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무기의 탄생;지대지 유도탄 현무

구름위 2017. 1. 15.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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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사거리 180㎞ …장거리 타격·억제전력 증강

지대지 유도탄 현무 ①




기사사진과 설명

국군의 날 퍼레이드에 참가한 현무 지대지 유도탄. 국방일보DB



 현무는 적 도발 시 후방에 위치한 지상 고정 표적 타격을 목표로 하는 지대지 유도무기다. 발사대 및 포대통제소는 차량탑재 이동식으로 설계됐다. 유도탄은 2단 고체 추진 기관의 정밀 관성유도방식을 사용해 표적을 정확히 타격한다. 현무체계는 이동식 발사대, 3기의 발사대 제어가 가능한 5톤 트럭 탑재 포대통제소, 유도탄 트레일러와 유도탄으로 구성된다. 유도탄의 길이는 11.92m, 동체 직경 0.89m이며 최대 사거리는 180㎞다. 현무는 장거리 지대지 개량형 유도무기의 자주적 개발 효시로 고도정밀유도 성능을 기반으로 장거리 대응 타격력을 확보해 억제전력 증강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1단 단일추진기관, 관성항법장치, 유도조종장치, 이동형발사대, 발사통제장비를 국내 개발했다. 탄착까지 계속 지령유도조종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발사 전 탄착점과 궤도를 장입해 관성유도에의해 자율유도비행하는 방식으로 명중 정확도를 크게 향상시켰다. 백곰은 1단 로켓으로 작은 추진기관 4개를 묶어서 사용하는 반면 현무는 대형 추진기관 1개를 사용한다.

 

현무, 탄생의 서막

 “독자적 개발체제 확립, 지대지 유도탄 개발, 1단계는 75년 내 국산화 목표로 함. 기술개발을 위해 국내외 기술진을 총동원하고, 외국 전문가도 초청하여 외국과 기술제휴. 비교적 용이한 것부터 착수, 유도거리 200㎞ 내외의 근거리, 탄두는 전략표적 파괴 목적으로 파괴 효과가 큰 것을 개발하되 탄두의 교환성 유지. 미사일 기술 연구반을 ADD에 부설하고 공군에 미사일 전술반을 설치”

 이 내용은 1971년 12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 독자적 유도탄 개발을 지시한 극비 메모 내용이다.

 이 지시에 따라 1972년 4월 14일, ‘1974년까지 단거리 전술유도탄 개발생산, 1976년까지 장거리 지대지유도탄 개발, 국방과학연구소장 책임하 사업추진’이라는 요지의 “항공공업 개발계획”이 국방부로부터 전달된다.

 이어 1974년 5월 “유도탄 개발에 관한 기본방침”이 대통령 재가를 받음으로써, 율곡사업비로 시설 및 장비 획득 투자가 이뤄져 백곰기본형(NHK-1) 개발이 본격적으로 개시됐다.

 ‘현무’의 탄생을 향한 첫 씨앗이 뿌려진 것.

 이후 ADD는 항공공업발전계획에 따라 XFR(Experimental Free Rocket) 개발을 통해 설계 인력을 양성하고 외국에서 관련 기술 및 설비를 도입해 유도탄 개발을 위한 기반을 확보했다.

 백곰유도탄은 1977년 선행개발에 착수해 1978년 4월 최초 시험비행을 실시했으며 여러 번의 실패와 성공을 거듭해 1978년 9월 26일 마침내 박정희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공적인 비행을 선보였다.

 이후 1979년에는 실용개발에 착수해 그해 10월 1개의 시험포대에 실전 배치했고, 여기서 백곰기본형의 단점을 보완해 관성항법유도방식을 적용한 대형 단일추진기관 및 이동식체계 개념의 백곰개량형(NHK-Ⅱ) 개발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백곰개량형(NHK-Ⅱ)은 1977년 9월부터 1978년까지 시스템 개념을 정립해 1979년부터 연차적으로 개발 및 각종 비행시험을 수행, 1981년 선행개발을 완료했다.

