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슈툼게베어(StG) 44
- 세계 최초의 돌격총
StG44의 개발은 192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 육군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훈을 통해 미래의 보병전투는 400m 이내의 근거리에서 병력이 산개된 산병전의 형태로 벌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이런 전투에서는 탄환의 위력이 떨어져도 빠르고 정확한 사격이 가능한 자동소총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됐다. 사정 거리와 살상력을 중시한 당시의 소총탄은 연발 사격시 반동이 심해 다루기가 불편하고 근거리 명중률이 떨어지므로 자동소총을 위한 새로운 탄환의 개발이 결정됐다.
1938년, 헤넬사는 34년에 개발된 7.92×33㎜ 규격의 쿠르츠(Kurz) 탄환을 사용하는 자동소총 개발에 착수했다. 이 소총의 요구 성능은 400m 내에서 Kar98 소총과 동등한 명중률, 분당 360∼450발의 발사 속도, 가혹한 환경에서의 작동 신뢰성이었다.
하지만 41년까지 독일 육군의 주력 소총은 여전히 Kar98k 소총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새로운 보병 화기 개발이 사실상 금지된데다 본격적으로 독일이 재무장한 이후로는 기관총과 기관단총에 생산 우선권이 주어져 개발이 늦어진 것이다.
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새로운 자동소총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소련군 보병들은 많은 자동소총과 기관단총들로 무장하고 있어 화력 면에서 종종 독일군을 압도하는 경우가 생겼기 때문이다.
더구나 산병전술의 영향으로 보병들은 분대 단위가 아니라 2인 1조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아지며 보병 개개인의 화력이 더욱 중요해졌다. 특히 당시 독일이 보유한 MP40기관단총은 100m만 벗어나면 위력이 급격히 약해지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독일 육군은 자동소총의 개발을 재개했다. 42년 헤넬사는 StG44 돌격소총의 원형인 Mkb42(H)를 만들었다. 좀 무겁기는 했지만 설계 당시 요구됐던 성능을 모두 달성한데다 반동이 거의 없어 숙련도가 부족한 신병들도 어렵지 않게 표적을 맞힐 수 있었다. 거기에 프레스 공법을 적극 도입, 생산성도 매우 높았다.
신형 자동소총은 42년부터 43년까지 실전 테스트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43년 육군 병기국은 Mkb42를 MP43으로 개칭하고 43년 말까지 1만4000정을 생산, 동부전선에 배치했다. 43년 12월 동부전선에서 MP43의 우수성을 확인한 히틀러가 양산을 정식 허가했고 44년부터 MP44로, 44년 12월에는 StG44로 제식명이 변경됐다.
StG44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약 52만5000정이 생산됐으나 전쟁 말기 수송망 붕괴로 생산량의 약 30%만 전선에 도달해 사용됐다. StG44는 전황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게 등장해 전쟁의 승패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우수한 설계 개념은 AK47·M16 같은 현용 소총의 설계 개념과 디자인에 큰 영향을 끼쳤을 정도로 소총 역사의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2차대전과 루프트파우스트
무게 6.5㎏, 길이 150㎝에 9개의 20㎜ 로켓 발사관을 원형으로 묶은 형태로 돼 있다. 발사 전 조작에 따라 2회에 나눠 4발·5발이 연사되는 방식과 방아쇠를 한 번씩 당길 때마다 두 발씩 발사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초속 380m의 로켓은 약 2000m의 최대사거리를 자랑했다. 특히 기초적인 조작훈련을 받은 병사 한 명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라도 사용이 가능했고 이론상 로켓만 재장전해 주면 발사관은 무한대로 사용할 수 있다.
현대 휴대용 지대공 미사일의 원형을 제시한 이 매력적인 휴대용 대공화기는 당시 독일이 연합군의 항공 공격에 얼마나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었는지 극단적으로 대변해 주는 무기다. 당시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한 독일은 지상 부대를 습격하는 연합군 항공기를 격퇴하기 위해 이 대공무기 개발에 노력을 경주했고 독일의 HMS사가 일반 보병이 사용할 수 있는 다연장 대공 로켓인 루프트파우스트를 개발 완료하자 즉각 대량 생산과 실전 배치를 결정했다. 그러나 1944년 말부터 나치 친위대(SS)를 중심으로 보급된 이 무기는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간 대표적 무기가 됐다.
현대의 자동, 혹은 수동 유도방식의 휴대용 지대공 미사일조차 실전에서의 명중률은 통상 50%를 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조종사가 완벽한 대비 태세를 갖춘 상태에서 이 수치는 더욱 낮아진다. 90% 이상의 명중률을 자랑하고 있는 일부 휴대용 지대공 미사일들은 그 수치가 과장돼 있거나 무기체계의 성능보다 이를 사용하는 병사들의 능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휴대용 지대공 무기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루프트파우스트는 자체 유도 기능이 없었다. 말그대로 미사일이 아니고 로켓이었던 것. 조준경은 너무나 단순했고 빠른 속도로 지상을 공격하는 전투기에 맞서 방아쇠를 당길 만큼 담대한 병사도 없었다. 충분한 실전 데이터를 수집할 시간도 없었고 간단한 조작 설명서만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대공 표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다수의 로켓으로 대공화망을 구성한다는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수십 발의 로켓을 동시에 발사하지 않는 이상 그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또 다른 문제로 이미 당시 전투기의 평균 속도가 로켓의 속도를 앞지르고 있었고 간단한 공중 조작만으로 로켓을 회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실전에서의 효과는 극히 미미했다. 만약 실전에서 검증된 운용 교리가 확립되고 숙련된 병사들만 있었다면 루프트파우스트는 충분히 그 잠재적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전황을 역전시킬 정도로 큰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루프트파우스트의 주요 개념은 이후 현대 휴대용 대공 미사일 개발에 그대로 계승·발전됐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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