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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도 전쟁 - 1835년 ~1836년

구름위 2013. 12. 18.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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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도 전쟁 - 1835년 ~1836년 

 

 

오하이오와 미시간의 분쟁

 

 

1787년에 미국 연합회의는 북서부 조례를 제정하여 현재의 미국 중서부 북부에 북서부 영토를 만들었다. 이 조례는,

영토는 최종적으로 <3이상 5이하의>장래의 주에 분할되는 것을 명확히 판시했다. 이리하여 세 개의 주 남북의 경계는

<미시간 호수의 남쪽에 있는 만 혹은 남서로 통하는 동서의 선>으로 결정되었다.

 

당시, 이 남북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불명이었다. 당시의 많은 지도로 이용된 <미첼 지도>에는 이를 디트로이트 강의

하구 가까운 위도로 두고 있었다. 이 지도에서 미시간 호의 남서에서 동서로 선을 이으면 펜실베니아 주의 서쪽 엘리 호수의

해안선 전체가 장래 오하이오 주가 되는 주로 귀속되는 것을 의미했다.

 

오하이오를 미합중국의 주로 하기 위한 과정을 개시한 권한을 부여한 1802년 수권법을 의회가 가결할 당시, 오하이오 주의

북쪽 경계를 정의한 단어는 북서부 조례에서 사용되었던 것과는 다소 달랐다. 이에 의하면 경계는 <미시간 호수의 남서를 통과하는

동서의 선으로 그것이 엘리 호수, 혹은 (캐나다와의)영토의 경계선과 교차하는 곳까지 동쪽에 이른다. 그곳에서 동시에 엘리 호수를

통과하여 전술한 펜실베니아의 경계까지>로 일컬어졌다.

 

미합중국과 캐나다 사이의 영토 경계선은 엘리 호수의 중앙을 통과하여 디트로이트 강을 위로 올라간다. 이 때문에 미시간 호수의

남서 장소에 관한 넓은 통념과 상응하여 1802년 오하이오 주 헌법의 입안자들은 오하이오의 북쪽 경계를 확실하게 모미 강 하구의,

그리고 경우에 따라선 디트로이트 강의 하구 북쪽에 있는 것이 의회의 입장이라고 믿었다.

 

이에 의해 오하이오는 펜실베니아의 남쪽 엘리 호수의 해안선 대부분, 혹은 모두를 포함하여 북서부 영토에서 분할된 다른 신설된

주도 미시간 호수, 휴런 호수, 슈페리어 호수를 경유하여 오대호 지역에 이어지게 되었다. 1802년의 오하이오 헌법제정회의에서

오하이오의 대표단은 미시간 호수는 이제껏 여기고 있던 것보다도 (즉 지도에 표기된 것 보다) 남쪽까지 연장된 모피수렵자들의

보고를 받아들였다고 여겨진다.

 

이에 미시간 호수의 남서에서 동쪽으로 연장된 동서의 선은 모미 만의 동쪽 어느 곳의 엘리 호수와 교차하여 더욱 나쁜 경우엔

바로 엘리 호수와 교차할지도 모르는 가능성이 생겨났다. 미시간 호수의 남서에서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오하이오가 획득하는 토지는

많아져서 펜실베니아의 서쪽 엘리 호수의 해안선 전체도 포함될지도 몰랐다.

 

다른 주와의 마찰을 우려하여 오하이오의 대표단은 헌법초안에서 만약 미시간 호수의 위치에 대해 사냥꾼들의 보고가 사실이라면

주의 경계선은 엘리 호수와 교차하기 위해 약간 북동으로 수정하는 것을 고려하여 <마이애미(모미)만의 최북단 갑>에서 교차한다는

조항을 삽입했다.

 

이 조항은 모미 강의 수로 대부분과 펜실베니아의 서쪽 엘리 호수의 남쪽연안을 모두 오하이오에 포함시키는 것을 보상한 것이었다.

이 규정을 포함한 헌법초안은 미합중국 의회에서 받아들여졌지만 1803년 2월에 오하이오가 연방에 가입하기 전에 이 헌법초안은

의회의 위원회에서 거부당했다.

 

위원회의 보고에서는 북쪽 경계를 상정한 조항이 <아직 명확하지 않은 사실>에 근거하였다고 보아서 위원들은 조항채택에 반대했다.