첫 번째 위기, 갑작스러운 개발 중단

 ADD는 1979년부터 백곰개량형의 핵심구성품인 관성항법장치 개발을 필두로 본격적인 시험비행을 진행했다. 그러던 중 1982년 말 정부의 갑작스러운 정책 변경으로 ‘현 상태로 사업정리, 사업 참여 인원의 대대적 감원, 사업종결 후속 조치’라는 상부 지시가 내려짐에 따라 현무 개발은 큰 위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연구소의 대대적인 기구 축소에도 불구하고 사표가 반려된 몇몇 사람들로 구성된 개발팀이 현무의 이동식발사대, 탄운반차량과 사격통제밴을 이용한 지상통합시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1983년 10월 9일에 일어난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을 계기로 백곰개량형(백곰Ⅱ) 사업은 다시 본격화됐다.

 아웅산 테러 사건의 참상을 겪은 전두환 대통령은 88올림픽이 개최하기 전 평양을 즉시 타격할 수 있는 사정거리의 미사일을 완성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후 ADD의 연구원들은 1984년부터 1987년 말까지 현무의 개발과 생산을 병행했다.


 1985년에는 비행 시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1986년부터 1987년까지는 현무 종합체계에 대한 실용성 평가를 수행해 1차 생산과 전력화에 성공했다. 당시 연구소는 1988년 1월 1일부로 작전을 개시하기 위한 사업계획서를 작성하는 등 모두가 밤낮없이 연구에 매진했다.


 2차 전력화는 1989년에 착수하여 1995년에 완료하였는데 추가로 체계를 생산하여 부대 규모를 확장하였고 동시에 종합군수지원계획을 수립해 각종 기술 자료를 제작, 배포하면서 장비운용 및 야전 정비 교육을 실시했다.

 

   3차 생산 사업은 현무 유도탄 및 유도탄 정비 유지에 필요한 발사대, 사통장비를 생산하고 대대지역에 탄약반을 새로 설치해 신규 장비를 배치하는 사업으로 1993년 10월에 착수해 1999년 12월에 완료했다.

 또 3차 생산 기간 동안 ADD는 유도탄 핵심 품목인 짐발(GIMBAL)형 관성유도장치를 완전히 국산화했고 1999년에는 사격통제프로그램의 Y2K 문제를 해결했다.



잇단 난관 극복 … ‘토종 유도무기 효시’ 되다

지대지 유도탄 현무<玄武> <2.끝>
2015. 01. 13   16:52 입력 | 2015. 01. 14   10:51 수정


200원짜리 핀 불량으로 유도탄 추락 사고

5개월간 문제 해결 … 1987년 비행시험 성공

한미 미사일 협상, 핵심부품 국산화 기회로

美 경제불황 덕에 유도탄 개발 해결책 마련

 

공동기획 : 국방과학연구소(ADD)·국방일보

 



 


현무 주요 제원
 로켓 단수 2단 방식
 길이 11.92m
 직경 0.89m
 탄두 고폭 분산탄
 가격 약 12억 원
 명중률 CEP 1mil 이내
 최대상승고도 30㎞
 총중량 5.45톤
 최고속도 마하 4.1
 연료 1·2단계 로켓 모두 고체연료 사용 

 

 

 

2번째 위기, 아찔했던 비행시험 실패

 

 국방과학연구소(ADD)는 1984년 9월 22일 국내 조립 관성항법장치의 성능을 확인하는 비행시험을 시작으로, 1985년 9월 21일 전두환 대통령이 참관한 가운데 비행시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후 현무는 1986년 9월 12일까지 일곱 번의 연속된 비행시험을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그해 10월 17일 마지막 운용시험평가를 위한 장거리 비행시험에서 실패해 추락하고 말았다. 유도조종계통 연결 커넥터 속에 들어간 200원짜리 핀 한 개의 접촉 불량으로 15억원 상당의 유도탄이 예상 경로를 벗어난 것이다. 경로에서 벗어난 현무는 비상폭파해야만 했고 탄체는 전북 부안군 줄포리 논바닥에 추락했다.

 과거 백곰 유도탄 비행시험 시 4개의 소형추진기관 중 1개가 늦게 점화돼 시험장 뒷마을로 날아가는 일이 발생한 이후 유도탄 탄체가 육지에 떨어진 두 번째 사고였다.

