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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식인설의 오류

구름위 2020. 4. 1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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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식인설의 오류

  
 


   

공자가 인육으로 담근 젓갈을 즐겨 먹었다는 전설은 와전된 가짜 뉴스이다

배경

공자의 제자 자로가 위나라에서 벼슬할 때 변란이 일어났다. 여기에 얽힌 이야기가 매우 복잡하다. 너무도 음탕했던 자신의 모친을 죽이려했던 태자 괴외가 실패하여 망명을 하고, 괴외의 아들이 군주(위출공)가 되어 아버지를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고, 괴외는 자신의 누나를 위나라 대신에게 시집을 보내 돌파구를 찾는데 이 누나가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잘생긴 노비와 간통하고, 그의 아들 공회는 못마땅해하지만 사건에 휘말리고, 결국 괴외는 위나라로 돌아와 자신의 아들을 내쫓고 군주(위장공)가 된 그런 이야기다.

자로가 괴외의 조카인 공회를 섬기고 있을 때 공회는 괴외에 의해 붙잡혀있는 상황이었다. 자로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공회를 구출하려 하자 괴외는 뛰어난 무사 두 명을 자로에게 보냈다. 이미 자로는 늙은 몸이라 이겨낼 수 없었으며 얼굴에 칼을 맞아 갓끈이 끊어져 갓이 땅에 떨어졌다. 그러자 자로는 "군자는 죽더라도 갓을 벗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갓을 다시 쓰고 정좌했고, 무사들은 자로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를 살해했으며 괴외는 그의 시신을 소금에 절여 해(醢)로 만들어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공자는 통곡을 하며 집안의 '해' 단지를 모두 엎어버리고 집 안을 서성거리다가 쓰러진 다음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실상


한 마디로 공자의 애제자인 자로가 해(醢)가 되는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공자는 집 안의 해를 몽땅 내다버리고 다시는 해를 입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제자가 맞이한 최후를 상기시키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가 '공자는 인육젓갈을 즐겨 먹었는데 제자가 인육젓갈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뚝 끊었다'로 와전된 것이다.

당연하지만 해(醢)에는 젓갈이라는 뜻밖에 없다. '고기나 생선을 소금에 절이는 보존발효식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로가 소금에 절여져 젓갈 신세가 되었다고 해서 온 세상의 젓갈을 다 인육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허튼소리에 불과하다. 당장 해(醢)란 단어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수백 차례(...) 나오며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가 오늘날도 먹는 전통 한국 요리 중에는 식해(食醢)가 있다. '식해라니 인육젓갈을 먹는다는 뜻이냐?' 라고 묻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북송 시기 시장에서 인육을 팔았다는 것도 젓갈을 팔았다는 것을 오독한 것이다.

사람의 시신을 소금에 절여 버리는 경우는 역사 속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당장 고대 시대에는 전공을 증명하기 위해 적군 장수의 머리를 소금에 절여 후방으로 보내기도 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연산군이 아버지 성종의 두 후궁을 어머니의 원수라 여겨 죽인 뒤 젓갈로 담가서 산과 들에 뿌려버리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후의 경우에도 인간젓갈 기술을 시전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당연하지만 이는 시대를 막론하고 끔찍하고 무도한 행위로 여겨졌으며, 대상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이나 철저히 실용적인 필요(전공 확인)가 아니면 행해지지 않는 일이었다. 이러한 예외 사례를 확대 해석해서 '젓갈이라고 먹은 게 다 인육 아니냐'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그야말로 앞뒤없는 난장짓에 불과하다.

인간을 사용한 순장풍습에 대한 공자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이야기는 맹자에 나와있다.

양혜왕 편의 맹자가 혜왕에게 하는 이야기 중에서,
"옛날에 공자께서는
'처음으로 사람 모양의 인형을 만들어 그것을 순장에 쓰이게 한 자는 삼대가 멸할 것이다.'

라 하시며 사람의 형상을 한 인형조차도 귀히 여길 것을 역설하셨습니다."

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정말 사람을 묻어버리는 순장도 아니고, 그저 공양용으로 따로 만든 사람 비슷한 물체를 사용하는 행위조차, 그 근간에는 '사람을 희생시키는 행위'라는 사상이 아직 존재한다고 느껴 경계했다는 이야기다.


이 정도로 인본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어떤 형태로든 식인을 했으리라고 말할 수가 있는가.

이를 확대재생산한 '중국의 식인풍속사'라는 친일 대만논객인의 글일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대만사람이 중국을 까기 위해서 일본에서 편찬한 책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엽기적인 식인드립들은 대부분 저기서 나왔다. 유비가 식인을 즐겼네 어쩌네 하는 글도 이것이 기원. 그런데, 저 <중국의 식인문화>라는 책은 황원슝[1]이란 대만인이 쓴 책인데, 이 사람은 혐중(물론 중화민국이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을 혐오) 성향이 짙은 이이고 또한 일제 식민지 시대를 미화하는 자이다. 이 링크를 타고 황문웅이 어떤 똘아이인지 보고 평가하도록 하자.


황문웅의 저서인 <중국의 식인문화> 반박 덧붙여 저 대만인은 황문웅이라는 자로 일본에서 활동하며 식인이 중국의 전통문화라는 개드립을 치면서 중국인을 비하하는 데 앞장서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 또라이인간이 쓴 책 중에 납치가 한국의 전통 문화란 말도 나온다. 그나마 보쌈이라고 둘러대면 그렇다 치더라도 이 사람은 우리나라의 일제시대도 정의로운 것이었다고 주장하며 남경대학살, 위안부 사건 등도 모두 조작이라고 떠드는 자다. 철저하게 대만 친일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 근데 애초에 중화민국이 아무리 중국을 싫어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현재의 중국이지 중화민국인이라도 원주민이 아닌 한 어쨌든 그 조상은 중국 본토에 살았을 것이고, 더욱이 공자의 후손은 현재 대만에서 대접받으며 살고 있으니 이자가 한 짓은 아주 웃기지도 않는 헛짓거리일 뿐이다.

그나마도 더 기원을 파고 들자면 일본 제국시기의 쿠와바라 지츠조라는 일본의 중국학교수가 저술한 <지나의 식인육풍습>(circa 1927)[2]이라는 일련의 논문들이 있는데, 결국 황문웅도 이 논문들을 참조해서 현대에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유교와 사대주의를 까기 바쁜 몇몇 서적에서는 이걸 사실인 것처럼 써놓기도 했다. <전통과 중국인>이라든가. 사족으로, 저 책에서 얘기하는 식인 기록이란 것들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잔뜩 등장한다. 이런 논리라면 한국도 엄연한 식인 국가가 된다

[1] 그런데 대만에 동명이인이 있다. 위키백과 중국어판에서도 여기 나온 사람은 따로 작가라고 언급된다. 헷갈리지 않도록[2] 1919년, 1923년에도 같은 제목의 관련논문을 저술한바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