1805년에 의회가 미시간 임시 주를 창설했을 때, 그 남쪽 경계를 정의한 것으로 북서부 조례의 단어를 채용하였기에 이에 오하이오의

주 헌법과 차이가 났다. 이러한 다름으로 인한 악영향은 당시에는 그다지 신경쓰는 일은 아니었지만 30년 후에 발생하는 분쟁의 법적인

근거를 마련했다.

 

경계의 위치는 1800년대 전반에 토의되었는데, 포트 오브 마이애미(후의 톨레도)의 거주자는 경계문제를 해결하도록 오하이오 주정부에

진정서를 넣었다. 오하이오 입법부도 나서면서 문제를 다루게 된 의회에서는 1812년에 경계선의 공식적인 측량요구에 동의했다.

미영전쟁으로 인하여 다소 늦었지만 1816년의 인디애나의 연방가입 후에 드디어 측량의 실무가 개시되었다.

 

측량을 담당한 자는 미합중국 측량장관이었던 에드워드 티핀이었는데, 그는 전직 오하이오주 지사였었다. 최종적으로 북서부 조례선

뿐만 아니라 1802년의 오하이오 헌법에 기술되어진 경계선도 측량하기 위해 티핀은 측량사인 윌리엄 해리스를 고용했다. 이것이

완료되었을 때 <해리스 라인>은 모미 강의 하구를 완전히 오하이오 내에 두었다.

 

측량결과가 공포되었을 때, 미시간 주 지사였던 루이스 캐스는 이것이 미의회의 동의를 얻은 북서부 조례선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라며

불만을 나타냈다. 티핀으로 보내는 편지 속에 캐스는 오하이오 편에 선 측량에 대해 <강자에게 힘을 주고 단지 약자를 약하게 할뿐>

이라며 비난했다.

 

이에 맞서 미시간 주도 존 A. 풀턴에게 측량을 의뢰했다. 풀턴의 측량은 이전의 1787년 북서부 조례선에 기초하여 미시간 호수에서

엘리 호수까지 동쪽으로의 선을 측량하여 오하이오의 경계는 모미 강의 하구 남쪽이라고 명시했다. 해리스와 풀턴의 측량선 사이의

지역은 현재의 <톨레도 스트립>이 되었다.

 

이 오하이오 북부와 미시간 남부의 사이에 위치한 리본 모양의 토지는 폭이 5~8마일로, 두 당국은 주권을 서로 주장했다. 오하이오가

이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사이, 미시간은 조용히 이곳을 점령하여 지방정부를 설치하고 도로를 개설한 다음 세금을 징수했다.

톨레도 스트립 지대는 예나 지금이나 상업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었다.

 

철도산업이 일어나기 전에 하천과 운하는 미국 중서부의 중요한 <상업의 간선로>로 여겨졌다. 스트립의 적지만 중요한 부분은

그레이트 블랙 스웜프의 밤위 내여서 이 지역은 특히 봄과 여름에 비가 온 다음에는 육로의 운송이 거의 불가능했다. 엘리 호수의

흐름도 모미 강은 대형선박의 출입이 원활하지 않아 인디애나의 포트 웨인으로 물류가 이어졌다.

 

당시 일련의 운하로서 미시시피 강과 오대호를 연결하는 계획이 있었다. 1825년에 오하이오 입법부에 승인된 운하망 중 하나는

오하이오 강으로의 접속과 모미 강을 경유한 엘리 호수의 흐름을 포함해 마이애미 & 엘리 운하가 있었다. 톨레도 스트립을 둘러 싼

분쟁의 사이, 1825년에는 동해안의 뉴욕 시와 오대호 연안의 버팔로를 잇는 엘리 운하가 완성되어 교역의 주요 루트가 되었다.

 

중서부 산의 옥수수와 농작물은 미시시피 연안을 올라가는 루트보다도 저비용으로 동부의 시장으로 운반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민자의

중서부 이주는 운하의 오나성 후 급격히 증가하여 버팔로의 붐 타운처럼 항만도시가 생겨났다. 엘리 운하의 성공은 다른 많은 운하의

건설계획에도 활기를 불어넣었다. 