 당시 인근 파출소에 이상한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신고가 접수됐고, 경찰관들이 현장을 조사한 결과 ‘국방과학연구소’라는 명판이 발견됐다. 이들은 전주방송국에 연락처를 확인해 연구소로 연락을 해왔다. 탄두와 분리된 2단 몸체가 추락한 지점으로부터 약 30m 떨어진 곳에서는 한 할아버지가 벼 타작을 하고 있었고, 약 200m 떨어진 버스정류장에는 줄포리 장날을 맞아 5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이후 ADD는 사고 분석을 위한 팀을 구성했다. 연구원 모두가 합심해 체계 전반에 걸쳐서 간과한 문제점과 고장 유형 효과 분석을 했고, 차후 운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요소까지 5개월간 약 60여 개의 개선 사항을 도출했다. 그런 다음 이를 신속히 해결함으로써 1987년 5월 추가 운용 비행시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현무는 이런 과정을 거쳐 1987년 말 전력화돼 현재까지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무기체계로 운용되고 있다.

 

 

3번째 위기, 미국의 부품 수출 거부

 

   현무는 1차 사업 이후 추가 전력화를 위한 2차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위기에 봉착했다. 1989년 후반, 지대공유도탄인 ‘천마’ 개발용 부품 등을 포함해 미국에서 유입되는 부품들의 수출 허가가 지연되더니 급기야 현무를 비롯한 각종 미사일 및 로켓 개발과 생산에 소요되는 품목들이 일괄적으로 수출이 거부되거나 반려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대량살상무기 비확산정책을 강화하던 미국이 대량으로 현무를 생산 배치하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특히 현무의 성능을 의심했기 때문에 ADD는 이를 해소하고 연구소 제반 사업을 정상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국방부·외무부와 긴밀히 협조해 대미 미사일 협상을 추진했다. 그 결과 외무부 안보과장 명의의 정보보장 서한 송부 형식으로 1990년 10월 한미 미사일 협상이 타결됐다. 1979년 한국의 관성항법방식 지대지유도탄 개발과 관련, 노재현 당시 국방부 장관 서한 형식으로 한미 미사일 양해가 타결된 이후 두 번째 한미 미사일 협상이었다.

 

 이를 통해 ADD는 다시 소요 자재를 정상적으로 획득하게 됐고 1991년 4월부터는 현무체계 개발과 생산에 관련된 현장·현품에 대해 미국 측의 현장 검증이 일곱 차례나 이뤄졌다. 현장 검증 때마다 ADD 개발팀은 혹시나 불필요한 오해로 외교 마찰이 생기거나 다른 사업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크게 염려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핵심 부품과 관련한 자국의 능력 부재로 쓴맛을 톡톡히 본 연구소는 유도무기 핵심 부품의 국산화를 현무 2차 사업기간 내에 완료했고, 덕분에 현재는 각종 유도무기를 국내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할 수 있게 됐다.

 현무는 배치 후 15년 만인 2002년 8월 26일 거아도 시험장에서 현무대대 최초의 사격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쳐 운용부대 요원의 사기를 진작하고 현무체계의 신뢰성을 입증했다.

 현무 개발로 얻을 수 있었던 관성항법방식의 유도조종 기술, 고속유도비행체 성능설계 및 분석 기술, 대구경 고체추진기관 기술, 고성능 대용량 유압장치 기술, 자탄분산식 고신뢰 탄두 기술 등은 각종 유도무기 개발의 기본이 되고 있다.

 

 

이런 일 저런 일, 개발자가 말한다

 

현무 개발의 산증인 구상회 박사는 현무의 성공 배경에는 미 국방부로부터 받은 한 통의 초청장이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의 육·해·공군 연구소를 방문해달라는 초청장이었는데 구 박사는 방문 일정을 대폭 조정, 육·해군 유도탄연구소에서 오래 머무를 수 있도록 했고, 이곳에서 만난 맥 대니얼 소장의 도움으로 각종 자료와 관성항법장치를 얻어 지대지 유도탄 개발 계획을 작성하는 데 활용했다는 것.

 구 박사와 함께 유도탄시험장을 물색하다 간첩으로 오해받아 무장경찰과 예비군까지 출동하게 했던 이경서 박사는 유도탄 소프트웨어와 추진제를 만들 기반이 전혀 없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미국 경제 불황이 해결책을 마련해줬다고 말했다.

 불황에 시달리던 맥도널 더글러스가 ‘나이키’를 사거리 240㎞의 지대지 미사일로 개량하자는 제안을 했고 그 개량 과정에서 유도탄 관련 소프트웨어를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

 또 자금난에 시달리던 록히드가 당시 퇴역해 쓸모없게 된 공군 유도탄 추진제 공장을 매물로 내놨고, 그 공장을 200만 달러에 사들여 공장의 장비는 물론 나사 하나, 노트 한 장까지 싹 쓸어온 덕분에 추진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