 자신의 나라를 독립국으로 보존하려는 개혁군주의 노력에 감동하여 오히려 청나라에 대해 조선을 변호하는 일을 업무로 삼아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그의 특별한 이력은 조선의 평가 자체에 대해 신뢰성을 더해 준다.

그리고 고종이 초빙한 서양인 고문 중 한사람이자 개신교 선교사였던 헐버트(Homer Hulbert)는 고종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강하게 부정하였다. 그는 황제가 “유약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견해는 틀렸다.”면서 고종이 주권 수호에 대한 확고한 의지 아래 사생결단의 조치를 단행했던 것들을 열거하였다.

또한 1895년에 한성신문 기자로서 을미사변에 직접 가해자로 참여하기도 했던 기쿠치 겐조(菊池謙讓)가 쓴 《근대조선사》 상·하(1936년, 1939년, 鷄鳴社, 京城)에서 상당히 다른 의견을 보이고 있다. 기쿠치는 《근대조선사》를 쓰기에 앞서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찬한 《고종태황제실록》의 편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자료를 모으게 된다. 그의 논조는 대체로 《코리아 레퍼지터리》와 비슷하여, 고종이 암군이 아닌 명군이었으며, 단지 열강에 포위되어 내정보다는 외교에 힘쓰다가 국세를 끝내 세우지 못한 불운한 군주라고 묘사하였다.

또한 기쿠치는 다른 일본 학자가 거론하지 않은 평양 이궁 조영(造營)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며, 그러한 고종의 치적을 제정 러시아와 일본의 사이가 나빠짐에 대비한 시책이라고 평가하였다. 1903년 8월 15일 고종 황제가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는데, 그 친서에는 일본이 황성을 침탈하게 됨을 고종이 이미 예측하였음이 밝혀져 있고, 이러한 동맹 요청을 평양 이궁 조영의 연장으로 보았다.

그밖에도 고종시기에 설치된 각종 근대적 기구나 받아들여진 서양 문물을 개화파나 독립협회의 치적으로 보지 않고 고종의 업적으로 평가하였으며, 오히려 일본에 합병됨으로써 결실을 보지 못하고 산멸했다고 보았다.

코리언 레퍼지터리 잡지의 견해 :
고종에 대한 서양인의 평가는 1896년 10월에 간행된 《코리언 레퍼지터리》 3권 11책에 실린 〈한국의 국왕 폐하〉(His Majesty, The King of Korea)의 글이 가장 자세하다. 그 글에서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일본으로부터 벗어난 뒤, 대한제국으로의 새로운 출범을 내다보면서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그것도 서양인들(코리언 레퍼지터리 잡지의 편집자들)의 시점에 따라 씌었기 때문에 객관성이 인정된다. 그들이 특별히 한국의 국왕에게 아첨을 떨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기자는 진실로 그의 나라의 복지와 진보를 열망하고 있다고 적으면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열거했다.

1. 고종의 교육 수준에 대해 폐하는 한문과 한글에 숙달하여 있다고 하였고,

2. 국왕 자신이 자기 나라의 역사에 대해 나라 안의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있으며,

3. 신하들이 잘 모르고 있는 전통 등에 대해 국왕에게 물으며 그가 답해 주기도 한다.

4. 국왕의 집무에 대해서도 매우 부지런하며, 누구보다도 더 많은 일을 해낸다.

5.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도 진보적이며, 다른 동양 나라와는 달리

서양에 대해 적대적인 생각에 젖어 있지 않으며,

6. 교육적인 일에 아주 관심이 많으며,

7. 최근 수년 안에 이런 진보적 방향에서 물질적인 진보들이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8. 종교 면에서는 (가톨릭교회를 탄압했던) 대원군 집권 때와는 달리 관용으로 일관하였다.

9. 국왕의 성격에 대해서는 친절하고 상냥하며 자비롭다고 말했다.



이렇듯 고종은 암울했던 주변 국제정세 속에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훌륭하고 유능한 군주였으나,

일제에 기생했던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무능하고 유약한 왕이라는 어불성설의 평가를 받았다.

당연히 재평가되어야 한다.

 

 

 

출처 : 요트고래사냥
글쓴이 : 베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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