 

엘리 호수의 서쪽은 인디애나와 일리노이의 개척에 가장 짧은 육로를 제공했기 때문에 모미 항은 중요한 장소와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디트로이트는 엘리 호수에서 디트로이트 강을 20마일 이상 올라감으로 인해 그 남쪽은 그레이트 블랙 스웜프의 엄격한 장벽에 직면했다.

이 때문에 디트로이트는 톨레도와 비교해서 운하와 도로의 새로운 물류에 적당하지 않았다.

 

1820년대와 1830년대의 급격한 발전으로 인한 중서부는 오하이오와 미시간 두 주가 톨레도 스트립의 토지를 둘러싸고 분쟁을 더욱

확대시켰다. 톨레도 서부 스트립 지역은 물이 많은 비옥한 옥토여서 농업에 최적인 장소였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옥수수, 콩, 밀의

1 에이커당 산출량이 매우 높았다. 미시간과 오하이오 어느 쪽도 전략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항과 유복한 지역을 포기할 수 없었다.

 

1820년부터 1821년까지 연방의 토지측량대는 미시간의 남쪽 선과 오하이오의 북쪽 선 등 분쟁이 일어난 지역에 도착했다. 이유는

불명이지만 측량장관이던 티핀은 두 개의 측량대에게 해리스 선보다 북서부 조례선에 기준으로 할 것을 요구하여 오하이오보다

미시간의 주장을 암묵적으로 지원했다.

 

이리하여 측량대는 미시간 임시 주의 일부로서 보지않은 선상 북쪽에 마을을 창설했다. 1820년대 전반까지 발전지역의 인구는

주의 기준을 만족하는 60,000명이라는 최소인구 기준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미시간이 1833년에 주 헌법제정 회의를 개최했을 때

아직 토론이 끊이지 않았던 톨레도 스트립으로 인해 미의회는 미시간의 요구를 각하했다.

 

오하이오는 경계를 헌법으로 확정하고 설정해놓았기 때문에 미시간의 시민은 단순한 침입자란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오하이오

주정부는 이 문제로 미시간 임시 주와 협상을 거부했다. 오하이오의 의회 대표단은 로비를 벌여 다른 주에게 미시간의 주장을

반대하는 것에 표를 던지도록 선동했다.

 

1835년 1월에 이러한 정치난맥의 상황에서 미시간 주의 예비 주지사였던 스티븐스 메이슨은 미의회의 승인거부에도 불구하고

5월에 헌법제정 회의를 연다고 공포했다. 1835년 2월에 오하이오는 스트립에 군 정부를 설치하는 입법안을 가결했다. 톨레도가 설치된

군은 현직 지사였던 로버트 루카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어 미시간 주와 긴장관계를 불러 일으켰다.

 

오하이오는 주의 경계를 정식으로 해리스 선으로 설정하면서 이전의 경계법안을 폐기했다. 젊고 패기넘치던 미시간의 주지사였던

메이슨은 루카스 군이 창설된 6일 후에 형법의 가결로 맞섰다. 이 법률은 스트립에서 정치활동을 하는 오하이오 주민을 형사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여 1,000달러 이하의 벌금 또는 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하는 것이었다.

 

영지의 최고사령관을 겸무했던 메이슨은 오하이오의 침입자에 대한 징벌에 언제라도 나설 수 있도록 지시하는 한편, 조셉 W. 브라운

준장을 주 민병대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에 루카스는 민병대 입법안을 통과시켜 바로 스트랩에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병력을 파견했다.

이로서 톨레도 전쟁이 시작되어지게 되었다.

 

당시 메사추세츠 주 선출의원으로 전 미국 대통령이었던 존 퀸시 애덤스는 미시간의 주장을 지지했다. 1833년에 미의회가 미시간의

요구를 거부했을 때 애덤스는 토의 중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모든 권리가 확실히 한쪽에 있기에 모든 힘이 압도적인 편에 있는

토론은 내가 아는 인생의 길에는 결코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1835년 3월 31일에 오하이오 민병대 최고사령관이던 루카스 지사는 존 벨 장군과 600명의 무장민병대와 함께 톨레도의 10마일

남서쪽인 오하이오 주 펠리스버그에 도착했다. 이후 바로 메이슨 지사와 브라운 장군도 톨레도의 마을을 점령하기 위해 약 1,000명의

무장병과 함께 도착해 오하이오의 톨레도 침공을 막기위해 나섰다.

 

대통령의 개입과 전쟁의 종결

 

 

무력에 의한 전투를 막기 위해, 정치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필사의 시도로서 미합중국 대통령이던 앤드류 잭슨은 사법장관이던

벤자민 버틀러에게 경계분쟁에 대한 그의 법적인 자문을 구했다. 당시 오하이오는 연방 내에서 정치력을 증대시켜 19명의 미합중국

하원의원과 2명의 상원의원이 있었다.

 

대조적으로 아직 예비 주에 불과했던 미시간은 1명의 투표권도 없는 대변자만 있을 뿐이었다. 오하이오는 대통령 선거에서 승패의

결정적인 열쇄를 쥐고 있던 주였기에 미숙한 민주당에게 있어서 오하이오의 선거인 투표를 잃는다는 것은 파멸적인 것이었다.

이 때문에 잭슨은 자신의 당의 최우선 이익은 톨레도 스트립을 오하이오의 일부로서 남겨두는 것이 좋다고 계산했다.

 

잭슨이 버틀러로부터 받은 답변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사법장관은 의화가 지시하지 않으면 토지는 모두 미시간에 속한다는

주장이었다. 이것은 잭슨에게 <전쟁>의 결과로 큰 영향을 주는 행동을 취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에 잭슨에게는 큰 딜레마로

다가왔다.

 

1835년 4월 3일에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양쪽의 정부에 타협안을 제시하기 위하여 잭슨은 펜실베니아 주 출신의 리처드 러쉬와

메릴랜드 주 출신의 벤자민 하워드, 2명의 의원을 워싱턴에서 톨레도로 파견했다. 4월 7일에 나온 제안에선 해리스 라인을 찍은

재측량이 미시간에 의한 방해없이 개시되어 그리고 의회가 결정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영향을 받은 지역 거주자들은

그들 자신의 주(오하이오 주) 혹은 예비 주(미시간 주)의 정부를 고를 것을 강요받았다.

 

루카스는 이 제안에 마지못해 동의하여 토론으로 결정되리라 확신하여 자신의 민병을 해제시켰다. 3일 후 지역에서 벌어진 선거가

오하이오의 버률하에 진행되었다. 그러나 메이슨은 이 제안을 거부하여 그가 벌인 무력충돌을 위한 준비를 계속했다. 선거 중에

오하이오의 직원은 미시간 당국에 의해 시달려 영역의 거주자들은 만약 오하이오 당국에 따른다면 체포될 것이라 위협받았다.

 

1835년 4월 8일에 미시간 예비 주 먼로 군의 보안관이 오하이오를 지지한 벤자민 스티크니 소령의 자택을 방문했다. 미시간 지지자와

스티크니 가문과의 첫 접촉으로 보안관은 2명의 오하이오 주민을, 오하이오 선거에 투표했다는 이유로 형벌법에 근거해 체포했다.

선거 후, 루카스는 의원사절단의 행동이 상황을 완하시키리라 여겨 그들을 다시 한번 더 해리스 라인을 주지시키기 위해 측량사를

파견했다.

 

계획은 순조로웠지만 1835년 4월 26일에 필립스 코너스 전투라 불린 대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측량팀이 브라운 장군의 5, 60명 정도의

민병에게 공격당했다. 측량팀의 사건 후에 안식일을 축복하는 사이 미시간의 민병부대가 그들의 철수를 권고했다고 루카스는 편지에서

밝혔다.

 

그 다음의 추격에서 측량팀 9명은 포로로 붙잡혀 연행되었다. (미시간 측은 총격이 아니라 공포를 발사했다고 주장했다) 이 전투에서

오하이오의 주민과 미시간의 주민 양쪽은 사로 격노하여 전면전쟁의 직전까지 일촉측발의 상황으로 몰리게 되었다. 미시간의 민병이

오하이오 주민에게 발포했다는 사실에 대응하여 1835년 6월 8일에 의논에 관한 몇 가지 법률을 가결하기 위해 루카스는 오하이오의

입법부 특별의회를 소집했다.

 

여기에는 톨레도를 루카스 군의 군청 소재지로 만들며, 도시에 일반소송 재판소를 설립하며 지역에소 오하이오 주민에 대한 강제적인

납치를 막기위한 입법의 실행을 위해 30만 달러의 예산을 준비하는 법률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시간의 예비 주 입법부는 민병으로의

자금으로서 31만 5,000달러의 예산을 할당하며 여기에 대응했다.

 

1835년 5월과 6월에 미시간은 2원제 의회, 최고재판소, 그 외 여러 기능의 주 정부기구 요소를 정비하여 주 헌법을 초안했다. 그러나

미의회는 아직 미시간의 연방가입을 허가해도 좋다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잭슨 대통령은 경계문제와 <전쟁>이 해결되기까지 미시간의

주 제도를 거부한다고 단언했다.

 

루카스는 민병의 지휘를 그의 주병장관인 사무엘 앤드류스에게 명하여 1만명의 지원병이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고 밝혔다. 이 뉴스는

북쪽으로 전해지면서 확대되어 곧 미시간의 신문은 스트립에 진입하는 오하이오의 백만대군에 대해 <그들을 환영하면서 좋은 묘지를

만들어 두었다>며 결연한 입장을 보였다.

 

1835년 여름에 양쪽 주정부는 상대보다도 먼저 한발 나아가 작은 충돌과 체포가 이어졌다. 먼로 군의 시민은 톨레도에서 체포하기 위해

자경단에 참가했다. 오하이오 지지자들은 이들의 혐오대상이 되어 형사체포의 목표가 되었는데 이에 오하이오 지지자들도 보복에

나서면서 주 경계의 경비를 둘러싸고 보안관의 뒤를 쫓는 스파이를 붙이기도 했다.

 

1835년 7월 15일에 결국 긴장과 격정이 폭발하면서 유혈사태를 불렀다. 미시간의 먼로 군 보안관인 조셉 우드는 벤자민 스티크니

소령을 체포하기 위해 톨레도로 갔지만 스티크니와 그의 아들 3명의 저항으로 가족전원에게 진압당하며 구류되었다. 그 사이 소령의

아들이던 튜 스티크니가 우드를 주머니칼로 찌른 후 남부 오하이오로 달아났다.

 

우드의 상처는 목숨과는 상관없었다. 재판을 위해 튜 스티크니를 미시간으로 인도하려는 미시간의 요구를 루카스가 거부하자 메이슨은

잭슨 대통령에게 편지로 도움을 구하며 이 문제를 미합중국 최고재판소에서 다룰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분쟁의 당시, 최고재판소가

주의 경계분쟁을 해결한다는 것은 규정에 없어 잭슨은 결국 신청을 거두었다.

 

평화를 구하며 다시 오하이오의 의회 대표단을 경유한 연방의 개입을 통해 루카스는 분쟁을 끝내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1835년 8월에

오하이오 의원들의 가아한 요구로 인하여 잭슨 대통령은 메이슨을 미시간의 예비 주지사에서 해임하고 그 대리로 존 리틀 잭 호너를

임명했다.

 

메이슨은 해임당하기 전에 1,000명의 미시간 민병부대를 톨레도로 진입시켜 상징적으로 중요한 오하이오의 일반소송 재판의 최초

회의를 저지하도록 명령했다. 이 생각은 미시간 거주자들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그 노력은 실패했다. 판사들은 심야에 법정을 열어

오하이오의 부대가 주둔하던 모미 강의 남부로 피난했다.

 

메이슨의 후임이던 호너는 주지사로서 인기가 없었기에 재임기간도 짧았다. 거주자들은 그를 싫어하며 예비 주정부에 취임한

호너에게 야채를 던지며 야유했다. 1835년 10월의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헌법초안에 찬성하여 인기가 있던 메이슨을 주지사로 선출했다.

같은 선거에서 아이작 클래리가 미시간의 초대 미합중국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분쟁으로 인해 미의회는 그의 신임장 수리를 거부하여 대신 선거에서 선발되지 못한 대표자를 자리에 앉혔다. 11월에 입법정부에

선발된 2명의 합중국 상원의원인 로저스 라이언과 존 노벨도 역시 신임받지 못해 상원자리에는 그냥 견학자로서만 참석이 허가되었을

뿐이었다.

 

1836년 6월 15일에 잭슨은 톨레도 스트랩을 양도한 후에 미시간을 주로 편입하는 것을 허가는 법안에 서명했다. 이 양보로 인하여

미시간은 어퍼 반도의 서쪽 4분의 3을 부여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은 그다지 가치가 없는 황무지였기 때문에 미시간의 앤아버에서

열린 1836년 9월의 특별의회는 이 양보안을 거절했다.

 

시간이 흘러 미시간은 민병의 높은 유지비용 때문에 그 자체가 심각한 재정위기로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정부는 미합중국 재무성의

40만 달러의 예비금이 각 주에 분배되는 것을 기대했지만 예비정부에 대해서는 그런 혜택이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아직 예비정부이던

미시간은 그 예비금을 받을 자격이 없었던 것이었다.

 

1836년 12월 14일에 앤아버에서 열린 두 번째 회의에서 <전쟁>은 비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대표단은 의회에 제시된 조건을 수락하기로

가결했다. 그러나 회의의 소집 자체에 토론이 없지는 않았다. 그것은 개인적인 호응과 진정, 시민집회 등으로 집대성되었던 것이기에

분란의 소지가 있었다. 입법부가 회의소집에 동의하지 않았기에 회의는 불법이었다는 말도 나왔다.

 

결과적으로 결의는 거부되어 많은 미시간 거주자는 이를 비웃었다. 의회는 최종적으로 해결안을 받아들이기 전에 회의의 합법성을

문제시했다. 이러한 요소들로 인하여 당시의 오래 계속된 한파에 빗대어 이 일을 후에 <얼어붙은 회의>라 알려지게 되었다. 1837년

1월 26일에 미시간은 톨레도 스트립을 손에 넣는 것을 포기하여 미합중국의 26번째 주로 승인받았다.

 

얄궂게도 1836년 대통령 선거에서 잭슨 대통령이 민주당의 동료인 마틴 반 뷰렌의 선거를 지원했지만 오하이오 주는 톨레도 전쟁의

사이에 잭슨이 오하이오 주민들의 세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하여 휘그당 후보자였던 윌리엄 해리슨에게 투표했다. 한편 <동결된 회의>

당시에 오하이오 주는 분쟁에 승리한것 처럼 보였다.

 

어퍼 반도는 지역관계자들에게 전혀 쓸모없는 황무지로 여겨졌다. 하지만 구리와 철의 발견으로 이 토지는 막대한 광물자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발견은 이후 20세기까지 오랫동안 이어진 광업 붐을 불러왔다. 현재의 톨레도 항의 가치는 오하이오 주에게 주어져서

양쪽의 주가 분쟁에서 이익을 얻는 것은 무리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 분쟁의 유일한 패자는 위스콘신 주였다. 분쟁당사자가 아니었던 위스콘신 주는 미시간 주가 톨레도 스트립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어퍼 반도의 풍부한 광물자원을 수중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정확한 경계의 장소에 대한 견해차이는 1915년에 결정적인 재측량이

이루어 질 때까지 이어졌다.

 

재측량의 수순은 엄밀히 해리스선을 따라가는 측량사에 보통적으로 요구되었지만 이 때 측량사는 양쪽의 주장선을 피했다. 이것은

분쟁의 소지를 피하기 위함이었는데 1915년의 측량은 폭 30cm, 높이 45cm의 71개의 화강암 표식으로 선을 표시했다. 완성당시 두

주지사였던 미시간의 우드브릿지 펠리스와 오하이오의 프랭크 윌리스는 경계에서 악수를 나누었다.

 

20세기 전반에 토지의 경계가 설정되긴 했지만 두 주는 아직 동쪽인 엘리 호수의 경계 궤도엔 합의하지 못했다. 1973년에 두 주는

그들의 분쟁이던 엘리 호수의 물 소유권 주장을 최종적으로 미합중국 최고재판소에서 판결을 기다렸다. 미시간 주 대 오하이오 주의

재판에서 법정은 특별보조 재판관의 보고를 지지하여 엘리 호수에 걸친 두 주의 경계는 오하이오의 주 헌법에 따라 북동으로 치우쳐

동서로 바로 이어지는 선이 아니라고 재판했다.

 

재판의 또 하나의 결론은 모미 만의 바로 바깥쪽에 있는 작은 터틀 섬이 원래 미시간에 모두 귀속된다는 것이었지만 이것은 두 주에

나뉘어졌다. 이 재판이 최후의 경계에 대한 조정으로, 공식적인 경계선을 둘러 싼 오랜 논의는 종결되었다.

 

 

출처 : 미첼 고든 <오하이오와 미시간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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